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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이른 새벽부터 웃통을 벗고 연무장을 뛰는 이가 있었다.

탄탄한 근육에 특이한 백발 머리.

클라우드 카시미르였다.

그는 벌써 열 바퀴째 돌고 있었다.

다리에 경련이 일지 않은 것은 한 달 동안 꾸준히 달린 결과.

살에 파묻혀 보이지 않은 턱은 제법 날카로웠다.

“언제까지 이렇게 뛰실 거예요?”

페시아는 한 달 동안 같이 붙어 있어서 그런지, 예전처럼 자신을 무서워하는 기색이 많이 사라졌다.

“안 그래도 이제 다른 수련을 할까 해. 단검을 구할 수 있나?”

“단검이요?”

“응, 투척술을 익힐까 하고.”

그녀는 많이 놀랐는지, 안 그래도 큰 눈동자가 더욱 커졌다.

“검술을 안 익히시려고요? 주인님이 아시면 큰일 나셔요.”

“검에는 흥미가 영, 재능도 없어.”

“정말 혼나실 텐데…….”

그녀가 작게 중얼거리다가 가문의 무기고로 걸어 갔다.

사실 재능은 차고 넘쳤다.

클라우드의 몸에 들어오고 수련을 하면서 알았다.

이 녀석은 엄청난 재능의 소유자라는 것을.

한 달 동안 붙은 근육과 심법의 유동 경로가 아주 자연스러웠다.

딱 떨어진 톱니바퀴처럼 육체와 심법이 잘 맞았다.

원래부터 하나인 듯 말이다.

‘무림의 잘난 후기지수들도 이 정도의 신체는 가지고 있지 않았어.’

재능이 차고 넘친다는 걸 완전히 알게 된 건 보법 수련부터다.

솜이 물먹듯, 자신이 생각한 대로 몸이 반응해 모든 걸 빨아들이고 습득했다.

몸이 안 따라주고 헤맬 법도 한데, 수월하게 익혀 나갔다.

‘동생인 율리보다 재능이 없는 게 아니라, 흑마법에 걸려 마나 하트를 연성하지 못한 거야.’

카시미르 가문은 명망 높은 기사 가문.

장남이 기사가 되지 못한다면 어떤 말이 나올까.

원주인은 마나 하트를 못 익힌다는 절망감과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망나니가 된 것이다.

이제는 그런 걱정 없으니, 검술을 익힐 법도 하지만.

‘나에게는 비도술이 있으니까.’

굳이 검술을 새로 익힐 필요가 없었다. 자신에게는 암천제였을 때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이 한 달가량 수련하면서 꽤 재밌었다.

무공을 다시 배운다는 것.

이미 한번 겪은 경지를 다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가면서 오른다는 게 흥미로웠다.

자신의 무공이 이 세계에서 얼마나 먹히는지 알고 싶었다.

뿐만 아니라 양지에서도 살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최근 한 달 동안은 그런 생각을 잊고 살았다.

초심.

오직 무공을 다시 익히는 즐거움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어정쩡한 보법을 떠올리는 것만 해도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생각난 김에 보법 연습 좀 해야겠어.”

클라우드가 발을 놀렸다.

그가 펼친 보법의 이름은 부운귀보(浮雲鬼步).

구름을 타고 걷는 귀신이라는 뜻으로 한 번 펼치면 소리 소문 없이 상대방에게 접근할 수 있는 보법이었다.

‘아직 미숙해.’

움직일 때 나는 작은 옷깃 소리, 발에 스쳐 돌멩이가 굴러가는 소리, 바람에 피부가 닿은 소리.

거슬리는 게 많았다.

숙련도가 낮아 그런 거겠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미 걸어 본 길이었다.

이 정도로 멈춰서면 안 됐다.

보다 정확하고, 간결하게.

어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끔 움직일 수 있어야 했다.

‘모든 신경을 발끝에 집중한다.’

연무장에 널려 있는 작은 돌멩이 사이로 움직였다.

온전히 발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에만 의지한 채.

지렁이가 꾸물거리며 움직이듯 부운귀보를 펼쳤다.

또르륵.

발에 돌멩이가 채였다.

그 순간 집중이 흐트러지려는 걸 바로 잡았다.

‘다시.’

밟던 보법을 멈추고 처음부터 다시 펼쳤다.

또륵.

이번에도 돌멩이가 발끝에 스쳤다.

전보다는 굴러가는 소리가 희미했다.

발에 돌이 닿는 순간 보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반복에 반복을 거듭했다.

‘이번엔 느낌이 좋아.’

지금의 집중력이라면 연무장을 가로지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클라우드의 발아래에 안개가 끼듯 희미한 연기가 생겼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됐다!’

부운귀보의 이(二)성을 달성하면 생기는 현상.

극성으로 펼치면, 말 그대로 귀신의 움직임을 선보일 수 있다.

