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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카시미르 가로 돌아가는 길.

클라우드는 페시아의 얼굴도 보지 않고 걸어가면서 말했다.

“다음번에도 이런 일이 있으면 바로 말해. 내가 기억을 잃어 억지로 꺼내지 않는 이상 모를 수 있어.”

“네…….”

백작가에 다다를 즘, 며칠 후에나 온다는 백작 부인이 도착해 있었다.

정문에 나와 있는 이들.

그중 에드가 백작이 클라우드를 보자 얼굴이 단번에 시뻘겋게 변했다.

그들을 무시하고 가려 하는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형님?”

“율…리냐?”

“형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군요.”

백작가의 불세출의 천재.

스무 살의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에 오른 율리 카시미르와의 첫 대면이었다.



***



쾅!

에드가 백작이 식탁을 강하게 내리쳤다.

“저번에 암살자 때문에 죽다 살았는데, 또 영성회란 말도 안 되는 곳에 갔느냐! 기사까지 대동하고서?”

백작의 눈은 똑바로 말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빛이었다.

이전의 클라우드였다면 끔뻑 죽었을 테지만, 백운기는 달랐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어쌔신이나 흉내 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예전 망나니 시절 그대로구나.”

백작에게 짜증 낼 필요도 없었다.

괜히 대꾸하다간 이성을 잃을 거 같아 무시했다.

자신과 백작이 서로 으르렁거리자 부인이 끼어들었다.

“제가 잘 다그칠 테니 걱정 마세요. 그러다 더 엇나가면 어쩌시려고 그래요?”

그녀가 자신을 보며 웃었다.

여우의 웃음.

강호에 저런 요사한 웃음을 지은 자는 하나같이 위험했다.

“백작님, 왕국에서 율리가 콘젤 베로나 경의 눈에 들어 검술 지도를 받았어요.”

“그게 정말이오? 정말이냐 율리?”

그녀가 능숙하게 화재를 돌리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누가 싸우든 가만히 교양 있게 음식을 먹고 있던 율리가 당연하듯 말했다.

“네,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허허, 검성의 칭호를 가진 콘젤 경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면서 좋지 않으냐?”

콘젤 베로나.

왕국의 몇 안 되는 소드 마스터이자, 베로나 백작가의 가주이며 현 왕비의 오빠이다.

그런 자에게 한 수 배웠다는 건 기연과도 같은 일이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검성이란 칭호는 본디 저희 가문의 것이기도 합니다.”

“하하하, 당연하다. 검성은 우리 카시미르 가의 것. 네가 그 칭호를 되돌려 받아 오려구나”

율리를 보는 에드가 백작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클라우드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이러니 녀석이 삐뚤어져 망나니짓을 한 게지.

좋은 음식을 먹이면 뭐하나, 아들을 대하는 게 다른데.

클라우드는 입맛이 뚝 떨어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일어나니? 오랜만에 가족끼리 모였는데, 좀 더 이야기를 나누지 그러니.”

“밥맛이 영 없군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저,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보았나!”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삿대질을 해댔다.

“백작님, 놔두세요. 아이들 문제는 저에게 맡겨 주시기로 했잖아요.”

“후, 미안하오. 항상 클라우드를 부인께 떠맡기는 것 같소.”

백작의 손이 식탁에 올려진 부인의 손을 잡았다.

“호호, 제 일인걸요.”



***



방으로 돌아온 클라우드를 맞이한 건 페시아였다.

큰일을 겪어서 쉴 법도 한데 바로 일터로 복귀했다.

정말 대단한 시녀였다.

“목욕물을 준비할까요?”

“그래.”

“바로 준비할게요.”

클라우드는 백작 부인과 식사할 때 몇 마디를 주고받으며 알아낸 것이 있었다.

원주인의 기억 속에서 느낀 그녀의 대한 감정은 분노였다.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자신을 챙겨 주는 척하고 뒤로 괴롭혔다.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망나니여서 자신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없을 뿐.

‘한심한 놈, 그러게 잘 좀 살 것이지. 제 화를 못 이겨 방탕하게 생활이나 하다니.’

페시아가 목욕물을 다 받았는지 방으로 돌아왔다.

“물어볼 게 있다.”

“네, 말씀하세요.”

