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호구의 호구 4화

1. 호구가 좋아하는 사람 (4)


잠시 주어진 10분간의 휴식에 선호는 다른 아르바이트생들과 약간은 거리를 띄운 채로 휴게실에 앉아 핸드폰을 바라봤다.

[ 하준 ]

벌써 외우고 외운 열한 자리의 번호를 선호는 힘들 때마다 쳐다보고는 한다. 아마 자신이 먼저 이 번호를 누를 일이 없겠지만, 선호는 마치 그 번호가 하준, 그 자체라도 되는 것처럼 빤히 바라보고는 했다.

바보같이 울기까지 했는데도 하준은 착하게 자신을 카페에 데려가 함께 음료를 마셨고, 심지어 웃어 주기까지 했다. 선호는 하루 종일 카페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느라 정신이 다른 곳에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같이 과제도 해야 하니까, 이번 주말에 시간 있어?’

‘응…. 응.’

‘그럼 주말에 만나지 뭐.’

주말에, 하준을 만난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모든 게 힘이 났다. 선호가 다시 힘을 내서 일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선호 형, 혹시 내일 두 시간 일찍 와 줄 수 있어요?”

“응?”

“제가 약속이 있어서 좀 늦을 거 같거든요. 사장님께는 제가 말씀드려 놓을게요.”

평소처럼 오는 거야 문제는 없지만 두 시간이나 일찍 오게 되면 저녁밥도 못 먹고 일을 해야만 한다. 선호는 자신의 앞에 있는 알바생을 바라봤다. 평소와는 달리 대답이 없는 선호를 보고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순간 선호의 표정이 굳고, 손가락 끝이 차갑게 식었다. 이런 상태에서 선호가 거절의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선호가 겨우 입꼬리를 살짝 올려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싸! 고마워요, 형!”

순식간에 인상을 푼 알바생이 선호의 수락에 고맙다고 웃으며 사라졌다. 그러고는 다시 자신의 무리로 돌아가서 무언가 말하는 것 같았다. 선호도 그제야 몸에 긴장을 풀었다. 사실 선호는 이 순간이 가장 무섭고 두려웠다.

내가 이걸, 고칠 수 있을까? 하준은 도와주겠다고 말했지만, 사실 선호는 자신이 없었다.



선호가 눈을 뜨자마자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고는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7시 30분, 하준과 만나기로 한 시간은 오후 1시. 아직 다섯 시간이나 넘게 남았다. 어젯밤 무리해서 대타까지 하느라고 거의 피곤에 절은 상태로 집에 돌아온 선호였다. 그런데도 하준을 만난다는 생각에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어서 밤에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나도 피곤하거나 졸리지가 않았다.

“뭘 입지…….”

선호는 옷장 앞에 선 채로 한참을 고민했다. 대부분이 검정, 회색빛 등의 무채색인 남방만이 가득했다. 뭐가 뭔지 제대로 구분도 가지 않는 그런 옷들. 평소에는 옷 고를 고민 따위 하지 않아도 돼서 그런 옷들만 가득 있는 옷장이 편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한참을 뭘 입을지 고민하며 들떠 있던 선호가 이내 혼자 수그러들었다.

과제 때문에 만나는 거지, 다른 거 없잖아. 괜히 평소랑 다르면 더 이상할 거야.

선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평소랑 똑같은 검정색 체크무늬 남방에 청바지를 꺼냈다. 괜히 두근거리고 설레고, 그러지 말자. 하준이 알게 되면 얼마나 나를 싫어하겠어.

지금이 딱 좋았다. 같이 과제를 하는 사이. 동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지금. 그래도 말이라도 할 수 있는 거 자체에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지 모른다.

어서 시간이 흘러서 하준과 만나기로 한 1시가 되었으면 좋겠다. 선호는 시계를 빤히 바라봤다. 그렇게 하면 시간이 더 빨리 가기라도 한다는 듯이.



하준과 선호가 만나 처음으로 온 곳은 미용실이었다. 선호는 하준이 자신이 자주 가는 데가 있다며 데려온 곳이 미용실일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선호가 멀뚱멀뚱 얼이 빠진 사이에 하준은 아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형, 오랜만이야.”

“하준! 오랜만이네! 그때 이후로 연락도 없더니만… 무슨 일 있어?”

“아니, 일은 무슨, 그냥 이래저래 정신없었지. 형, 오늘은 내가 아니라 내 친구 머리하려고.”

하준이 그렇게 말하고 선호를 끌어당겨 앞에 있는 숍 원장에게 보여 주었다. 그때가 뭔지, 원장과 하준은 어떤 관계인 건지 이런저런 것들이 궁금했지만 선호는 그저 말없이 제 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원장은 하준보다 살짝 키가 작았지만, 그래도 큰 편이어서 자신보다 작은 선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원장이 선호를 보더니, 말했다.

