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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구의 호구 3화

1. 호구가 좋아하는 사람 (3)


군대 휴학 신청을 하러 마지막으로 학교에 갔다. 2년 동안 학교에 오지 못할 테니까 하준이 보고 싶었지만, 그와 어떤 인연도 없는 선호는 하준을 볼 여지가 없었다. 애초에 하준은 선호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조차 모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청서를 제출하고 아쉬움만 가득 남긴 채 버스를 타러 갈 때였다.

“이거.”

바보같이 땅만 보고 걸어가는 선호를 뒤에서 누군가 붙잡았다. 선호가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지갑을 잡은 손을 보고 그 손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 것 같아 심장이 마구 뛰었다. 선호가 용기를 내서 그 손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떨어트렸어.”

하준이, 정말 한여름의 햇살처럼 화사하게 웃는 하준이 제 지갑을 손에 들고 내밀고 있었다. 보고 싶다고 계속 생각은 했지만 정말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데.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선호는 지금 눈앞에 있는 하준이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처럼 느껴졌다.

“…고마워.”

선호가 하준의 손에 있는 자신의 지갑을 받아 들고 말했다. 하준은 미련 없이 선호의 앞에서 떠났다. 선호는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의 지갑만 만지작거렸다.

하준을 좋아하고 난 후 처음으로 한 대화였다. 이거, 떨어트렸어. 고마워. 단 두 마디. 어떤 의미도 없는 말들. 그런데도 선호는 그 두 마디를 한참을 곱씹고 서 있었다. 하준아, 보고 싶을 거야. 하준아…….

…넌 모르겠지만 사실 난 너를 많이 좋아해. 아주 많이.

말이라도 더 해 볼걸. 내 이름이라도 알 수 있게 인사라도 건네 볼걸. 선호는 그날 집에 오는 길에 한참을 후회해야만 했다. 선호 혼자 하는 사랑은 이렇게 많은 아쉬움만 남겼다. 군대 가기 전 마지막에 그나마 얘기해 볼 수 있었으니 좋았지만, 그게 이토록 좋은 거였다면 조금 더 다가가도 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 싶을 거야, 잘 다녀와, 하준아. 선호는 마음속으로 혼자 하준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꺼내지도 그래서 닿지도 못할 인사를.



군대에 있는 2년간은 선호에게 고통의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하준을 볼 수 없는 게 가장 힘들었다. 군대에서 훈련을 받다가도, 휴가를 나와서도 자꾸 하준이 떠올라서 괴로웠다. 원래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하던데, 그 얘기가 선호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선호는 군대에 갔다 와서 복학을 하자마자 개강 파티에 왔다.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행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걸 다 제쳐 두고 그냥 하준이 보고 싶었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 그날, 선호는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눈으로 하준을 찾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하준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어 버렸다. 그쪽으로 가고 싶었지만, 이미 하준 근처에는 자리가 없었다. 선호는 아쉬움에 한참을 그쪽을 바라보면서 남은 자리에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선호구!! 오랜만이다!”

“호구 호구, 군대 가서 나 안 보고 싶었냐?”

선호는 자신의 어깨에 마음대로 팔을 올리고 머리를 기분 나쁘게 툭툭 치는 행동에도 뭐라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호를 호구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떤 부탁을 해도, 다 들어주고, 싫다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내가 우리 호구 없어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하하….”

처음부터 아이들이 선호를 이렇게까지 호구로 대하진 않았다. 동우가 선호를 막 대하기 시작하니, 다른 아이들도 선호에게는 그래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인지 아무렇지 않게 구선호를 선호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사실 기분 안 나쁠 수 없는데. 선호는 그래도 웃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다. 그저 앞에 놓인 물수건을 만지작거리며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야, 너네 그거 아냐? 걔네 둘이 사귀었다가 이번에….”

아이들은 금세 선호에게 다른 화두로 대화 주제를 넘겼다. 누가 이번에 사귀었다더라, 누가 이번에 깨졌다더라,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들. 그 모든 이야기들을 선호는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그저 선호는 마음 편히 하준을 바라볼 수 있어서 좋을 뿐이다. 하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보였다. 선호도 그런 하준을 따라서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이제 곧 들어갈 거라니까….”

