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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곡선에서 나의 모서리까지 4화

1. 공백 (4)


마주 앉아 있는 유원의 차분한 시선을 느끼고 있으면 가슴 언저리가 따끔거려 오는 것도 같았다. 그것조차 못마땅했던 하랑은 입술만 씹어 대다 말고, 홧김에 날숨 섞인 말을 뱉었다.

“하. 누가 그런 개새끼한테 처음을 붙이고 싶…….”

뒤늦게 하던 말을 멈춘 하랑이 움찔거렸다. 내가 지금 뭐라는 거야. 정수리 위를 헤집고 있던 손으로 하랑이 제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지나간 일에 순간 지나치게 몰입을 해 버린 탓에 불쑥 상스러운 말이 튀어 나갔다. 해도 꼭, ‘개새끼’인 게 뭐냐고. 당연히 상대는 여자라고 생각을 하고 있을 텐데.

“…….”

아까부터 하랑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메모를 하고 있던 유원은 곧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여백 위에 글자를 써냈다.

개새끼. 그 정갈한 세 글자를 확인한 하랑이 경악을 했다.

“아, 형.”

거칠게 의자를 밀고 일어선 하랑이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놀란 듯 그 얼굴을 올려다본 유원이 뒤늦게 어, 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좋네.”

얼굴이 새빨개진 하랑이 뭐냐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가요. ‘개새끼’가요?”

맥락은 있지도 않은 유원의 말에 하랑이 사납게 되물었다. 고개를 살랑 저은 유원이 천연덕스럽게 대답을 했다.

“너 형이라고 처음 불렀잖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괜찮아. 뭐 어때.”

흥분을 한 탓에 반 톤은 더 올라가 있는 하랑의 목소리가 우스운 건지, ‘개새끼’란 단어 위로 두 줄을 직직 긋던 유원이 넌지시 웃으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 유치하게 좀 굴어 본 거야.”

너 괜히 신경 쓸까 봐. 달래는 듯 다가서는 말에 하랑은 제가 다 무안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어쩐지 일방적으로 휘둘리는 듯한 느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나지막한 숨을 내뱉은 하랑이 속으로 진정을 하고서, 공연히 허공을 맴돌던 두 손을 다시 테이블 위로 얹었다.

“형은요?”

제자리에 풀썩 하고 앉은 하랑이 침착하게 유원을 보았다.

“응?”

손을 앞으로 뻗은 하랑이 유원에게 들려 있던 펜과 종이를 가져왔다. 유원의 시선이 그대로 하랑의 쪽을 따라왔다.

“어땠냐고요.”

하랑은 차례가 넘어갔다는 걸 암시적으로 이야기했다. 유원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지, 목울대를 울리는 소리를 내며 제 옆에 있는 커피 잔을 손끝으로 매만지기를 반복했다.

“잠시만.”

전화가 울렸다. 양해를 구한 유원이 전화기를 집었다.

“응. 왜?”

눈에 띄게 부드러운 말투였다. 몇 마디가 자연스럽게 오고 가면서, 얼핏 여자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지금?’ 하며 되물은 유원이 어딘가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나 과제하고 있는 중이야.”

벽 한 칸에 걸려 있는 시계를 확인한 유원이 살풋 인상을 썼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고 있기만 하던 그가 나직한 한숨 소리를 흘리며 대꾸를 했다.

“알겠어. 갈게.”

누가 봐도 미안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유원이 천천히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흘끔 올려다본 하랑이 몇 모금도 마시지 않은 음료를 한 바퀴 휘, 저으며 말했다.

“가 보셔도 돼요.”

“미안해서 어쩌지. 내가 불러 놓고.”

하랑이 별거 아니란 식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애초에 시간 좀 뺏겼다고, 화를 낼 만한 바쁜 인간은 되지 못했다. 어차피 과제를 하면서 했어야 할 말을 속 시원하게 꺼내 놓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내 부분은 워드로 정리해서라도 꼭 보내 줄게. 감상은 각자 경험담에 대해 생각나는 것들 위주로 쓰는 걸로 하고.”