내공 운용을 멈추니, 발아래에 희미하게 있던 연기가 아예 사라져 버렸다.

때마침 페시아가 단검을 구해왔다.

“오랜만에 잡아 보네.”

한 손에 쥐어 지는 손잡이의 감촉.

작고 날카로운 날.

가벼우면서 누군가를 몰래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최고의 무기다.

휘리릭― 척.

습관적으로 단검을 위, 아래로 던졌다가 받았다.

그럴 때마다 단검이 손에 착 감긴다.

그 모습을 본 페시아가 탄성을 질렀다.

“정말 대단하세요. 꼭 묘기를 부리는 곡예사 같아요.”

“이걸로 감탄하긴 이르지.”

클라우드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무언가를 찾았다.

‘어디 보자, 던질 과녁이 어디에 있더라?’

꼭 어린아이가 잘하는 걸 엄마에게 자랑하는 것 같았다.

한쪽 연무장에 나열된 목각 인형을 발견했다.

“잘 봐. 신기한 걸 보여줄 테니까.”

“넵!”

페시아의 눈이 반짝이며 자신의 단검에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차분하게 숨을 내쉬면서 손에 든 단검을 목각 인형을 향해 던졌다.

휘익―

바람 소리를 가르며 단검이 일자로 날아갔다.

페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자신을 쳐다봤다.

“그냥 투척술 아니에요? 막 신기하지 않는데….”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그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어, 어? 단검이.”

일자로 날아가던 단검이 포물선을 그리면서 표적으로 정한 목각 인형이 아닌 제일 뒤편에 있는 목각 인형의 중심부를 맞췄다.

퍽!

“와.”

“거기를 맞추려던 게 아닌데, 연습이 필요하겠어.”

원래 맞추려던 목표는 뒤편 목각 인형의 심장 부위.

연습도 하지 않고, 페시아에게 재미난 걸 보여주려는 마음에 의도치 않게 목각 인형의 중심부를 맞췄다.



***



한달이라는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이젤라와 내기한 시일.

백작가의 제3연무장에선 기사들이 재미난 구경이라도 난 것처럼 벌 때같이 모여 있었다.

“드디어 오늘 첫째 도련님이 무릎 꿇고 비는 걸 보는 거야?”

“근래 열심히 수련했다는데요?”

“수련 해 봤자지. 말이야 수습기사지만, 이젤라는 오러를 다루잖아. 절대 질 리가 없어.”

클라우드가 이긴다는 의견은 전혀 없었다.

모두가 이젤라의 승리를 장담했다.

“이러면 내기할 맛이 안 나는데.”

“에라, 내가 혼자 독박 쓸 테니까, 너흰 이젤라한테 걸어.”

“오! 티몬 형님 그렇게 안 봤는데, 첫째 도련님한테 돈을 거는 용자시구만요.”

기사들이 껄껄 웃었다.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을 때 클라우드와 페시아가 연무장으로 왔다.

‘눈을 후벼 파버릴까?’

그가 대놓고 적의를 들어내는 기사들과 눈이 마주쳤다.

요즘 들어 수련에 몸이 달아오른 상태.

모든 걸 초탈한 늙어 빠진 백운기가 아닌, 젊었을 적 투기로 가득한 자신이었다.

조금만 건드려도 터질 만큼 고조되어 있었다.

“도련님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이곳에는 기사들만이 아니고, 백작가의 고용인들이 죄다 모인 것 같았다.

넓디넓은 연무장에 사람이 꽉 들어찬 걸 보니.

“저들이 의도했겠지.”

기사들을 봤다.

그들은 자신을 보며 히죽이고 있었다.

그동안 기사의 자긍심을 짓밟고 무시한 걸 빨리 와서 무릎 꿇고 우리에게 사과하라는 무언의 소리였다.

‘나야 관객이 많을수록 좋지.’

저들의 반응은 자신에게 전혀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대련에서 이길 사람은 자신이었으니까.

저들이 기대하는 건 추호도 일어나지 않을 테다.

연무장 가운데로 가서 이젤라에게 말했다.

“준비됐나?”

“전 오래전에 준비 끝났습니다.”

“바로 시작하자.”

클라우드가 무기도 없이 대련을 시작하려 하자, 그녀의 눈이 꿈틀거렸다.

“지금 무기도 없이 대련하시려는 겁니까?”

“무기가 없다니. 여기 있지 않나?”

그가 등 뒤에서 작은 단도 하나를 꺼냈다.

이에 이젤라의 표정이 굳어졌다.

“수습기사인 저를… 끝까지 모욕하시는 거군요…….”

그녀의 떨리는 음성에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

“무시? 단검도 검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죽이는 무기다. 네가 이 단검을 무시하는 거겠지.”

말에 싸늘함이 물씬 풍겼다.

이 세계 사람들은 검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다.

기사들이라서 그런가.