하준은 꽤나 피곤한 듯한 목소리로 건물 바깥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통화를 하고 있었다. 어느새 비는 그쳐 있었다. 이내 별말 없이 전화를 끊는 모습을 보며, 선호는 하준에게 다가갔다. 하준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선호의 얼굴을 빤히 훑었다. 선호는 하준의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푹 숙이고 하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내내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사실 처음 볼 때부터 그랬다. 하준은 선호의 인사에도 한참을 대답이 없었다. 그래도 선호는 자신이 하준에게 인사를 건넸다는 거, 그 사실 자체가 너무나 좋았고, 감격스러웠다.

“안 답답해?”

“…응?”

“보는 내가 다 답답한데, 좀 풀지.”

그래서 하준이 그렇게 차가운 말로 제 목을 가리키며 뭐라 해도, 선호는 좋았다. 다른 애들에게 그러는 것처럼 그저 괜찮다는 말로 자신의 속이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좋았다. 하준은 선호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하준이 뭐라고 해도, 그냥 자신에게 말을 걸어 줬다는 사실 하나로,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행복하니까.



물론, 그날이 하준과의 대화의 끝이 아니었다. 선호는 운 좋게도 하준과 같은 교양 수업, 심지어 같은 팀까지 되어 전화번호까지 주고받았다. 하준에게서 전화번호를 받은 날, 너무 들뜨고 기뻐서 하루 종일 그 생각에 싱글벙글 웃고 다녔다. 하준의 표정에서 저에 대한 감정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도, 그냥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선호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야, 네 이름이 진짜 호구야? 저 새끼들이 하는 말을 왜 그냥 처듣고만 있어.”

그런데 왜 이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하준이 자신을 알게 되면 호구 같은 자신의 모습도 다 알게 된다는 걸. 얼마나 멍청하고 한심하게 보였을까. 하준의 앞에서, 모욕을 당하고 거기에 또 아무 말도 못하고 멍청히 웃기만 하는 자신을 보여 준 그 상황이.

“저 개새끼들이 지들 좆대로 함부로 말하잖아. 그럼 싫다고, 하다못해 그만하라고 말이라도 해. 왜 그렇게 호구처럼 당하기만 해, 시발 보는 사람 답답하게!”

선호는 하준의 말을 들으면서 방금 자신의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얼마나 바보 같았고, 또 얼마나 호구 같았으면 하준이 저렇게까지 화를 낼까. 좋아하는 사람의 눈에 그런 식으로 보였다는 건 생각보다 많이 슬프고 억울한 일이었다.

“적어도 시발… 말이라도…….”

“…….”

“…구선호.”

“…….”

“…울어?”

하준의 당황 섞인 목소리에도 선호는 말이 없었다. 선호의 큰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흘렀다. 하준을 쳐다볼 수도 없었다. 부끄럽고, 또 수치스러웠다. 이 와중에 또 하준이 불러 준 자신의 이름이 좋아서, 선호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하준은 하준대로 당황스러웠다. 무슨 말을 해도 별말 없이 그저 실실 웃기만 하던 애가 갑자기 눈시울을 붉히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뚝뚝 눈물을 흘리는 게 생각보다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정작 심한 말을 하고 상처를 준 건 하준이 아니라 동우인데, 선호는 동우의 말은 그냥 웃어넘겨 놓고 하준의 말에는 저토록 처연하게 울고 있었다.

그냥 답답하게만 느껴졌는데, 이렇게 우는 모습을 보니 꽤나 안쓰러웠다. 그래서 하준은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손을 들었다가, 내리고, 다시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기도 했다.

어쩌다 보니 길 한복판에서 울고 있는 선호와, 그 모습을 멍청히 쳐다보고 있는 하준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바라봤다. 장신인 하준과 왜소한 체격의 선호가 그렇게 서 있으니 하준이 작정하고 선호를 괴롭히거나 때렸다고 오해를 하는 듯했다.

일단은 여기를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하준은 선호의 팔을 잡고 가까운 카페로 걸었다. 선호가 흐릿한 시야로 하준이 잡은 자신의 팔을 바라봤다. 눈물을 멈춰 보려는 듯, 선호가 손으로 눈을 마구 비볐다. 그제야 하준이 제대로 보였다.

선호는 바보같이 하준의 앞에서 울었다는 사실과, 하준을 곤란하게 했다는 사실 때문에 고개를 푹 숙이고 하준을 따라 말없이 걸었다. 지금 이 순간, 선호는 하준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괜찮아?”

