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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이젤라와의 내기.

그리고 변경된 룰.

그건 어디까지나 원주인 클라우드의 생각이었다.

‘이 세계에 적응을 해야한다.’

더불어 에드가 백작에게 말한 것처럼 자신을 노린 암살자를 손수 처리하기 위해선 힘이 필요했다.

이를 위한 첫 번째 목표가 이젤라가 된 것뿐.

그보다 제일 큰 이유는 다른 거에 있었다.

‘과연 이곳에서도 내 무공이 잘 통하냐 이거지.’

궁금했다.

다른 세계에서도 무공이 통할지.

만약 그렇다면 어느 선까지 먹히고, 무림에서 정점을 찍은 자신이 이 곳에서도 최고가 될 수 있을지 말이다.

‘대련이 기대되긴 오랜만이야.’

무공을 처음 배운 시절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그때는 이런 설렘 가득한 일은 없었지만, 무언가에 도전한다는 건 언제나 짜릿했다.

철컥!

“도, 도련님 식사하세요.”

시녀인 페시아가 쟁반을 가져와 스튜를 내밀었다.

소고기를 큼직하게 썰어서 감자, 당근과 같은 채소가 어우러진 음식.

맛있는 향기가 코를 자극해 입에 침이 고였다.

그런데 그녀가 스튜를 떠서 자신의 입으로 가져왔다.

“뭐냐?”

“이, 이래야 드신다고…….”

“됐다, 혼자 먹으마.”

클라우드가 그녀에게서 숟가락을 건네받아서 한입 베어 물었다.

여러 야채와 함께 어우러진 고기의 맛이 일품이었다.

스튜를 먹는데. 시선이 느껴져서 옆을 보니 멍하니 서 있는 페시아가 보였다.

“넌 왜 계속 거기에 서 있어?”

“다, 다 드시고 그릇을 가져가려고…….”

그녀가 잔뜩 주눅이 든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말하자 보는 자신이 더 답답했다.

“말 좀 더듬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아, 네.”

“목소리도 잘 안 들리니까 크게 해.”

“네.”

여전히 작은 목소리였다.

짜증이 올라왔지만, 손을 휘휘 저으며 나가라는 시늉을 하자, 페시아가 문을 열고 방을 나갔다.

“하, 이 망나니로 살기 힘드네.”

눈을 뜬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주위의 시선 때문에 너무 피곤했다.

그리고 어린 손녀뻘인 그녀가 자신을 무서워하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이럴 때는 내공을 운용하는 게 제격이지.”

내공은 심신을 편안하게 해 주고 피곤함을 없애 주는 효과도 있었다.

클라우드가 침대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백작의 부름에 중단했던 심법을 운용했다.

단전에서부터 혈맥을 타고 흐르는 기를 관조했다.

‘내공이 단전에 자리 잡지 못하고 헛돌고 있어.’

왜 이럴까…….

설마 이 세계에서는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내공도 움직이지 않아야 할 텐데, 그건 또 아니었다.

기가 그저 단전에 똬리를 틀지 못하고 있을 뿐…….

심법을 운용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후욱, 후욱.”

들숨과 날숨을 반복했다.

배꼽 아래인 단전과 심장, 머리 부분에서 미세하게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 있었다.

계속해서 심법을 운용한 결과.

단전이 좀처럼 자리 잡지 못하고 헛도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둡고 침침한 기운이 심장과 머리, 그리고 배 부분에 금제를 가하고 있어. 이것 때문에 내공이 자리를 잡지 못해.’

심장과 머리 부분은 지금으로선 뚫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곳은 배꼽 아래.

이곳을 뚫지 못하는 한 내공이 똬리를 틀지 못한다.

클라우드는 기를 쓰고 심법을 돌렸다.

시간이 지나자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던 땀방울이 턱으로 주르륵 흘렀다.

느낌이 상쾌했다.

창문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와 나무가 흔들리며 잎사귀들이 부딪히는 소리, 고용인들이 밖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까지.

너무도 잘 들렸다.

그렇게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길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순간 눈을 뜬 클라우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여기서 끝인가.”

금제 때문인지 결국 내공이 자리 잡지 못했다.

몸에 자리 잡은 어둡고 음침한 기운을 무리하게 건드리다가 자칫 폐인이 될 수 있어 그만 멈췄다.

“운공을 하고 이렇게 땀을 흘린 것도 오랜만이군.”