그들이 검에 유독 집착을 보이니, 한편으로는 편협해 보이기까지 했다.

무림에서도 만병지왕을 검이라 칭하는데, 적어도 단검을 쓴다고 무시한 적은 없었다.

저들의 콧대를 꺾어 줄 생각이었다.

“시작 안 할 건가?”

클라우드가 이젤라를 향해 비웃음을 보이면서 단검 손잡이 끝 동그란 부분을 손가락에 끼워 돌렸다.

한껏 여유로운 모습.

빈틈투성이인 모습은 명백히 이젤라를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이에 격분한 나머지 그녀가 검을 뽑지도 않고 땅을 박찼다.

“저를 무시한 대가를 톡톡히 치루 게 해드리겠습니다.”

“기대하마.”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의 앞에 다다른 이젤라.

그녀가 최대한 몸을 숙이고 옆구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그대로 위로 그을려고 했다.

‘발검? 멍청하군.’

사람들은 발검술을 칼집에서 칼을 꺼낼 때의 반동으로 펼치는 쾌검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었다.

오히려 암살이나, 기습에 대비해서 만들어진 것이지.

선공을 취할 때는 힘이 현격하게 낮아서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냥 검집에서 빼 휘두르는 게 훨씬 빠르고 강했다.

철컥!

소리가 나며 이젤라의 눈이 커졌다.

자신의 손이 검의 손잡이를 꾹 눌러 발검술을 저지했기에.

“이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겠지?”

그녀가 손에 힘을 줬지만, 검은 꼼짝도 하지 않고 검집에서 나올 생각을 안 했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그녀가 발로 몸을 가격해 왔지만, 자신은 이미 뒤로 물러난 후였다.

주위가 술렁였다.

“이젤라가 검도 못 꺼낸 거 맞죠?”

“우연이야. 우연.”

이젤라는 수치심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익!”

선임 기사들이 보고 있었다.

기사를 모욕하고 심지어 무기의 정점인 검을 고작 단검 하나로 상대하려는 자다.

그런 사람을 상대로 검도 빼보지도 못하고 당하면, 기사단의 일원으로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다.

그녀는 클라우드를 처음부터 강하게 압박하기 위해 검에 마나를 담았다.

푸른빛이 감 돔과 동시에 이전보다 더 빠르게 그를 향해 돌진했다.

‘지금부터다.’

클라우드는 도발에 성공하긴 했으나, 진짜는 지금부터라 생각했다.

검에 담긴 오러.

무림에서는 내공이라고도 불리는 기가 담겨 있었다.

깡! 까가가강!

단검과 검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마찰에 의해 불꽃이 튀며 순식간에 다섯 합이 지나갔다.

그녀의 손은 쉬지 않고 움직이며 클라우드의 허점을 놓치지 않으려는듯 집요하게 공격했다.

‘으윽, 점점 밀려.’

여자인데도 느껴지는 힘이 대단했다.

한 달간의 수련.

헛되지 않았으나 이젤라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렇게 버티는 것도 사선을 수천 번 넘은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번엔 하단이냐.’

상단을 집요하게 노리다가, 이젠 하단을 노렸다.

단검으로 하단을 막으려면 허리를 숙여야 했고, 그 결과 머리가 텅 비어 버린다.

쉬익―

하단을 공격한 검이 경로를 바꾸며 머리를 향해 찔러갔다.

이젤라는 자신이 이겼다는 생각에 미소를 지었다.

그걸 본 구경꾼들이 경악성을 토해 냈다.

“헉! 이젤라 저 미친년. 정말 도련님을 죽이려고 작정했어.”

“그래도 그렇지 뒷감당은 어쩌려고 저래?”

하나같이 이젤라를 걱정하는 사람들 뿐.

클라우드를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단 한 명 있었다.

페시아만이 클라우드의 위기에 비명을 질렀다.

“안 돼!”

푸욱!

검이 틀어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젤라는 떨리는 눈으로 클라우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 어째서?”

“지금의 내 실력으로 널 이길 방법은 이것밖에 없으니까.”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사실 그녀의 검을 겨드랑이에 끼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심장을 비껴가고 어깨에 박혔다.

최대한 내공으로 몸을 보호했음에도 통증에 정신이 아찔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단검은 어디 있냐.

바로 그녀의 목 언저리 부분에 있었다.

그 덕분에 입고 있는 고급스러운 비단 옷은 피로 물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오러가 담긴 검의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단검이 부러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부러졌다면 입장은 정반대가 됐을 터.

“내기는 내가 이긴 건가?”

주위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페시아가 뭐라고 소리치는 게 들렸다.

한데 그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이젤라의 목소리는 뚜렷하게 들렸다.

“제가 졌…습니다.”

이젤라가 패배를 시인하자, 곧바로 몸을 돌렸다.

눈앞이 흐려져서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았다.

여기서 쓰러질 수 없어 재빠르게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순간.

“도, 도련님!”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