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0화



똑똑.

문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젤라입니다.”

“깨어 있어, 들어와.”

이제는 익숙해진, 전속 기사 이젤라의 수발을 받았다.

“식사 가져왔습니다.”

“또 이 음식인가?”

“백작님이 하루도 거르지 마시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바쁘실 텐데 지극 정성이야.”

눈을 뜨고 매일 스튜만 먹었다.

맛있어서 다른 음식은 손도 안 댔는데, 이제 슬슬 질렸다.

아니, 스튜만 보면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다.

“응?”

“왜 그러십니까?”

자신이 인상을 찡그리자, 기사라 그런지 곧바로 반응했다.

“독입니까? 빨리 뱉으십시오.”

“독의 느낌은 아니야.”

과거에 많이 먹어봐서 안다.

먹자마자 쌉싸름한 맛이 나며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뛴다.

그런데 지금은 청량감이 입을 감쌌다.

몸에 활력이 돋았다.

꼭 영약 먹을 때나 생기는 현상이었다.

스튜에 영약이 가당키나 할까.

‘가만.’

에드가 백작이 바쁜 와중에 손수 챙긴 음식이었다.

그것도 하루도 거르지 말라는 신신당부와 함께 두 달째 먹었다.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알아?”

“전 시종 장이 전해 준 음식만 가져왔습니다.”

“흠…….”

신기한 느낌에 스튜를 계속 먹었다.

한 입 목으로 넘길 때마다 힘이 넘쳐났다.

‘영약이 분명해… 그런데 내게 영양을 왜 주지? 그렇게 어쌔신을 무시하면서 근신 처분까지 내린 양반이.’

단 두 달 만에 이룬 성장세.

자신의 노력으로 일류 끝자락에 도달했다.

거기에 더해 뭔지 모를 영약이 도움이 된 듯하다.

에드가 백작이 무슨 생각으로 영약을 복용시키는지 몰랐다.

‘나야 내공이 높아지면 좋지.’

받았으면 고맙게 잘 쓰면 그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스튜도 먹었으니…….”

퍽!

클라우드는 언제 꺼냈는지 모를 단검을 창문에 던졌다.

그 순간, 잠깐이지만 기척이 느껴졌다.

커튼이 흔들리는 창문.

‘예전에도 누군가 날 보는 것 같더니.’

흑영심법을 배웠을 때도 뭔가 거슬리더니, 경지가 높아지니 확실히 알았다.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누군가 있다는 것을.

살수인가?

이 정도의 거리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으면 진작 자신을 죽일 수 있었을 터.

적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면 누굴까.

‘아버지가 보낸 감시자일 수도 있어.’

그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카시미르 가가 대단하긴 해. 쥐새끼의 경지가 상상 이상이라니.”

일류 끝자락에 닿은 자신에게 들키지 않았다.

조금 전에는 감시자의 작은 실수 때문.

그게 아니면, 자신에게 들킬 일은 없었다.

자신의 기감에 잡히지 않는 걸 보면 절정 이상이라는 소리였다.

“어쌔신입니까?”

“아마도?”

“감히!”

이젤라가 검을 뽑으려는 걸 제지했다.

“됐어, 이미 도망쳤을 거다.”

옷을 챙겨 입고 이젤라와 밖으로 나갔다.

창문 밖.

에드가 백작의 명으로 클라우드의 암중 호위를 맡은 카시아스는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내 존재를 알아챘어.’

가문의 천재 율리조차 알아채지 못한 걸 첫째가 잡아냈다.

아무리 마음을 놓고 있었지만, 보통 예삿일이 아니었다.

자신은 백작의 그림자이며 어쌔신 마스터에 근접한 인물.

‘백작님께 보고해야겠어…….’

스르륵.

순식간에 나무와 동화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고 나서 그가 나타난 곳은 조촐하기 이를 대 없는 백작의 서재였다.

“카시아스 웬일이냐?”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에드가 백작은 읽고 있던 서책을 덮었다.

그의 눈동자는 카시아스에게 꽂혔다.

“중요한 일이냐?”

“클라우드 도련님이.”

“문제라도 일으켰나?”

“제가 숨어 있다는 걸 눈치챘습니다.”

백작이 흠칫 놀랐다.

생각이 많아지면 나오는 버릇인 손가락을 책상에 딱딱거렸다.

“그게 가능해?”

“제가 방심했다고는 하지만, 수련한지 두 달만에 저를 알아채는 건 불가능합니다.”

카시아스의 목소리에 확신이 어려 있었다.

“에우슈리의 눈물을 음식에 넣어 먹었다지만, 오러 운용도 못하던 아이가 어찌?”

이젤라까지 이긴 클라우드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나 임기응변.

