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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백작가는 때아닌 일로 시끌벅적했다.

“요즘 들어 클라우드 도련님 멋있지 않아?”

“언니도?”

“뚱뚱할 때는 못 느꼈는데, 그 차가운 눈빛에서 언뜻 내비치는 우수에 젖은 눈빛은…….”

“꺄!”

시녀들이 청소하다 말고 호들갑을 떨었다.

“어제는 이젤라님을 이겼잖아.”

“소문에는 이젤라님을 가지고 싶어서 그랬다는데 정말일까?”

“나도 들었어. 어쩜, 낭만적이야.”

어제의 일로 인해 시녀들의 오해는 점점 커져만 갔다.

“페시아가 너무 부럽다.”

“제가 페시아한테 물어볼까요?”

“뭐를?”

“도련님에 대해서 말이에요. 전담 시녀인 만큼 아는 것도 많지 않겠어요?”

“그러자, 어떤 말 할지 궁금하다야.”

시녀들이 청소도 내팽개치고 어디론가 향했다.

그녀들만이 부산을 떤 게 아니었다.

가문의 음식을 만드는 부엌데기, 정원사, 심지어 카시안 영지까지 클라우드에 대한 소문이 쫙 퍼졌다.

그와 반대로 초상집 분위기인 곳도 있었다.

이젤라가 소속된 사막의 안내자 기사단.

그들 중에서 단 한 명만 기분 좋았고 나머진 전부 죽상이었다.

“의도치 않았는데, 웬 떡이냐. 흐흐.”

기사단 모두가 이젤라에게 돈을 걸었을 때, 혼자 독박 쓴다는 각오로 클라우드에게 배팅한 티몬이었다.

마음을 착하게 먹어서 그런가.

천운이 따라 내기에서 크게 이겨 버렸다.

판돈에 걸린 돈은 티몬이 죄다 독식해 버렸다.

“이봐, 왜 너희들이 기가 죽어 있어? 술 한잔 살 테니까 나가자.”

“지금 술이 넘어가게 생겼습니까?”

“안 넘어갈 건 뭔데?”

“이젤라가 졌어요. 사막의 안내자들이 졌다고요…….”

티몬이 코를 후벼 파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게 어때서? 이젤라가 몬스터에게 사로잡힌 것도 아니고, 적국에 패배한 것도 아닌데. 우리가 모시는 주군이자, 가문의 장남인 클라우드 도련님께 졌잖아. 좋아해야 할 일 아닌가?”

기사단의 명예는 어디서 오는가.

자신들이 섬기는 주군에게서 온다.

사막의 안내자 기사단의 주군은 에드가 백작.

그의 골칫거리가 사라진 건 기사단에게 오히려 경사스러운 일이라 생각한 티몬이었다.

“이젤라를 이긴 건 요령에 불과했어요.”

“넌 대련에 목숨을 걸 수 있어? 귀족인 네가?”

“전…….”

침중해 있는 후임 기사가 대답하지 못했다.

귀족은 목숨을 소중히 여겼다.

지방 귀족의 목숨도 소중한데, 고위 귀족이라면 얼마나 귀하겠는가.

카시미르 가는 국왕의 자식만큼 존귀했다.

귀족 중의 귀족.

왕국이 존재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백작위를 놓치지 않고, 왕국이 위험하면 제일 앞장서는 가문.

순혈 귀족의 차남도 아닌 본처에게서 소생한 장남이 대련에서 목숨을 건 도박을 했다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우리에겐 골라야 할 선택지가 두 개로 늘어서 좋은 일이야.”

에드가 백작을 주군으로 받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후계자.

단일 후보에서 쟁쟁한 경쟁자가 한 명 생겨났다.

그들의 선택지가 많아진 만큼 기사들의 가치는 덩달아 높아진다.

주군이 된 자는 그들을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해 줄 것이고, 큰 명예를 안겨 줄 것이다.

“정말 클라우드 도련님이 변했다면.”

“저희에게 좋은 기회군요.”

듣고 있던 기사들의 안색이 많이 풀렸다.

“티몬의 말이 맞아.”

“좀 늦게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하면 돼.”

간혹 범의 새끼가 늑대 새끼가 될 때가 있었다.

클라우드의 경우 늑대 새끼에서 다시 범의 새끼로 돌아온 것뿐.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영광을 안겨줄 주군을 고르기만 하면 돼.”

이젤라와의 대련으로 인해 클라우드에 대한 주위의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



“으음.”

클라우드가 몸을 뒤척였다.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

마치 엄마의 품에서 잠을 고이 자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깨기 싫었지만,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수는 없기에 눈을 천천히 뜨자.

“깨어나셨어요?”

“페시아…….”

그녀가 자신의 몸을 어루만졌다.

붕대로 칭칭 감긴 상반신.

몸이 불편할 뿐, 다친 상처가 아프거나 쑤시진 않았다.

“뭐 하는 거냐?”

“사제님이 치료해 주시고 가셨는데, 저도 도움을 드리고 싶어서요…….”

