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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곡선에서 나의 모서리까지 2화

1. 공백 (2)


“듣고 있어?”

“아, 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 값들을 곱해 주면 되는 거지. 이 정도만 하면 나머지도 다 풀 수 있을 건데. 할 수 있겠어?”

그 과정을 찬찬히 되새겨 보던 하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서 막혔던 부분이 설명이 됐다. 나머지는 어차피 다 공식에 넣어서 계산을 하면 해결이 될 거였고.

“감사합니다.”

별거 아니란 듯, 가볍게 웃어 보인 남자가 다시금 하랑의 손에다 펜을 쥐여 주었다. ‘잘 썼어.’ 따뜻한 미열이 남아 있는 펜을 쥔 하랑이 흘끗 남자를 쳐다보았다.

“언제까지 하려고?”

“공승빈이 보내 줄 때까지요.”

“엄청 시달리고 있었나 보네.”

시각을 확인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뒤따라 의자를 밀고 일어선 하랑이 마침 그의 빈 커피 잔을 확인하였다.

“아. 제가 한 잔 더 사 드릴…….”

“친하게 지내자.”

불쑥 튀어나온 손바닥을 쳐다보던 하랑이 눈썹을 들썩였다.

“왜요?”

“왜냐니.”

그가 얼른 손을 잡으라는 뜻으로 눈짓했다.

“그러면 안 돼?”

“아, 아니. 뭐….”

하랑이 결국엔 스치듯 그 손을 잡고는 바로 놓아 버렸다. 그러자 낯간지러운 웃음소리를 흘린 남자가 하랑의 머리칼을 헝클였다. 그 부드러운 손길이 와 닿자마자 어깨를 움츠린 하랑이 생각했다. 이거, 뭐지.

“커피값이야.”

세상에 커피값으로 친하게 지내자는 사람이 어딨어. 이름도 모르는 사이에.

“유원이 형. 가려고요?”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선 승빈이 마침 일어서 있던 남자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붙였다. 그러자 진짜 가 보겠다면서 승빈의 등을 툭툭, 두드린 그가 하랑을 돌아보며 인사를 건넸다.

“또 보자.”



“성격 존나 좋지?”

승빈이 봤냐는 듯 앉자마자 가게 문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누군가의 그 정갈한 글씨가 쓰여 있는 전공 책을 제 앞으로 당겨 온 하랑이 대충 장단에 맞추어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말이었나. 우리 과 축구 소모임 뒤풀이할 때 휴가 나온 형이 술자리에 몇 번 나온 적 있거든. 그때 나도 처음 보고 안면 튼 사인데, 이제는 뭐. 몇 년 알고 지낸 것 같다. 사람 진짜 좋아. 그러니까, 너도….”

갑자기 하던 말을 멈춘 승빈은 언젠가부터 계속 창밖만 내다보고 있는 하랑을 알아채고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했거든. 형, 여자 친구.”

건널목 앞에 선 채로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얼굴들을 쳐다보던 하랑은, 자연스럽게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는 남자를 보고는 곧 창밖에 두었던 시선을 거뒀다.

“단과대 사이에서 꽤 유명해. 오래 사귀기도 했고.”

“안 궁금해.”

뭔데. 승빈은 흥이라도 깬 듯, 혀 차는 소리를 냈다.



***



아침부터 집에서 나왔던 것 같은데. 이미 한밤이 된 하늘을 쳐다본 하랑이 퀭한 눈으로 기지개를 켰다. 지박령이라도 내린 듯 하루 종일 앉아 있던 탓에 이곳저곳이 다 쑤셨다. 등허리를 주먹으로 툭툭, 치던 하랑이 그 와중에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승빈을 보고는 못마땅한 눈초리를 해 보였다.

“너 개총 갈 거냐? 공지 떴는데.”

전화기를 들고 있던 승빈이 물었다. 하랑은 목덜미에 뭉친 근육을 풀어내다 말고, 물을 걸 물어보란 식으로 대꾸했다.

“안 가. 어차피 형들이 술만 죽어라 먹일 게 뻔한데.”

