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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유미는 내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가왔다.

조금 전처럼 기운을 내뿜어 속박하지도 않는데 나는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한기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멀리 나가떨어진 그녀가 어느새 내 공격권 안으로 들어왔지만, 나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지금껏 수백, 수천 번씩 반복한 총검술도 펼치지 못했다.

그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무서웠다.

나를 노려보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싶지만, 그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미는 두 손가락으로 내 총을 슬쩍 옆으로 밀어냈다.

나는 그걸 그냥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대검을 역수로 쥐고 내 가슴에 찔렀다.

그러자 헬멧 속에서 무미건조한 여성의 안내 음성이 들려왔다

[피격 판정 중… 피해 계산 완료. 심장 관통상으로 인한 즉사입니다.]

순간, 눈앞이 암전되듯 캄캄해졌다.

[당신은 사망했습니다. 모든 시각 및 청각이 차단됩니다. 사망 판정으로 인해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음성 안내가 끝나자, 척추를 타고 전신으로 짜릿한 전류가 흘렀다.

“커헉!”

나는 전신에 힘이 풀리는 걸 느끼며,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다시 일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여성의 안내 멘트가 다시 흘러나올 뿐이었다.

[당신은 사망했습니다. 모든 시각 및 청각이 차단됩니다. 사망 판정으로 인해 움직일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 직후 다시 한 번 전신을 강타하는 전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가만히 누워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안내 멘트처럼 청각이 차단당했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바닥의 냉기만 느껴질 뿐이고, 그 외엔 내가 눈을 깜빡이고 있다는 것 정도만 느낄 수 있었다.

‘먼저 쓰러진 한상혁과 조달영도 마찬가지겠지.’

나는 이대로 구조대를 기다리다가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리는 건 아닌지 걱정됐다.

‘오늘 하루가 참 더럽게도 기네.’

추운 상황이라 잠이 올 리가 없는데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눈을 부릅뜨고 버텨보려 했으나,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게 눈꺼풀이라는 말처럼 졸음이 몰려왔다.

“…어나.”

그 순간, 누군가가 날 흔들어 깨우는지 몸이 흔들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야. 일어나.”

“으음…….”

눈곱으로 딱 달라붙은 눈을 억지로 들어 올리니, 처음 보는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헉!”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며 경계 태세를 갖췄다.

당장에라도 눈앞에 있는 남자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양팔을 가슴 높이로 들어 올렸는데,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하하하, 진정하라고.”

처음 보는 남자가 크게 웃었다.

“정신이 좀 들어? 여기는 교육대 생활관이야. 여기서는 안 싸워도 되니까 긴장 풀어.”

“교육대?”

“그래. 너희는 새벽에 실려 왔어.”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나는 머쓱하게 헛기침하며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새하얀 천장에 길게 늘어선 철제 관물대.

출입문 상단에는 7이라는 숫자가 쓰인 하얀 판이 붙어 있었다.

훈련소에서 지내던 생활관과 비슷하지만, 왠지 낯선 공간이었다.

“나는 김중석. 네 이름은 이미 들었어.”

자신을 김중석이라 밝힌 남자는 손가락으로 생활관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여섯 명의 남자가 보였는데, 그중 두 사람은 익히 잘 아는 얼굴이었다.

“여어.”

나와 시선이 마주친 조달영이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 맞은편에는 한상혁이 똥 씹은 듯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데, 녀석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나는 다시 내 앞에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세히 보니 그는 마치 교회 오빠 같은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떤 상황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런데… 교관이십니까?”

남자는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을 소개했다.

“나도 너랑 같은 CHT 후반기 교육생 중 한 사람이야, 부사관으로 지원해서 임시로 7생활관의 팀장을 맡고 있어.”

“헛, 충…….”

“경례는 안 해도 돼. 존칭도 마찬가지고. 여기선 너나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같은 입장이야. 이곳은 오로지 실력으로 승부를 보는 곳이고, 모두가 경쟁자라고 할 수 있지.”

“…그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그래. 상급자 대우는 합격해서 다시 마주쳤을 때 해주면 돼.”

“어… 응. 알겠어.”

“생활하다 보면 느끼겠지만, 훈련은 같이 받아도 생존 훈련에 투입되면 모두가 적이야. 그래서 기본적으로 자기소개도 잘 안 하는 편이야.”

