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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방에는 열기가 후끈거렸다.

여름이 다 지나갔는데 더웠다.

“답답한데 하나만 입을 수 없어?”

“저녁에 무도회가 있으십니다.”

“율리가 주인공이지 내가 아니야.”

“주인님께서 꼭 예법에 맞게 클라우드 도련님의 복장을 입히라 하셨어요.”

두 번은 못 할 짓이었다.

시녀가 입혀주는 대로 몇 겹이나 껴입었다.

가을이라 제법 날씨가 쌀쌀했지만, 자신은 껴입은 옷의 열기로 뜨거웠다.

“얼굴만 비치고 나와야겠어.”

그 사이 옷을 다 입었다.

두께는 갑옷 수준이었으나.

“의외로 무게는 가벼운데?”

“당연해요, 불편하면 무도회에서 어떻게 춤을 추겠어요?”

“그도 그렇군. 이젤라는?”

“이젤라님도 드레스로 갈아입고 계실 거예요.”

항상 갑옷만 입은 모습을 보다가 색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어렸다.

옷을 다 입고 방을 나온 클라우드는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율리와 마주쳤다.

그 옆에는 백작의 부인도 함께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요.”

“그래, 서로 어색하니 말은 다음에 나누자.”

클라우드가 쌩하고 지나가려 하자.

“어머, 어미한테 인사도 안 하니?”

“당신이 제 어미셨습니까?”

말에 뼈가 있었다.

“어른한테 못하는 말이 없구나. 귀족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교양과 품위를 유지해야 한단다.”

백작 부인이 설교를 늘어놓았다.

클라우드는 들을 생각도 안하고 하품하며 옆을 지나갔다.

“저, 저!”

백작 부인의 눈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언뜻 살의까지 내비쳤다.

자신의 앞에선 눈도 못 마주치던 클라우드였다.

그런데 지금은 개가 짖기라도 하듯, 귀찮아하며 대놓고 무시를 했다.

여태까지 자신이 알던 클라우드가 아니었다.

“교양이라곤 눈곱만도 없는 놈.”

“무시하세요.”

백작 부인은 언젠가 날 잡아서 버릇없는 걸 잡아야겠단 생각을 했다.

“애야, 소문 들었니? 클라우드가 수습 기사를 이겼다는데, 이 어민 믿겨 지지 않는구나.”

“순전히 운이에요.”

“그러겠지? 고작 한 달 수련했다고 마나 하트도 없는 녀석이 수습 기사를 어떻게 이기겠니.”

백작 부인이 마나 하트란 단어를 유독 강조하며 말했다.

그녀와 다르게 율리의 눈은 복잡했다.

자신의 어머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저런 망나니가 우리 가문을 이으면 언제 백작위에 쫓겨날지 몰라. 그러니 네가 잘해야 한다.”

“네, 어머니.”

“네가 잘하지 못하면…….”

백작 부인의 말을 도중에 끊은 율리가 나직하게 말했다.

“어머니.”

“왜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어?”

“건드리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이 어미는 인내심이 별로 없구나.”

율리의 말아 쥔 주먹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어머니 리아나 백작 부인.

자신을 백작 가의 후계자로 만들려고 무슨 짓이든 할 여인이었다.

설령 그게 자신의 배다른 형제일지라도.

‘더는 어머니의 눈에 띄게 해선 안 돼.’

자신의 형이 망나니로 살았을 때가 차라리 나았다.

그러면 목숨에 지장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고, 눈에 띄었다.

그건 어머니가 좋아하지 않는 방향이었다.

‘내가 먼저 움직여야겠어.’

자신의 형이 후계자 자리에 관심이 있는 것 같으니.

아예 넘보지도 못하게 해 놓으면 된다.

그러면 알아서 포기하겠지.



***



“날 죽이고 싶어 안달이군.”

백작 부인의 눈에는 살의가 가득했다.

웃는 얼굴 뒤로 숨기고 있는 칼날.

전의 클라우드라면 못 느꼈을 테지만, 지금의 자신은 백작 부인의 적의를 느꼈다.

“집이 개판이야.”

자신에게 암살자를 보낸 유력한 인물인 그녀.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으니.

그 증거를 잡아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미행해볼까?’

언젠가 암살자와 접촉할 터.

그때를 포착해야 한다.

암살자가 나타나기 좋을 때가 언제일까.

곰곰이 생각했다.

‘외부인이 많은 율리의 생일, 지금이 적기야.’

오늘부터 삼 일간 열리는 무도회.

