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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한상혁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GPS 위치 추적기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30분 정도 움직였을 때, 나는 녀석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녀석은 커다란 나무 사이에 참호를 파고 숨어 있지만, 이미 위치를 아는 내게 위장해 둔 참호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녀석은 가끔씩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주변을 살핀 뒤, 다시 참호 속으로 숨는 걸 반복했다.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혹시 몰라 한 시간 정도 기다렸지만, 유미라든지 다른 동료의 모습은 확인되지 않았다.
한상혁은 혼자서 행동하는 중인 게 분명했다.
나는 한상혁이 참호 밖으로 다시 머리를 내밀었을 때, 그의 뒤통수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움직이지 마.”
“헉! 이 목소리는…….”
“어허, 고개 돌리지 마.”
내가 뒤통수를 총구로 찌르자, 한상혁은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지? 분명 조달영이 있는 곳으로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러 참은 채 한상혁에게 말했다.
“이제 너는 내 손바닥 안이라는 것만 알아 둬. 그리고 몇 번이고 찾아가 널 죽일 작정이라는 것도 기억하면 좋고.”
“잠깐, 우리 사이에 오해가 있던 것 같다. 일단 대화로…….”
“시끄러, 새끼야.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그러지 말고…….”
한상혁이 뭐라고 말을 꺼내기 전에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한상혁은 그대로 즉사 판정을 받아 참호 안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잘 가라, 배신자 새끼야.”
한상혁에게 복수하는 것을 끝으로 나는 벌써 경쟁자 셋을 해치웠다.
‘이대로라면 금방 합격하겠는데?
하지만 그 순간.
휘유우우.
등 뒤로 강한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호호, 그리고 너는 나한테 죽는 거야.”
“젠장!”
나는 급히 몸을 돌리며 고무탄을 발사했다.
타앙!
하지만 고무탄은 유미의 보호막을 뚫지 못하고 튕겨져 나왔고, 대검이 목을 긋는 차가운 감각과 함께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교육대 생활관에서 눈을 뜬 나는 식사 이동 중에 조달영의 모습을 발견했다.
“조달영!”
“대길아!”
조달영은 메고 있던 더플 백을 내려놓고 내 쪽으로 달려왔다.
가까이 다가온 조달영의 가슴에는 이등병 계급장과 함께 이름표가 달려 있는 게 보였다.
“달영아, 너 합격한 거야?”
“그래. 그나저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은신처로 돌아갔더니 둘 다 사라지고 안 보이더라.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조달영은 아무래도 그날 이후 나와 한상혁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졌다는 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하아, 그건 말하자면 얘기가 길어져. 그건 그렇고, 자대 배치받은 모양이네.”
“그래. 은신처에서 너희를 기다리다 보니 벌써 일주일이 지나 버렸더군.”
“축하한다.”
나는 진심을 담아 인사를 건네며 악수를 청했다.
“고맙다.”
우리가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CHT 부대의 간부처럼 보이는 사람이 조달영을 불렀다.
“거기 신병, 잡담 나누지 말고 빨리 준비해!”
“네!”
힘차게 대답한 조달영이 내 손을 놓았다.
“먼저 가서 미안하다.”
“그런 말 하지 마, 나도 곧 따라갈 테니까. 그건 그렇고, 이제 다시 만날 땐 선임이겠네. 반말하는 것도 오늘까지인가?”
“아니. 우리는 변함없이 친구 사이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꼭 와라.”
조달영이 떠나는 걸 지켜보다 훈련장으로 향하자, 다른 팀에 소속된 한상혁과 김중석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무서운 눈빛으로 노려봤다.
나는 가볍게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훈련에 임했다.
‘지들이 째려보면 어쩔 거야? 나한테는 위치 추적기가 있어.’
다시 3일이 지나고 생존 훈련에 투입되자, 나는 위치 추적기를 활용해 바로 김중석과 한상혁을 찾아내 탈락시켰다.
그들은 어떻게든 나를 피하려고 노력했으나, 의미 없는 발버둥에 불과했다.
물론, 나 또한 유미에게 죽어 교육대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 나를 찾아내는 건지, 하루 이상을 버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후반기 교육 60일 차를 맞이했다.
팀 단위 야간 전술훈련을 마치고 새벽에 생존 훈련장에 투입됐으나, 한상혁을 탈락시킨 지 10분도 채 지나기 전에 유미와 조우하고 말았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한마디 말도 없이 곧바로 내 가슴에 대검을 꽂았다.
벌써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내가 생존 훈련에 투입될 때마다 탈락시킨 탓에 한상혁은 호언장담하던 것과 달리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교육대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리고 김중석은 2주 전에 불합격 판정을 받아 일반 부대로 전출당하고 말았다.
“하아…….”
내가 한숨을 내쉬자, 같은 생활관을 쓰는 교육생 한 명이 알은체를 해 왔다.