“백작 부인이 내 말을 잘 들어줬나?”

“그럼요, 도련님이 망나니짓…….”

그녀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자신의 눈치를 봤다.

“괜찮다, 말해봐.”

“도련님이 주인님께 혼나지 않은 것도 다 주인마님 덕분이에요.”

클라우드의 망나니짓은 도가 지나쳤고, 백작 부인이 모든 걸 막았다.

교묘하게 틈을 만들어 놓고 때가 되면 에드가 백작의 귀에 들어가 클라우드는 박살이 났다.

‘내가 망가지면 제일 이득을 얻은 사람은 율리야. 백작 부인이 배 아파서 낳은 친자식.’

하나 걸리는 건 백작 부인을 볼 때와 율리를 볼 때의 느낌이 달랐다.

바로 친근감.

정말 아끼는 친동생을 오랜만에 본 감정이었다.

‘그런데 기억과는 달라.’

기억 속의 얼굴에선 맑고 순수한 표정이 떠오른 반면, 지금의 율리는 무뚝뚝하고 감정이 전혀 없었다.

‘일부러 나를 멀리하고 있어.’

왜일까.

클라우드의 병을 치료할 방법이 왕국에 있다며 아카데미로 떠난 지 오 년이 되었다.

그리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아카데미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 집안 알면 알수록 너무 복잡해.’

클라우드가 율리 모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 페시아가 뜸을 들이면서 말했다.

“저, 도련님.”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이번 달에 집으로 휴가를 갈까 해요. 허락 맡으려고요.”

카시미르 가의 고용인들은 일 년 내내 일을 한다.

가문이 있는 카시안 영지에 거주지를 둔 고용인들은 왔다 갔다 할 수 있지만, 타 지역에 고향으로 둔 이들은 가문의 숙소에 묵었다.

페시아는 후자였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일 년에 단 한 번 두 달 가량을 고향에 내려가 머물게 해 준다.

“휴가라…….”

“안 될까요?”

갑자기 마음 한 켠이 빈 듯 공허해졌다.

눈을 뜬 후로 항상 곁에 있어 준 그녀.

자신을 항상 걱정해 준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하니, 무언가가 허전해졌다.

‘큰일을 겪었는데 마음을 추스를 수 있게 보내 줘야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거울이 있는 곳으로 가 서랍을 열었다.

각양각색의 보석이 있는데 그중 한 움큼을 쥐었다.

“갈 때 여비로 쓰거라, 편히 갈 수 있게 마차도 구해 주마.”

“괘,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다.”

이번 일을 당하게 해서 너무 미안했다.

“내일 당장 출발할 수 있게 조치해 줄게.”

“굳이 그러시지 않아도 되는데…….”

클라우드가 못 들리게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페시아였다.



***



백작 부인이 의자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렸다.

때마침 반문을 두드리는 이가 있었다.

“들어와.”

“부르셨습니까?”

백작 부인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시녀 장이었다.

“내가 없는 동안 클라우드를 잘 감시했지?”“네, 한시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보고해.”

에드가 백작에게 현모양처처럼 대하던 그 백작 부인이 맞는 걸까.

예쁜 귀부인의 얼굴에는 표정이 하나도 없었다.

“어쌔신들이 실패했습니다.”

“명이 꽤 기네? 내가 지시한 증거는?”

“이미 불태우고 없습니다.”

“잘했어, 계속 말해봐.”

그녀는 흡족해했다.

“그 후 사람이 변했습니다.”

“어떻게?”

백작 부인이 다소 흥미로운지 다리를 꼬며 귀를 쫑긋 세웠다.

“기억을 잃어 망나니짓을 그만두고 수련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면 곤란하지.”

아들인 율리가 카시미르 가의 가주가 되려면 불안의 씨앗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제거해야 했다.

그 걸림돌 중 하나가 클라우드였다.

온전한 백작의 작위를 가지려면 장남은 사라져야 했으니까.

시녀 장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일하는 시녀들도 괴롭히지 않고 수련만 하며 지내다 오늘 일이 터졌습니다.”

“영성회 말이냐?”

“네.”

“제 버릇 개 못 주는 거지. 호호, 자기랑 걸맞은 년들이랑 놀았겠어.”