남자의 말에 생활관을 둘러보니, 역시나 모두가 제 할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삭막한 분위기에 대충 분위기를 파악하고 나니, 간밤에 만난 여자가 퍼뜩 떠올랐다.

한상혁의 물음에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밝히던 여자.

‘유미라고 했지…….’

“뭐,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말라고.”

김중석은 내 어깨를 토닥이더니 다른 이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슬슬 준비하자. 아침 먹어야 또 훈련을 받지.”

김중석의 말에 침상 위에 널브러져 있던 여섯 명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나는 뭘 준비할 필요도 없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은 어제 그대로 전투복 차림이고, 누군가 이부자리를 깔아준 것도 아니기에 침구류를 정리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생활관을 나서다가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바로 김중석에게 질문을 던졌다.

“바로 식사하러 가면… 점호는 안 하는 거야?”

“아, 여기서는 약식 점호만 하기 때문에 팀장이 인원 보고만 하면 끝나.”

김중석의 뒤를 따라 건물을 나서자마자, 아침 식사 시간을 알리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교육생 전원, 현 시각부로 식사할 수 있도록 합니다.]

마침 여덟 명의 병사가 본관 앞에 더플 백을 메고 대기 중이었다.

그중 세 사람은 검은색 CHT 전투복을 입고, 나머지 다섯은 디지털 무늬 전투복 차림이었다.

그중엔 이등병도 있고, 하사 계급장을 단 사람도 보였다.

“저 사람들은 누구야?”

내 질문에 김중석은 내가 바라보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웃으며 내게 설명했다.

“CHT 부대의 전투복을 입은 세 사람은 합격자야. 그리고 옆의 다섯 명은 최종 탈락자들이고. 10주 안에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부대로 전출 가는 거지.”

“아!”

그러고 보니 합격자들과 탈락자들의 표정이 사뭇 대조적이었다.

김중석은 CHT 전투복을 입은 세 사람을 가리켰다.

“나중에 합격해서 자대로 가게 되면, 저 사람들이 선임이겠네. 저기 맨 왼쪽에 있는 사람 보여?”

김중석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내 또래처럼 보이는 남자가 보였다.

얼굴이 동안이라 나보다 더 어려 보일 정도였다.

“윤수겸이라고 교육대에 들어온 지 2주도 안 된 놈인데, 이번에 저놈한테 당해서 탈락했어. 부사관 학교 기수로는 내 후배인데, 나보다 먼저 자대 배치를 받았으니까 꼼짝없이 선배 대접을 해줘야 할 판이야.”

그렇게 해도 문제가 없는 건지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우리의 대화를 들었는지 한상혁이 킥킥대며 웃어 댔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니, 예사롭지 않은 눈빛을 번뜩이고 있었다.

나보다 훈련을 먼저 통과해 선임 대접을 받으려는 속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앞으로 가!”

나는 7생활관 인원들과 발을 맞춰 교육대의 식당으로 향했다.

교육대 식당은 훈련소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종류의 음식이 푸짐하게 준비돼 있었다.

나와 한상혁, 조달영이 깜짝 놀라 식판을 든 채 석상처럼 굳어 있자, 김중석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밥을 수북이 퍼 담았다.

곧바로 훈련이 있다고 들었으니, 많이 먹어 둘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김중석이 충고를 건넸다.

“너무 많이 담는 것 같은데, 오늘 아침은 적게 먹는 게 좋을 거야.”

“훈련소에서도 이만큼씩 먹었어. 그리고 훈련을 생각하면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야지. 너야말로 너무 적게 담은 거 아냐?”

김중석의 식판엔 아주 적은 양의 음식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얼른 주변 사람들을 살폈는데, 대부분의 교육생이 김중석과 마찬가지로 식판의 대부분의 공간을 비워둔 상태였다.

심지어 아침을 거르려는 건지, 거의 아무것도 담지 않은 교육생도 보였다.

“음… 뭐, 처음이니까 직접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응?”

“아니, 맛있게 먹으라고.”

나는 배가 든든해야 훈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 음식을 잔뜩 쌓았다.

그렇게 첫술을 떠서 입안에 넣은 나는 내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훈련소의 식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맛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아침을 배불리 먹은 나는 포만감을 느끼며 식당을 나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김중석의 충고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생활관으로 돌아와 대기하고 있을 때였다.

