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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에드가 백작이 있는 본관 서재.

클라우드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백작은 서재로 그를 불렀다.

“백작님, 클라우드 도련님을 데려왔습니다.”

“들여보내게.”

철컥.

문이 열리고 클라우드가 안으로 들어갔다.

고풍스러운 서재에 책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 앞에는 책상에 앉아 있는 에드가 백작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자신의 얼굴과 덩치가 어디서 나왔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백작도 산적 수염 말고는 잘생긴 축에 속했으니까.

“…….”

그는 아버지 앞에서 눈만 끔뻑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드가 백작이 클라우드를 멀거니 쳐다보다가 이내 먼저 말을 하며 정적을 깼다.

“넌 애비를 보고도 인사할 줄 모르느냐?”

타인에게 고개를 숙인 게 언제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암흑의 제왕으로 군림해 온 자신이 고개를 숙이기란 쉽지 않지만…….

“안녕하셨습니까.”

“……?”

에드가 백작의 앞에 서니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기운을 뿜어내는 것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대화였다.

그런데 자신의 머리와 마음은 따로 놀았다.

‘아마도 원주인의 기억 때문이겠지…….’

자신의 아버지는 아니더라도 원주인 클라우드 카시미르의 아버지였다.

녀석은 눈앞에 있는 작자를 무서워했다.

처음 그를 봤을 때처럼 심장이 가만있질 못하고 미친 듯 요동쳤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해 봤다. 이곳은 이전에 살던 곳이 아니고, 지금의 자신은 나약했다. 그렇다면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한번쯤은 고개를 숙이는 게 맞는 듯 했다.

한데 백작의 표정을 보니 뭐가 잘못된 듯싶었다.

“어디 아프냐? 아직 정신이 온전치 못한 모양이구나.”

백작이 턱수염을 매만지면서 자신을 살폈다.

“괜찮습니다.”

“흠, 그러면 이번 일에 대해서 물으마.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삐뚤어지게 행동하느냐?”

조곤조곤 말하면서도 말투에는 근엄함이 뚝뚝 묻어 나왔다.

‘클라우드는 왜 망나니짓을 했을까?’

한쪽 구석에 있는 기억의 파편을 끄집어냈다.

많은 장면이 눈앞으로 스쳐 지나가고, 곧 몇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마나 하트란 걸 연성할 수 없어서 엇나간 거였어. 자신과는 다르게 동생은 재능이 뛰어났고. 이런 한심한 새끼를 봤나.’

기사에게 마나 하트는 생명과도 같았다.

오러를 방출하기 위한 동력 기관.

그렇기에 마나 하트를 연성할 수 없으면 기사가 되지 못한다.

카시미르 가문은 매 세대마다 검성이라 불리는 인물을 배출하는 검의 명가.

지금은 비록 베로나 백작에게 그 명성을 뺏겼지만, 언젠간 꼭 되찾아야 했다.

검의 명가에서 기사가 될 수 없다는 건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을 터.

하지만 자신은 원주인처럼 패배자가 아니었다.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혹, 정신을 차리고 기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수련하겠다는 말이냐?”

에드가 백작은 내심 기대를 했다.

“비슷합니다.”

“비슷하다라… 도움이 필요하느냐?”

“괜찮습니다, 혼자 할 수 있습니다.”

“하하, 알았다. 네가 결심했다니, 다행이구나. 행여나 도중에 포기할 생각이면…….”

“그럴 생각 없습니다. 할 말 다 하셨으면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클라우드가 되기로 마음먹은 백운기가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가려는 그때.

“애비한테 다른 부탁은 없느냐?”

에드가 백작이 그를 불러 세웠다.

“무슨 부탁 말입니까?”

“가령 너를 공격한 암살자로부터 보호해 달라느니, 잡아서 죽여 달라는 등의 부탁 말이다.”

예전이라면 그리해 달라고 했을 거다.

“그런 하찮은 놈들에게 죽으면 그것도 운명이겠지요. 하나 저를 공격한 놈들을 다른 누구의 손을 빌려 해치우는 건 제 자존심이 허락 못 합니다. 녀석들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건들지 마십시오.”

싸늘한 말만 남기고 방을 나섰다.

누가 봤다면 기억을 잃어버리기는커녕, 더 싸가지 없는 후레자식이라고 말했을 터.

아니, 능력도 없는 놈이 자존심만 앞서 명을 단축한다고 했을 거다.

“…….”

에드가 백작은 클라우드가 나간 문에서 떼지 못하였다.

예전에는 그리 자신을 무서워하더니, 지금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당당하기까지.

“하하하! 변해도 너무 변했어. 안 그런가, 카시아스?”

달라진 아들의 모습에 에드가 백작은 목청이 보일 정도로 웃어 보이며 허공에 대고 말했다.