인상을 쓴 하랑이 넌더리를 냈다. 술자리 자체가 싫다기보다는, 윗 학번만 섞였다 하면 다음 날 죽어나게 되는 뒷감당을 해낼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공승빈처럼 주량이 버텨 주는 편도 아니었고. 오죽했으면 학번 단체로 뒤풀이가 포함된 과 행사를 기피하는 현상도 생겼다.

“그래도 이번에 복학한 선배들 꽤 많은데. 가서 얼굴도 트고, 친해지면 좀 좋냐. 족보가 그냥 나오는 게 아니라니까?”

거기다 저 성격처럼 웬만한 형, 누나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게 아니고서야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는 술자리였다.

“싫다고. 그렇게 좋으면 너 혼자 가든가.”

“안 그래도 우리 학번 애들 몇 없는데. 나 혼자 가라고?”

끊이지 않는 닦달에 견디다 못한 하랑이 욕지거리나 한가득 퍼부을 생각으로 걸음을 멈춰 섰을 때였다. 계속 전화기를 만지고 있던 승빈이 곧 그 화면을 내밀어 보였다.

“혼자 가면 심심하잖냐.”

하랑은 이미 전송 표시된 메시지 내용을 보고는 제 뒷목을 잡았다.

“가긴 누가 가. 씨발아.”



불이라도 지핀 듯 목울대가 뜨겁다. 그 언저리를 긁어 대던 하랑이 제자리로 돌아오자마자 테이블 위로 이마를 박았다. 시발, 내가 여기 오는 게 아니었는데. 정신을 차리면 승빈의 목부터 베러 가야겠다고 생각한 하랑이 건조한 숨을 내뱉었다.

“……아.”

안 그래도 무리를 하고 있다가 소주 한 병을 생으로 밀어 넣으니 상태가 영, 말이 아니었다. 하여간 곱게 마시는 꼴을 못 봤다지만, 뒤풀이 시작부터 의리주 판을 벌일 줄은 몰랐다. 이래서 안 오려고 했는데. 하랑은 그 와중에도 제 몸에서 나는 술 냄새가 역해, 작게 몸부림을 쳤다.

술기운이 돌자 주변의 소음들이 두세 배로 증폭되어 들려왔다. 사정없이 울려 대는 고막 통에, 뱃멀미를 하듯 속이 요동치기까지 했다. 그러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기분을 느낀 하랑이 다급하게 제 가방을 집어 들었다.

“어이, 임하랑이. 어디 가려고.”

동시에 들고 있던 가방마저 도로 내려놓은 하랑이 반쯤 포기한 뉘앙스로 ‘안 가요’ 하며 신경질조의 대답을 내놓았다.

“내가 모르고 있을 줄 알았냐.”

시체처럼 엎어져 있는 하랑의 등 위로 제 팔을 얹어 놓은 기택이 즐겁다는 듯 낄낄거렸다.

그래. 처음부터 이 인간과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된 게 문제였다. 어쩐지 가위바위보를 하는 족족 다 질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 모든 게 기택의 소행이라 확신한 하랑은 속으로 시근덕거리길 반복했다.

“야. 근데 이 새끼는 왜 안 오냐?”

“아까 근처라고 하던데? 금방 오겠지.”

“한창 재밌었는데. 좋은 구경은 다 놓쳤네.”

그게 무슨 소리냐며 홍아가 크게 웃자 기택은 ‘마지막은 일부러 짜지도 않았는데, 얘가 진짜 진 거잖아’ 하며 피식거렸다. 하랑은 그 듣기 싫은 소리를 일부러 밀어 내려 귓바퀴 근처를 손바닥을 막았다. 그러다 갑자기 일어선 홍아가 하랑의 등을 흔들어 댔다.

“야. 임하랑. 너 괜찮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도 모르게 엄청나게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홍아의 말소리에 대충 고개를 주억인 하랑이 다시 테이블 위로 이마를 떨어뜨려 놓았다. 순간 힘 조절을 하지 못했던 탓에, 부닥친 충격이 그대로 골까지 전해졌다.

