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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곡선에서 나의 모서리까지 3화

1. 공백 (3)


그 말에 하랑이 희번뜩 눈을 떴다.

“서로의 첫사랑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고 그에 따른 감상과 이론을 결부시켜 열 장 내외의 에세이로 제출하면 됩니다. 추후에 있을 발표 점수도 평가에 포함이 되겠습니다.”

안 그래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수업인데. 젠장. 속으로 험한 말을 연신 뇌까리던 하랑이 일단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았다. 아무리 교양이라고 한들, 3학점이나 되는 수업을 편하게 제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재수가 없으려니 영, 하랑은 골치가 아팠다.

“조 구성은 자유롭게 하시고, 확정이 나는 대로 알려 주시면 강의실을 나가 보셔도 좋습니다.”

하나둘씩 술렁이고 있던 강의실이 곧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디서 그렇게 만난 건지, 벌써부터 끼리끼리 짝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멀찍이서 쳐다보던 하랑이 인상만 팍 썼다. 탐탁지는 않았어도, 어딘가 남는 사람이 하나쯤은 나올까 싶어 하염없이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러다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두드리는 듯한 손길을 느낀 하랑이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렸다.

아. 하랑은 순간 제 뺨을 쿡, 찌르는 손가락에 지레 놀란 채 멈춰 섰다. 동시에 부스스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안녕.”

해사한 얼굴이 인사를 건네 왔다. 뒤늦게 그 주인을 발견한 하랑이 열고 있던 입술을 몇 번을 달싹거렸다.

“원래 이 수업 들으셨어요?”

“그건 내가 할 소린데.”

너 이 수업 잘 안 나왔잖아. 그 말에 황망한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는 걸 쳐다보고 있던 유원이 피식, 하고 웃었다.

“교수님이 출석하실 때마다 너 이름 두세 번씩 자주 부르셔서 기억나.”

제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유원이 능청스럽게 덧붙였다.

“아까도 너 잘 때 계속 지켜보시는 것 같던데?”

오늘은 딱히, 자고 있지도 않았는데. 하랑이 한쪽 눈가를 찡그린 채, ‘거짓말하지 마세요’라며 쏘아붙였다.

“응. 방금 건, 농담.”

언제부터 그렇게 농담까지 할 사이였다고. 의자 끄트머리를 쥐고 있던 하랑은 웃는 얼굴에 침도 못 뱉는 심경으로 있다가, 이름 모를 누군가가 유원에게 다가서는 것을 보았다.

“야. 오유원. 너 왜 여기 있었냐.”

보아하니 어딘가 낯이 익은 게, 몇 학번 위 선배인 듯했다. 유원이 그에게 아는 체를 하며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어. 왜?”

“너 누구랑 같은 조 할 거냐?”

그 대화에 어정쩡하게 끼일 생각도 없던 하랑은 뒤쪽으로 향해 있던 몸을 다시 제 방향으로 틀었다. 그리고 무작정 시간을 죽이고 있을 수도 없는 탓에, 혹여나 저와 처지가 마찬가지인 사람이 있을까 싶어 사방으로 시선을 뻗었다.

“나 이미 정했는데.”

“뭐야. 벌써?”

“응.”

그러다 건너편의 누군가를 발견한 하랑이 제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누군데?”

“쟤.”

그 옆을 지나쳐 가려던 하랑이 갑자기 저를 향해 꽂힌 시선을 보고는 걸음을 멈춰 섰다.

“저요?”

유원이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내가 뭘? 하랑은 도통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는 새에 제 옆에 서 있던 남자에게 얼른 가 보란 식으로 고갯짓을 한 유원이 아직도 제자리에 있는 하랑을 쳐다보며 말을 건넸다.

“괜찮지?”

“뭐, 뭐가요?”

“같은 조 하는 거.”

제 영역을 침범이라도 당한 것처럼 상체를 뒤로 물리고 있던 하랑이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제안에 되묻기까지 했다.