그녀의 손에 하얀 광채가 흘렀다.

자신이 느낀 포근함.

그 빛이 원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마나?”

희미하고 미약하나, 분명 마나였다.

시녀인 페시아가 어떻게 마나를 쓰는 걸까.

마나를 다룬다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

그만큼 어디를 가나 대접을 받을 만한 능력인데.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거냐?”

“조, 조금이요.”

“왜 말 안 했어?”

“…….”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

각자의 사정이 있겠지.

말하기 싫은 걸 억지로 말하게 할 정도로 인정 없지 않았다.

언젠가 말해 주겠지 하고 말려다가 이내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문에 고용인으로 오기 전, 보육원에서 여사제 추천 후보였어요.”

“그런데 내 시녀를 하는 이유는?”

“제 신분이 미천했어요. 그리고 돈을 벌어야 해서…….”

마나가 미약하긴 해도, 못 쓸 정도는 아니었다.

‘사제들은 페시아보다 더 뛰어나나?’

마나가 얼마만큼 있어야 대단한 건지 잘 몰랐다.

무림에도 이류나 삼류무사는 내공을 지니고 있어도 생계를 유지하려면 온갖 잡일을 해야 했다.

‘이곳도 무림과 다를 바 없구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사이, 치료가 다 끝났다.

페시아가 한쪽에 둔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여기…….”

“이게 뭐야?”

“영성회에서 온 편지에요.”

“편지?”

‘이런 망나니에게도 편지가 온단 말이야?’

편지를 쓴 자는 원주인과의 관계된 사람일 터.

자신과는 상관없는 사람이 보낸 편지라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안 봐도 괜찮아. 거기에 둬.”

“네.”

자신을 걱정하고 있던 그녀의 표정은 왠지 모르지만 금세 시무룩해져 있었다.

그러다 뭔가 결심했는지.

“저…….”

말을 하려는 때에 문을 열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아들이 걱정되서 다시 찾아오신 건가.

‘하여튼, 원주인 녀석은 복도 많아.’

밑바닥 인생부터 살아온 자신과는 다르게 주위에 걱정해 주는 사람이 많아 부러웠다.

에드가 백작이 육중한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철썩!

자신이 반응하기도 전에 고개가 돌아갔다.

빨개진 얼굴.

왼쪽 뺨이 달아올랐다.

“너는 나가 있어라.”

에드가 백작이 토끼 눈을 뜨고 있는 페시아를 향해 말했다.

그녀는 걱정 가득한 표정을 하며 방을 나갔다.

“무슨 짓입니까?”

“물라서 묻는 게냐?”

“모릅니다. 이유나 알고 맞았으면 덜 억울할 텐데요.”

속으로 화를 가라앉혔다.

그래도 아버지였다.

화가 난다고 다짜고짜 덤벼 들 수 없지 않는가.

에드가 백작의 눈을 또렷이 봤다.

얼마나 화가 나 있으면 그의 눈가에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젤라와 대련했다고 들었다.”

“맞습니다.”

“그 대련에서 단검을 사용했다는데, 참말이냐?”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자 에드가 백작이 버럭 소리쳤다.

“왕국의 방패인 우리 카시미르 가에서 비겁하고 저열한 어쌔신이나 쓰는 단검을 사용했단 말이냐!”

클라우드는 그의 말의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도 에드가 백작은 다를 거라 생각했다.

한 가문을 짊어지고 있었기에 견문이 넓을 줄 알았건만, 기사들과 똑같이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검을 잘 쓴다면 단검도 필시 잘 쓸 것이다.

창을 잘 휘두른다면 단검 또한 잘 다룰 것이다.

활과 마법도 마찬가지.

모든 무기는 하나였다.

그저 사람을 죽이는 도구에 불과했다.

“단검을 사용하면 비겁하고 저열합니까?”

“어쌔신이라도 되려는 것이냐?”

“그러면 안 됩니까?”

에드가 백작이 계속해서 살수.

이곳의 언어로 어쌔신을 안 좋게 보자, 가슴에 일어난 불길을 주체할 수 없었다.

과거 수십 년 동안 해 온 것들이… 어떤 적도 적수가 되지 못해 모든 걸 초월하고 은거한 기간이 전부 부질없게 느껴졌다.

자신의 본질이 부정당하고 말았다.

“망나니로 살아도 봐주었다. 정신을 차린 것 같아 기뻤다. 그런데, 영성회란 같잖은 대장 놀이에 빠진 것도 모자라, 이젠 어쌔신 흉내를 내? 정녕 애비를 이렇게까지 실망시킬 작정인 게냐?”

‘어쌔신이 되면 가문의 명예가 떨어지는 건가?’

그도 아니면 검이 최고라 자부하는 기사들이 불만이라도 품나?

무림에서는 무공이 강하면 모든 게 용서가 됐다.

그런데 여기선 그게 통용되지 않는 건가.