카시미르 가에 초청받은 외부인이 제일 많은 날이었다.

사절단으로 변장할 수도 있고, 고용인으로 신분을 감출 수도 있었다.

암살자의 특기는 변장이니까.

“오늘은 날씨도 좋으니 이젤라와 저택 한 바퀴를 돌아봐야겠어.”

혹시 알아?

우연히 암살자를 만날지.

클라우드가 걸음을 옮기려는데.

“아니, 이게 누구신가?”

어제 만났던 남자와 함께 걸어오는 이들이 있었다.

2남 1녀.

하나 같이 고급스러운 비단옷을 입었다.

“또 너냐?”

클라우드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또 너라니! 어제 내가 먼저 소개했으면, 오늘은 네가 이름을 밝혀야 할 것 아니야!”

“내가 왜?”

디온 센이드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씩씩거렸다.

“이, 익……!”

어제처럼 달려들 줄 알았던 그가 꾹 참고, 서 있었다.

그때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한 여자가 나섰다.

“디온 오라버니, 그만 하세요. 저희는 카시미르 가의 손님이잖아요.”

“저놈도 똑같은 손님 아니야?”

디온은 클라우드를 사절단과 같은 손님으로 착각했다.

그러자 여자가 클라우의 소매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라버니. 저분의 소매에 작은 문양을 보세요. 어디서 많이 보시지 않았어요?”

“문양?”

클라우드의 소매에는 파란색 드래곤이 구슬을 물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카시미르 직계만 사용한다는 표식?”

“네, 맞아요. 뇌룡의 문양. 제 말이 맞죠? 클라우드 오라버니?”

여자가 그에게 싱긋 미소를 보냈다.

“이게 그런 의미였나?”

몰랐다.

이런 문양이 무도회 복장에 새겨져 있었는지.

에드가 백작이 꼭 예법에 맞춰 입으라고 하더니.

개망나니지만, 카시미르 가의 일원.

다른 이들에게까지 장남이 무시당하는 건, 원치 않았나 보다.

“정식으로 소개할게요. 전 율리 오라버니의 생일에 초대 받은 엘리나 블라드에요.”

‘엘리나 블라드?’

어찌 모를 수가 있겠나.

기억 속에 엘리나 블라드는 자신과 약혼하기로 한 사이였다.

‘귀찮게 됐어.’

망나니에게 과분할 정도로 똑똑한 여자.

그녀는 20살의 나이에 3서클에 올라선 마법사였다.

카시미르 가가 기사들의 가문이라면, 블라드 가는 마법사들의 가문.

왕국의 현자도, 마탑의 탑주도 블라드 가 출신이었다.

대단한 가문의 여자와 약혼하기로 한 망나니.

과연 그녀는 이 약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디온은 그가 카시미르 가의 장남이란 소리에 배알이 꼴렸다.

‘다 가지고 태어난 주제에 노력도 없는 하찮은 놈.’

귀족 중의 귀족에다가 그것도 장남.

노력하지 않아도 원하는 건 뭐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위치.

자신의 가문인 센이드와는 전적으로 달랐다.

노력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작위를 빼앗겼다.

가문의 장남으로 짊어져야 하는 짐.

그 무게는 상당했다.

‘그런데 저놈은 나와 다르게 자유로워.’

미인 여기사에 순혈 귀족의 당당함을 넘어 오만하기까지.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짓밟아 주고 말 거야.’

디온의 마음이 점점 질투로 변할 때, 어제 본 예쁜 여기사가 일행 쪽으로 다가왔다.

“주군,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주위의 시선은 모두 이젤라에게 향했다.

붉은 머리의 미녀.

드레스 옆에 검을 찬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누구야?”

“저 사람의 전속 기산가?”

디온은 입을 떡 벌린 채 이젤라를 뚫어지게 쳐다 볼 뿐이었다.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갑옷을 벗은 모습은 지금까지 봐오던 미녀들과는 전혀 달랐다.

군더더기 없는 몸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옆에 있는 엘리나 블라드도 예쁘지만, 여기사가 한 수 위였다.

‘꼭 저 여자를 내 것으로 만들 거야.’

디온은 자신의 모든 걸 동원해서라도 그녀를 얻겠다고 다짐했다.

이곳에 있는 남자들의 모든 시선이 이젤라에게 쏠리자.

오직 한 명만이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그 사람은 바로 엘리나 블라드.

언제나 주목받은 사람은 자신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여자가 나타나 사람들의 시선을 독차지하니, 눈엣가시 같았다.

그럼에도 태연한 척하며 클라우드에게 말을 걸었다.