“이론 부분은 어떻게 할까요?”

“내가 해 놓을게.”

그게 핵심이고, 가장 어려운 거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린 하랑이 의아한 눈치로 그에게 물었다.

“그렇게 해도 되겠어요?”

어차피 도움도 안 될 테지만,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양심껏 굴었다. 어질러진 자리를 정리하고 있던 유원이 사선으로 하랑을 보았다. 슬그머니 올라가는 한쪽 입가가 매끄러웠다.

“어차피 이론은 자신 없잖아?”

“…….”

하랑은 그 슬쩍 올라가 있는 입꼬리를 보고는 정곡이라도 찔린 것만 같았다. 그 표정을 살핀 유원이 부스스 웃었다.

“실전만 잘하면 그만이지.”

유원은 넋을 놓고 있는 하랑에게 정신을 차리란 듯 이마를 톡, 하고 쳤다. 하랑이 무심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렇게 해서 다음에 만나자.”

착한 눈으로 인사를 건넨 유원이 제자리에서 일어섰다. 뒤에서 카페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던 하랑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하고서 남은 커피를 습관처럼 들이켰다. 이제껏 느껴 본 적 없는 쓴맛이 밀려왔다. 윽. 발칵 인상을 쓴 하랑이 혀끝을 달싹거렸다.

“…….”

상황은 어느 정도 예상이 됐다. 사람 하나 사귀면서, 뭐가 그렇게 심각한 일이 다 있다고 전화 한 통에 바로 달려가는 건지. 하기야, 사랑꾼이니 뭐니 하는 소문도 아무한테나 붙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하랑이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남 생각을 할 바에, 차라리 게임 한 판을 더 하는 게 자신한테 이로울 거라 생각한 하랑이 전화기를 꺼냈다. 그렇게 의자 등받이에 구부정하게 기댄 등이 미끄러지는 줄도 모른 채 집중을 하고 있을 때였다.

“잠깐만.”

뒤쪽에서 들이닥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하랑이 들고 있던 전화기를 제 허벅다리 위로 떨어뜨렸다.

“물어본다는 게 깜빡해서.”

아직도 상황 파악이 덜 된 하랑은 언제 돌아왔는지도 모를 유원의 얼굴을 올려 보았다.

“뭘요?”

하랑이 곧 동그래진 눈으로 반문을 했다. 그사이에 어디까지 갔다 온 건지, 작은 숨소리가 사방으로 흩뿌려지고 있었다.

“연락해도 되지?”

하랑은 얼결에 대답을 내놓았다. ‘네.’ 그 말에 모나지 않은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제야 만족한 듯 유원이 쥐고 있던 하랑의 손목을 놓았다. 그리고 가볍게 손을 흔든 유원이 다시 발길을 돌렸다. 동시에 하랑이 생각했다. 정작 전화번호 같은 건 주고받지도 않았는데.

“저기, 형.”

돌아서려는 손목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하랑이 입술을 달싹이다, 망설이는 것도 잠시였다.

“연락처는요?”

“아. 괜찮아. 안 받아도 돼.”

이미 공승빈한테 받았거든. 유원이 웃으며 말했다.



***



시험이 다가오자, 과제가 쏟아졌다. 늦저녁이 돼서야 부랴부랴 전공 과제를 시작한 하랑이 간신히 마침표를 찍었다. 마감일에 닥쳐서 쓴 보고서가 그리 수준 있을 리도 없었지만, 어떻게든 해낸 것만으로도 하랑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자정에 가까워진 시각을 확인하고서 서둘러 메일을 전송했다.

맘 편히 기지개를 켜던 하랑이 허리를 뒤로 꺾다 말고 잠시 멈칫했다. 유원과 다시 만나기로 한 날이 이쯤이지 싶었다. 다급하게 달력을 확인해 보니, 당장 오늘 날짜에 표시가 돼 있는 걸 발견했다. 하랑은 확인 사살이라도 당한 듯 절망에 빠졌다. 전공 과제도 미루는 판에, 교양 과제라고 해서 미루지 말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아. 밤새우게 생겼네…….”