“거기 새로 온 아저씨는 어제까지만 해도 다른 팀 소속으로 같이 훈련받은 것 같은데, 아닌가?”
“뭐가 궁금한데?”
내가 날카로운 반응을 내비치자, 질문을 던진 남자가 움찔했다.
“아니… 새벽에 나갔다가 바로 죽은 건가 싶어서.”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걸 묻는 이유가 뭔데?”
“그냥. 요새 들리는 소문에 두 달 동안 생존 훈련에서 8주가 넘어가는데 하루도 못 버티고 교육대로 돌아오는 신기록을 세운 병사가 있다기에. 혹시 그게 아저씨인가?”
그런 소문이 돌고 있었나.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하긴, 오늘처럼 새벽에 나가자마자 돌아오면 연속으로 훈련을 받게 되는 꼴이니, 얼굴이 많이 팔린 모양이었다.
“맞는 모양이네. 와, 이거 영광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야? 얘기나 좀 해 봐. 당신처럼만 안 하면 합격하는 거잖아? 하하하!”
“푸하하하!”
“대박. 기록 갱신을 일부로 하는 건가? 일반 부대로 전출 가고 싶어서?”
“하하하! 그야말로 보너스네, 보너스. 다음에 나한테도 한 번 죽어 주면 안 될까?”
생활관에 있는 모든 교육생들이 일제히 나를 비웃어 댔다.
짜증 나는 일이지만, 나는 애써 그들을 무시했다.
잠시 후 식사 시간이 되자, 나는 밥을 한가득 퍼 담았다.
교육대의 좋은 점을 꼽자면, 맛있는 식사를 마음 편히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 모습을 지켜보던 같은 생활관 교육생이 비웃음을 흘렸다.
“이야, 아침을 그렇게나 많이 먹다니… 훈련을 많이 받아 본 사람이 기본도 모르는 모양이야. 하하하.”
“아하하하!”
나는 비웃어 대는 교육생들을 철저히 무시한 채 식사에 열중했다.
식사를 마치고 교육이 시작되자, 교육생들은 목봉 교장까지 이동했다.
벌써 거의 두 달 내내 교육대에서 시간을 보냈더니, 이제는 중량 장비가 내 평상복이고 행군도 전혀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목봉 체조가 끝난 이후에도 체력은 여전히 남아돌았다.
점심 식사는 언제나 그렇듯 전투식량이었다.
이제는 보는 것만으로도 신물이 올라올 정도로 지겹지만, 억지로 씹어 삼켰다.
“지금부터 체력 훈련을 시작한다. 꼴찌 팀은 보충 훈련이다.”
열 개의 팀이 동시에 밧줄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시작과 동시에 가장 먼저 밧줄에 올랐다.
그리고 경쟁하던 교육생들 중 가장 먼저 종을 치고 바닥에 착지했다.
체감상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데 5초도 걸리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모습에 팀원들이 멍하니 내 얼굴을 쳐다봤다.
나는 아침에 내게 시비를 걸어온 교육생을 쳐다보며 말했다.
“뭐 해, 빨리 안 올라가고.”
“아, 응!”
나는 이어진 교육에서도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가장 빠르게 코스를 통과하며 체력 훈련을 마쳤다.
레그턱 2분 18초, 전장 순환 훈련 1분 52초, 240미터 왕복 달리기 46초.
하지만 산악 뜀걸음의 경우, 마지막으로 통과한 팀원의 기록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팀 기록은 34분으로 전체 열 개 팀 중에 3위로 떨어졌다.
“우와, 도대체 뭘 먹었기에 그렇게 빠른 거야? 나도 좀 알려 주라.”
“나처럼만 안 하면 통과할 수 있다는 사람에게 도움이 필요해?”
“그건…….”
나는 머쓱해하는 팀원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냥 닥치고 하면 돼. 포기하지만 말고.”
이어진 근접 격투술에서도 나는 교관이 보여 준 동작들을 모조리 따라 하며 거의 완벽하게 펼쳐 냈다.
그러자 야간 전술훈련 때엔 팀원들이 내 입만 바라보게 됐다.
팀장은 따로 있지만, 그 팀장까지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 어쩔 수 없이 지휘를 맡아야 했다.
“시작과 동시에 깃발을 뺏으러 간다. 루트는 좌우로 나누지 않고, 중앙을 돌파한다. 총알은 각자 두 발씩. 나머지는 모두 내가 쏜다.”
나의 지시에 따른 우리 팀은 3일 동안 단 한 번도 경계 근무에 나서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또다시 생존 훈련에 투입되는 날이 돌아왔다.
생존 훈련에 투입되기 전, 박은우 중위가 나를 불렀다.
“교육생에게는 따로 생존 훈련 규칙에 대해 설명하지 않겠다.”