“아니. 갑자기 제가 왜요?”

전에 학사 경고를 받았다고 말했던 게 그렇게 동정심을 유발할 정도였나.

“이번엔 다른 사람들이랑 좀 하고 싶어서.”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을 한 유원이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받아쳤다. 하랑은 그게 좀처럼 이해가 되질 않았다.

“원래 아는 얼굴이 더 편하지 않아요?”

“너랑도 얼굴 아는 사이잖아.”

잠시 입술을 다문 하랑은 골치가 아픈 듯 눈살을 구겼다. 괜히 어정쩡한 사람과 엮여서 까딱 잘못하여 피해를 주게 됐을 때, 안 그래도 안 좋은 이름값에 먹칠을 할 것 같았다. 눈앞의 유원의 말끔한 얼굴을 슥, 훑어 내린 하랑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웬만해선 저 말고 다른 사람이랑 하시는 게 좋을걸요.”

“교양인데, 뭘. 열심히 할 필요는 없고, 편하게 하면 돼.”

“저 학점도 F만 안 받으면 그만인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나랑 같이하면 되겠네.”

“아니요. 제 말은…….”

말을 하다 만 하랑은 의도치 않게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는 기분에 제 머리를 짚었다. 내가 이렇게 말을 못 했나. 때아닌 좌절감까지 들었다. 딱 잘라 거절하는 것만큼은 도가 텄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F만 안 받으면 된다며.”

유원이 뭐가 그리 어렵냐는 식으로 말했다. 그 앞에서 제 발등만 쳐다보고 있던 하랑은, 이내 마음대로 하라는 식으로 손을 저었다. 까놓고 말해서 내가 먼저 같은 조가 되자고 한 것도 아니었고. 뒷일이 어떻게 된다고 한들, 저 사람 좋은 성격에 뭔 일이 설마 날까 싶었고.

“갈게요.”

차라리 마음을 편히 먹는 쪽이 훨 나을 거라 판단한 하랑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래서 너…….”

일순간 미간을 좁힌 얼굴이 하랑을 향했다.

“네?”

“형이라고 안 부를 거야?”

차분하게 내려앉은 머리칼을 두 손으로 쓸어 올린 유원이 넌지시 하랑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 시선 너머로 훤칠한 이마가 드러났다가 다시금 앞머리 아래로 덮였다. 제 이마를 손으로 짚은 유원이 저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친한 척 좀 해 주라.”



***



“거짓말 치지 마, 새끼야. 어디서 구라야.”

눈썹이 팔자로 휜 하랑이 동시에 물고 있던 종이팩 입구를 잇새로 콱 물었다. 흐물거리며 구겨진 종잇장이 입술 아래로 눅눅하게 젖어 들었다.

“진짜라니까.”

승빈은 여전히 못 믿겠다는 눈치로, 라면 면발을 입 속에 집어넣다 말고 게슴츠레 눈을 떴다.

“눈뜨고 염병하네.”

그 반응에 하랑은 됐다는 식으로 한쪽 다리를 꼬며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해 봤자, 별 같잖은 말로 자신을 속이지 말라며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게 뻔했다.

승빈은 그 뒤로 말없이 뻐끔뻐끔 담배만 피우기만 하는 하랑을 보고선 의자 다리를 툭, 발등으로 찼다.

“왜.”

또 무슨 시비냐는 하랑의 대꾸가 튀어나왔다. 승빈은 들고 있던 나무젓가락을 하랑의 쪽으로 가리키며 추궁을 시작했다.

“너 안 친하잖아. 형이랑.”

“누가 친하다고 했냐? 조 과제 같이하게 된 거라니까.”

“그러니까 그 형이 왜 너 같은 놈이랑 과제를 하겠냐고.”

듣고만 있으려니, 하랑은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렇게 물어뜯기고 있어야 하나 싶었다.