머리를 짚은 하랑이 벌써부터 내려앉는 눈꺼풀을 힘겹게 떠 냈다. 온갖 스팸으로 쌓여 있는 메일함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화면 하단에 메신저 알림이 떴다.

[ 오전 12:03. 공승빈: 야 너 전공 제출함? ]

[ 오전 12:04. 공승빈: 나 열람실에서 처자다가 이제 일어났는데 어떡하냐 ]

[ 오전 12:04. 공승빈: 교수가 시간 엄수라고 했는데 ㅅㅂ ]

마우스 휠을 굴려 대던 하랑이 그 메시지 답장으로 ‘ㅂ’, ‘ㅅ’ 두 초성만 입력을 하여 전송했다. 메시지 옆에 달린 1이 사라지자마자, 전화가 걸려 왔다. 통화음이 두 번, 세 번 반복될 때까지도 메일함을 확인하고 있던 하랑이 귀찮다는 듯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이렇게 전화를 걸 시간에 제출을 하겠다.”

-아니, 씨발. 나 보고서 파일, 내 집 컴에 있어.

나 지금 존나 좆된 거지? 시답잖은 승빈의 푸념을 대충 흘려듣고 있던 하랑이 스크롤을 아래로 내리다, 유원의 이름으로 와 있는 메일을 하나를 발견했다. 하랑이 한쪽 어깨에 전화기를 끼워 넣은 채, 메일에 첨부된 파일을 열었다. 화면 위로 검은 글자들이 하나둘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첫문장 앞에 놓인 마우스 커서가 깜빡깜빡거리고 있었다.

「언제나 좋은 사람이고 싶었다. 내가 사랑하고, 그만큼의 사랑을 받는 만큼.」

긴 글에 얽히고설킨 문장들을 살피던 하랑은 곧, 심각해진 눈을 하고서 화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이 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늘어났고…… 내가 그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걸 알게 될 때마다 잘못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 참. 유원이 형이 너 번호 묻던데.

「첫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전달은 됐나 모르겠네. 야. 듣고 있냐?

「내가 평생을 노력해 온 최선은 그들이 하는 사랑이 아니었다.」

“…….”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단락을 확인하고서야 하랑은 마우스 휠을 굴리던 손을 멈췄다. 겉으로만 보아도 알 수가 있었다. 같잖은 평가를 위한 글과는 달랐다. 진심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의 문장들이, 모두.

-야. 듣고 있냐니까?

[ 오전 12:09. 오유원: 오늘 오후에 볼까? ]

“…….”

잘 알지도 못하는 이름 앞에서. 하랑은 그 몇 문장만으로도, 은근한 동질감 따위가 들려고 했다.



***



“야. 일어나, 새끼야.”

승빈이 후드를 뒤집어쓴 하랑의 뒤통수를 쳤다. 앞자리에서 멀쩡히 눈을 뜨고 있던 하랑이 눈알이 다 빠질 것만 같은 충격을 느꼈다.

“왜. 새끼야.”

홱, 고개를 돌린 하랑이 흉흉하게 말을 뇌까렸다. 승빈은 예상도 못했다는 얼굴과 함께 머쓱해졌다.

“뭐야. 안 잤냐?”

“내가 맨날 처자는 줄 아냐.”

거, 되게 까칠하네. 승빈은 저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하랑의 부릅뜬 눈을 보고서 생각했다. 밤잠을 설치기라도 한 건지, 퀭한 눈가에 짜증이 그득했다. 승빈이 뒤늦게, ‘미안’ 하고서 그다지 진심도 아닌 사과를 건넸다. 마침 강의가 끝나려고 하는 단상을 하랑에게 가리켜 보였다. 그제야 수업 내내 쳐다보고 있던 종이를 챙겨 든 하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거 뭐냐. 임하랑?”

“뭐가.”