가문에 속해 있는 기사가 가문의 장남을 해하지 못한 걸 이용해 얻은 승리에 불과했다.

‘에우슈리의 눈물이 오러를 운용하지 못한 클라우드의 신체를 고쳤나?’

사람은 에우슈리를 이렇게 불렀다.

천공의 지배자, 뇌룡 에우슈리.

흉포한 그는 자신이 인정한 자에게만 준다는 게 에우슈리의 눈물이었다.

‘가능성이 없지 않아.’

가문에 축복이 내려졌다.

영약의 효과로 어쩌면 마스터 경지에 오른 인물이 두 명이나 생길지 모른다.

하지만 에드가 백작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백작님의 뜻을 내비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우리 가문의 비밀을 말이냐?”

“네, 지금 클라우드 도련님이라면.”

“확신이 설 때까지는 아니야. 어쌔신이나 흉내 내는 녀석은 우리 집구석에 너 하나로 충분하다.”

카시아스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죄송합니다.”

“네 탓을 하는 게 아니다. 형님께서 장남이 아닌 둘째. 너를 그리 만들려고 한 것을 어쩌겠느냐.”

에드가는 카시아스에게 막내 아버지가 된다.

풀네임은 카시아스 카시미르.

그의 아버지는 가문의 차남으로 에드가 백작의 형이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에게 가문의 기밀을 가르쳐 줄 수 없어. 좀 더 지켜보자.”

왕국에서 이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날엔 아들의 목숨이 위험했다.

아직 때가 아니었다.

클라우드가 힘을 기르기 전까지는 철저하게 숨겨야 했다.

“괜히 분란만 더 커지는지 모르겠어.”

골치 아픈 일은 부인이 율리를 내세우기 위해 클라우드를 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아비의 입장.

괴롭지만 가문을 위해선 클라우드 스스로 헤쳐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면 자신의 대에서 가문은 끝장이 날 거니까.



***



가문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고용인들은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집에 사람이 벌떼 같이 몰려드는군.”

“율리 도련님의 생일에 초대받은 손님들입니다.”

“거참 요란하게 지내는구만.”

클라우드는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자리를 옮기려는 찰나.

두 사람에게 달려오는 남자가 있었다.

“홀리 쉣!”

정확하게 이젤라를 보고 눈이 커진 남자가 환호하며 다가왔다.

‘카시미르 가는 천국이야? 기사조차 여신이라니!’

남자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크음, 안녕하십니까. 센이드 가의 장남, 디온 센이드입니다.”

호들갑을 떨며 달려온 남자가 자신을 소개하자, 말똥말똥한 눈으로 쳐다본 이젤라의 첫마디.

“네.”

그녀의 짤막한 대답에 디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명백한 무시였다.

찡그린 표정을 재빨리 폈다.

‘나를 상대로 도도하게 구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가문을 듣고도 무시한 여자는 태어나서 단 한 명도 없었다.

백작위를 단지 오십 년밖에 되지 않는 센이드 가문.

하나 왕국에서 그들의 권위는 무시무시했다.

왕국의 5대 명검을 만든 가문.

군수품 중 절반은 센이드 가에서 만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자, 더는 이곳에 있기 싫으니.”

“네.”

디온이 눈을 부릅떴다.

자신을 소개했는데도 무시하던 그녀가 차갑게 생긴 남자의 말에는 고분고분했다.

‘전속 기사? 부럽다. 저런 예쁜 기사가 날 보필하면 여한이 없겠어.’

옆에 서 있는 남자가 갑자기 미워졌다.

얼굴도 잘생겼는데, 미인의 여기사까지.

비싼 옷을 걸치고 있는 걸 봐서는 신분이 결코 낮지 않아 보였다.

‘옆에 붙어 다니면서 신분을 캐봐야지.’

디온이 두 사람을 쫓아갔다.

“거 같이 다닙시다.”

이젤라의 앵두같은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주군께서는 귀찮은 걸 싫어하십니다.”

“제가 카시미르 가를 구경하고 싶은데… 혹여, 그대가 안내를 해주면 안되겠소?”

디온이 최대한 품위 있게 말했다.

“거절합니다. 다른 이에게 부탁하십시오.”

“내가 무례하다는 걸 아오만. 이렇게 부탁합니다.”

그가 두 손을 모아 머리 위로 올렸다.

이젤라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부정의 뜻을 내비쳤다.

“제 주군께서 허락하셔야 합니다.”

‘그럼 그렇지, 이제 저놈만 설득하면 되는 건가?’

디온이 신이 나 옆을 쳐다보자, 차갑게 서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시발, 뭔 놈의 눈이 저렇게 살벌해.’

대장장이지만 왕국 아카데미에서 검술 훈련을 받았다.

