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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우기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김중석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왠지 익숙한 장면이었다.

“경계 근무시간이다.”

“아…….”

우리 팀은 깃발을 빼앗기며 야간 경계 근무에 나서야 했다.

생활관으로 돌아와 정신을 차린 뒤 접한 소식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우리 팀은 전원이 탈락했고, 상대 팀은 일곱 명 중 내가 죽인 두 명을 빼고는 모두가 살아남았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상대 팀 전원이 능력자다 보니, 우리 팀은 총알을 모두 소비한 뒤 속수무책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팀 전체가 헌터라니, 완전 사기였다.

‘그래도 내 공격으로 쓰러진 여자의 표정은 아주 볼만했지.’

비록 그녀를 탈락시킨 직후 대검에 난도질당해 탈락했지만, 전혀 아쉽지가 않았다.

쏟아지는 졸음에 하품을 쩍쩍 해 대며 경계 근무를 마치고 생활관으로 돌아오자, 김중석과 다른 팀원 한 명이 생활관을 나서는 중이었다.

생존 훈련에 투입되는 것이리라.

“정상에 높은 첨탑이 보일 거야. 거기서 우리랑 합류해.”

“그래, 고마워.”

“나중에 보자.”

생활관에 누워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자, 어느새 아침이 밝아 있었다.

생활관에는 간밤에 실려 온 탈락자가 도착해 있었다.

다른 팀도 사정은 마찬가지인지, 훈련을 준비하러 연병장에 나가니 처음 보는 얼굴이 많이 보였다.

나는 어젯밤 전술훈련에서 만난 여자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새벽에 생존 훈련장으로 향한 듯싶었다.

곧 지옥 같은 훈련이 반복됐고, 나는 여전히 버거운 훈련을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

그러고 나서 팀 단위 야간 전술훈련이 진행됐지만, 이번에도 깃발을 빼앗겨 야간 근무를 서게 됐다.

다음 날엔 세 명의 팀원이 떠났고, 그 자리에 또다시 탈락자들이 충원됐다.

이틀째와 같은 패턴으로 3일째가 지난 새벽, 조달영과 한상혁이 먼저 생활관을 나섰다.



내 차례는 아침이 밝아올 무렵에야 돌아왔다.

이번에 날 생존 훈련장에 데려다준 건 박은우 중위가 아닌, 다른 교관이었다.

“조건은 첫날과 동일하다. 7일간 생존하거나, 경쟁자 일곱 명을 제거하면 합격이다. 건투를 빌지.”

낯선 장소에 남겨진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168:58:47.’

두 번째 생존 훈련은 첫날과 많은 게 달랐다.

아무것도 없이 한밤중에 투입된 것과 달리, 이번에는 날이 밝은 뒤였다.

그뿐만 아니라, 전투 식량 두 개와 기본 보급품을 지급받은 상태로 시작할 수 있었다.

문제는 조력자가 되어 줄 조달영과 한상혁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우선적으로 목표로 해야 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파티에 합류하자.’

일단 나는 근처에 높게 자란 나무그늘 아래 숨어 주변을 살폈다.

낮에 본 생존 훈련장은 제법 넓어 보였다.

산 정상을 확인하자, 김중석의 말대로 높은 첨탑이 서 있었다.

‘고지대를 선점하는 게 주변을 살필 수 있어 유리하겠지.’

이동 방향을 정한 나는 대충 거리를 가늠해 봤다.

어느 정도 거리가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엔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 움직이는 건 위험해.’

밤이라면 모를까, 환한 대낮에 모습을 드러낸 채 이동하는 건 위험부담이 상당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최대한 숲의 그림자에 숨어 이동하기로 마음먹고 자세를 최대한 낮춘 채 정상을 향해 움직였다.

해가 저물어 갈 무렵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산의 초입을 벗어나지 못했다.

‘젠장, 내가 이렇게 심한 방향치였나?’

나는 분명 앞을 바라보며 똑바로 걸었다 생각하는데, 어느새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게 반복되다 보니 산 중턱은 구경도 못했다.

‘슬슬 밤을 보낼 장소를 찾아야 해.’

낮 동안엔 의외로 교육생들 간의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지, 총성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아마 다들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에서 사냥감을 찾기를 원하는 듯싶었다.

“이쯤이 좋겠네.”

나는 계곡 근처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져 죽은 장소를 발견했다.

꼬르륵.