슬리퍼를 신은 발로 의자를 툭, 하고 밀어 낸 하랑이 제가 들고 있던 종이를 슥, 쳐다보았다.

“교양 조 과제.”

“유원이 형이랑 한다는 거? 쌉구라 아니었냐?”

강의실 뒷문을 나서던 하랑이 승빈의 정강이를 발로 찼다. 억, 소리를 낸 승빈이 복도 한가운데에서 고함을 막 내질렀다. 옆에 서 있는 것조차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그 옆을 지나친 하랑이 막힘없이 복도를 걸어 나왔다.

“야. 같이 가자고.”

경영관 현관까지 나온 승빈이 절름발로 하랑의 뒤꽁무니를 쫒았다. 뭐가 이렇게 빨라. 하랑의 옷깃을 잡아 세우려던 승빈이 실수로 후드를 잡아당겼다. 동시에 하랑의 모자가 뒤로 죽, 벗겨지고 말았다. 부스스하게 일어선 하랑의 머리칼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어. 야, 왜 갑자기 멈춰 서고 난린데.”

승빈은, 이거 또 한 지랄하겠네. 하는 생각으로 애써 침착하게 하랑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별다른 반응도 없이 정면을 향해 가만히 멈춰 서 있는 하랑을 확인한 승빈이 곧, 그 앞에 위치한 분수대 위로 시원하게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를 보았다.

“오. 총장님, 기분 좋으신가 본데.”

학기 중에 몇 번 볼까 말까 한 장관에 승빈이 감탄을 했다. 급기야 전화기까지 꺼내어 사진 촬영을 하기에 이르렀다. 승빈이 하랑의 팔등을 툭, 치며 말했다.

“저거 다 우리 등록금 아니야. 너도 빨리 찍어 둬.”

1초에 몇 번씩 찰칵이는 소리 너머로 하랑은 분수대 뒤편에서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유원과 아연을 바라보았다. 화기애애한 담소를 나누고 있는 둘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거기다 아연의 뽀얗고, 발그레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동화 속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아기자기한 느낌까지 났다.

그 옆에서 웃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유원의 얼굴에 하랑이 천천히 눈살을 구겼다. 그러곤 꼭 배탈이라도 난 듯, 제 뱃가죽을 스멀스멀 쓸어내렸다. 아지랑이처럼 보이지도 않는 느낌이 단전을 중심으로 해서 피어올랐다.

“어, 뭐야.”

한참 동안 제 카메라 뷰를 살피고 있던 승빈이 뒤늦게 그들을 발견했다. ‘너 알고 있었냐?’ 그 물음을 듣고서야 시선을 돌린 하랑이 고개를 주억였다.

“와. 근데 아연이 누나 진짜 예쁘지 않냐?”

“넘보지 마. 새끼야.”

입술 밖으로 헛바람을 다 흘리며 시큰둥하게 쏘아붙인 하랑이 자리를 뜰 생각으로, 발 방향을 틀었다.

“야. 말은 똑바로 해라. 내가 언제 그랬다고!”

하릴없이 큰 승빈의 목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 있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아는 얼굴을 발견한 유원은 먼저 손인사를 건넸다. 승빈이 그에 반갑게 답인사를 하자, 유원이 자연스레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에 어정쩡한 걸음까지 멈춰 선 하랑이 홱 고개를 돌려 승빈을 노려보았다.

내가 뭘? 승빈이 억울하다는 듯 항변을 하는 새에 아연과 유원이 그 옆까지 왔다. 하랑은 마뜩찮은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부러 그 뒷전에 멀찍이 섰다. 그 불거진 표정을 살피고 있던 유원이 도리어 나지막이 물었다.

“왜 싸우고 있어?”

“얘가 시비를 걸어서요.”

시비는 무슨. 하랑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눈으로 승빈을 흘겼다. 하지만 이미 하랑은 승빈의 관심 밖이었다.

“잘 지내셨어요? 누나.”