웬만한 이들은 자신이 휘두른 거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그래서 어딜 가나 당당했는데, 이 남자에게는 말을 걸기 껄끄러웠다.

위험한 냄새가 난다고 해야 할까.

무심하게 바라보는 저 눈.

자신이 꼭 발가벗겨진 것만 같았다.

‘여기서 물러설 수 없어.’

자신이 누군가.

대(大)세이드 가의 장남이었다.

여기서 꼬리를 말고 도망칠 수 없었다.

“내 소개는 들었을 거요. 당신의 기사에게 저택을 안내받고 싶은데, 괜찮겠소?”

“안내받고 싶으면 다른 사람 알아봐.”

1초. 아니,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당했다.

너무 황당해 말을 더듬었다.

“무, 뭐요?”

“뒤지기 싫으면 꺼지라고.”

세 번의 무시.

자신을 향한 폭언과 이대로 자리를 떠나면 자신을 한심하게 볼 거 같은 여기사를 생각하니, 디온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내가 누군지 몰라? 나 센이드 가의 장남 디온 센이드야!”

“센이드 가의 장남이면 남의 집에 와서 예의를 밥 말아 먹어도 되나? 네 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치던?”

클라우드가 센이드 가를 모욕한 발언을 하자 디온의 눈이 뒤집혔다.

“죽여 버리겠어!”

그가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죽엇!”

등에 매고 있던.

대검이 뽑아져 나오며 일자로 찔러왔다.

클라우드는 무방비의 상태였다.

그저 디온의 칼끝을 바라볼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살하는 사람처럼 가만히 있었는데.

깡!

디온의 검이 반동에 못 이겨 뒤로 날아가 땅에 꽂혔다.

“네년이 끝까지!”

좋게 봤던 여자.

그녀가 자신이 찌른 검을 튕기고, 경멸 어린 시선으로 봤다.

“사절단으로 오셨으니 한 번은 봐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다음에도 제 주군께 불경한 죄를 범한다면 그때는 결단코 베겠습니다. 가시죠, 주군.”

클라우드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승자인 마냥 여유로운 미소를 한껏 지었다.

“너희들이 나에게 이렇게 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

소리치며 외쳤지만, 두 사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두고 보자. 네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꼭 내 앞에 무릎 꿇게 할 거야.’

디온이 이를 갈았다.

센이드가와 척을 지고 아스란 왕국에서 잘 사는지 두고 볼 생각이었다.



***



이젤라는 어딜 가나 눈에 띄었다.

적발의 미녀 기사.

거기에 비견되는 예쁜 얼굴과 몸매.

완벽 그 자체였다.

모든 남자의 시선을 잡아끌기엔 충분했다.

이젤라의 외모 덕에 귀족 가에서 혼사가 꽤 들어오지만 모두 거절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상대가 아니면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몸의 원주인도 그녀를 가지려고 수작 부리지 않았는가.

“상당히 눈에 뜨이는 외모야.”

“죄송합니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에 미세하게 균열이 갔다.

클라우드는 이젤라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얼굴 때문이네.’

그녀와 지내보며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실력으로 인정받길 원하는 점.

그 누구보다 열심히 수련해 기사단에 들었는데, 선임들은 마냥 예쁜 여기사가 들어왔다고 좋아했다.

실력은 뒷전.

항상 앞에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는 단어는 미녀 기사였다.

그러니 좋을 수가 있나.

“머리를 짧게 자르겠습니다.”

“됐어, 다른 이들이 네 실력을 몰라서 저러는 거야.”

무림에서도 이젤라와 같은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백이령.

강호인들은 백이령을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라고 칭송했지만, 그녀는 외모가 아닌 실력으로 인정받길 원했다.

은거를 선택하고 각고의 수련 끝에 자신의 무공을 완성했다.

때마침 정마대전이 일어나고, 백이령은 정파 진영에 가담했다.

만나는 마교도 마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희롱했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전무.

전쟁이 끝나고 얻은 무명은 혈후였다.

외모밖에 칭찬 안 하던 무림인들은 마교도를 무참히 도륙한 혈후에게 외모의 외자도 꺼낼 수 없게 되었다.

“네가 소드 마스터가 되면 이런 시답잖은 소리는 사라지겠지.”

“노력하겠습니다.”

“얼굴은 불가능하다는 표정인데?”

“아,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을 들켰는지 말을 더듬었다.

그녀는 자신의 잠재력을 몰랐다.

노력으로 올라갈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소드 익스퍼트까지고 그 이상은 재능이라 생각하겠지.

하지만 클라우드는 그녀의 재능을 알았다.

타고난 집념.

그것이 그녀를 소드 마스터까지 안내할 것이라는 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