마침 배도 고파 오기에 나는 오늘 밤에 머물 장소를 이곳으로 정하고, 야삽으로 흙을 퍼냈다.

겨우 무릎 높이의 구덩이를 파냈을 때, 날은 이미 어둑해진 뒤였다.

나는 구덩이에 들어간 뒤, 가방에서 전투식량 하나를 꺼냈다.

그때,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참호 속에 바짝 웅크린 채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은 물을 뜨러 왔는지 조심스럽게 계곡으로 내려가 수통에 물을 담으며 대화를 나눴다.

나는 그들이 떠나길 기다리며 대화를 엿듣다가 귀에 익은 목소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중석? 산 정상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여긴 왜… 그럼 같이 있는 사람은 동료 중 한 명인가?’

“크크크, 짓궂기는… 순진한 놈들은 뭣도 모르고 산 정상으로 가고 있겠네?”

“그래. 지금쯤이면 이미 정상에 도착했을지도 모르지. 신병들은 참 잘도 속아.”

“조심해라. 그러다가 또 윤수겸 같은 놈한테 당할라.”

“걱정 마. 이번에 만난 놈들은 두 놈이 노말이고, 한 명은 D급 능력자야.”

“D급이면 셋 다 데려오지그랬냐?”

“말도 마. 노말 중 한 놈은 머리라도 좋은데, 다른 한 놈은 어디 한 군데 써먹을 구석이 없어. 그놈 때문에 체력 훈련 때 보충 훈련까지 받았다니까. 산악 뜀걸음 중에 탈진해서 쓰러지는 바람에 눈앞에서 송장 치우는 줄 알았다. 뭐, 그 덕에 연예인을 봤지만.”

“연예인? 누구?”

“영화배우 차지혁.”

“뭐? 차지혁이 여기에 와 있다고?”

“그래. 내 두 눈으로 직접 봤어. 그리고 놀라지 마라. 차지혁이 B급 능력자란다. 그것도 치유계 각성자래.”

“정말? 우와, 부럽다. 여자들한테 인기도 많을 거고, 치유 능력이면 완전 귀족이잖아. 그것도 B급이면 엄청 대단한 거 아냐?”

“그렇지. 그런데 그 병신이랑 차지혁이 꽤 친해 보이더라. 깨어나자마자 형님, 형님 부르고, 차지혁도 그놈한테 잘 대해주고.”

“뭐? 차지혁 그놈, 남자 밝히는 거 아냐?”

“그건 아닌 것 같더라.”

“그래? 그럼 그 병신이라도 데려오지그랬어?”

“왜?”

“그놈이랑 친한 척해두면 우리도 나중에 차지혁이랑 알게 될 수도 있는 거 아냐?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우리가 연예인이랑 친해질 기회가 있겠냐.”

“쩝, 그렇긴 하네.”

“병신이니까 이런 잡일도 그놈한테 떠맡기면 되고 좋겠네. 괜히 물 뜨러 나왔다가 뒈져도 우리 손해는 아니잖아.”

“하긴, 그 생각을 못했네. 지금이라도 데리러 갈까?”

“미쳤냐? 정상에 가면 괴물들이 미쳐 날뛰는데… 아무리 연예인이랑 친해질 기회라지만 그건 아니다. 나 이제 이틀밖에 안 남았다.”

“자식, 농담이야. 내가 미쳤다고 거길 가겠냐?”

가만히 둘의 대화에 집중하던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저 개자식! 사람 좋은 척하더니, 완전 날 갖고 논 거였어!’

나는 당장에라도 총을 꺼내 김중석을 쏴 죽여 버릴까 하다가 애써 참았다.

내가 가진 총알은 한 발뿐이고, 적은 두 명이다.

요행히 김중석을 맞춘다 하더라도, 남아 있는 녀석을 상대해야 할 테고, 총소리가 퍼지면 주변에서 누군가가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개새끼…….”

나는 이를 악물고 욕하는 걸로 마음을 달랬다.

“어?”

“왜?”

“방금 무슨 소리 안 들렸어?”

“글쎄, 난 아무 소리도 못 들었어.”

“방금 누가 욕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김중석의 동료는 귀가 무척 밝은 모양이었다.

나는 숨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입을 틀어막고 더욱 몸을 웅크렸다.

그러자 다행히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한 김중석이 동료를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에이~ 새끼야, 놀랐잖아.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괜히 지랄하지 마. 이틀 남았다더니, 쫄리냐?”