“엄기택, 적당히 좀 하지. 아직 한 시간도 안 지났는데.”

“야, 내가 뭘. 너도 실컷 같이 해 놓고 그런다?”

“난 얘가 이렇게까지 술 못 마실 줄은 몰랐지.”

귓전을 어물거리는 대화를 들을 새도 없이, 제 머리를 감싸고 있던 하랑은 혼자서 막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던 와중에 떠들썩한 인사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뭔가 싶어 고개를 들었던 기택이 곧 누군가를 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야. 오유원!”

그제야 기택의 얼굴을 발견한 유원이 바람결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하며 그 옆자리에 앉았다. ‘다들 많이 마셨어?’ 유원이 맞은편에 앉아 있던 홍아에게 웃으며 물었다. 그 물음에 홍아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기택이 끼어들었다.

“야. 아니, 뭐 하느라 이제 오냐?”

“아연이 집까지 데려다주고 오느라.”

아. 또 시작이네. 기택은 진저리가 난다는 투로 고개를 저었다.

“왜. 경영과 사랑꾼이면 저 정도는 돼야지.”

유원에게 잔을 건네주고 있던 홍아 역시 작게 키득거렸다. 유원은 그 말이 영 적응이 안 되는 듯, 작게 헛웃음을 지었다.

“누가 그러는 거야. 그런 말은 또 어떻게 지어낸 거고?”

“어차피 그게 너라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니까, 걱정 마.”

“야야. 됐고. 왔으니까 다 같이 한잔해.”

각기 다른 목소리가 오고 가는 것과 동시에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눈살 하나 구기지 않은 얼굴로 빈 술잔을 내려놓던 유원이 문득, 테이블 모서리에 처박혀 있는 뒤통수 하나를 발견했다.

“얘는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잠결에 정신이 든 하랑이 무의식적으로 귀를 세웠다.

“엄기택. 너 또 애들 괴롭혔어?”

귓가를 부드럽게 울려 대는 말소리가 어딘가 알 듯 말 듯 하다. 잠기운을 이겨 내려 안간힘을 쓰던 하랑이 미간을 좁혔다.

“뭘 괴롭혀. 걔 방금 의리주 마셔서 그래.”

“어차피 다 판 짜고 했을 거면서?”

“야. 딱, 한두 번만 그랬다. 쟤가 술이 약한 거야.”

숨은 쉬고 있는 건가. 한참 동안 테이블 위로 코를 처박고 있는 모습을 보다 못한 유원이 결국엔 손을 내밀었다.

“보자. 누군데?”

푹 꺾여 있는 목덜미를 슬며시 그러쥐고 방향을 틀어 주던 유원이 그 얼굴을 확인하고는,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얘였어?”

“너 얘 아냐?”

그때까지 잘만 누워 있던 하랑이 갑자기 상체를 들썩거렸다. 순식간에 역한 기운이 밀려들었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다급하게 입을 틀어막은 하랑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테이블 아래로 무릎이 부닥치자마자 우당탕,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서너 개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어. 임하랑, 너 괜찮냐?”

“세상에. 쟤 얼굴색 좀 봐.”

낯빛이 새하얗게 질린 하랑이 무어라 대답도 하지 못하고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그대로 화장실 칸 문을 열고 들어선 하랑이 변기에 얼굴을 집어넣었다. 있던 장기마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에 절로 욕이 새었다.

“……윽.”

그렇게 한참을 변기에 기대 있던 하랑이 퍼뜩 고개를 치켜들고는 엉망이 된 입가를 아무렇게나 닦아 냈다. 간신히 몸을 세운 뒤 화장실 문을 열고 나서려는데, 갑자기 초록색 병 하나가 눈앞을 차지하고 섰다. 뭐야. 제 돈으로는 죽어도 사 먹지 않는, 숙취 해소제를 확인한 하랑이 눈살을 찌푸렸다.

“…….”