하준의 말에 선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하준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두 눈은 빨갛고, 그 길고 답답한 앞머리는 어느새 약간 흐트러져 있는 상태로, 그런 상태로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하준은 자신도 모르게 이 상황이 새삼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하준이 선호를 데려온 곳은 카페였다. 두 사람은 카페 구석에 마주 앉아 있었다. 하준은 별말 없이 선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어쨌든 자신이 울린 건 맞으니까, 하준 나름의 위로하는 방식이었다.

“미안….”

선호가 여전히 약간은 달아오른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하준은 선호의 앞에서 턱을 괴고 앉아 선호의 말을 듣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네가 잘못했어.”

“…….”

“장난이야, 뭘 또 울상을 짓냐.”

그냥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 보려고 장난스럽게 말했는데, 하준의 타박하는 말을 듣자 선호의 얼굴은 순식간에 울상이 되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이 되었다. 장난이라는 말에 또다시 안도한 듯 웃는다. 하준은 그 일련의 표정 변화가 신기하게 느껴져서 말없이 선호를 빤히 바라봤다.

“마셔.”

“응.”

하준이 여전히 한 입도 안 먹은 채로 앞에 놓여 있는 선호의 아메리카노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선호가 그제야 자신의 앞에 놓인 음료를 조심스럽게 입에 한 모금 담았다.

하준은 그냥 지금 이 상황이 웃겼다. 선호가 답답한 짓거리 하는 거 보고 저도 모르게 참지 못하고 타박하듯 욕을 한 하준 자신도 웃기고, 매번 무슨 말을 해도 웃는 얼굴을 유지하던 선호가 제 말에만 큰 상처를 받은 듯 눈물을 뚝뚝 흘린 것도 웃기고. 카페에 데려와서 약간은 진정된 선호에게 뭘 먹겠냐고 하준이 물어보자 거의 기어 들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너랑 같은 거라고 조용하게 대답한 것도. 모두 다.

“갑자기 욕해서 미안한데, 난 아까 내가 한 말에 사과할 생각이 없어.”

그 말에 선호가 하준을 빤히 바라봤다. 선호는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모두 짙은 까만색이었다. 약간의 갈색도, 어떤 색도 전혀 섞이지 않은 검은색. 살짝 흐트러진 앞머리 때문에 이제야 선호의 눈을 제대로 보는 것 같았다.

“나도… 나도 알아…. 내가 답답한 거.”

선호가 손으로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하준이 화를 낸 이유를 모두 안다는 듯이. 약간은 체념한 듯한 목소리가 하준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치면 되잖아.”

답답하다는 듯한 하준의 목소리에 선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내야 할지도 몰랐고, 애초에 하준에게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오래전부터 그랬어서… 누군가한테 거절하고 그런 게… 나는 너무 어려워.”

선호가 작게 말을 이었다. 그러고는 흘끔 하준을 바라보며 눈치를 봤다. 하준은 선호의 말을 들으며 툭툭,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쳤다. 다시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하준은 하준대로, 선호는 선호대로 복잡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내가 한심하겠지. 하준의 눈에 한심하게 보이는 게 당연하다. 선호는 눈을 꾹 감았다. 하준을 보는 게 무서웠다. 자신을 한심하다는 얼굴로 바라볼 것 같았다.

“내가 도와줄까?”

그러나, 잠시 후 들려오는 하준의 목소리에 선호가 번뜩 고개를 들고 하준을 바라봤다. 하준의 눈에는 전혀 한심하다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선호를 보고 싱긋 웃고 있을 뿐이었다. 선호는 자신도 모르게 멍청히 입을 벌렸다. 자신이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자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준이 제 표정을 보고 웃을 때도 왜 웃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준은 한참을 대답이 없는 선호의 얼굴 앞에 휘휘, 손을 휘저어 보였다.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선호가 다시 되물었다.

“도, 도와준다고…?”

“응.”

“…어떻게?”

“글쎄.”

딱히 깊은 생각을 거치고 선호에게 던진 말은 아니었다. 그냥 선호가 호구에서 벗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하준은 잠시 고민했다. 선호는 그런 그를 보면서 어째서 하준은 저렇게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도 멋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테이블 위에 얹혀 있던 선호의 손을 하준이 덥석 잡았다. 선호는 순간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바로 앞에 있는 하준에게 들킬까 봐 숨을 훅 들이켰다. 그러고는 숨을 내쉬는 법을 까먹은 사람처럼 멈춘 채, 하준에게 잡힌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물론 아까 팔을 잡혀서 오긴 했지만, 손과 손이 맞닿는 건 다른 문제였다. 약간은 차가운 하준의 손이 뜨거운 선호의 손과 맞닿아 있었다. 선호가 말없이 붙잡힌 손만 바라보고 있자 하준이 웃으며 손을 떼어 내곤 말했다.