“이렇게 귀여운 친구는 또 어디서 데려왔대?”

그리고 그가 덥석 선호를 껴안았다. 선호는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뜨고 하준을 바라봤다. 하준은 익숙하다는 듯이 선호에게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 보일 뿐이었다. 태연하게 느껴지는 하준의 웃음에 선호가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근데 머리가 너무 덥수룩하다. 미용실 얼마나 자주 가요?”

“음…….”

원장의 물음에 선호가 고민했다. 사실 선호는 미용실을 간 적이 거의 없었다. 그냥 머리가 자라면 자란 대로, 가끔 눈을 찌르고 너무 불편하다 싶으면 집에서 직접 자르기도 하니까. 그래서인지 머리가 단정하지 못하고 이곳저곳 삐쭉하고 튀어나왔고, 앞머리도 꽤 긴 편이었다. 원장의 표현대로 덥수룩하다는 게 맞았다.

대답하지 못하는 선호를 보고 원장은 웃으며 선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고 그래. 너무 귀엽다, 하준이 친구.”

“아…하하….”

“자, 이쪽으로 와요.”

안내한 곳에 어정쩡하게 앉은 선호가 눈만 굴려서 하준을 바라봤다. 하준은 선호의 옆에 서서 거울을 통해 선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머리 자르는 거 싫어?”

“아니, 괜찮아.”

이번에도 고개를 도리도리. 선호가 하준의 말에 강하게 부정했다. 뭐든 다 좋고, 다 오케이. 아직은 멀었다 생각하면서 하준이 한숨을 쉬면서 별생각 없이 선호의 앞머리를 살짝 옆으로 넘겼다. 그 작은 손길에도 선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버렸다.

하준의 입장에서는 정말 별거 아니고, 아무 생각 없는 제스처일지 몰라도 선호는 매번 심장이 뛰고 두근거렸다. 자꾸 이러면 하준이 눈치를 챌지도 모르는데, 이제 익숙해져야 한다. 선호가 숨을 훅 들이켜며 쿵쾅쿵쾅 심장이 뛰는 걸 참아 보려 노력했다. 그런 선호를 차마 알아차리지 못하고, 하준은 그저 선호가 미용실에 오랜만에 와서 긴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긴장돼?”

하준이 그런 선호를 보며 웃었다. 얼마나 미용실에 안 와 봤으면 미용실 의자에 앉은 것만으로도 저렇게 긴장을 할까.

“어떻게 잘라 줄까?”

“짧게.”

“얼마나?”

“음… 이 정도?”

자르는 건 선호인데 정작 선호는 그저 제 앞에서 대화하고 있는 두 사람을 멀뚱히 보기만 했다. 하준이 선호의 이마 위쪽을 가리켰다. 너무 짧지 않아? 그 정도 잘라야 자주 안 와도 괜찮을 것 같아서. 그래, 그럼. 두 사람의 대화를 멀뚱히 듣던 선호는 자신의 어깨 위로 가운이 둘러지는 것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어휴, 귀여워. 이 친구 우리 숍에서 일 시키면 안 돼? 이렇게 귀여워서 그냥 있기만 해도 인기 많아지겠다.”

원장이 말랑말랑한 선호의 볼을 만지며 말했다. 머리를 자르기 위해 안경도 벗고 가운을 쓰니까, 둔하고 바보 같은 이미지가 모두 사라지고 마냥 귀엽기만 했다. 원장이 한참 선호에게 이곳에서 알바를 하라며 유혹을 하는 사이에 하준이 뒤에서 빨리 끝내 달라며 외쳤다.

선호의 뒤에서 다리를 꼬고 잡지를 꺼내 읽는 하준은 말 그대로 모델 같았다. 선호의 머리를 자르게 시켜 놓고, 선호 쪽은 보지도 않은 상태였다. 오히려 좋았다. 계속 흘끗 거울로 하준을 몰래 훔쳐볼 수 있었으니까. 하준을 보는 것에 완전히 정신이 팔린 나머지 정작 선호는 본인의 머리가 어떻게 잘리고 있는지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다 됐다.”

머리만 자르는 줄 알았는데, 머리도 감겨 주고, 커다란 고데기로 그 짧은 머리를 또 말고, 원장은 귀여운 고객을 통해 자기 사심을 다 채우고 나서야 선호의 가운을 벗겨 주었다. 그러고는 하준보고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너무 귀엽다. 진짜.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괜찮은가요?”

“괜찮은 정도야? 진짜 귀여워. 친구가 생각보다 눈이 정말 예쁘네. 하준아, 어때?”

