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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석 달이란 시간.

사실 필요 없었다.

자신의 성장세라면 길어야 두 달.

짧으면 한 달 반 정도면 율리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물론, 그때까지 율리의 경지가 제자리에 있어야만 가능하겠지만.

녀석을 따라잡는 건 시간문제였다.

“잠을 못 주무셨습니까? 눈 밑이 시커멓습니다.”

“보다시피 생각이 많았어.”

이젤라는 클라우드를 유난히 뚫어지게 봤다.

‘사람이 너무 변했어.’

영성회의 일.

페시아가 끌려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의 눈빛이 변했다.

분노, 연민, 미안함.

수많은 감정을 눈에 담았다.

분노는 패거리와 클라우드 자신에게 연민과 미안함은 페시아에게.

‘구해 오실 거라고 생각도 못 했어.’

자신은 클라우드 도련님을 모시기로 했다.

그가 시킨 일이라면 더러운 일도 서슴없이 해야 하는 전속 기사.

그런 각오로 따라나섰지만, 자신이 우려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모습이 주군의 진짜 모습일까?’

궁금해졌다.

과연 진심으로 충성할 만한 주군인지를.

“페시아는 이미 준비가 다 끝났다고 합니다.”

“나가 보자.”

“배웅합니까?”

클라우드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나는 배웅나가면 안 되나?”

“아닙니다, 가시죠.”

저택 밖으로 나온 그가 페시아를 볼 수 있었다.

“집에 쉬러 가는데 걱정이 잔뜩 있는 얼굴은 뭐냐.”

그녀의 얼굴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썩 좋지 않았다.

뭔가 어둡다고 할까.

일 년에 한 번뿐인 휴가인데, 어디가 안 좋은 건가?

“오랜만에 고향을 가는 거라 긴장돼서요.”

“그런가.”

페시아가 잠시 곁을 떠난다고 하니 예민했나 보다.

영지 밖에서 온 마차가 가문의 입구에 섰다.

“마침 왔군.”

“이렇게까지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이미 부른 걸 어째. 그냥 타고 가.”

페시아가 코를 찡긋거렸다.

감정이 북받쳤나.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불편해서 그런다. 그러니 조심히 다녀와.”

그녀가 마차에 타기 전, 이젤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백작님께서 꼭 스튜를 삼시 세끼 챙겨 주라고 했어요.”

“알았어. 내가 잘 챙길 테니 걱정 마.”

“감사합니다. 저 대신 수고해 주세요.”

“내 일이기도 해.”

페시아는 미련이 남은 듯 머뭇거리다가 이내 마차에 올라탔다.

마중 나온 고용인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여기 일은 잊고 마음껏 쉬어.”

“보고 싶을 거에요, 페시아 언니.”

그녀가 애써 밝은 얼굴을 한 채 창문을 열어 손을 흔들었다.

“도련님 항상 몸조심하세요.”

“어디 멀리 떠나는 것도 아니고, 다녀와.”

왜지.

이 불안감은 뭘까.

페시아가 카시미르 가로 영영 안 돌아올 것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클라우드는 마차가 점이 되어 사라지는 걸 보고 몸을 돌렸다.

“돌아가서 수련해야겠다.”

“모시겠습니다.”

두 사람이 연무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시녀들은 그들의 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봐봐, 클라우드 도련님 바뀌었다니까.”

“정말이네요. 페시아 언니를 위해 마차까지 손수 불러주시고 어쩜 마음까지 좋으실까.”

“왕자님 같아.”

시녀들의 눈이 하트가 되었다.

“도련님 전속 시녀 자리 공석 아니에요?”

“어머! 시녀 장님게 말씀드려봐야겠다.”

“언니, 이상형은 율리 도련님이라면서요.”

“에이 참, 이상형은 계속 바뀌어.”

자기들끼리 북치고 장구 치고 있는 사이, 페시아와 제일 친한 릴리가 나섰다.

“어림없어, 페시아가 돌아올 때까지 이젤라님께서 도련님 수발을 드신데.”

“힝.”

“괜히 설렜어.”

그녀들은 김이 확 샜는지, 자신들의 일터로 복귀했다.



***



오전, 오후 내내 클라우드이 수련하는 걸 지켜본 이젤라였다.

일과가 끝나고 잠이 들 시각.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보필한 그녀도 내일을 위해 잠을 자려던 찰나.

방으로 오라는 연락을 클라우드에게 받았다.

‘늦은 시각에 방에는 왜?’

많은 생각 끝에 나온 답은.

‘내 몸을 원하시나?’