[교육 집합! 교육생 전원은 중량 장비를 착용하고 10분 내로 연병장으로 집합합니다.]

방송이 나오자마자 김중석을 비롯해 교육생들이 다들 관물대에서 무언가를 꺼내 전투복 위에 착용했다.

“중량 장비? 그게 뭐야?”

“아, 이거? 너희도 곧 지급받을 거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생활관 문이 열리며 어제 만난 박은우 중위가 조교들과 함께 들어섰다.

조교들은 각자 수레를 하나씩 끌고 오더니, 나와 동기들 앞에 상당히 커 보이는 상자를 내려놨다.

쾅!

박은우 중위는 간략한 설명을 덧붙였다.

“잠은 잘 잤나? 이건 너희들 장비니까, 앞으로 훈련 시엔 항상 착용할 수 있도록.”

“네!”

박은우 중위가 나가고, 상자 속을 들여다보니 김중석이 착용하던 것과 같은 장비들이 보였다.

조끼 하나에 손목과 발목에 착용하는 밴드가 각각 한 쌍씩 들어 있었다.

“조끼가 20㎏, 손목과 발목에 차는 밴드가 각각 5㎏씩, 총 40㎏이야. 실제 자대에서 사용하게 될 마력 갑주의 무게랑 얼추 비슷해.”

“뭐, 40㎏? 그럼 군장보다 훨씬 무거운 거잖아!”

난 김중석이 농담하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상자 속에서 장비를 꺼낼 때 느껴지는 무게에 농담이 아니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낑낑대며 조끼와 밴드를 모두 착용하자, 전신을 짓누르는 무게감이 상당했다.

그때, 훈련 집합을 알리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내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김중석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조금 지나면 익숙해질 거야.”

김중석을 비롯한 기존 교육생들은 이미 익숙해졌는지, 움직이는 데 크게 힘든 기색이 없어 보였다.

능력자인 조달영 역시 크게 신경 쓰는 기미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와 한상혁은 중량 장비를 입고 움직이는 것만으로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연병장으로 나오자, 교육을 받기 위해 모여든 교육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들 중에는 어젯밤 우리와 대치한 녀석들도 있을 터였다.

우리와 함께 유미의 공격을 받아 탈락했을 테니 틀림없다.

나는 팀장인 김중석을 따라 열을 맞춰 섰는데, 팀마다 일곱 명이나 여덟 명씩 열두 개의 팀으로 구성돼 있었다.

교육생들 사이엔 여자로만 구성된 팀도 두 개나 있었다.

물론, 여자 교육생들도 우리와 같은 중량 장비를 착용한 상태였다.

잠시 후, 박은우 중위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단상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너희가 이곳에 있다는 건 최소 한 번 이상 탈락을 경험했다는 뜻이다. 그 나약한 정신을 재무장하기 위한 훈련을 진행하기 위해 목봉 체조 교장까지 급속 행군으로 이동하겠다.”

목봉 체조.

왠지 이름부터 불길한 예감이 풍겼다.

“현재 시간 08시 05분, 한 시간 정도면 다들 도착할 거라 믿겠다.”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되기 전이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이곳의 미친 듯한 훈련 난이도를 절감할 수 있었다.

교장까지 이동하는 데만 한 시간, 그것도 40㎏에 육박하는 중량 장비를 몸에 걸치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야 했다.

실제로 가볍게 뛴다고 달렸는데, 발목에 무게가 쏠리며 장비에 짓눌려 죽을 것만 같았다.

나는 대열에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걸었다.

그렇게 한 시간을 죽기 살기로 버텨 다리에 힘이 풀릴 무렵, 간신히 교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넓은 공터에 들어선 나는 불길한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공터 바닥엔 성인 남자의 머리통보다 큰 둘레의 기다란 육각형 통나무가 놓여 있었다.

통나무의 절단면에는 ‘240㎏―8’, ‘210㎏―7’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설마 이걸 들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나는 마음속으로 제발 내 예상이 빗나가기를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이내 들려온 박은우 중위의 한마디에 내 바람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지금부터 목봉 체조를 실시하겠다. 각 팀은 인원수에 맞춰 목봉 앞에 위치하도록.”

이동하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렸는데, 짧은 휴식조차 부여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