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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오랜만에 좋은 꿈을 꾸었다.

평소 빨리 일어나던 습관도 오늘은 예외.

침대에서 몸을 뒹굴었다.

게으름을 피우며 몸을 흐느적거리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군. 일어나십시오.”

‘이 목소린?’

페시아는 절대 아니다.

그녀는 조용하고 나긋한 목소리였지 이렇게 날카로운 음성이 아니었다.

“주군, 일어나십시오. 아침입니다.”

생각났다.

‘이젤라구나.’

잠깐.

‘그녀가 왜 여기에 있지?’

클라우드이 몸을 벌떡 일어났다.

육중한 갑옷을 입고 옆구리에 검을 찬 모습이었다.

“아침부터 웬일이야?”

“전속 기사는 주군 옆에 항시 붙어 다녀야 합니다.”

그래서 몸의 원주인이 이젤라를 전속 기사로 만들려고 했던 거구나.

“그런가, 잠깐 기다려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페시아.”

밖에 대기하고 있을 페시아를 불렀다.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시녀는 페시아가 아니었다.

“페시아는?”

대신 들어온 시녀 릴리가 대답했다.

“오늘 못 나온다고 연락 왔습니다.”

“어디 아픈가?”

“그게… 오늘 그날이라고 토레토님이 데려갔습니다.”

“그날? 토레토가 누군데?”

클라우드는 그날이 무슨 날인지 몰라 시녀를 빤히 쳐다봤다.

“영성회 참석 날이십니다.”

시녀의 얼굴이 붉어지면서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영성회, 영성회가 뭐…….”

전날의 편지.

발신인이 영성회였다.

토레토를 떠올리면서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는 기억을 끄집어냈다.

영성회는 영웅이 될 별의 모임이란 뜻으로 자신이 주축이 된 모임이었다.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별 볼 일 없었다.

클라우드는 카시안 영지의 질 나쁜 패거리들과 더럽고 지저분하게 어울렸다.

“페시아가 왜 내 허락 없이 영성회에 간 것 것이냐?”

“그건 저도 잘…….”

“언제 소식을 들었지?”

“해 뜨기 전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는 시각이다.

“나갔다 오마.”

“주인님께서 근신하시라고…….”

클라우드가 시녀의 말도 들은 채도 안 하고 방을 나갔다.

옆에 있는 이젤라의 낯빛이 굳었다.

그녀가 시녀를 보며 말했다.

“주군께선 카시안 영지로 나가지 않았다. 잠시 산책을 나가신 거야. 이해하겠지?”

그러면서 칼을 슬쩍 뽑았다.

“그, 그럼요. 클라우드 도련님은 산책을 나가셨어요.”

이젤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클라우드의 뒤를 따랐다.

옆에선 그녀가 주군의 얼굴을 슬쩍 봤다.

냉기가 풀풀 날리는 얼굴.

차갑다 못해 냉막하기 짝이 없었다.



***



클라우드의 처소에 있던 릴리가 부엌으로 오자, 누군가 그녀에게 물었다.

“릴리, 도련님은 어쩌고, 이곳에 와 있어?”

“도련님은 사, 산책가셨어요.”

일하던 고용인들이 하나둘씩 모였다.

단연 화제는 변한 클라우드의 이야기였다.

“어땠어? 오늘도 도련님 멋있었어?”

“당연하지, 뚱뚱하던 과거는 잊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하셨잖아.”

“아침의 도련님은 어때?”

부엌데기들이 요란스럽게 떠들어 대자, 릴리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어머, 표정이 왜 그래?”

“그러게, 클라우드 도련님 방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니요, 그게…….”

릴리가 손가락을 매만지면서 불안해했다.

답답한 나머지 부엌데기들이 그녀를 닦달하자.

“페시아를 찾으러 영성회에 가셨어요…….”

그녀가 걱정되어 이젤라가 함구하라는 말을 어기고 말았다.

“아, 그… 변태 모임?”

“도련님 바뀌지 않았어?”

다들 놀란 얼굴을 했다.

영성회에 갔다는 말에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개 버릇 어디 안 간다더니…….”

“페시아 찾으러 갔다면서 혹시, 데리러 가시지 않았을까?”

“데리러 갔겠지. 변태 짓거리하러.”

“이것들아 그만 이야기하고 일 좀 해. 우리끼리 싸워봤자 아무 의미 없다고.”

부엌데기 중 최고참이 나서서 중재를 안 했더라면, 부엌은 난장판이 되고도 남았다.

“에휴, 주인마님이 첫째 도련님을 너무 감싸고돌아서 그래.”

최고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친자식도 아니면서 첫째 도련님을 어쩜 그리 감쌀까요?”

“난들 알아? 모성애가 강한가 보지.”

릴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어 백작 부인에게 일러바쳤지만, 돌아오는 건 침묵뿐이었다.

자신이 배 아파서 난 자식도 아닌데 어찌나 클라우드를 감싸는지…….

그래서 백작의 귀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동안 페시아가 도련님 변했다고 얼마나 칭찬하고 다녔는데. 쯧…….”