클라우드가 수련한다는 말에 표정이 굳었다가 영성회란 말에 다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의 눈이 반달이 되면서 시녀 장에게 말했다.

“잘 주시하고 있다가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보고해.”

“네.”

시녀 장은 공손히 배에 손을 얹으며 90도로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고요한 숲’에 부탁을 해봐야겠어.”

자신이 없을 때 클라우드를 처리하는 게 안전했다.

그래서 어쌔신을 고용한 건데, 실패로 돌아갔다.

자칫 백작이 어쌔신의 꼬리를 잡기라도 하는 날엔 큰일이지만, 아들을 위해선 어떤 짓이든 감내할 수 있었다.



***



눈에 피로한 기색이 하나도 없는 클라우드

침대에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페시아가 휴가를 간다고 하니까 괜히 마음이 심란했다.

“잠은 안 오고, 달밤에 운동이나 해볼까?”

평소 자신이 사용하는 연무장으로 갔다.

그런데.

“먼저 온 손님이 있었군.”

달밤에 자신 말고 검을 휘두르려는 인물이 있었다.

큰 키에 딱 벌어진 어깨, 달빛에 비춘 얼굴에는 잘생김이 덕지덕지 묻어난 이.

율리 카시미르였다.

녀석이 검을 쉬지 않고 휘둘렀다.

잠자코 그 모습을 지켜봤다.

얼마나 잘 휘두르기에 사람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할까.

5분, 15분, 30분.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중간에 흐름이 끊기지 않았다.

간간이 검에서 푸른빛이 품어져 나오기도 했다.

‘마나 하트를 연성하지 못해 망나니 길로 접어들었다는 말은 취소해야겠어.’

율리는 타고난 천재였다.

스무 살의 나이에 저 정도 검을 휘두른 사람을 한 명 본적이 있었다.

무림에서 자신과 같이 이제(二帝)의 칭호를 쓴 자.

혈교의 교주만이 저 나이 때에 초식의 정교함과 이해도를 가졌다고 했다.

“후우우우.”

드디어 율리의 춤사위가 멈췄다.

긴 숨을 내뱉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녀석은 이마를 소매로 쓱 문대며 땀을 닦았다.

그리고 검을 집어넣고 가려는 찰나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연무장은 학을 떼던 분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말에 전혀 감정이 없었다.

정말로 예전의 율리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자신의 기억 속 동생은 웃는 얼굴로 자신에게 손을 흔들고 아카데미로 떠났는데.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형님, 몸조심하세요! 제가 왕국에서 꼭 형님의 고질병을 고칠 방법을 찾아올게요!”



순수하고 맑은 아이였다.

율리는 클라우드가 마나 하트를 익히지 못한 걸 이미 알았다.

고칠 방법이 왕도에 있다는 걸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왕국에 죽어도 가기 싫다던 율리가 스스로 떠났다.

그런데 180도 변한 모습으로 자신 앞에 나타났다.

“연무장에 올 이유가 수련밖에 더 있나?”

“집으로 돌아와서 들었습니다. 근래 들어 정신을 차리고 수련을 하신다고… 형님, 그러지 마십시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수련하지 말라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지.

“형님은 검을 잡기엔 늦었습니다. 쉽게 생각하지 마세요.”

말투가 굉장히 공격적이었다.

자신을 무시하는 게 물씬 묻어 나왔다.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다.”

“가주 자리에 미련이 있으신 겁니까?”

마치 죄인을 추궁하듯 쏘아붙이자 슬슬 짜증이 났다.

“그렇다면?”

“포기하십시오. 저를 넘지 못하는 이상 형님은 절대 가주가 되지 못합니다.”

율리의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이걸 어쩌나.

저 말을 들으니 괜한 오기가 생겼다.

자신은 이제 망나니 클라우드가 아니고, 백운기의 영혼이 들어간 클라우드였다.

무림에서 음지를 지배한 암천제.

햇병아리인 율리를 따라잡는 건 일도 아니었다.

“내가 너를 뛰어넘으면 후계자 자리를 내려놓을 거냐?”

“무리입니다. 수습 기사 하나 이겼다고 기고만장해 있으신 겁니까? 저를 그런 어중이떠중이들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석 달.”

“……?”

“석 달 안에 너를 따라잡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