그러자 언제 나타났는지, 복면을 쓴 자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군요.”

“망나니 생활을 청산하고 계속 저런 모습이면 좋으련만. 그보다 암살자들은?”

“이미 모습을 감춘 후입니다.”

“언제 또 클라우드를 습격할지 모르니, 네가 뒤를 봐주도록.”

“예.”

복면인은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이고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



에드가 백작의 서재에서 나온 클라우드가 뜰을 거닐었다.

그러자 지나가는 이들이 자신의 눈치를 보면서 슬슬 피했다.

정원을 가꾸는 고용인은 경기를 일으키기까지 했다.

‘빌어먹을, 불편해서 돌아다니지도 못하겠어.’

이대로는 자신을 보는 시선 때문에 밖을 못 돌아다닐 것만 같았다.

아무리 자신이 남의 눈치를 안 본다지만, 이건 정도가 심했다.

새로운 인생을 통해 재미도 느끼기 전에 원한이 있는 자에게 칼이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정원을 지나 연무장 쪽으로 가려는데, 페시아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저, 정말 이 길로 가시게요?”

“내가 이곳으로 가지 못할 이유라도 있나?”

“그게 아니라 불편하실 것 같아서…….”

‘불편할 게 뭐가 있겠나.’

이 길은 자신이 머무르는 저택과의 최단 거리였다.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걸었다.

연무장에 도착했을 때, 여러 시선이 느껴졌다.

시녀들은 그렇다 치고, 훈련하던 기사들까지도 동작을 멈추고 자신을 아니꼽게 바라본다.

개중 한 기사는 대놓고 살기를 드러내기까지 했다.

‘아주 가관이네.’

카시미르 백작가에서, 그것도 장남에게 살기를 드러내다니.

이곳은 어떻게 된 게 자신에게 호의적인 사람이 하나도 없는지…….

저도 모르게 피로가 몰려왔다.

클라우드는 살기를 드러낸 자와 마주쳤다.

탐스러운 적발의 수습 기사는 자신을 향한 적의를 전혀 숨기지 않았다.

“이젤라인가.”

머릿속에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탐욕스러운 감정도 함께 무럭무럭 자라났다.

아랫도리가 반응하며 흥분한 것이 그 증거였다.

이 모든 게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 때나 발정하는 쓰레기 때문에 돌겠어.’

이 감정.

분명 원주인인 클라우드가 이젤라란 수습 여기사를 보고 느낀 감정이었다.

시녀, 기사 가릴 것 없이 여자라면 사리 분별하지 못하고 덤벼들었으니.

저 여기사가 죽일 듯한 기세를 드러내는 게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면서도 클라우드가 된 백운기는 습관적으로 그녀의 몸을 훑었다.

상대의 근골이나 버릇, 행동을 관찰하는, 전직 살수로서의 습관이었다.

이젤라는 그런 시선에 불쾌감을 드러내곤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말했다.

“암살자에게 습격을 당해 이제야 깨어나셨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음흉한 눈은 여전하십니다.”

“오해다.”

“굳이 변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신의 평판이 바닥을 기어 변명도 딱히 필요 없었다.

저들의 머릿속에는 클라우드는 상종 못할 종자로 낙인찍힌 상태이니까.

여기에 더 있다간 분노에 눈이 확 돌아갈 것 같아 몸을 돌렸다.

이젤라만 보면 발정난 개처럼 달려들던 클라우드가 아무 일 없다는 듯 연무장을 벗어나려 하자…….

“이젤라를 그냥 훑어본 게 다야?”

“암살자 때문에 기억을 잃었다는 게 정말인가 봅니다.”

“퉤! 망나니가 어디 가겠어? 기억 돌아오면 이젤라에게 더 집적대겠지.”

모두가 같은 생각인지 곧바로 수긍했다.

“그도 그래요. 율리 도련님의 반만 닮아도 좋았을 텐데.”

“그건 바라지도 않아. 그냥 없는 사람처럼 살았으면 좋겠다.”

기사들의 빈정대는 목소리가 클라우드의 귀에 박혀들었다.

‘저 찢어 죽일 놈들을 보았나. 내가 무공만 되찾으면 저것들을 그냥…….’

예전의 성격이었으면 이미 사단이 나고도 남았다.

카시미르 가의 기사들은 오직 자신들이 선택한 주군만 따른다.

그중에서도 제1공격대인 사막의 안내자 기사단은 호불호가 유독 심했다.

지방 귀족의 자제들만 모인 엘리트 집단이라 그런가.

에드가 백작의 명령이 아니면 카시미르 가 내에서 독불장군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가문에서 포기한 개망나니 앞에서도 험한 말을 서슴없이 했다.

그런 사실을 알 턱이 없는 클라우드는 화를 꾹 눌러 참았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랄까.