“이럴 땐 싫다고 말해야지.”

“……그.”

“이런 식으로 연습하는 거야.”

“…….”

“가끔은 네 의견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싫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해. 그게 힘들면, 일단 자주 해 보면 돼. 뭐든 하면서 느는 거니까.”

하준의 말에 선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완전히 수긍할 수는 없었다. 이런 식으로 거절하는 방법을 배운다면 얼마 못 가 선호의 심장이 펑 하고 터질지도 모른다. 가장 큰 문제는 하준에게는 선호의 손을 잡은 것에 어떤 사심도,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건 당연했다. 하준에게 선호는 아무런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선호에게 하준은…….

선호가 하준의 손이 맞닿는 걸 싫다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 애초에 하준에게 어떠한 것이라도 싫다는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심지어 하준이 선호를 때리고 침을 뱉는다고 해도 자신은 하준에게 싫은 말을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냐, 일단은…….”

생각에 빠져 있는 선호의 얼굴 쪽에 하준이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흐트러져 있는 앞머리를 옆으로 살짝 넘기며 말했다.

“머리부터 자르자.”

하준이 그렇게 말하고 입꼬리를 올려 시원하게 웃었다. 선호는 하준의 그 웃음이 좋았다. 하준의 이름 그대로 정말 여름의 시원한 바람 같은 웃음이었다. 선호도 하준을 따라 웃었다. 그래, 그러자. 마치 남의 머리 자르는 것을 말하듯이. 선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했다.

“싫으면 싫다고 하라니까?”

“아냐, 괜찮아. 안 싫어.”

선호의 이 말은 200% 진심이었다. 항상 남의 눈치를 보며 알겠다고 하는 것과, 하준의 앞에서 알겠다고 하는 건 분명 달랐다. 정말 진심을 다해 고개를 끄덕이는 선호에게 하준이 고갯짓을 하며 앞에 놓인 커피를 마시라고 말했다. 선호가 착실하게 하준의 말을 듣고 커피를 마셨다.

참, 말 잘 듣는다. 호구 짓 안 하게 도와줘야 하는데, 이렇게 바보 같은 걸 어떻게 도와줘야 하지. 하준은 갑자기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저답지 않은 충동적인 행동과 말이었다.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도, 아주 조금은 들었다. 군대를 갔다 오면 사람이 변한다고 하는데, 제가 그래서 그런 걸까. 저답지 않은 행동을 하는 일이 는 것 같았다.

그냥… 순전히 처연하게 뚝뚝 눈물방울을 흘리는 것에 마음이 약해져서…. 지금에 와서 후회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말은 뱉었고, 엎질러진 물이었다.



“야, 야, 좀 빨리 움직여.”

저녁 시간의 술집은 언제나 바쁘고 붐볐다. 선호는 그 안에서 바쁘게 돌아다녔다. 가끔 선호의 등을 툭툭 치며 재촉하는 사장의 손을 느끼면서.

“야, 빨리 가서 저거 좀 옮겨.”

사장이 선호의 등을 힘을 실어 밀면서 바깥 쪽에 있는 소주 박스와 맥주 박스를 가리켰다. 선호는 별다른 말 없이 사장이 시키는 대로 바깥으로 나가 박스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른 알바생들 같은 경우는 시키면 대부분 혼자서는 너무 무리라고 다른 사람과 같이 시켜 달라고 부탁하지만, 선호는 항상 무슨 일을 시키든 군말 없이 하곤 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장은 더욱 선호에게 무리한 일을 시켰다.

-툭.

“아, 죄송합니다~”

술 마신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선호를 치고 다녔고 선호는 그 와중에도 열심히 혼자 맥주 박스와 소주 박스를 옮겼다.

“다 옮겼어? 빨리 다른 일 해. 가서.”

“네.”

저녁 시간대의 아르바이트는 힘들다. 선호는 그래도 이만한 일이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학교 끝나고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고, 밤에 근무하기 때문에 야근 수당도 있어서 선호가 할 수 있는 일 중에서는 가장 페이가 셌다. 그리고 이제는 익숙해져서 그렇게 많이 힘들다고 느껴지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