“…예.”
나도 더 이상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박은우 중위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딱 일주일 남았나?”
“네.”
“예전에도 너와 같은 병사가 하나 있었지. 합격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계속해서 탈락을 반복하다가 결국 하루를 남겨두고 최종 합격 판정을 받았어. 교육대에 근무하는 교관들 사이에서도 전설처럼 전해져 오는 얘기다.”
“그렇습니까?”
내가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박은우 중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반응이 시원찮군. 하지만 그분이 누군지 알면 다르겠지. 이름은 강기오. 지금은 논산훈련소에서 교관 생활을 하고 있다더군.”
내가 눈을 크게 뜨자, 박은우 중위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건넸다.
“그분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네.”
의외의 얘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강인하게만 보이던 강기오 중사가 하루를 남겨두고 겨우 합격했다니.
박은우 중위는 더 해줄 말이 없는지, 나를 태우고 생존 훈련장으로 향했다.
생존 훈련장에 도착한 나는 곧 바로 위치 추적기를 사용해 한상혁의 위치를 검색했다.
[수신 완료. 목표와의 거리, 433미터.]
나는 언제나 그렇듯 곧장 한상혁을 찾아 이동했다.
이상한 건 내 기습에 죽은 뒤로는 항상 시작하자마자 바쁘게 움직였는데, 이번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내가 한상혁을 발견했을 때도 녀석은 주변을 두리번거릴 뿐, 이동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는 공터에 자신을 노출시킨 채 몸을 숨기지 않았다.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나는 조용히 한상혁의 등 뒤쪽으로 돌아가 총구를 겨눴다.
내가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고 호흡을 가다듬을 때였다.
한상혁이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리더니 허공에 외쳤다.
“최대길, 거기 있나? 지금쯤이면 어딘가 숨어서 나를 죽이려 하고 있겠지?”
워낙 교활한 녀석이기에 나는 대꾸 없이 가만히 녀석을 지켜봤다.
“큭, 이제 그 정도 했으면 화가 풀릴 때도 되지 않아? 이쯤에서 휴전하는 게 어때? 아니지. 항복하겠다.”
한상혁은 자신의 뜻을 확실히 표현하기 위해 양손을 머리 위에서 깍지 낀 채 무릎을 꿇었다.
나는 녀석의 등 뒤로 다가가 총을 겨눴다.
“무슨 개수작인지 모르겠지만, 안 통해.”
“진짜 와 있었네. 큭큭.”
한상혁은 곧 죽게 생겼는데도 재미있다는 듯 킥킥대며 웃었다.
“뭐가 웃겨?”
“큭큭, 나만 죽을까? 너도 곧 죽을 텐데.”
한상혁의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미친년이랑 만나기로 했냐?”
“아니. 그 여자 소위와는 따로 연락한 적 없어. 생각해 봐. 훈련장에 나오자마자 너한테 죽는데, 내가 무슨 수로 연락하겠어?”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내가 오기 전에 흔적을 남긴다든지, 바닥에 글을 적을 수도 있잖아?”
“내 생각엔 그 여자도 너처럼 무언가를 이용해 너를 쫓아오는 게 분명해. 솔직히 너도 가지고 있잖아? 예를 들어… 위치 추적기라든지.”
나는 녀석이 위치 추적기를 언급하자 놀랐지만, 최대한 반응을 내비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한상혁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말을 꺼냈다.
“이미 눈치챈 지 오래야. 내가 아무리 위치를 옮겨 다녀도 너는 곧바로 나를 찾아내더군.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닐까?”
“그래서 뭐, 이제 와서 달라질 게 있어?”
“큭큭큭, 충분히 달라지지.”
“뭐가?”
“어차피 이대로라면 나는 너한테 죽어서 불합격할 게 빤하고, 너도 그 여자한테 죽어서 일반 부대로 편입되겠지.”
“그래,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적어도 억울하진 않을 거야.”
“좋아. 그럼 한 가지만 더 물어보겠어. 너는 본인이 탈락하더라도 상관없다는 뜻이냐?”
“어차피 안 될 거라면, 너라도 데려가는 게 낫지 않겠어?”
“쯧, 그런 여자를 이용하려 했다는 게 내 실수다. 너를 탈락시키고 먼저 합격해서 선임 노릇을 하겠다는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어. 하지만 이젠 너도 나도 더 물러설 곳이 없어. 이대로 가다간 선임은커녕, 사이좋게 손잡고 전출 가게 생겼다고. 안 그래?”
“상혁아, 혓바닥이 길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내가 소리치자, 한상혁이 양손을 번쩍 든 자세로 손가락 하나만을 펼쳤다.
“큭큭, 너에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 그래서 이렇게 자존심을 굽힌 거고.”
“제안?”