언제부터 와 있던 건지도 모를 유원이 말간 눈을 하고서 하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뒤늦게 그 얼굴을 확인한 하랑이 작게 움찔거렸다. 어둑한 조명 아래서도 눈코입의 음영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 분위기에 하랑은 왠지 모르게, 방금 전에 닦았던 입가를 옷소매로 연거푸 훔쳐 냈다. 얼마나 힘을 줘서 닦아 냈으면, 그새 입 언저리가 따가워지는 것도 같았다.

“안 받을 거야?”

“아.”

유원이 제가 내민 손을 가볍게 까딱였다. 주는 대로 그것을 받아 들었던 하랑이 잠시 멈칫하고는, 받았던 걸 도로 내밀었다.

“저 괜찮은데요.”

아무래도 속도 없이 넙죽 받자니, 여간 찝찝한 게 아니었다. 물론 이게 푼돈도 아니겠거니와 아무리 성격이 좋다고 한들 영문도 모를 필요 이상의 친절도 사양이었고. 하랑이 다시 내민 손을 쳐다보고 있던 유원이 갑자기 맥락도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아예 하랑의 손에 들려 있던 걸 가져가 뚜껑까지 연 채로, 하랑에게 그것을 건네주었다.

“바람 쐬는 김에 사 온 거니까 받아.”

그러니까 누가 사다 달라 했냐고. 하랑은 불편해 죽겠다는 뉘앙스로 결국엔 뱃가죽을 쓸어내리고 있던 손도 멈췄다.

“나 뭐 안 탔는데.”

그 의증 섞인 눈초리를 마주하고 있던 유원이 도리어 변명을 했다.

“편하게 생각하고 마셔.”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두 번 거절하는 것도 난감했던 하랑이 결국엔 슬쩍 눈치를 보고는, 들고 있던 걸 입 앞으로 가져다 댔다. 목울대가 두어 번 일렁이고, 단숨에 액체를 삼켜 낸 하랑이 빈 병을 쓰레기통 속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텅, 하는 시원한 소리가 화장실을 울렸다. 그리고 곧장 세면대 앞으로 간 하랑이 떨어지는 물줄기에 손을 집어넣었다. 유난히 손을 열심히 씻고 있던 하랑이 이미 깨끗해질 대로 깨끗해진 손을 두어 번 더 반복해서 씻어 냈다.

왜 안 가고 있는 거지. 뒤쪽에서 꽂히는 시선에 괜히 신경이 쓰였다.

“과제는 잘 마무리했어?”

며칠 전을 말하는 건가. 하랑은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덕분에요.’ 군더더기 하나 없는 문장이 깔끔하게 떨어졌다. 그 거울 너머로 비친 얼굴을 유원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술기운 때문인 건지 1초에도 눈을 몇 번씩 깜빡거리는 얼굴이 신기했다. 생긴 건 나름 순하게 생겨 놓곤, 하는 행동이나 말들이 티끌 하나라도 박힌 것처럼 뾰족하기도 했고. 감정이나 의사 표현에 보기보다 투박해 보이는 것도. 낯가림도 생각보다 심한 것 같은데.

‘공부 좀 하세요?’

그런 부탁은 도대체 어떻게 한 건지. 당연히 장난인 줄 알았다. 내기에서 지면, 시키는 대로 억지로 해야 하는, 뭐 그런 거. 공승빈 친구라면 못할 것도 없지 싶었고. 어차피 같은 과 후배에다, 약속 시간까지 여유도 있겠다, 적당히 놀아 주고 갈 생각이었는데

“잘 마셨어요. 감사합니다.”

진심이었나?

“저, 안 가 보세요?”

유원은 뒤늦게 벽에 기대고 서 있던 등을 떼고서 물었다.

“이름이 뭐야?”

하랑은 순간 당황했다. 이렇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로 동문서답을 할 수가 있나? 친하게 지내자고 한 건 그쪽이면서. 아니, 그전에 제대로 된 통성명 한번 하지 않은 것 가기도 하고.

“임하랑이요.”

하는 수 없이 제 이름을 밝힌 하랑이 멀쩡한 손을 다 쥐락펴락하며 작게 눈살을 구겼다. 자기 이름을 꺼내는 게 어색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알고 계신 줄 알았어요.”