가부좌한 아래, 침대 시트는 노폐물로 검게 물들어 있었다.

구린내가 몸에서 진동했다.

심한 악취에 목욕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클라우드는 페시아를 불렀다.

“페시아, 거기 있느냐?”

문을 열고 그녀가 들어오는데 안색이 심상치 않았다.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픈가?”

“그, 그게 아니고… 걱정이 돼서.”

“누가 걱정돼?”

“도련님이…….”

“내가 왜?”

“하루가 훨씬 지났는데, 방에서 안 나오셨어요…….”

운공에 빠져 하루를 훌쩍 넘기다니.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몰랐구나.”

그녀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토록 걱정해 주는 이가 있던가.

적들은 자신을 무서워하고, 부하들 또한 어려워했다.

암천제의 강함을 아는 자들은 누구도 그에게 걱정이란 감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남의 몸에 영혼이 들어와서 이상하게 감상적이 됐어.’

가슴에 느껴보지 못한 낯선 감정이 올라왔다.

누군가를 죽이고 미안한 마음이 든 적이 없었다.

지인이나 수하가 죽어도 슬픈 감정이 들지 않았다.

무림에 공포로 군림한 암천제에게 그런 감정은 사치에 불과했다.

그런데 백운기로 느낄 수 없던 걸 클라우드가 되고 나서야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느낌… 썩 나쁘지 않아.’

그가 손을 페시아로 향해 손을 뻗자 그녀가 몸을 움찔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반응을 보니 머리를 만지기가 망설여 져 다시 손을 내렸다.

그걸 본 페시아는 더욱더 안절부절못했다.

“난 괜찮다.”

“네…….”

원주인이 얼마나 그녀를 못살게 굴었으면 아무것도 아닌 행동에 이런 반응을 할까.

점점 더 원주인이 괘씸하다고 생각했다.

페시아가 무안해하자.

“걱정해 줘서 고맙구나.”

“제, 제 일인걸요.”

뜻밖의 말에 그녀의 눈이 커졌다.

그의 전생에 한 번도 하지 않던 말.

입에 달라붙지 않아 말하고는 쑥스러운 나머지 화제를 돌렸다.

“배가 고프다. 내가 목욕할 동안 음식과 침대 시트를 갈아 줘.”

“넵!”

그녀가 씩씩하게 말하곤 후다닥 방을 나갔다.

클라우드는 그녀가 준비해 준 목욕물로 깨끗이 씻고 왔다.

그사이에 침대 시트는 새것으로 갈아져 있었다.

침대 옆에는 전과 똑같은 식단인 스튜가 놓여 있었다.

“주인님께서 꼭 챙겨 드시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버지란 말이 입에 달라붙지 않았다.

‘여기서 살아가려면 아버지란 말이 잘 나와야 할 텐데.’

‘마주치면 어색하니 당분간은 피해 다녀야겠어. 그보다 망나니는 복에 겨웠군.’

녀석은 원망을 산 인물들이 정말 많았다.

죽이고 싶어 하는 자가 수두룩했으나, 반대로 그를 챙겨 주는 이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페시아와 에드가 백작.

페시아는 클라우드를 두려워하면서도 시녀가 해야 할, 본분을 잊지 않고 행동했다.

에드가 백작은 어떤가.

가문의 가주가 아들의 음식까지 손수 챙겨준다.

개망나니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부성애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기대에 부응해줘야지.’

망나니와 같은 나이 때 밑바닥 인생을 산 백운기였다.

이런 대접은 무림을 지배하던 시절에나 받았다.

그것도 자신들이 목숨을 부지하려고 없는 마음을 끄집어다가 받쳤다.

그런 작자들과는 다르게 두 사람은 아무 조건 없이 베풀었다.

그저 에드가 백작이 바라는 건 아들이 정신을 차리는 것.

그뿐이었다.

페시아가 준비해 준 스튜를 한입 먹었다.

“응?”

“맛이 없으세요?”

“아니다.”

다시 한입 먹었으나 똑같은 맛이 났다.

전에 먹은 스튜는 맛이 있지만, 지금처럼 입안에 달콤한 향이 퍼지지는 않았다.

‘지금은 먹을 때마다 활력이 돋는 것 같아.’

특별한 향신료나 약재료가 들어간 건가.

당장이라도 나가 연무장을 뛰라면 몇 바퀴고 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말 나온 김에, 페시아에게 물었다.