“너도 들어서 알겠지만, 장교 교육생들은 10주 안에 100명을 탈락시켜야 해. 그리고 내가 협력하기로 한 뒤에 알아낸 정보로는 그 여자는 오늘로 딱 66일째야. 그리고 너만 죽이겠다는 걸 우둔하게 고집하는 중이라면 현재까지 98명을 탈락시켰을 거야.”
나는 한상혁의 설명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그래. 오늘 너를 탈락시키면 99명, 그리고 3일 뒤에 너를 한 번 더 탈락시키면 딱 100명째가 되겠군.”
“젠장.”
“그럼 너는 하루를 남긴 채 마지막 생존 훈련의 기회를 받겠지. 물론, 네가 나를 죽일 테니 나도 같은 신세가 될 거고 말이야. 큭큭큭.”
한상혁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를 향해 돌아섰다.
총을 든다든지 공격적인 행동은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기만 했다.
그러자 한상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너 혼자 하루 만에 경쟁자 일곱 명을 처치하고 합격할 수 있어?”
“그럴 수 있다면 이미 합격했겠지.”
“그럼 둘이라면 어떨까?”
“어차피 하루 만에 열네 명은 무리야.”
“큭큭큭, 그럼 며칠이면 가능할까?”
“적어도 사나흘 정도는 있어야…….”
“4일이라… 그 정도면 위치 추적 장비를 이용하면 충분하겠네.”
“유미를 피해 다닐 수 있을까? 그 미친년도 위치 추적 장비를 가지고 있을 텐데.”
“아니, 그 여자는 그럴 수 없을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그 여자가 100명을 모두 채우게 만들면 된다는 뜻이야.”
“뭐?”
한상혁은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을 펴 보이며 말했다.
“그 여자에게 우리 둘이 죽어 주면 우리에게는 4일의 시간이 주어지게 되는 거지.”
“우리라고?”
“그래, 우리. 오늘 나도 그 여자의 손에 죽는다.”
한상혁은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최대길, 일시적인 동맹을 제안한다. 기한은 두 사람이 합격할 때까지.”
“동맹? 네가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걸 내가 어떻게 믿어?”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만약 내가 다시 뒤통수를 치면 개새끼다.”
개새끼라는 말에 조금 믿음이 생겼다.
일단 전에도 나와 내기에서 패배한 후에 나를 형님이라고 부른 적은 있으니까.
하지만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의 말에 말려들었다가 낭패를 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결정은 빠를수록 좋아. 그 여자가 오기 전에 준비할 것도 있거든.”
나는 고민 끝에 한상혁의 손을 잡았다.
“동맹 성립이다. 앞으로 잘해 보자고, 파트너.”
한상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한 바람이 불더니, 등 뒤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호호호, 여기 있었구나. 오늘은 친구가 아직 살아 있네? 그사이에 화해라도 한 모양이네.”
쓸데없는 발악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나는 곧바로 대검을 꺼내 들었다.
유미는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더니, 양 볼에 보조개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하지만 이내 기분이 나쁘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휴, 아쉬워. 조금 더 오래 괴롭히고 싶은데 말이야. 이제 두 번밖에 안 남았네.”
“꼭 정신과에 가 봐라, 미친년아. 너 정도면 입원 사유로 충분할 거다.”
“호호호, 입 거친 건 여전하네. 어서 덤벼 봐.”
유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두 팔을 늘어뜨렸다.
나는 바로 유미에게 달려들려 했으나, 별안간 한상혁이 팔을 뻗어 내 목을 감더니 대검을 목에 들이댔다.
[피격 판정. 미약한 출혈. 응급 처치를 실행하십시오.]
“너, 또 배신…….”
놀란 내가 소리치자, 한상혁은 내게 귓속말로 조용히 있으라고 속삭였다.
내가 입을 다물고 양손을 들어 올리자, 한상혁은 유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미안한데, 이놈은 제 겁니다.”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유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큭큭큭, 나도 그동안 이 녀석한테 당한 게 많아서 복수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소위님은 이만 빠져 주시죠.”
말을 마친 한상혁은 그대로 대검을 머리 위로 들더니, 곧장 내 목을 향해 내리찍었다.
하지만 한상혁의 대검은 내 눈앞에서 멈춘 채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어느새 유미가 쏘아낸 기운에 속박당해 몸을 바르르 떨고 있을 뿐이었다.
“젠장, 다음엔 꼭…….”
천천히 달려온 유미는 한상혁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의 정수리에 대검을 꽂았다.
유미는 바닥에 쓰러지는 한상혁을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감히 내 것을 넘봐?”
한상혁이 쓰러지며 제압이 풀리자, 나는 무방비 상태로 서 있는 유미의 가슴을 노려 대검을 찔렀다.
“호호호, 안 된다니까!”
