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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언제부턴가 모두 나만 보면 오줌을 지리기 바빴다.

살귀라 일컬어지던 내 별명은 살성으로 바뀌고, 종래엔 암천제(暗天帝)가 되어 있었다.

암천제 백운기.

전 강호인들에게 나는 경외의 대상이자 동시에 두려움의 존재로 군림했다.

빳빳이 고개를 쳐들고 다니던 고수들도 내 앞에선 머리를 조아렸다.

이는 분명 기쁘고 좋아해야 할 일이나, 이제는 더없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지친 나의 일상에 한 줄기 따사로운 햇살을 비추는, 그런 재미가 없을까.

“…….”

아마 없겠지. 이 강호란 세상에선 말이야.

남들은 우화등선은 하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나 같은 살귀가 우화등선은 얼어 죽을.

지옥이나 가지 않으면 다행이다.

무료해진 내가 바라고 또 바란 건 죽을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뿐이다.

만약 다음 생이 또 있다면 무엇으로 나를 즐겁게 해 줄지 기대가 되니까.

“…….”

난 무거운 눈꺼풀을 서서히 감으며 희미한 미소를 드러냈다.





1화



갑자기 아픔이 느껴졌다.

‘윽!’

근 십 년 만에 느껴 보는 아릿한 통증이었다.

백운기는 암천제란 이명(異名)을 얻은 뒤로 강호에서 그의 옷깃을 건드릴 수 있는 실력자가 없어 아픔을 잊고 산 지 오래였다.

‘한데 이 심장을 도려내는 느낌은 뭐지?’

원인을 알기 위해 감겨 있는 눈을 억지로 떴다.

퍼억!

그 순간, 누군가의 발길질에 의해 벌러덩 뒤로 나자빠졌다.

“커헉!”

어느 누가 감히 암천제인 자신을 기습한단 말인가.

죽음이 마중 나왔으나, 천기를 거스르더라도 자신을 공격한 놈만큼은 저승길 동무로 삼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나 눈의 초점이 흐릿해 상황 파악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쓰러진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자신의 몸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천근만근 무거웠다.

이를 악물고 통증을 버티며 내공을 끌어 올렸다.

‘뭔가 잘못되었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대해같이 일어나야 할 내공이 단 한 줌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빌어먹을! 사천당가의 극독을 들이부어도 중독되지 않는 본좌이거늘!’

은거하는 사이, 새로운 독을 개량이라도 한 것일까.

천하의 백운기가…….

어떤 발악도 하지 못한 채 적의 손에 생을 마감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무공이 없던 길바닥 들개 시절에도 내공과 초식 대신 짱돌 하나로 사람을 찍어 죽인 게 자신이었다.

어떻게든 상대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반격을 가하기 위해 눈에 힘을 줘 흐려진 초점을 맞췄다.

그런데…….

생전 처음 보는 생김새의 남자들이 보였다.

파란 눈에 금발 머리.

입고 있는 옷 또한 무림에서 보던 복장이 아니었다.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니, 낯선 형태의 건물들이 주변을 메우고 있었다.

등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주변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사람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큰 건물의 뒤편으로 짐작됐다.

그러고 나서 눈살을 찌푸린 채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들의 눈에서 싸늘한 살기를 감지했다.

다른 건 몰라도 딱 하나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저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에잉, 좀 빗나갔네.”

“잘 좀 하자. 심장이 아니고, 어깨에다가 칼침을 놓으면 어떻게 해?”

그 말에 백운기는 놈들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오른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왼쪽 쇄골 아래에 박혀 있는 작은 단도.

그제야 살을 에는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감히… 내가 누군지 아느냐!”

놈들의 행동과 언사는 왈패로 보이나 걸음걸이며 손에 든 무기로 짐작할 때, 살수임이 틀림없었다.

“낄낄, 백작가의 도련님이지 누구겠어?”

“우리에게 죽는 걸 영광으로 생각해.”

피를 너무 많이 흘렸나?

호통을 쳤지만, 시야가 가물가물하다.

정신을 놓으면 바로 쓰러질 듯한 상태.

이대로 무너질 수 없었다.

“내… 앞에서 같잖은 살수… 흉내나 내고 앉아 있다니, 통탄할 노릇이구나.”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있는지 따위는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직 단 하나.