승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아연에게 말을 건넸다. 해사한 얼굴로 반긴 아연이 승빈과 익숙하게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그 허물없는 사이를 확인하던 하랑은 승빈의 대단한 친화력에 내심 혀를 두르며, 시선을 거뒀다. 그러다 제 머리통 위로 떨어지는 무언가에 하랑이 흠칫거리며 놀랐다.

“머리는 왜 이러고 있어?”

뒤에 선 유원이 하랑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매만졌다. 그 목소리에 어깨를 와짝 움츠린 하랑이 냉큼 뒤를 돌아보자, 제 손 틈 사이에 얽힌 머리칼이 부드럽게 빠져나가는 걸 확인한 유원이 시선을 내렸다. 하랑의 휘둥그레진 눈을 마주한 유원은 웃기다는 듯 한쪽 눈가를 접으며 작게 웃었다.

“누가 잡아먹는대?”

하랑이 입술을 뻥끗거렸다.

“노, 놀라서요.”

“뭐가?”

유원이 하랑의 목덜미에다 친근하게 제 양팔을 둘렀다. 짐짓 눈살을 찌푸린 하랑이 잇새를 꾹 물었다. 어떻게 만날 때마다, 늘 이런 식으로. 사람을.

“아니, 형. 좀….”

팔을 들어 올린 하랑이 유원의 어깨를 슬쩍 밀어 냈다. 그 목소리에 승빈과 대화를 나누던 아연이 이쪽으로 얼굴을 향해 왔다. 두 팔로 하랑을 끌어안고 있던 유원이 듣기 좋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아연에게 하랑을 소개했다.

“우리 과 친한 후배. 2학년, 임하랑.”

아연의 말간 눈을 마주한 하랑이 움찔거렸다. ‘안녕하세요.’ 숫기 없는 하랑의 한마디가, 숙인 고개와 함께 짤막하게 튀어나왔다.

“얼굴만 보고, 신입생인 줄 알았어요. 반가워요.”

그에 비하면 반갑기 그지없는 눈으로 활짝 웃으며 다가온 아연이 다가와 손을 건넸다. 백옥을 담아 낸 것처럼 새하얀 손목이 가늘었다. 아래로 숙이고 있던 시선을 들 생각도 못하던 하랑이 대충 그 손을 잡고는 금방 놓았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제 목울대 주변을 둘러싼 살갗이 자꾸만 거슬려서.

“사범대 4학년, 이아연이에요. 잘 부탁해요.”

그 인사말에 겨우 고개를 든 하랑이 괜히 사람 좋은 척 입가를 끌어당겨 웃어 보였다. 입술 끝에 쥐가 날 것 같았다. 그러다 옆에 있던 승빈과 눈이 마주쳤다. 어딘가 박제된 것처럼 유원의 팔 아래서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하랑을 본 승빈이 그 난처한 기색을 읽고는 폭소를 했다. 한번 터져 버린 웃음을 참으려 제 눈두덩이를 손가락으로 찌르던 승빈이 끅끅거렸다. 유원은 왜 저러냐는 듯 작게 실소를 내뱉었다.

“어디 가는 길이었어?”

“다음 수업 가려고요.”

한 뼘 위에 있는 유원의 목소리가 하랑의 귓전을 타고 들었다. 하랑은 숨이 다 막히는 기분에, 파묻혀 있다시피 한 제 고개를 유원의 팔 밖으로 빼냈다.

“감상은 써 왔고?”

“어느 정도는요. 그런데, 저기….”

응? 유원의 되묻는 목소리가 나긋했다.

“…시간, 다 됐지 싶은데요.”

하랑은 이만 떨어져 달라는 의사를 에둘러 말했다. 유원은 그 말에 순순히 제 팔을 풀어 주었다. 담백해도 너무 담백하기 그지없는 그 반응에, 하랑은 가슴 언저리를 옥죄던 팔이 떨어져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불만족스러운 듯이 혀를 찼다. 이런 줄 알았다면 진작 얘기했을 텐데. 못다 한 아쉬움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