빈정이 상한 듯 입술을 씰룩거리고 있던 하랑을 쳐다본 승빈은 아직도 납득이 안 된다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형. 과탑이야.”

“뭐?”

그럼 그렇지. 승빈은 예상대로 돌아온 반문에 저 혼자 고개를 한번 끄덕거렸다.

“솔직히 말해라. 너 형, 뭐 책잡은 일 있지?”

“야. 내가 뭘 책을 잡아?”

“사람 그렇게 사는 거 아니다. 새끼야.”

그 말까지 들은 하랑은 결국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라 말해 봤자, 씨알도 안 먹힐 게 뻔해서였다. 물을 마시던 승빈이 어디 가냐며 물었다.

“집.”

무신경한 얼굴을 한 하랑이 그대로 승빈의 물병 바닥을 손등으로 쳐올렸다. 푸욱. 입 안에 있던 물을 바깥으로 뿜은 승빈이, 욕설을 내뱉으며 성질을 냈다.

“너 진짜 공부 안 할 거냐?”

“안 한다고.”

손에 든 빈 음료수 팩을 편의점 쓰레기통에 집어 던진 하랑이 승빈을 뒤로한 채로 곧장 집으로 향했다. 불현듯 요상한 더부룩함이 드는 게 기분만 나빴다. 한밤중에 도서관에 있던 승빈이 뭐라도 먹자고 나오라 할 때 나가는 게 아니었는데. 전화기 잠금 화면을 켠 하랑이 자정을 넘은 시각을 확인했다. 중간고사가 코앞이었다. 물론 교양 과제 제출일도 포함해서. 하지만 여태껏 별 기별도 없었다. 심지어 유원의 연락처도 없었다. 오늘 공승빈을 만난 김에 물어보려 했는데, 그것도 이미 그른 것 같았고.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건지. 애초에 열심히 할 필요도 없지 않냐는 말이 이런 뜻이었나. 어떻게 되는 간에 아쉬울 게 없는 건 이쪽이긴 한데. 어쩐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아. 몰라.”

신경질적으로 제 뒷머리를 사납게 헤집은 하랑이 길가에 튀어나온 돌부리를 툭, 걷어차고는 가벼워진 걸음을 이었다.



***



“야, 임하랑. 수업 끝났다. 일어나.”

전공 시간 내내 잠에 빠져 있던 하랑이 비몽사몽한 눈을 떴다. 교수고 뭐고, 이미 절반은 빠져나간 강의실 안이 공허했다. 퀭한 눈을 한 하랑이 지나가는 길에 저를 깨워 준 호승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야. 고맙다.”

“또 밤새워서 게임했냐?”

든 것도 없는 가방을 챙긴 하랑이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적미적 몸을 일으켰다.

“내일모레가 시험인데 너도 징하다. 야.”

출석률도 저조한 보충 수업에 몸만 끌고 나왔던 하랑은 덜 풀린 눈가를 비비적거리며 호승과 강의실을 나섰다.

“공승빈 얘는 왜 안 왔어?”

“작정하고 쨌을걸. 도서관에만 살고 있던데.”

“벼락 치느라? 안 그래도 나 이제 도서관 가려고 했는데.”

너도 갈래? 그 물음에 비스듬히 메고 있던 가방을 추스른 하랑이 물어볼 걸 물어보란 눈치로 호승을 쳐다보았다.

“싫으면 말고.”

무안했는지 제가 했던 말을 재빠르게 철회시킨 호승은, 네가 아니면 누가 바닥을 깔아 주겠냐며 너스레를 다 떨었다.

고마운 줄 알아. 하랑은 호승과 영양가 없는 대화를 이어 가며 경영관 복도를 지나갔다. 어수선하게 퍼져 있는 인파 사이로 걸음을 내딛다 말고, 제 어깨를 잡아 오는 손에 ‘뭔데’ 하며 무신경한 반응을 보였다.

“안녕하세요. 형.”