유미의 대검이 번쩍인다 싶은 순간, 나는 사망을 알리는 메시지를 듣는 것과 동시에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한상혁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GPS 위치 추적기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30분 정도 움직였을 때, 나는 녀석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녀석은 커다란 나무 사이에 참호를 파고 숨어 있지만, 이미 위치를 아는 내게 위장해 둔 참호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녀석은 가끔씩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주변을 살핀 뒤, 다시 참호 속으로 숨는 걸 반복했다.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혹시 몰라 한 시간 정도 기다렸지만, 유미라든지 다른 동료의 모습은 확인되지 않았다.
한상혁은 혼자서 행동하는 중인 게 분명했다.
나는 한상혁이 참호 밖으로 다시 머리를 내밀었을 때, 그의 뒤통수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움직이지 마.”
“헉! 이 목소리는…….”
“어허, 고개 돌리지 마.”
내가 뒤통수를 총구로 찌르자, 한상혁은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지? 분명 조달영이 있는 곳으로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러 참은 채 한상혁에게 말했다.
“이제 너는 내 손바닥 안이라는 것만 알아 둬. 그리고 몇 번이고 찾아가 널 죽일 작정이라는 것도 기억하면 좋고.”
“잠깐, 우리 사이에 오해가 있던 것 같다. 일단 대화로…….”
“시끄러, 새끼야.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그러지 말고…….”
한상혁이 뭐라고 말을 꺼내기 전에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한상혁은 그대로 즉사 판정을 받아 참호 안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잘 가라, 배신자 새끼야.”
한상혁에게 복수하는 것을 끝으로 나는 벌써 경쟁자 셋을 해치웠다.
‘이대로라면 금방 합격하겠는데?
하지만 그 순간.
휘유우우.
등 뒤로 강한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호호, 그리고 너는 나한테 죽는 거야.”
“젠장!”
나는 급히 몸을 돌리며 고무탄을 발사했다.
타앙!
하지만 고무탄은 유미의 보호막을 뚫지 못하고 튕겨져 나왔고, 대검이 목을 긋는 차가운 감각과 함께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교육대 생활관에서 눈을 뜬 나는 식사 이동 중에 조달영의 모습을 발견했다.
“조달영!”
“대길아!”
조달영은 메고 있던 더플 백을 내려놓고 내 쪽으로 달려왔다.
가까이 다가온 조달영의 가슴에는 이등병 계급장과 함께 이름표가 달려 있는 게 보였다.
“달영아, 너 합격한 거야?”
“그래. 그나저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은신처로 돌아갔더니 둘 다 사라지고 안 보이더라.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조달영은 아무래도 그날 이후 나와 한상혁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졌다는 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하아, 그건 말하자면 얘기가 길어져. 그건 그렇고, 자대 배치받은 모양이네.”
“그래. 은신처에서 너희를 기다리다 보니 벌써 일주일이 지나 버렸더군.”
“축하한다.”
나는 진심을 담아 인사를 건네며 악수를 청했다.
“고맙다.”
우리가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CHT 부대의 간부처럼 보이는 사람이 조달영을 불렀다.
“거기 신병, 잡담 나누지 말고 빨리 준비해!”
“네!”
힘차게 대답한 조달영이 내 손을 놓았다.
“먼저 가서 미안하다.”
“그런 말 하지 마, 나도 곧 따라갈 테니까. 그건 그렇고, 이제 다시 만날 땐 선임이겠네. 반말하는 것도 오늘까지인가?”
“아니. 우리는 변함없이 친구 사이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꼭 와라.”
조달영이 떠나는 걸 지켜보다 훈련장으로 향하자, 다른 팀에 소속된 한상혁과 김중석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무서운 눈빛으로 노려봤다.
나는 가볍게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훈련에 임했다.
‘지들이 째려보면 어쩔 거야? 나한테는 위치 추적기가 있어.’
다시 3일이 지나고 생존 훈련에 투입되자, 나는 위치 추적기를 활용해 바로 김중석과 한상혁을 찾아내 탈락시켰다.
그들은 어떻게든 나를 피하려고 노력했으나, 의미 없는 발버둥에 불과했다.
물론, 나 또한 유미에게 죽어 교육대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 나를 찾아내는 건지, 하루 이상을 버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후반기 교육 60일 차를 맞이했다.
팀 단위 야간 전술훈련을 마치고 새벽에 생존 훈련장에 투입됐으나, 한상혁을 탈락시킨 지 10분도 채 지나기 전에 유미와 조우하고 말았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한마디 말도 없이 곧바로 내 가슴에 대검을 꽂았다.
벌써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내가 생존 훈련에 투입될 때마다 탈락시킨 탓에 한상혁은 호언장담하던 것과 달리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교육대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리고 김중석은 2주 전에 불합격 판정을 받아 일반 부대로 전출당하고 말았다.
“하아…….”
내가 한숨을 내쉬자, 같은 생활관을 쓰는 교육생 한 명이 알은체를 해 왔다.