저 시건방진 놈들을 치워 버리는 것뿐.

“낄낄. 저 새끼가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입만 나불대지 않았어도 편히 죽여 줄 텐데. 언제나 저 입이 문제야.”

두 사람 중 한 명이 쏜살같이 단숨에 접근해 왔다.

같잖은 살수 흉내를 내고 있다고 큰소리쳤으나, 어찌 된 건지 지금의 안력으로 남자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제 정말로 장난은 끝이라는 듯 남자가 역수로 잡은 단검을 휘둘러 자신의 목을 긁어 왔다.

‘이건 피해야 한다.’

위협을 느낀 백운기가 발을 박차며 몸을 뒤로 뺐다.

핏!

어떻게든 일격을 피했지만, 얼굴에서 화끈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조금만 늦게 빠졌어도 꽤 깊게 목을 베여 과다 출혈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예상 밖 행동에 남자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치명상을 입고도 내 단검을 피해?”

“대단하지도 않은 실력으로 본좌의 몸에 두 번이나 상처를 입혔으니 칭찬받아 마땅하겠으나, 더는 봐줄 수가 없구나.”

화아악―

자신의 영혼은 수천 명, 아니, 수만 명을 잡아먹은 악귀였다.

그 악귀가 마음먹으니, 몸에서 살기가 무럭무럭 피어올라 남자들을 겁박했다.

뒤쪽에 서서 관망하던 놈은 물론이고, 바로 코앞에서 자신의 기운을 쐰 놈은 몸을 덜덜 떨며 이를 위아래로 딱딱, 부딪쳤다.

“으으, 사, 살려 줘…….”

“이게 어떻게…….”

그들은 현실을 부정하며 격하게 고개를 흔들어 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운기는 그들을 더욱 압박하며 앞으로 한 발자국 움직였다.

그러자 놈들은 거센 바람에 밀리듯 뒤로 물러났다.

“버러지 같은 것들. 본좌 앞에서 설친 대가는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

허벅지 근육에 힘이 잔뜩 들어가며 땅을 박차려는 순간.

“흩어져서 도련님을 찾아라! 1조는 영성회 쪽으로, 2조와 3조는 카시안 거리를 샅샅이 훑어!”

“옙!”

“클라우드 도련님, 어디 계십니까!”

누군가를 찾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놈들이 서로 마주쳤다.

그러고 나서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자리를 박차며 건물의 벽면을 교차하고 위로 올라가 도망쳤다.

녀석들을 쫓아가려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며 당장에라도 넘어질 것 같지만, 힘을 줘서 간신히 버티고 섰다.

의식을 잃을 듯 초점이 흐릿해졌다. 하지만 방금 전에 자신이 내보낸 살기가 더 신경이 쓰였다.

‘허, 영혼까지 끌어모은 살기가 하찮다 못해 한심할 지경이야.’

마침 누군가가 자신에게 달려오며 낯선 이름을 불렀다.

“클라우드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단장님, 여기 큰 도련님을 찾았습니다!”

갈색 갑주를 입은 사내의 뒤로 그와 똑같은 복장을 한 이들이 골목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저들이 왜 이곳으로 오는지 모르지만, 자신을 공격한 자들과는 다르게 안심이 돼서 그런지 몸이 허물어졌다.

“억! 클라우드 도련님, 정신 차리십시오!”



***



백운기는 목이 바짝 타들어 가는 느낌에 심한 갈증을 느꼈다.

마른 입술 사이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 물…….”

그에 옆에서 누군가가 컵에 물을 따르는 소리가 들렸다.

뚜벅뚜벅.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자신의 옆에 멈추더니…….

촤악―

“윽!”

백운기의 얼굴에 물을 뿌렸다.

그 뒤로 동굴처럼 울리는 중후한 중년의 음성이 들렸다.

“일어나라.”

“누, 누구냐!”

백운기는 벌떡 일어나 자신의 얼굴에 물을 뿌린 인간을 자세히 살폈다.

산적처럼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의 얼굴이 가차 없이 일그러졌다.

“이 망종이, 이젠 제 애비도 몰라보는구나!”

“뭐라고?”

어이가 없었다.

자신보다 열 살은 더 어려 보이는 남자가 아버지란다.