뜬금없이 제 뒤에서 들리는 호승의 인사말에 뭔가 낯선 느낌이 든 하랑이 고개를 돌렸다.

안녕. 하랑의 어깨를 놓은 유원이 자연스럽게 호승에게 답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 웃는 입가 옆으로 새겨지는 보조개를 쳐다보던 하랑이 뒤늦게 시선 처리를 했다.

“무슨 일이세요?”

“너 기다렸는데.”

방금 전에 떨어져 나갔던 손이 이제는 하랑의 어깨 위를 감쌌다. 저도 모르게 놀란 하랑이 목을 와짝 움츠렸다. 그 순간 무어라 하려던 말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뭘 그렇게 놀라. 웃는 말소리가 귓가를 다 스쳐 갔다. 없던 솜털이 다 솟을 것 같은 기분에 하랑이 작게 몸서리를 쳤다.

“저, 이것 좀…….”

“응?”

옆에 서 있던 호승과 눈이 마주친 하랑이 어떻게든 좀 해 달라는 식으로 인상을 썼다. 그러자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호승이 대뜸 제 한쪽 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야. 나 먼저 간다. 임하랑?”

뭘 가, 가기는. 호승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하랑이 기가 찬 듯 허, 하고서 입술을 벌렸다. 저 바보 같은 게, 그걸 하나 못 알아듣고.

“너 이제 공강이지?”

하랑은 대뜸 제 목덜미 위로 실리는 힘에 아래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 다소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치켜든 하랑이 제 머리 위에 있는 유원의 얼굴을 곱지 못한 모양새로 보았다.

“그런데요.”

“그럼, 가자.”

“예? 어디를, 아.”

구부정하게 서 있던 하랑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유원이 먼저 발을 떼었다. 그 큰 보폭에 끌려가다시피 하고 있던 하랑이 등 뒤로 딱 붙은 상체를 느끼고는 어깻죽지에 힘을 팍 주었다. 맞닿은 옷자락 사이로 뜨거운 체온이 다 느껴지고 있는데도, 어깨를 두르고 있는 팔은 떼어 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디 가냐니까요.”

한쪽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가방 끈을 부박하게 추켜올리고 있던 하랑이 물었다. 안 그래도 뒤통수에 딱 붙어 있는 몸 때문에 머리가 엉망으로 흐트러지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너 화났어?”

그제야 성큼성큼 걷던 걸음을 늦춘 유원이 고개를 숙인 채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하랑을 보았다. 말문이 막혔던 하랑이 괜히 제 머리칼을 더 들쑤셔 놓은 채로 대답을 했다.

“화가 난 게 아니라…….”

“과제하려고 했는데. 시간 안 되는 거면 말해.”

그러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든가. 하랑은 제 성질대로 날뛰어 대고 싶은 충동을 애써 내리누르고서 대답을 했다.

“가요.”

제가 누구처럼 공부를 한답시고 시간이 부족한 사람도 아니었고. 그 말에 뒤늦게 픽, 하고 웃어 버린 유원이 다시 걸음을 이어 갔다.

하랑은 여전히 제 어깨 위로 올라와 있는 손을 쳐다보고는 속으로 ‘제멋대로네’ 하며 생각했다. 혹시라도 안 된다고 말했으면 어떻게 하려고 한 건지. 새까맣게 닳은 신발 앞코를 쳐다보던 하랑이 소리 없는 날숨을 내뱉었다.

경영관을 나서자, 벚잎을 실은 바람이 옷깃을 흔들었다. 정오의 햇볕이 머리 위를 내려쬐고, 긴팔 아래의 살갗이 따뜻하게 달아올랐다. 저절로 뜨끈해진 볼가를 손등으로 쓸어내리고 있던 하랑이 문득 제 곁으로 닿는 시선을 느꼈다.

호롱불처럼 밝게 비친 눈동자 하나가 이쪽을 향해 있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든 하랑이 입술을 열었다.

“왜요?”

제 손을 뻗은 유원이 하랑의 앞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덥지?”