부엌데기들이 모여 이야기하는데, 시녀 장이 불쑥 나타났다.

“모여서 뭣들 해! 일 안 해?”

“계속 일하다가 잠깐 쉬었어요. 이제 다시 일합니다.”

그들이 흩어지며 각자 맡은 구역으로 돌아가 요리를 했다.

그러다 안색이 어두운 릴리를 봤다.

“넌 클라우드 도련님 처소 아니었어?”

“네, 맞아요.”

“심부름이라도 온 거야?”

“아니요, 산책가신다고 나가신 바람에…….”

시녀 장이 릴리를 유심히 보았다.

손가락을 매만지며 입술을 깨물고 있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그녀가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걸 안 시녀 장은 릴리를 다그쳤다.

“릴리야, 나한테 거짓말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시녀 장에게 거짓말한 시녀는 매를 맞았다.

그것도 아주 살벌하게.

릴리는 이젤라보다 앞에 서 있는 시녀 장이 더 무서웠다.

그리고 이미 부엌데기들이 알았다.

시녀 장 한 명 더 안다고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했다.

“여, 영성회에 가셨어요.”

“진작 말하지 그랬니. 도련님이 돌아올 때까지 처소에 가만히 있어. 절대 주인님께 들키지 말고.”

“이젤라님이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나는 누구에게도 도련님이 영성회에 가셨다는 걸 듣지 못했어.”

시녀 장이 몸을 돌려 부엌을 나갔다.

그녀의 입꼬리엔 작은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녀는 철저히 백작 부인의 사람이었다.



***



카시안 영지로 나온 클라우드는 저택을 당당하게 나온 것과는 달리 주위를 경계하면서 다녔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다.”

사실 영지로 나온 순간부터 자신을 공격한 암살자가 언제 나타날 지 몰라 날이 잔뜩 서 있었다.

‘천하의 암천제가 살수의 눈치나 봐야하다니.’

자신에게 죽은 정파 고수들이 이 모습을 봤다면 땅을 치고 통곡할 것이다.

고작 저런 놈에게 죽었냐고 말이다.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이야기.

현재의 경지로는 경계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숙련된 암살자가 온다면 목숨이 위험할 수 있었다.

자신만이 아니라 이젤라도 함께.

틈틈이 주위를 살핀 끝에 클라우드는 허름한 주점에 도착했다.

‘아무 일 없겠지?’

페시아가 이런 곳에 있다는 생각을 하자, 괜히 걱정이 됐다.

“여기입니까?”

이젤라는 기분 나쁜 쾌쾌한 냄새 때문에 손으로 코를 막았다.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끼익―

그녀가 문을 열고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손님이라곤 한 사람도 없었다.

테이블엔 먼지가 풀풀 날리고, 의자는 다리가 부서져 있었다.

클라우드는 원주인의 기억 속에서 이곳에 비밀 통로가 있다는 걸 생각해 냈다.

“저 부근을 한번 두들겨 봐.”

이젤라가 한쪽 벽면으로 가 검집 채 벽을 탁탁 치면서 비밀 공간을 찾았다.

쿵, 쿵.

바 뒤편의 벽 너머에 뚫린 공간이 있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여기가 통하는 문 같습니다.”

“비밀 공간이 따로 없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밑으로 통하는 계단이 나왔다.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갈수록 환한 불빛이 점점 다가왔다.

거의 도착할 무렵.

여기저기서 끈적한 교성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클라우드의 눈이 실룩거렸다.

자신의 눈에 비친 광경.

누가 들어왔는지도 모른 채 전라의 여성과 살을 맞대며 추잡하게 놀고 있는 남자들.

가슴을 핥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허리를 미친 듯이 흔들어 대는 놈이 있었다.

그들을 보며 페시아를 찾는데.

“허억! 형님 오셨습니까?”

양옆에 여자를 끼고 눈이 잔뜩 풀어진 남자가 클라우드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

그제야 남자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맞이했다.

여자들은 일이 끝났음에도 옷 입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눈은 흐리멍텅하게 풀어져 있고, 팔다리를 가누지 못했다.

‘약에 취했어.’

힘없이 축 늘어진 모습.

여기는 여자에게 약을 먹이고 흥분하게 해 자신의 성욕을 채우는 쓰레기들의 집합소였다.

“헤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저희끼리 한탕 뛰었습니다. 빨리 오신 걸 보니 우리 형님께서 많이 달아오르신 모양입니다.”

이곳의 주인인 토레토가 손을 파리처럼 비비며 다가왔다.

“누가, 네 형님이냐.”

“아이고, 저희가 먼저 거사를 치루는 바람에 화나셨나 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페시아가 어디에 있는지 안내해.”

지금은 참았다.

페시아가 어떤 상태인지 알기 전에 일을 벌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으니까.

“만찬은 이미 준비된 상태입니다. 따라오십시오.”

토레토가 앞장서서 걸으며 뒤에 있는 이젤라를 슬쩍 쳐다봤다.

“저분은 뉘신지?”

“안내부터 해.”

목소리가 무미건조했다.