“거기 새로 온 아저씨는 어제까지만 해도 다른 팀 소속으로 같이 훈련받은 것 같은데, 아닌가?”
“뭐가 궁금한데?”
내가 날카로운 반응을 내비치자, 질문을 던진 남자가 움찔했다.
“아니… 새벽에 나갔다가 바로 죽은 건가 싶어서.”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걸 묻는 이유가 뭔데?”
“그냥. 요새 들리는 소문에 두 달 동안 생존 훈련에서 8주가 넘어가는데 하루도 못 버티고 교육대로 돌아오는 신기록을 세운 병사가 있다기에. 혹시 그게 아저씨인가?”
그런 소문이 돌고 있었나.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하긴, 오늘처럼 새벽에 나가자마자 돌아오면 연속으로 훈련을 받게 되는 꼴이니, 얼굴이 많이 팔린 모양이었다.
“맞는 모양이네. 와, 이거 영광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야? 얘기나 좀 해 봐. 당신처럼만 안 하면 합격하는 거잖아? 하하하!”
“푸하하하!”
“대박. 기록 갱신을 일부로 하는 건가? 일반 부대로 전출 가고 싶어서?”
“하하하! 그야말로 보너스네, 보너스. 다음에 나한테도 한 번 죽어 주면 안 될까?”
생활관에 있는 모든 교육생들이 일제히 나를 비웃어 댔다.
짜증 나는 일이지만, 나는 애써 그들을 무시했다.
잠시 후 식사 시간이 되자, 나는 밥을 한가득 퍼 담았다.
교육대의 좋은 점을 꼽자면, 맛있는 식사를 마음 편히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 모습을 지켜보던 같은 생활관 교육생이 비웃음을 흘렸다.
“이야, 아침을 그렇게나 많이 먹다니… 훈련을 많이 받아 본 사람이 기본도 모르는 모양이야. 하하하.”
“아하하하!”
나는 비웃어 대는 교육생들을 철저히 무시한 채 식사에 열중했다.
식사를 마치고 교육이 시작되자, 교육생들은 목봉 교장까지 이동했다.
벌써 거의 두 달 내내 교육대에서 시간을 보냈더니, 이제는 중량 장비가 내 평상복이고 행군도 전혀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목봉 체조가 끝난 이후에도 체력은 여전히 남아돌았다.
점심 식사는 언제나 그렇듯 전투식량이었다.
이제는 보는 것만으로도 신물이 올라올 정도로 지겹지만, 억지로 씹어 삼켰다.
“지금부터 체력 훈련을 시작한다. 꼴찌 팀은 보충 훈련이다.”
열 개의 팀이 동시에 밧줄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시작과 동시에 가장 먼저 밧줄에 올랐다.
그리고 경쟁하던 교육생들 중 가장 먼저 종을 치고 바닥에 착지했다.
체감상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데 5초도 걸리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모습에 팀원들이 멍하니 내 얼굴을 쳐다봤다.
나는 아침에 내게 시비를 걸어온 교육생을 쳐다보며 말했다.
“뭐 해, 빨리 안 올라가고.”
“아, 응!”
나는 이어진 교육에서도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가장 빠르게 코스를 통과하며 체력 훈련을 마쳤다.
레그턱 2분 18초, 전장 순환 훈련 1분 52초, 240미터 왕복 달리기 46초.
하지만 산악 뜀걸음의 경우, 마지막으로 통과한 팀원의 기록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팀 기록은 34분으로 전체 열 개 팀 중에 3위로 떨어졌다.
“우와, 도대체 뭘 먹었기에 그렇게 빠른 거야? 나도 좀 알려 주라.”
“나처럼만 안 하면 통과할 수 있다는 사람에게 도움이 필요해?”
“그건…….”
나는 머쓱해하는 팀원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냥 닥치고 하면 돼. 포기하지만 말고.”
이어진 근접 격투술에서도 나는 교관이 보여 준 동작들을 모조리 따라 하며 거의 완벽하게 펼쳐 냈다.
그러자 야간 전술훈련 때엔 팀원들이 내 입만 바라보게 됐다.
팀장은 따로 있지만, 그 팀장까지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 어쩔 수 없이 지휘를 맡아야 했다.
“시작과 동시에 깃발을 뺏으러 간다. 루트는 좌우로 나누지 않고, 중앙을 돌파한다. 총알은 각자 두 발씩. 나머지는 모두 내가 쏜다.”
나의 지시에 따른 우리 팀은 3일 동안 단 한 번도 경계 근무에 나서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또다시 생존 훈련에 투입되는 날이 돌아왔다.
생존 훈련에 투입되기 전, 박은우 중위가 나를 불렀다.
“교육생에게는 따로 생존 훈련 규칙에 대해 설명하지 않겠다.”
“…예.”