“아. 알고는 있었는데…….”

“네?”

하랑이 다소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되묻자, 천천히 눈을 접어 웃은 유원이 마저 말을 했다.

“직접 들으면 더 좋을 것 같아서.”

부드럽게 말려 올라가는 눈두덩이 살이 반달 모양을 그렸다. 하랑의 입술이 마비라도 걸린 듯 움찔거렸다. 도대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아. 잠시만요….”

응? 유원의 어깨를 옆으로 밀쳐 낸 하랑이 또다시 들끓는 속을 붙든 채 화장실 칸 안으로 들어섰다. 얼굴에 몰린 열이 체한 것처럼 내려갈 생각을 않더라니, 순식간에 반응이 왔다. 약발 엄청나네. 변기를 안은 하랑이 헐떡거리며 생각했다.

“너 되게 못 마신다.”

“그 정도는 아닌, 윽…….”

“주는 대로 받아먹다가 큰일 난다, 너.”

하랑은 수긍을 하는 의미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까딱 잘못했다간 정말, 생사를 넘나들 지경이었으니까. 뒤에서 제 등을 토닥이는 손길을 느낀 하랑이 마저 거사를 치렀다. 그러고 난 뒤에야, 한껏 뒤집혔던 속이 차츰 가라앉았다. 이제는 제대로 게워 낸 것도 없는 변기 물을 쳐다보고 있던 하랑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제 진짜 가 보셔도 되는데요.”

여태 나란히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던 유원이 하랑의 등에 붙어 있던 손을 떼어 냈다.

“너 아직도 내 이름 몰라?”

하랑이 감았던 눈을 흐릿하게 떴다. 못마땅해서인가. 살풋 미간을 좁힌 하랑이 어림짐작 끝에 날숨 섞인 말을 뱉었다.

“선배라고 부를까요?”

유원은 어이가 없단 듯 실소를 터뜨렸다.

“지난번에 얘기한 것 같은데.”

그러니까 뭐를. 그러다 갑자기 다가온 유원의 손이 하랑의 미간 사이를 살살 어루만지며 주름을 펴냈다. 지레 놀란 하랑이 변기를 잡고 있던 손도 놓을 뻔한 채로 그 손을 밀어 냈다.

“아. 저기요.”

“저기요라니.”

얼굴 위로 지는 그림자에 눈만 어물어물거리고 있던 하랑이 순간, 제 시야를 통해 환한 얼굴을 마주 보고 말았다.

“친해지자니까. 형이라고 해.”



***



잊을 만하면 하품이 터져 나왔다. 눈가에 고인 물기를 닦아 낸 하랑이 묵직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두 시간의 공강을 버틴 것도 모자라 세 시간짜리 연강을 듣는 일은 늘 죽을 맛이었다. 심지어 아는 얼굴도 하나 없는 교양 수업이었다. 처음부터 시간표만 잘 짰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아직도 한 시간가량이나 남아 있는 시간을 본 하랑이 끔찍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손에 잡힌 책장을 구겼다.

이미 수업을 듣는 태반이 지루함에 짓눌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외에는 아예 고개를 책상에 처박고 있거나, 전화기를 만지고 있을 뿐이었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무기력한 얼굴의 하랑이 멍하니 앞을 보았다. 당연하단 듯, 졸음이 몰려왔다.

“……인간의 심리 중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이 바로 사랑과 관계된 감정입니다. 그중에서도 그 처음과 관련한 경험만큼이나 꾸준히 회자되는 게 또 없죠.”

되게 진부하네. 가물거리는 눈을 감고 있던 하랑이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이래서 인문과 관련한 교양은 듣기 싫었다. 정해진 답도 없는 것을 사유하고, 통찰하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말이 안 되는 거였다. 첫사랑이니 뭐니, 그딴 우스운 얘기은 더 이상 믿고 싶지도 않았고. 그때부터 아예 팔짱을 낀 하랑이 고개를 아래로 떨군 채 본격적으로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번 중간고사 과제는 2인 1조로 진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