밤에 방으로 불렀다는 건 잠자리 말고 없었다.

그녀가 이를 질끈 깨물었다.

‘일단 가보자.’

잠자리를 요구하든, 다른 일을 시키든.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클라우드의 방문까지 왔다.

똑똑똑.

“이젤라입니다.”

“들어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건 클라우드의 젖은 머리카락이었다.

‘내 몸을 원하시는 거였어.’

그녀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그 상황이 닥치자 화가 났다.

고작 이런 사람을 주군으로 모시게 됐다니.

많이 변했다고 생각한 자신이 한심했다.

그녀가 체념하고 앵두 같은 입술을 열었다.

“용건이 뭡니까?”

목소리에 가시가 잔뜩 돋아나 있었다.

“잠이 안 와서 말이야.”

“잠자리를 원하십니까?”

“전속 기사가 잠자리 시중도 드나?”

클라우드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이젤라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주군이 원하신다면…….”

그녀가 말끝을 흐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호, 그래? 앞으로 알아두지. 그런데 아쉽겠지만 오늘은 그 때문에 부른 게 아니야.”

“네?”

“잠이 안 와서 수련이나 할까 해.”

그녀는 속으로 천만다행이라고 되뇌었다.

자신의 착각으로 주군을 오해했다.

양 볼이 붉어지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사실을 숨기려고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늦은 시간에 말입니까?”

“왜, 나랑 잠자리를 가지지 못해 아쉽나?”

“무, 무슨 그런 말씀을! 전혀 아쉽지 않습니다.”

이젤라가 당황스러움에 손사래를 쳤다.

“하하, 농담이다.”

“장난이 지나치십니다.”

언제나 경직된 표정을 유지하던 그녀가 예상 밖의 반응을 하니 놀리는 맛이 있었다.

페시아가 없어 심심하던 찰나.

꿩 대신 닭이라고 이젤라에게 장난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녀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크흠, 그런데 아침부터 계속 수련만 하시지 않았습니까. 휴식도 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클라우드는 오늘 수련만 했다.

밥 먹고 생리현상을 제외하면 연무장을 벗어난 일이 없었다.

잠이 안 온다고 수련을 하겠다니.

이 정도 했으면 체력이 바닥날 법도 한데.

‘의지가 대단하셔.’

강해지겠다는 굳은 결의

수련을 늦게 시작한 만큼, 잠자는 시간까지 쪼개 가면서 수련을 하시려고 한다.

정신력 하나는 본받아야 마땅했다.

“그러지 말고 네가 몸으로 도와줬으면 해.”

클라우드가 오해를 부르는 단어를 사용하는 통에 이젤라의 얼굴이 또다시 시뻘게졌다.



***



페시아가 없는 저택.

허전함이 가시지 않고, 잠은커녕 정신은 또렷했다.

그러다 율리가 수련장에서 한 말이 생각났다.

‘율리와 아버지의 콧대를 꺾어 주려면 이대로 있으면 안 돼.’

동생에게 큰소리친 기한은 세 달이긴 하나, 최대한 빨리 과거의 실력을 되찾아한다.

율리도 그렇지만, 우선 언제 암살자들이 나타날지 모르는 이 상황이 한없이 불편했다.

적어도 일류에서 절정 초입은 들어서야 생활하기 편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이젤라를 불렀다.

어두컴컴한 연무장에 서 있는 클라우드가 단검을 꺼냈다.

“봐주지 말고 날 죽이겠단 마음으로 와.”

“괜찮으시겠습니까?”

“어둠은 나 그 자체다.”

이젤라는 클라우드의 말한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둠 그 자체라니,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전력을 다할 작정으로 처음부터 강수를 두었다.

“가겠습니다.”

오러를 잔뜩 주입한 검이 푸른빛을 띠자…….

팟!

그녀는 자신의 다리 근력을 이용해 달려가는 그대로 도약을 했다.

오러로 신체를 강화한 덕에 2m는 치솟아 오르며 검을 수직으로 내려찍었다.

쾅!

연무장에 굉음이 울리며 먼지구름이 피었다.

그때, 등 뒤에서 오싹한 음성이 들렸다.

“지금 한 번 목숨을 잃었어.”

이젤라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클라우드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웃음엔 왠지 모를 살기가 얼핏 보였다.

‘우, 움직임을 보지 못했어.’

기의 흐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폭발적으로 움직이려면 마나의 움직임이 느껴질 텐데, 그런 낌새가 전혀 없었다.

소리 없이 다가와 등을 점했다.

만약 저게 자신을 죽이려고 한 거라면?