나도 더 이상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박은우 중위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딱 일주일 남았나?”
“네.”
“예전에도 너와 같은 병사가 하나 있었지. 합격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계속해서 탈락을 반복하다가 결국 하루를 남겨두고 최종 합격 판정을 받았어. 교육대에 근무하는 교관들 사이에서도 전설처럼 전해져 오는 얘기다.”
“그렇습니까?”
내가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박은우 중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반응이 시원찮군. 하지만 그분이 누군지 알면 다르겠지. 이름은 강기오. 지금은 논산훈련소에서 교관 생활을 하고 있다더군.”
내가 눈을 크게 뜨자, 박은우 중위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건넸다.
“그분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네.”
의외의 얘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강인하게만 보이던 강기오 중사가 하루를 남겨두고 겨우 합격했다니.
박은우 중위는 더 해줄 말이 없는지, 나를 태우고 생존 훈련장으로 향했다.
생존 훈련장에 도착한 나는 곧 바로 위치 추적기를 사용해 한상혁의 위치를 검색했다.
[수신 완료. 목표와의 거리, 433미터.]
나는 언제나 그렇듯 곧장 한상혁을 찾아 이동했다.
이상한 건 내 기습에 죽은 뒤로는 항상 시작하자마자 바쁘게 움직였는데, 이번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내가 한상혁을 발견했을 때도 녀석은 주변을 두리번거릴 뿐, 이동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는 공터에 자신을 노출시킨 채 몸을 숨기지 않았다.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나는 조용히 한상혁의 등 뒤쪽으로 돌아가 총구를 겨눴다.
내가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고 호흡을 가다듬을 때였다.
한상혁이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리더니 허공에 외쳤다.
“최대길, 거기 있나? 지금쯤이면 어딘가 숨어서 나를 죽이려 하고 있겠지?”
워낙 교활한 녀석이기에 나는 대꾸 없이 가만히 녀석을 지켜봤다.
“큭, 이제 그 정도 했으면 화가 풀릴 때도 되지 않아? 이쯤에서 휴전하는 게 어때? 아니지. 항복하겠다.”
한상혁은 자신의 뜻을 확실히 표현하기 위해 양손을 머리 위에서 깍지 낀 채 무릎을 꿇었다.
나는 녀석의 등 뒤로 다가가 총을 겨눴다.
“무슨 개수작인지 모르겠지만, 안 통해.”
“진짜 와 있었네. 큭큭.”
한상혁은 곧 죽게 생겼는데도 재미있다는 듯 킥킥대며 웃었다.
“뭐가 웃겨?”
“큭큭, 나만 죽을까? 너도 곧 죽을 텐데.”
한상혁의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미친년이랑 만나기로 했냐?”
“아니. 그 여자 소위와는 따로 연락한 적 없어. 생각해 봐. 훈련장에 나오자마자 너한테 죽는데, 내가 무슨 수로 연락하겠어?”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내가 오기 전에 흔적을 남긴다든지, 바닥에 글을 적을 수도 있잖아?”
“내 생각엔 그 여자도 너처럼 무언가를 이용해 너를 쫓아오는 게 분명해. 솔직히 너도 가지고 있잖아? 예를 들어… 위치 추적기라든지.”
나는 녀석이 위치 추적기를 언급하자 놀랐지만, 최대한 반응을 내비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한상혁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말을 꺼냈다.
“이미 눈치챈 지 오래야. 내가 아무리 위치를 옮겨 다녀도 너는 곧바로 나를 찾아내더군.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닐까?”
“그래서 뭐, 이제 와서 달라질 게 있어?”
“큭큭큭, 충분히 달라지지.”
“뭐가?”
“어차피 이대로라면 나는 너한테 죽어서 불합격할 게 빤하고, 너도 그 여자한테 죽어서 일반 부대로 편입되겠지.”
“그래,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적어도 억울하진 않을 거야.”
“좋아. 그럼 한 가지만 더 물어보겠어. 너는 본인이 탈락하더라도 상관없다는 뜻이냐?”
“어차피 안 될 거라면, 너라도 데려가는 게 낫지 않겠어?”
“쯧, 그런 여자를 이용하려 했다는 게 내 실수다. 너를 탈락시키고 먼저 합격해서 선임 노릇을 하겠다는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어. 하지만 이젠 너도 나도 더 물러설 곳이 없어. 이대로 가다간 선임은커녕, 사이좋게 손잡고 전출 가게 생겼다고. 안 그래?”
“상혁아, 혓바닥이 길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내가 소리치자, 한상혁이 양손을 번쩍 든 자세로 손가락 하나만을 펼쳤다.
“큭큭, 너에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 그래서 이렇게 자존심을 굽힌 거고.”
“제안?”