치매라도 걸린 건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여긴 백운기가 남자에게 도리어 호통을 쳤다.

“어허! 내가 너보다 열 살은 많아 보인다, 이놈아!”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자신의 위엄 넘치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앳되어 보이는 건 왜 일까.

의문이 떠올라 고개를 들어 산적 두목의 얼굴을 봤는데, 그의 표정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얼굴이 일그러지다 못해 찌그러진 상태.

저걸 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이노오옴! 애비를 몰라보는 것도 모자라 이 무슨 패륜이란 말이냐!”

‘내가 저 산적을 무서워하고 있어?’

이 느낌은 자신보다 강한 적을 만났을 때나 느끼던, 아주 오래된 감정이었다.

격하게 부정하려고 머리를 흔들려는 찰나.

“으윽…….”

백운기가 머리를 붙잡고 신음했다.

그런데도 자신을 아버지라고 소개한 산적 두목은 무심한 표정으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엄살 피우지 말고 일어나거라. 내 오늘은 너의 그 몹쓸 행실을 바로잡고 말 것이다.”

산적 두목의 말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지…….

“크아아악!”

백운기가 악을 써 댔다.

계속되는 두통 때문에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마치 수천 개의 바늘이 뇌를 찌르는 듯한 고통이 들었다.

온몸에서 경련이 일어나며 근육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고통은 점점 심해지고, 입에선 거품이 올라오며 눈알이 뒤집혔다.

아들의 몸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산적 두목은 밖을 향해 소리쳤다.

“올코프! 어서 신관을 불러오라!”

“예!”

산적같이 생긴 남자.

에드가 카시미르 백작이 다급하게 기사단장 올코프에게 명을 내렸다.

잠시 후.

올코프의 옆에 하얀 사제복을 입은 늙은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신관은 백운기의 가슴에 손을 얹더니 마나를 집어넣었다.

따스한 마나가 잠시 머물더니, 이내 온몸을 돌아다니며 안정을 시켰다.

경련이 일어나던 근육도 제자리를 찾았다.

마지막으로 마나가 머리로 올라가자…….

“허허, 이런 일이.”

“왜 그러시오? 뭐가 잘못되었소?”

개망나니라곤 하나 명색이 가문의 장남이었다.

어릴 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었다.

신관의 허허로운 웃음에 에드가 백작은 초조한 얼굴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아무래도 뇌에 손상이 간 듯합니다.”

“백치가 됐다는 말이오?”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기억을 하지 못할 것이라 사료됩니다.”

“허… 하긴, 이 애비의 얼굴도 몰라봤으니.”

그러다가 에드가 백작의 눈이 반짝였다.

‘어쩌면 망나니짓을 더는 안 하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감이 어렸다.

“그렇지, 어쩌면 좋은 기회일지도…….”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것도 아니오, 포포비치 사제께서는 고생하셨소.”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가 백작은 처소를 담당하는 시녀에게 몇 가지를 말하곤 늙은 신관 포포비치와 함께 방을 나갔다.



***



“허억!”

백운기가 상체를 일으키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얼마나 땀을 많이 흘린 건지, 입고 있는 옷이 흠뻑 젖어 있었다.

‘젠장, 내가 다른 사람의 몸으로 들어왔다니. 그것도 강호와 전혀 다른 세계로 말이야.’

수천 개의 바늘로 꾹꾹 찌르는 듯한 고통과 함께 원주인의 기억이 물밀듯 들어왔다.

두 기억의 충돌로 하마터면 머리가 터질 뻔했다.

알지 못할 포근하고 따스한 기운이 아니라면, 미치광이가 됐을 수도 있었다.

그때, 쭈뼛쭈뼛거리며 여자가 다가왔다.

“도, 도련님, 괜찮으세요?”

“넌……?”

강호에서 볼 수 없는 옷을 입고 있는 여자.

그녀를 보자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페시아.

자신의 시녀.

아니, 이 몸의 원주인인 클라우드 카시미르의 수발을 담당한 시녀였다.

“페시아?”

“네? 네. 괘, 괜찮으세요?”

시녀 페시아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몸까지 떠는 것이, 자신을 두려워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무시했다.

“목욕부터 해야겠구나.”

“주, 준비하겠습니다.”