짧아진 머리를 어색하게 만지작거리는 선호를 하준은 별말 없이 멀뚱히 바라봤다. 이상하다거나, 괜찮다거나, 무슨 말이라도 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하준은 입을 다문 채로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 바람에 선호는 속으로 괜히 잘랐나 후회하고 있었다.

“너무 귀여워서 할 말을 잃었나 봐.”

“무슨 소리야.”

원장이 선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는데 그 말을 들었는지 하준이 인상을 구기고 말했다. 원장은 그런 하준을 보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역시, 별로인가? 선호는 오랜만에 자른 머리가 나름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또 제 스스로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하준이 표정이 별로 좋지 않으니까. 어울리지 않나 봐. 갑자기 우울해진 기분에 선호의 어깨마저 축 처졌다.

“계산할게.”

“됐어, 오랜만에 왔으니까 그냥 해 줄게. 대신 자주 와. 우리 귀여운 친구도 자주 와요. 알바할 생각 있으면 연락하고?”

알바를 하라는 말이 마냥 장난은 아니었는지 원장이 선호에게 명함을 쥐여 주었다. 선호가 명함을 받고는 급하게 안경을 쓰고 어느새 문 근처에 서 있는 하준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인 기분이 이상했다. 일부러 머리를 짧게 자르지 않은 건 그런 이유도 있었다. 조금은 얼굴을 가려 줄 무언가가 필요했으니까. 시야가 약간은 가려지고, 얼굴 전체가 다 보이지 않는 게 선호는 훨씬 편했다.

“안 이상해. 괜찮아.”

자꾸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는 선호에게 하준이 툭 던지듯 말했다. 그제야 선호가 자꾸 만지작거리던 손을 내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이상하고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던 머리가 하준이 괜찮다고 말해 준 순간, 정말로 괜찮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짧은 게 낫다.”

“그래…?”

“넌 눈이 예뻐서 가리는 거보다 이게 훨씬 나아.”

하준은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선호는 하준을 따라 걷다가 쇼윈도에 비치는 제 모습을 바라봤다. 확실히 머리가 짧아지니까 시야가 좀 더 확 트인 기분이었고, 답답한 느낌도 덜한 것 같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이 지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그런데 그냥 머리를 자른 것만으로도 변할 수 있을 거라는 작은 희망이 생긴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밥 먹으러 갈까?”

하준은 자신을 따라오지 않는 선호에게 걷다가 뒤돌아서서 물었다. 선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하준을 따라 걸었다. 머리를 자르고 나서 가장 좋은 점은, 이 밝아진 시야로 하준의 얼굴이 더 뚜렷하게 잘 보인다는 점. 다른 무엇보다 그 점이 가장 좋았다.



“저….”

선호가 우물우물 하준의 눈치를 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하준은 물수건으로 손을 꼼꼼히 닦으며 눈을 들어 올려 선호를 바라봤다. 그 일련의 동작이 선호는 너무 좋아서 순간 얼굴이 빨개질 것 같아 고개를 내렸다가 다시 하준을 바라봤다.

둘이 온 곳은 꽤나 비싸 보이는 중국집이었다. 하준이 중국 음식 좋아해? 하고 묻길래 선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 음식이라면 가격이 나쁘지 않을 테고 그 정도야 선호가 얼마든지 하준에게 사 줄 수 있었다.

그런데 하준을 따라온 곳은 선호가 생각하는 그런 중식당이 전혀 아니었다. 선호는 최대한 메뉴판에서 싸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았지만 기본 자장면이나 짬뽕도 가격이 만 원대가 넘었다. 그런 선호를 마치 비웃듯이 하준은 선호 대신 코스 요리를 척척 시켰다.

하준은 혼자서 끙끙거리고 있는 선호를 보고 웃었다. 이렇게 말하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지만, 약간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또 귀엽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했다가, 하준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한 거야 하며 고개를 털었다. 군대까지 다녀온 자기와 동갑인 남자애가 귀엽다니.

“내가 살게, 걱정 말고 먹어.”

“…어, 그치만 머리도 공짜로 했고…….”

“나 돈 많아.”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는 하준의 돈 자랑에도 선호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얄밉게 느껴질 수 있을 법한 말도 하준이 하니까 오히려 얄밉기보다는 정말 그렇다는 생각에 수긍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애초에 선호는 하준에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받는 게 어색한 사람이었다. 평생을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으니, 누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것 자체가 어색하고 민망했다. 하다못해 그 상대가 하준이라면 더더욱.

“다른 애들이랑 밥 먹을 때도 이런 식으로 맨날 너가 사?”