그때 각을 잡고 서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

“말을 삼가라. 저래도 우리가 모시는 주군의 아들이다. 주둥이를 함부로 놀렸다간 네놈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알았나?”

“넵!”

기사들이 일제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좌중을 압도한 사람.

그는 사막의 안내자 기사단의 단장 올코프 세론이었다.

클라우드는 올코프 단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까닥였다.

‘그래도 가문에 제대로 된 사람이 한 명은 있네?’

기사들을 지나 그가 연무장에서 멀어지려는 찰나.

이젤라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기억을 잃었다고 저와의 내기까지 잊은 건 아니시겠지요?”

“내기?”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본 이젤라의 얼굴이 얼음장으로 변했다.

“정말로 잊으신 겁니까?”

말투는 사뭇 정중하나, 그 속에 담긴 경멸을 읽지 못할 정도로 아둔한 클라우드가 아니었다.

저편 너머에 있는 기억을 끄집어냈다.

잠시 후, 클라우드는 그녀와의 약속을 생각해 냈다.

‘빌어먹을 망종이 이젤라를 갖겠다고 그런 내기를 하다니.’

몸의 전 주인은 저 도도하고 예쁜 이젤라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와 다르게 검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다.

스물 초반의 나이로 카시미르 가의 기사단 수습 기사로 발탁될 정도로.

더 마음에 든 건, 그녀가 아직 자신이 모실 주군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탐이 나 치근덕거렸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그녀는 기사가 된다면 차남인 율리에게 충성할 거라고 말했다.

‘그래서 부아가 치민 나머지 자존심이 강한 그녀에게 너 같은 수습 기사는 동생에게 아무 쓸모가 없다고 자극해서 내기를 이끌어 낸 건가…….’

‘치졸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상대를 요리하는 건 칭찬할 만해.’

그 방법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원하는 걸 얻으면 그만이라는 게 백운기의 생각이었다.

그가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페시아를 봤다.

‘이래서 불편할 것 같다고 한 거군.’

이젤라와 내기한 후, 연무장에는 얼씬도 안 하던 자신이 웬일로 걸음을 하니 이상할 만도 하겠지.

백운기는 페시아에게 시선을 거두고 이젤라의 물음에 답했다.

“알지, 한 달 후 내가 골라 준 기사와 대련해서 이기면 너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고, 만약 네가 지면…….”

“도련님의 종이 되겠다고 했어요.”

“미안하지만, 내가 너한테 무릎 꿇을 일은 없다.”

그녀의 잠재성에 눈이 돌아갔다.

자신의 몸 하나 챙기기도 바빴다.

비루한 몸뚱이.

비대까지는 아니지만, 움직일 때마다 살이 출렁이는 게 느껴졌다.

이 몸으로는 길어 봐야 20년.

이대로 있으면 십중팔구 병사하고 말 것이다.

“흥, 자신만만하십니다. 전 꼭 도련님이 제 앞에 무릎 꿇고 비는 모습을 보겠어요!”

이젤라가 단호하게 말하자, 그녀의 우군인 선임 기사들이 목소리를 높여 응원했다.

“오우, 이젤라! 박력 쩔어!”

“네가 질 일은 없겠지만, 대련 때까지 특별히 내가 지도해 줄게.”

“끝나고 술은 내가 사마.”

저쪽 분위기는 이미 대련에서 다 이긴 분위기였다.

당연했다.

수습 기사가 되려면 적어도 오러를 검에 주입시킬 수 있어야 했다.

이젤라는 수습 기사 사이에서도 상당히 실력이 좋은 편이었다.

“내 종이 되어도 후회 안 할 자신 있나?”

“그럴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사람 일은 아무도 몰라.”

결국 내기는 이루어질 것이다.

한 달 동안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관건.

‘저 여자를 얻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재능이 특출 나고, 근골도 뛰어났다.

저런 신체는 몸으로 하는 건 뭐든 잘한다.

문제는 저 자존심이었다.

꺾어 놓을 수만 있다면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직접 상대해서 찍어 눌러야만 했다.

그래야 자존심 강한 이젤라의 충성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한 달 동안 죽었다고 생각해야겠군.’

전직 최고의 살수.

암천제라 불리는 그도 이런 썩어 빠진 몸뚱이를 한 달 만에 정상인으로 만든다는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선다는 건 자신의 자존심상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럼 규칙을 변경하자.”

“규칙… 말입니까?”

이젤라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아무 생각 없다. 다만, 네가 납득할 만한 결과가 나와야 순순히 내 종이 되지 않겠어?”

그녀는 얼굴은 찡그러진 상태로 펴지지 않았다.

말투에는 날이 잔뜩 서 있었다.

“한번 들어나 보겠습니다.”

“기존의 내기가 대리 기사를 내세우는 조건이었다면, 변경된 룰에선 내가 직접 나서서 대련하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