그녀가 목욕물을 받으러 후다닥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방.

백운기가 거울 앞으로 가서 섰다.

눈앞에 보이는 남자는 백발을 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얼굴은 북풍한설처럼 차가워 보였다.

몸은 어떤가.

근육은 없으나 한 덩치 했다.

출렁이는 살만 아니면 괜찮은 근골이었다.

“호∼ 이거, 전생의 나보단 못났지만, 나름 괜찮은 얼굴이야.”

차가운 이목구비가 꽤 마음에 들었다.

남들이 자신을 볼 때 어려워한다는 건 언제나 좋았다.

문제는…….

“이놈의 성격이 문제인데…….”

기억 속에서 본 원주인 클라우드의 성격은 말 그대로 개망나니.

백작가에서 일하는 고용인 모두가 클라우드 카시미르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얼마나 못되게 굴었으면 부엌데기조차 슬슬 피했을까.

“하필 들어와도 이런 막돼먹은 녀석에게 들어오다니.”

외관은 좋은데 원주인의 평판을 생각하니 막막하기만 했다.

거기에다가 자신을 죽이려는 살수까지 있었다.

“다시 암살을 시도할 거야.”

목표를 바로 죽이지 않은 얼간이들로 보내긴 했지만, 다시 암살시도가 온다면 그때는 다를 것이다.

한번 실패했으면 그다음은 절대 실패하지 않은 이들로 파견한다.

그것도 아니면 더 강한 놈들로 오고.

그게 암살 업계의 규칙이었다.

“이곳도 무림과 같은 생리가 적용되겠지.”

자신이 가진 최대의 무기.

그것은 바로 암천제 백운기의 기억이다.

과거, 절대자에 오른 자신이 젊은 몸으로 다시 시작한다면?

분명 더 높은 경지를 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무공을 다시 익히긴 해야겠는데.”

평생을 살수로 살아왔다.

비록 다른 이의 몸에 들어오긴 했으나, 영혼만은 온전한 자신의 것.

살수가 아닌 다른 길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럼 다시 음지에 쳐박혀야 하는 건가?”

청부살인을 업으로 하는 살수는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다고 한들, 늘 누군가의 표적이 되기 마련.

이는 암천제의 칭호를 가진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림의 정점에 오르기 전까지, 무려 오십 년에 가까운 세월을 음지에 틀어박혀 보냈다.

새로 얻은 삶까지 음지에 살긴 싫었다.

모든 인연을 배척하며 쓸쓸히 무공만을 연마하는 고독한 인생을 반복하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 무공을 등질 생각도 추호도 없었고.

“어떻게 해야…어?”

앞으로의 선택을 두고 고민하던 와중, 머릿속에 기막힌 해결책이 떠올랐다.

“내가 들어와 있는 이 몸의 원래 주인… 백작가 장남이라고 했지?”

몸의 원주인은 태생이 귀족.

그것도 아스란 왕국 최강의 방패라는 칭호를 받은 위대한 검술 가문의 장남이었다.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치와 배경.

이 사실을 깨달은 순간.

더 이상 음지에서의 삶과 양지에서의 삶을 두고 고민할 이유를 못 느꼈다.

둘다 가져버리면 그만이기에.

“이거 아주 괜찮군.”

그의 한쪽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다른 세계에서 다시 살아 보는 것도 재밌겠어.”

새로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똑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페시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무, 물 다 받았어요.”

개미가 기어갈 정도로 목소리가 작았다.

“알았다. 나 혼자 씻을 테니, 넌 나가 봐.”

“네? 저, 정말로 혼자 씻으시게요?”

“두 번 말하게 하지마.”

백운기의 목소리에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눈을 떴을 때 자신을 걱정해 주던 얼굴.

처음 겪어봤다.

오묘하면서도 낯설었다.

그런 여자아이가 자신에게 겁을 집어먹고 있으니, 되레 짜증이 올라왔다.

페시아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뭔가 찝찝해.”

백운기, 그러니까 이제는 클라우드가 된 그가 욕실로 향했다.

고급스러운 욕조에 몸을 푹 담그며 심법을 일으켜 봤다.

“아무것도… 없어.”

그와 함께 강호를 누비며 평생을 함께해 온 녀석이 단전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