거기까지 생각하자 이젤라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죽을 거란 걸 알지도 못했을 거야.’

눈에 공포가 깃들었다.

손에 쥔 검이 떨렸다.

주군은 자신의 적이 아닌데도 무섭게 느껴졌다.

기사가 되고 이런 적이 있던가.

단연코 없었다.

기사는 명예에 죽고 명예에 살았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기사는 더 이상 기사가 아니었다.

“멍하니 뭐해?”

“네? 아, 네.”

“나에게 한 번이라도 상처를 입히면 아까 못다한 잠자리 이야기라도…….”

클라우드가 시답잖은 농담을 하자, 이젤라가 곧바로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절대 방심하지 않을 겁니다!”

카시미르 가의 개망나니는 여기에 없었다.

자신을 죽이려는 어쌔신만이 있을 뿐.

검을 고쳐 잡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클라우드가 어둠과 동화되어 사라졌다.

이젤라가 검을 똑바로 잡으며 눈을 감았다.

‘집중해, 기척을 잡으면 피할 수 있어.’

주위는 고요한 정적만이 가득했다.

연무장 중앙에 박힌 깃발의 펄럭임과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

그러고 나서 그 어떤 것도 소리도 들리지 않을 찰나.

파삭.

나뭇잎이 부스러지는 소리가 오른쪽에서 들리자…….

후웅―

“거기입니까!”

검을 옆으로 휘둘렀다.

깡!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며 클라우드가 감탄을 했다.

“호, 집중력이 대단한데?”

“절대 방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좋아, 이래야 대련하는 맛이 있지.”

대련은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다음 날도.

“세 번 죽었다.”



그다음 날도.

“벌써 열 번째, 점점 더 날 못 찾으면 어떡해.”



저녁 늦은 시간까지의 수련은 이어졌다.

어느덧 율리의 생일이 다가왔을 때, 이젤라와의 술래잡기는 끝이 났다.

“수고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대련을 시작한 날부터 지금까지 클라우드와 격차는 계속 벌어졌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마지막 한 달 째에는 기척을 전혀 잡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유령 그 자체.

어쌔신 마스터가 저러할까.

주군이 누군가를 죽이려고 마음먹는다면 그러지 못할 사람이 없다고 자부했다.

이젤라는 자신의 분신인 검으로 땅을 짚으며 간신이 일어났다.

그러고 나서 경의로운 눈빛으로 자신의 주인을 바라봤다.

‘믿기지 않아.’

하찮게만 여긴 단검이 자신의 등을 점하는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성장 속도가 말이 안 돼.’

자신의 재능도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아니, 적어도 가문의 차남인 율리 도련님 다음으로 재능이 뛰어나다고 자부했는데, 오산이었다.

그녀의 앞에는 커다란 산이 존재했다.

그 사실을 직접 몸으로 확인 한 시간은 정확하게 삼 주 하고도 사흘이 지난 시점이었다.

“페시아가 있으면 회복 마법을 써 달라고 했을 텐데, 몸조리 잘해.”

“알겠습니다.”

클라우드는 이젤라를 뒤로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이젤라는 앞으로 더 성장할 거야.’

이번의 수련을 통해 그녀도 꽤 빠르게 강해졌다.

소드 유저에서 익스퍼트 초급으로 올라섰다.

이전에는 검에 마나만 담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검기, 이 세계의 말로 소드 오러를 불안전하게라도 뽑을 수 있게 되었다.

대련이긴 하나 죽는다는 긴장감으로 살얼음판을 걸었을 터.

공포와 죽음을 이겨 내니 저절로 성장한 것이다.

그녀의 재능이라면 여자로서 최초로 소드 마스터가 될지도 몰랐다.

왕국의 별.

나아가서 대륙의 수호자.

차세대 오성(五星)의 자리에 오를 사람이 자신의 전속 기사였다.

“땀을 흠뻑 흘렸더니 솔솔 잠이 오네.”

침대에 벌러덩 누운 클라우드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그 자세 그대로 내공을 돌렸다.

몸에서 나온 희미한 기류가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일류 끝자락인가.’

막힌 벽만 뚫으면 절정의 초입에 들어선다.

전무후무한 기록.

세 달 만에 삼류에서 일류 끝자락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걸 누가 믿을까.

무신이 와도 믿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자신이 익혀야 될 살검이자 비도술.

천살(天殺)의 조건이 충족되었다.

하늘도 죽인다는 광오한 무공.

일류 이상의 경지에서 익히지 않으면 기혈이 꼬여서 폐인이 되고 마는 천고의 무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