“오라버니, 저한테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나와?”

“네, 조금이면 되요. 조용한 곳으로 가 이야기해요. 우리.”

“그러지, 나도 너한테 할 이야기가 있으니.”

두 사람은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뒤를 이젤라가 따랐다.



***



꿈의 정원.

클라우드의 저택 뒤에 있는 정원으로 외진 곳이라 아무도 안 오는 곳이었다.

“할 말이 뭐지?”

클라우드와 엘리나는 서로 마주 보며 앉았다.

시녀가 차를 따라 주며 공손히 뒤로 가서 섰다.

“제가 오라버니와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잠시 멀리 떨어져 계시겠어요?”

시녀에게도 착하게 말하는 그녀.

시녀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원에 멀어졌다.

이젤라 또한 마찬가지.

그러고도 안심이 안 됐는지, 그녀가 나무 탁자를 두드리며 작게 주문을 외웠다.

“에도라 킨스킨.”

주위의 투명한 막이 생기자, 클라우드의 눈이 커졌다.

‘기막? 순간적으로 힘이 커지더니 투명한 벽이 생겼어.’

기로 소리를 차단한 막.

이쪽 세상의 용어로 노이즈 캔슬이었다.

마법사들이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면 쓴다는 마법이었다.

“대단해.”

클라우드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내공이 아닌, 마법으로 기막을 친다는 게 신기했다.

엘리나는 그런 클라우드를 보며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다 바로 본론을 꺼냈다.

“저와 당신이 어울리다고 생각하나요?”

평소의 말투와는 전혀 달랐다.

나긋나긋한 말투에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으려는 듯한 행동은 더 이상 없었다.

가시가 돋은 그녀의 모습이야말로 자연스러웠다.

“가면을 벗은 건가? 가식적인 모습을 대하는 것보다 이게 더 편하네.”

“당신도 듣던 말보다 더 예의와 교양이 없네요.”

“우리가 잡담할 정도로 친하지 않은 걸로 아는데, 용건만 말해.”

그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신의 예상과는 달랐다.

울며불며 매달려 결혼해 달라고 무릎 꿇고 애원할 줄 알았지만.

자신 앞에 두고 거만하게 구는 꼴이라니.

카시미르 가의 장남이라고 허세를 떠는 건지 무척이나 우스워 보였다.

그래봤자 후계자 구도에서 밀려난 패배자면서.

“저도 당신 같이 기품이라곤 일도 없는 사람과 오래 말하기 싫어요. 저랑 파혼해 주세요.”

“우리가 언제 결혼했나?”

“가문끼리 약속한 사이잖아요. 그쪽에서 싫다고 해 주세요.”

“내가 왜 그래야지?”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흥, 거만하게 말해 놓고 결국엔 저랑 결혼해서 살고 싶다는 말이군요. 주제넘어요.”

“착각도 정도껏 해야지.”

“뭐라고요?!”

그녀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소리를 막아 준 장막이 있어서 작정하고 본색을 드러냈다.

“나도 너 같은 뱀의 심성을 가진 여자와 결혼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당신!”

클라우드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에 그녀가 마법을 일으켰다.

손에 붉은 구체가 일어났다.

2서클의 마법.

파이어 볼이었다.

탁!

클라우드가 탁자에 손을 내려쳤다.

와장창 유리가 깨지듯이 붉은 구체가 거짓말처럼 허공에서 흩어졌다.

“어떻게?”

“아직 시동어를 말하기 전이잖아? 마법사는 그게 큰 약점이라고 알고 있거든.”

마법을 쓸 때 영창을 해야 한다.

시동어를 말하기 전 집중력이 흩어지면 마법이 사라졌다.

고 서클의 마법사는 무영창도 가능 하지만, 엘리나 블라드는 3서클의 마법사.

클라우드가 손에 내공을 모아 기파를 흘려 엘리나의 집중력을 깨트려버리긴 충분한 이였다.

“그러니까 당신이 어떻게 내 마법을 깨뜨렸냐고!”

더욱더 흥분해서 소리치는 엘리나를 보며 클라우드는 입꼬리를 비틀고 웃었다.

“나는 네 마법을 깨트리면 안 되나? 아, 내가 마나 하트가 없어서 가문의 후계자의 낙오된 걸 알고 내게 본 모습을 드러낸 거였어?”

“다, 당연하지!”

“이걸 어쩌나, 난 마나 하트보다 더한 걸 익혔는 데 말이야.”

클라우드가 엘리나를 내려다보며 비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