이마 속에 머금고 있던 열기가 잔바람을 타고 흘러나갔다. 입술을 조용히 다문 하랑은 차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

부는 바람처럼 더웠다. 덥다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첫사랑. 고작 세 글자를 써 놓은 하랑이 손을 멈추었다. 이걸 열 페이지로 늘려 쓰라니. 시작과 함께 난관에 부딪친 하랑이 입술만 잘근잘근 물고 있다, 들고 있던 펜을 던졌다.

“생각해 봤어?”

주문한 음료를 들고 온 유원이 제자리에 앉았다. 짐짓 심각한 얼굴을 한 하랑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못 하겠어요. 저.”

이미 손을 놓고 있던 모습을 알아채고 있던 유원은 하랑의 앞에 놓인 백지를 흘긋 쳐다보고는 ‘그래?’ 하며 간결한 반응을 보였다. 평소와 그다지 다를 것도 없는 목소리였다.

“저 못 하겠다니까요.”

“하면 돼.”

하랑은 상황을 일축시켜 버리는 유원의 반응에 할 말을 잃었다.

“일단 생각나는 대로 간단하게만 써 봐. 나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을 테니까.”

유원의 말에 하는 수 없이 다시 의자를 당겨 앉은 하랑이 제 이마를 무던히 쓸어내렸다. 사랑이니, 뭐니.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것들을 억지로 회상하려니 얼굴 살에 절로 주름이 잡혔다. 며칠을 미룬 숙제처럼, 펜촉만 끄적거리고 있던 하랑은 이제 흰 종이만 보아도 갑갑해지는 기분에 고개를 들었다. 왠지 이쪽을 쳐다보고 있던 유원과 눈이 딱, 마주쳤다.

“……?”

아. 하랑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자, 살짝 웃고 있던 유원이 다시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눈치를 주는 건가? 이렇게나 친절하게. 생각을 거듭하던 하랑이 괜스레 긴장한 투로 퍼뜩 제 종이를 당겨 왔다.

“말로 할까?”

너른 손 하나가 하랑이 쥐고 있던 종이를 가져갔다. 어차피 이미 가져가 놓고는. 하랑은 선뜻 그러자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툭, 하고 다시 떨어진 하랑의 펜이 테이블 언저리에서 멈추는 소리가 났다.

“먼저 얘기해 주면 내가 정리해 볼게.”

형체를 알 수 없는 하랑의 글씨 아래로 유원의 손등이 스쳐 갔다. 제 볼펜을 든 유원이 준비가 된 모양으로 차분하게 하랑을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하랑은 왠지 어색해졌다. 애꿎은 뒷머리만 쓸어내리던 하랑이 퍼석한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좋은 기억은 아니어서요.”

어느덧 공손해진 하랑의 두 손이 허벅다리쯤에서 멈췄다.

“처음부터 잘 안 될 거라는 생각은 했어요.”

한편으로는 어렵고, 창피했다. 그래 봤자 몇 번 만난 적도 없는 학과 선배한테 이런 얘길 구구절절 꺼내는 것도. 말할 수 없는 사실들을 적당히 걸러서 이야길 하는 것도.

“하지만, 진심이었으니까. 아니란 걸 알면서도.”

“…….”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알면서도 속아 줄 정도로요.”

그렇게 좋은 사람이었던 것도 아닌데. 하랑이 헛웃음을 흩뿌리며 말했다. 이제 와 보면, 사라지지 않을 후유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죄다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있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속앓이를 하며 살았나 싶을 정도로.

“아무튼 그렇게 몇 년을 만나다가 어느 날부터 연락이 끊겼어요. 이것도 저것도 안 되는 관계였으니까……. 이쯤 하고 그만하자는 통보였겠죠. 제가 계속 매달릴 걸 다 아니까.”

이미 웃음기가 가신 눈을 한 하랑이 그제야 유원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저는 첫사랑 같은 거 안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