갑작스러운 하준의 말에 선호가 당황해서 입을 열지 못했다. 하준의 말이 맞았다. 선호랑 밥을 먹으려고 하는 애들 다, 그런 이유로 함께 밥을 먹으려고 하니까. 선호는 매번 거절하지 못해서 아이들에게 밥을 사 주곤 했다.

그래도 이번엔 다르다. 억지로 돈을 내는 것과 정말로 하준에게 사 주고 싶어서 사 주는 것과는 다르니까.

“그런 거 하나하나도 다 거절해야지. 싫으면, 싫다. 아니면 아니다.”

“……응.”

“자.”

선호가 물을 따라 주려고 하는데, 하준이 잽싸게 선호의 손에 들린 물병과 컵을 뺏어 물을 따라 선호에게 건넸다. 하준의 입장에서는 선호가 호구처럼 다 해 주기만 하는 걸 막으려고 하는 거니까. 선호는 하준에게서 물을 받아 마시면서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감추려고 노력해야만 했다.

“앞길이 막막하다.”

하준이 선호 쪽으로 좀 더 몸을 기울이고, 턱을 괴고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선호가 무슨 뜻이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얼굴을 보고 하준은 저도 모르게 짧게 웃었다. 구선호는 자기도 모르게 하는 행동들이 다 티가 나서, 그래서 귀엽다. 하준은 아까까지만 해도 선호가 귀엽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지금은 순순히 인정하고 있었다. 제대로 만난 지 몇 시간이 채 되지 않았어도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과제 말이야.”

“아…….”

하준이 덧붙인 말에 선호가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했다. 사실 과제 얘기가 아니라 선호 얘기였는데 바보같이 곧이곧대로 믿고 있었다.

“이런 과제는 좋아하는 사람이랑 해야 할 텐데.”

선호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차 안에 놔두는 끄덕 인형이 생각나서 하준은 또 웃음이 터질 것 같아 고개를 돌려 괜히 헛기침을 하는 척을 했다. 선호는 그런 하준이 목이 막힌 줄 오해하고 물을 따라 건넸다. 눈빛 가득 걱정을 담고 있어서 하준은 별말 없이 선호가 내민 물을 받아 마셨다.

확실히 선호와 하준이 들은 교양의 과제는 <사랑의 심리학>이라는 강의 제목과 맞게 과제도 <다양한 장소에서 마주칠 수 있는 사랑>이라는 매우 추상적이고 어려운 주제였다. 물론 내용도 내용이지만 얼마나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하게 생각했는지를 좀 더 중점적으로 본다고 하긴 했지만.

하준이 제 앞에 놓인 애피타이저를 먹으며 과제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였다. 선호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그, 방금 그 장소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의 머리를 잘라 준다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어.”

그 말에 하준이 흥미로운 표정을 하고는 좀 더 몸을 선호 쪽으로 당겼다. 하준이 괜찮은 반응을 보이자 선호가 들떠서 마저 뒷말을 잇기 시작했다. 하준이 생각한 건 고작 아까 본 잡지 속에서 본 연애 관련 에세이에서 연관한 진부한 내용이었는데 선호가 생각한 내용은 자신과 전혀 다른 것 같아서 좋았다.

“머리를 잘라 준다는 게, 정말 그 사람한테 많은 걸 맡기고 믿는다는 거니까… 그 느낌을 잘 살려서 거기에 대해 쓰면 좋을 것 같아서….”

“좋네.”

하준의 좋다는 말 한마디에 선호가 활짝 웃었다. 확실히 머리를 자른 게 시원해 보이기도 했고 웃을 때 살짝 올라오는 애교살이 더 잘 보이는 것 같아서 괜찮았다. 여전히 커다란 안경이 얼굴을 가리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길고 덥수룩한 앞머리가 사라지니 그나마 괜찮았다.

역시 자른 게 훨씬 괜찮네. 하준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 있어?”

“응?”

“그냥, 구체적이길래.”

하준은 정말 별생각 없이 툭 던지듯 꺼낸 말이었다. 그런데 그 아무 생각 없는 하준의 말에 선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토마토처럼 달아올랐다. 하준이 그런 선호를 보고 웃었다. 저 바보 같은 구선호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웃기기도 하고, 또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는 물음에 저렇게 목까지 빨개진 것도 우스웠다.

“말해 봐.”

하준이 좀 더 몸을 선호 쪽으로 기울이자 선호가 뒤로 살짝 몸을 빼면서 고개를 저었다.

“우리 과 애야?”

“…….”

“그럼 내가 아는 애야?”

“…….”

하준의 물음에 선호는 계속 대답이 없었다. 하준은 선호를 놀리는 걸 그만하고 몸을 편하게 뒤로 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