에드가 백작은 자신의 할 말을 마치고 방을 나가려다가 도로 멈췄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한 달 뒤에 있을 생일에 맞춰 율리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돌아온다. 그때까지 잠자코 근신하도록.”

쾅!

그가 문을 거칠게 닫고 나가버렸다.

‘이 몸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어.’

왕국을 넘어.

제국의 기사들에게 보여줄 것이다.

어쌔신의 극의에 다다른 이가 어떤 식으로 기사를 제압하는지.

똑똑히 뇌리에 새겨줄 것이다.

‘밤의 무서움이 어떤 공포인지 각인시켜주겠어.’

그때도 단검을 든 어쌔신을 하찮게 보는지 두고 볼 생각이었다.

‘그보다 율리라…….’

원주인의 기억 속에서 유일하게 좋은 기억이 남아 있는 인물.

항상 밝게 웃어주며, 클라우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동생.

그런 동생이 돌아온단다.

‘보고 싶었는데, 잘됐어.’

율리가 돌아오면 백작 부인도 함께일 터.

그녀에게 확인할 것도 있었으니 잘됐다.



***



근신 처분이 내려진 지 이틀이 지났다.

클라우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밥 먹고 자고, 수련하는 게 전부였다.

‘허억… 귀신이 허억… 되야한다.’

그가 펼치고 있는 건 부운귀보.

이젤라를 상대로 버틸 수 있던 건, 다 이 보법 때문이었다.

암살자는 속도가 관건.

암습을 하는데 누군가가 눈치를 채면 그건 실패나 다름없었다.

자신이 펼치는 보법을 좀 더 빠르고 정확하게 펼치기 위해 반복에 반복을 더했다.

이미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보법을 멈추지 않았다.

한계까지 몰아친 지금이야말로 집중력이 절정에 다다를 그때였으니까.

“허억, 허억…….”

자신이 움직일 때 땅에 떨어져 있는 돌들이 들썩이지 않았다.

걸은 흔적이 전혀 남지 않은 움직임.

공중을 부양하는 듯한 걸음걸이.

귀신이라고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한 움직임이었다.

‘이대로 계속한다면 삼성은 넘을 수 있겠어.’

흑영심법 이(二)성 끝자락에 부운귀보 삼성 중반.

한 달 만에 이룬 성과치곤 엄청났다.

조만간 두 개 다 한 단계는 도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무후무한 발전 속도였다.

“조금만 허억… 쉬어야겠어.”

한계까지 몰아붙였더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하체 단련을 해 놔서 이 정도지 아니었으면 이미 쓰러지고 남았다.

“페시아가 오늘은 없군.”

바닥에 주저앉으며 페시아를 찾았다.

항상 수련하는 내내 자신을 지켜보던 그녀였다.

무슨 일인지 오늘은 연락도 없이 오지 않았다.

혹시나 아픈가 하고 다른 시녀에게 물어보려고 했는데 관뒀다.

자신이 찾았다는 말을 듣기라도 한다면 페시아의 성격으로는 아파도 쉬지도 못하고 바로 올 수도 있었다.

‘이참에 쉬라고 놔두는 게 좋겠어.’

그래서 다른 시녀에게 그녀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앉아서 조금만 더 쉬고 일어나려는 찰나.

인적이 드문 연무장으로 갑주를 찬 기사가 다가왔다.

“이젤라가 여긴 어쩐 일이야?”

“약속을 지키러 왔습니다.”

“아∼ 내가 내기에서 이겼지?”

이젤라는 전과 같이 반응하지 않았다.

묵언 수행하는 소림사 스님마냥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러니 재미가 없네.’

반응이 커서 놀리는 맛이 있었는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좋아, 내가 원하는 요구는 뭐든지 들어준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몸을 요구해도?”

“당신이 원한다면…….”

막간에 농담조로 던진 말이지만, 이젤라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무서워서 농담이나 하겠나.

클라우드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카시미르 가의 장남 클라우드 카시미르는 이젤라를 전속 기사로 임명한다. 그대의 영광은 내 영광이고 그대의 명예는 내 명예가 될 것이다. 서약을 다짐하느냐?”

기사와 주군의 서약.

주군이 죽기 전까지 기사는 따라야 했다.

명예가 땅에 떨어지든, 태양을 비추든.

기사의 서약은 물릴 수 없어, 한 번이 중요했다.

이젤라가 멍한 얼굴로 있다가 자세를 바로 잡았다.

무릎을 꿇고 검을 빼어 역수로 잡아 땅에 꽂으며 고개를 숙였다.

“수습기사 이젤라, 카시미르 가의 장남 클라우드 카시미르께 충성의 서약을 다짐합니다.”

클라우드가 허리를 굽히며 검 손잡이에 포개진 이젤라의 손에 입을 맞췄다.

엄숙한 의식이 끝났다.

이로써 이젤라는 클라우드의 전속 기사가 되었다.

어색한 분위기.

고요함 속에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클라우드였다.

“배고픈데 밥 먹지 않겠나?”

서약한 기사에게 한 첫 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