“너도 들어서 알겠지만, 장교 교육생들은 10주 안에 100명을 탈락시켜야 해. 그리고 내가 협력하기로 한 뒤에 알아낸 정보로는 그 여자는 오늘로 딱 66일째야. 그리고 너만 죽이겠다는 걸 우둔하게 고집하는 중이라면 현재까지 98명을 탈락시켰을 거야.”
나는 한상혁의 설명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그래. 오늘 너를 탈락시키면 99명, 그리고 3일 뒤에 너를 한 번 더 탈락시키면 딱 100명째가 되겠군.”
“젠장.”
“그럼 너는 하루를 남긴 채 마지막 생존 훈련의 기회를 받겠지. 물론, 네가 나를 죽일 테니 나도 같은 신세가 될 거고 말이야. 큭큭큭.”
한상혁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를 향해 돌아섰다.
총을 든다든지 공격적인 행동은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기만 했다.
그러자 한상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너 혼자 하루 만에 경쟁자 일곱 명을 처치하고 합격할 수 있어?”
“그럴 수 있다면 이미 합격했겠지.”
“그럼 둘이라면 어떨까?”
“어차피 하루 만에 열네 명은 무리야.”
“큭큭큭, 그럼 며칠이면 가능할까?”
“적어도 사나흘 정도는 있어야…….”
“4일이라… 그 정도면 위치 추적 장비를 이용하면 충분하겠네.”
“유미를 피해 다닐 수 있을까? 그 미친년도 위치 추적 장비를 가지고 있을 텐데.”
“아니, 그 여자는 그럴 수 없을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그 여자가 100명을 모두 채우게 만들면 된다는 뜻이야.”
“뭐?”
한상혁은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을 펴 보이며 말했다.
“그 여자에게 우리 둘이 죽어 주면 우리에게는 4일의 시간이 주어지게 되는 거지.”
“우리라고?”
“그래, 우리. 오늘 나도 그 여자의 손에 죽는다.”
한상혁은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최대길, 일시적인 동맹을 제안한다. 기한은 두 사람이 합격할 때까지.”
“동맹? 네가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걸 내가 어떻게 믿어?”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만약 내가 다시 뒤통수를 치면 개새끼다.”
개새끼라는 말에 조금 믿음이 생겼다.
일단 전에도 나와 내기에서 패배한 후에 나를 형님이라고 부른 적은 있으니까.
하지만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의 말에 말려들었다가 낭패를 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결정은 빠를수록 좋아. 그 여자가 오기 전에 준비할 것도 있거든.”
나는 고민 끝에 한상혁의 손을 잡았다.
“동맹 성립이다. 앞으로 잘해 보자고, 파트너.”
한상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한 바람이 불더니, 등 뒤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호호호, 여기 있었구나. 오늘은 친구가 아직 살아 있네? 그사이에 화해라도 한 모양이네.”
쓸데없는 발악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나는 곧바로 대검을 꺼내 들었다.
유미는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더니, 양 볼에 보조개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하지만 이내 기분이 나쁘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휴, 아쉬워. 조금 더 오래 괴롭히고 싶은데 말이야. 이제 두 번밖에 안 남았네.”
“꼭 정신과에 가 봐라, 미친년아. 너 정도면 입원 사유로 충분할 거다.”
“호호호, 입 거친 건 여전하네. 어서 덤벼 봐.”
유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두 팔을 늘어뜨렸다.
나는 바로 유미에게 달려들려 했으나, 별안간 한상혁이 팔을 뻗어 내 목을 감더니 대검을 목에 들이댔다.
[피격 판정. 미약한 출혈. 응급 처치를 실행하십시오.]
“너, 또 배신…….”
놀란 내가 소리치자, 한상혁은 내게 귓속말로 조용히 있으라고 속삭였다.
내가 입을 다물고 양손을 들어 올리자, 한상혁은 유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미안한데, 이놈은 제 겁니다.”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유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큭큭큭, 나도 그동안 이 녀석한테 당한 게 많아서 복수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소위님은 이만 빠져 주시죠.”
말을 마친 한상혁은 그대로 대검을 머리 위로 들더니, 곧장 내 목을 향해 내리찍었다.
하지만 한상혁의 대검은 내 눈앞에서 멈춘 채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어느새 유미가 쏘아낸 기운에 속박당해 몸을 바르르 떨고 있을 뿐이었다.
“젠장, 다음엔 꼭…….”
천천히 달려온 유미는 한상혁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의 정수리에 대검을 꽂았다.
유미는 바닥에 쓰러지는 한상혁을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감히 내 것을 넘봐?”
한상혁이 쓰러지며 제압이 풀리자, 나는 무방비 상태로 서 있는 유미의 가슴을 노려 대검을 찔렀다.
“호호호, 안 된다니까!”
유미의 대검이 번쩍인다 싶은 순간, 나는 사망을 알리는 메시지를 듣는 것과 동시에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