눈치 빠른 토레토는 분위기가 이상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사방이 천으로 덥힌 공간이었다.

클라우드가 천을 확 걷었다.

안에는 전라의 여성이 안대로 눈을 가린 채 밧줄로 꽁꽁 묶여 두려움에 몸을 떨며 흐느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젤라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신이 이러려고 클라우드를 주군으로 모신 게 아니었다.

내기에 졌다지만, 인간 이하의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클라우드를 말리려는 순간.

그의 손이 번쩍이며 움직이는 게 보였다.

“케엑!”

토레토가 그의 손에 목이 잡혀 발버둥쳤다.

“혀, 형님… 케엑… 제가 무슨… 켁… 잘못이라도…….”

그의 얼굴이 터질 듯 빨갛게 변했다.

클라우드는 토레토에 분노한 게 아니었다.

이 모든 원인을 제공한 놈.

원주인에게 분노가 차올랐다.

‘미친 새끼…….’

죽어서도 말썽을 피우는 후레자식.

이 어린 것이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았을 생각하니.

으득.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옛날의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어리고 힘이 없을 때 기루의 기녀들이 자신을 키워줬다.

살뜰히 보살펴준 그녀들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다.

시장의 왈패나, 강호의 무뢰배들이 그녀를 겁탈하고 괴롭히다 죽여도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했다.

그때는 힘이 없었기에…….

과거의 기억 때문일까.

클라우드의 눈에 시퍼런 귀기가 피었다.

“누가 이런 짓을 하라고 시켰나?”

메마른 음성은 지옥의 악귀가 심연에서 올라온 듯했다.

페시아는 클라우드가 왔다는 걸 알았는지 움찔거리며 몸을 떨었다.

그걸 보자 한 줄기 간신히 지탱하던 고삐가 끊어지고 말았다.

“내 것을 함부로 건드린 대가를 치러야겠다.”

우두둑.

손아귀에 힘을 주며 토레토의 목을 부러트리고 옆으로 던져 버렸다.

“헉!”

“토레토 혀, 형님을 죽였어.”

“미, 미친 새끼.”

영성회에 모인 남자들이 경악했다.

그들을 무시하고 페시아의 눈을 가린 안대를 벗겼다.

“도, 도련님…….”

“나에게 영성회가 이런 거라는 말을 왜 하지 않았느냐.”

“도련님이… 편지를 아무렇지 않게 받길래 다 알고 있으신 줄 알았어요. 흑흑…….”

페시아가 서러운지 큰 눈동자에서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자신의 사소한 행동에 이런 사단이 났다.

원주인이 개망나니였다는 걸 간과했다.

언제 또 이런 일이 발생할지 모르니.

‘주의 깊게 행동해야겠어.’

자신의 겉옷을 벗어 그녀의 알몸을 가려줬다.

“백작가로 돌아가자.”

페시아를 부축하며 걸어갔다.

자신이 움직일 때마다 남자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데리고 먼저 가 있어.”

“주군께서는?”

“내 눈이 썩어들어갈 것 같아서 말이야. 쓰레기를 전부 치워야겠다.”

“제가 하겠습니다.”

이젤라가 검을 뽑아 들려는 걸 멈췄다.

클라우드의 눈.

귀기가 피어오른 눈을 마주치니, 온몸이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잠깐 마주 본 것만으로도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살기, 그것도 잘 정련된 살기야!’

날카로운 칼날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자칫 한 발 잘못 디뎠다간 천 길 낭떠러지에 떨어진다.

‘이 정도의 살기는 상위 어쌔신이나 가능해.’

사람을 수없이 죽여 본 사람이 낼 수 있는 경지를 클라우드가 선보이고 있으니 혼란스러웠다.

“안 나가고 뭐 해?”

삭막한 음성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위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이젤라가 페시아를 부축한 채 위로 올라간 걸 확인 후 고개를 돌렸다.

“기생충 같은 새끼들…….”

남의 옆에 빌붙어 자생하며 좀 먹는 사회의 악이었다.

자신이 사파였지만, 적어도 힘없는 약자를 이용하진 않았다.

여자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질 나쁜 흑도때문에 자신이, 사파가 통틀어 욕을 먹었다.

물론 흑도보다 더 악랄한 짓거리를 일삼는 사파인도 존재했다.

그래도 모두가 나쁘진 않았다.

그저 패도를 추구하기에, 미천한 출신 성분으로 인한 오해였다.

“너희들은 아예 뿌리를 뽑아야 돼.”

푸확!

흑영심법을 운용해 바짝 세운 손날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가운데를 덜렁이는 남자를 향해 휘두르니.

목이 깔끔하게 잘리며 뒤로 넘어갔다.

그의 단검에선 피가 뚝뚝 떨어졌다.

“저, 저희가 무슨 자, 잘못이라도…….”

“사, 살려주세요. 형님… 악!”

“난 너희 같은 쓰레기들을 아우로 둔 적이 없다.”

비밀 지하 공간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비명이 난무하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소리로 가득했다.

클라우드가 움직일 때마다 사방으로 피가 튀며 바닥은 끈적한 피로 웅덩이가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