“가문에 아무도 안 쓰는 연무장 있나?”

“연무장은 왜……?”

“당연히 수련 아니겠어?”

그녀가 이번에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한 말이 저런 반응을 보일 정도의 일인가?

“아무도 안 쓰는 연무장이 하나 있어요.”

“안내해 줘.”

페시아의 안내를 받고 온 연무장은 이전에 기사들이 훈련하던 공간의 두 배 크기는 되었다.

“카시미르 가가 부자는 부자인가 보군.”

그가 곧바로 몸을 풀었다.

무공의 기본은 하체에서 나온다.

특히 살수에게 보법과 신법은 동아줄임으로 하체의 근력을 기르는 건 굉장히 중요했다.

물 흐르듯 움직이는 보법은 잘 발달 된 하체의 유연한 근육에서부터 나오니까.

“그럼 뛰어 볼까?”

몸을 다 푼 클라우드가 연무장을 뛰기 시작했다.

한 바퀴, 두 바퀴.

연무장이 커서 그런지.

“허억… 허억…….”

숨이 금방 가빠왔다. 온몸에 땀이 줄줄 흐르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게 정상은 아니었다.

‘시발, 이 빌어먹을 몸뚱이는 어떻게 된 거야?’

스튜를 먹고 활력이 넘쳐흘렀다.

그런데 막상 연무장을 뛰어보니, 열 바퀴는커녕 두 바퀴째에 숨이 턱 막혀 왔다.

비대한 뚱땡이가 아니어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내 오산이었어.’

이젤라와의 내기 잘 할 수 있을까.

마음이 약해진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꽤 길지만, 이 몸뚱이로는 절대 이젤라를 이기지 못한다.

실전의 경험?

수만을 넘게 죽여 본 살수의 본능?

‘무공이 통하는지 알기도 전에 이젤라에게 패하겠다.’

죽기 살기로 수련하지 않으면 질 것이다.

“도련님, 물 드릴까요?”

“고맙다.”

페시아에게 물을 받아 들고 꿀꺽꿀꺽 삼켰다.

“캬, 물맛 한 번 좋군.”

물이 목을 넘어가는 시원한 느낌에 살 것 같았다.

격렬한 운동 후에는 물이 어떤 음식보다 맛있었다.

“힘드실 텐데 들어가 쉬시겠어요?”

“두 바퀴밖에 안 돌았는데 더 해야지.”

잠시 쉬던 클라우드는 일어나 다시 연무장을 돌기 시작했다.



***



“이, 이럴 수가!”

클라우드는 기사들에 의해 방으로 실려왔다.

어느 정도 쉬었다고 생각해 다시 달렸지만, 이번에는 연무장의 반도 돌지 못하고 발에 경련이 일어나 쓰러지고 말았다.

“아니, 안 하던 운동을 왜 하고 지랄이야?”

“에휴, 기억을 잃으니까 별짓을 다하네.”

“쉿! 조용해. 다 듣겠다.”

클라우드의 귀로 기사들이 빈정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고작 연무장 두 바퀴 반을 돌고 쓰러지다니.’

치욕스러웠다.

무공을 배우기 전 밑바닥 인생을 살았을 때도 연무장을 돌다가 경련이 일어난 경우는 없었다.

“괜찮으세요?”

“혼자 있고 싶다.”

이런 상황을 겪게 한 원주인을 찢어 죽이고 싶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를 악물고 버티던 자신이.

천하의 암천제가.

수련을 포기한 것도 모자라, 기사들에게 의해 끌려오다시피 왔으니.

‘정파의 검왕이나 활불이 보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들이 봤으면 배를 붙잡고 비웃었을 게 뻔했다.

“그러면 편히 쉬세요.”

페시아 마저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그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얼굴을 들 수 없구나.”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다.

두 번 다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우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하체 단련을 할 수 없으면 심법이라도 하자.”

혹여 주화입마에 걸릴까 봐 무리하게 수련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냥 누워만 있을 수 없는 일.

한 달 후 이젤라와의 대련이 있다.

그리고 언제 자신을 공격한 암살자들이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

에드가 백작이 다스리는 영지에서 가문의 장남을 죽이려는 이들이었다.

‘자택이라고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어.’

내공이 있어야만 안심할 수 있었다.

다른 세계에서 눈을 뜬 지금,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