“그런가? 그래도 혹시 모르지. 빨리 은신처로 돌아가자.”

“그러든가.”

두 사람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된 후에야 나는 참던 숨을 내쉬었다.

“후우, 저 개자식이… 가만, 이려면 큰일 난 거 아닌가?”

김중석에게 놀아났다는 것은 둘째 치고, 정보를 공유한 동기들이 걱정됐다.

김중석의 말이 사실이라면 조달영과 한상혁이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전투식량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고, 주변을 빠르게 살핀 뒤 참호 밖으로 기어 나왔다.

그사이, 해는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주위는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상의 첨탑은 어렴풋이 보인다는 점이었다.

날이 어두워져 더 이상 몸을 낮추지 않아도 되기에 나는 서둘러 정상을 바라보며 달렸다.

도중에 누군가와 마주칠까 걱정도 됐지만, 다행히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간혹 산 아래쪽에서 전투가 벌어지며 고함 소리와 총소리가 들려왔지만, 첨탑에 가까워질수록 주변은 더욱 고요해졌다.

첨탑에는 괴물들이 미쳐 날뛴다는 말을 들었지만, 나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한 걸음, 한 걸음 정상으로 다가갔다.

오로지 위험에 빠진 동기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물론, 평소에 한상혁이 얄밉게 굴지만, 아무리 그래도 죽게 놔둬 아군을 잃을 필요는 없었다.

정상 부근에 도착해 저 멀리 첨탑의 아랫부분이 눈으로 보일 정도가 되자, 나는 멈춰 서서 시계를 내려다봤다.

‘155시간 42분 01초. 생존 훈련에 투입된 지 열두 시간이 넘었어.’

나보다 일찍 투입된 동기들은 벌써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벌써 당해 버린 건 아닐까?’

내가 다시 첨탑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툭.

차가운 금속 물질이 등에 닿았다.

‘총이라고?’

나는 그 자리에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

“손 들어.”

누군가가 낮게 속삭이듯 위협했다.

나는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뒤에서 킥킥거리며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달영?”

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조달영이 내 등에 총을 겨눈 채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하하하, 미안. 하도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는 걸 보니까 갑자기 장난이 치고 싶어져서.”

나는 그의 웃는 얼굴을 보게 되자 화가 나기는커녕 안도하며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정말 다행이다. 너라도 살아 있어서.”

“그게 무슨 말이야? 죽기는 누가 죽어?”

“그게 아니라… 김중석, 그 자식이 우릴 속였어. 저 첨탑엔 파티가 없어.”

나는 길을 헤매다 우연히 김중석과 그의 동료를 만난 일과 그들이 나눈 대화를 조달영에게 말해줬다.

그러자 조달영은 그다지 놀라는 기색 없이 턱을 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역시 그랬나.”

“뭐야? 알고 있었어?”

“한상혁이 그러더군. 뒈지고 싶으면 혼자 가라고.”

“뭐?”

“처음 본 녀석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면서, 함정일 게 빤하다고 충고하더군. 그러더니 제 갈 길로 가버렸어.”

“그래? 그럼 너는 여기 왜 온 거야?”

나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조달영에게 물었다.

“나는 널 기다렸다가 합류하자고 제안했는데, 꼼짝 못하고 함정에 빠져 죽을 병신을 왜 구하냐고 화를 내더군.”

“뭐? 그럼 나 때문에 여기서 기다린 거야?”

“그래. 진짜로 나타날 줄은 몰랐지만. 그런데 너는 중간에 다 알았는데 왜 여기에 온 거냐?”

조달영의 물음에 나는 머쓱해져서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나야 당연히 너희들을 걱정해서…….”

경위는 다르지만, 어쨌거나 조달영과 나는 같은 마음으로 이곳에 온 것이었다.

“조금 의외네. 네가 나를 그렇게 생각해 줄 줄은 몰랐는데.”

내가 진심을 말하자, 조달영이 도리어 머쓱해했다.

“뭘 이런 걸로 감동을 받아? 어렵게 생각하지 마. 나는 한 명이라도 확실한 아군이 필요했을 뿐이야.”

“나도 그건 마찬가지야.”

그때, 처음으로 진정한 전우애가 싹튼 훈훈한 그림에 찬물을 끼얹듯 강한 바람이 산 아래쪽에서 불어닥쳤다.

그와 함께 우리 앞에 예상치 못한 불청객이 등장했다.

나와 조달영은 반사적으로 총구를 들어 불청객을 겨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