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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한상혁은 상황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넘어왔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놈들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선택권을 줄게. 이대로 물러가면 우리도 너희와 싸울 마음은 없어. 대신 총알 한 발과 공이는 다시 돌려줘야겠어.”

한상혁의 말에 내 앞에 서 있는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상황이 이해 안 되나? 지금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너희가 아니라 우리다.”

한상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나와 조달영을 번갈아 가리키며 말했다.

“뭘 모르는 건 너희야. 멍청하게 생긴 이놈은 총검술 대전의 본선 진출자야. 이쪽은 준우승자이고, D급 능력자이기도 해. 물론 나도 그냥 허수아비는 아니야. 그러니 꼭 총을 쏘길 바라. 근접전으로는 너희에게 승산이 없을 테니까.”

“이 새끼야, 이빨 털지 마.”

“맘대로 생각해. 하지만 하나는 장담할 수 있어. 너희가 총을 쏴도 한 명 정도는 살아남을 거다. 그러면 너희도 둘 중 한 놈은 죽어야 할 거야. 어렵게 얻은 총알을 이렇게 허무하게 사용하고 싶다면 말리지 않을게.”

한상혁의 말을 듣고 있던 조달영이 빙긋 웃으며 총에 대검을 결합하더니, 껄렁이는 남자를 겨눴다.

그러자 한상혁이 내 옆구리를 툭, 쳤다.

녀석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이마를 찌푸렸다 펴는 걸 반복했다.

그게 꼭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보여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지만, 뭘 요구하는지는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덤벼! 혼자 이렇게 억울하게 죽을 수는 없지.”

내가 자세를 잡자, 옆에 선 한상혁도 차려 총 자세를 취했다.

“큭큭큭, 자, 어서 선택하는 게 어때? 피차 시간 끌어봐야 좋을 게 없어.”

한상혁이 두 사람을 몰아붙이는 사이, 나는 눈앞의 남자를 살피다 아주 적당한 협박 수단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남자의 전투복은 여기저기 쓸리고 해져 있고, 그건 이곳에서 제법 오래 있었다는 증거였다.

“어차피 우리는 방금 들어와서 아쉬울 게 없어. 우리 먼저 탈락시키고 뒤따라오든지, 아니면 좋게 끝을 보든지 결정하라고!”

내가 기세를 끌어 올리며 강하게 나서자, 한상혁은 크게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지금 우리를 죽이면, 우리 셋은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만 쫓아다닐 거야. 다른 두 사람이 싫다고 해도 나는 너희를 잊지 않을 거야. 그러니 셋 셀 동안 결정해. 하나…….”

“젠장, 야! 어떻게 할까?”

예상 못한 상황에 당황했는지, 껄렁거리던 이가 내 앞에 선 남자에게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없었다.

그러자 한상혁의 카운트다운이 이어졌다.

“둘…….”

꿀꺽.

일촉즉발의 상황.

어느새 우리의 지휘를 한상혁이 맡았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셋!”

한상혁의 마지막 카운트가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내가 돌진하려 하자, 눈앞의 사내가 소리를 질렀다.

“그만!”

“큭큭큭, 결정을 내렸나 보네?”

한상혁의 물음에 눈앞의 남자가 총구를 거두며 말했다.

“제길,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어차피 우리는 여기까지 온 목적을 완수했으니까.”

결정이 내려지자, 조달영과 대치하던 남자가 내 앞으로 이동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지. 너, 신병 주제에 깡이 좋군. 이름이 뭐지?”

남자는 우리 얼굴을 한차례씩 훑어보다가 한상혁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내가 네게 이름을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나?”

“하하하, 영악한 놈이군. 얼굴과 목소리는 대충 기억했어. 다음에 만나면 오늘처럼 좋게 끝나지는 않을 거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우리에게 총구를 겨눈 채 천천히 물러났다.

점점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에 나는 비로소 안도감이 들었다.

내가 속으로 한숨을 삼키던 그때, 한상혁이 그들을 불러 세웠다.

“잠깐.”

“왜? 또 볼일이 남았나?”

“큭큭큭, 어디서 수작질이야? 내가 분명 총알 한 발을 넘기라고 했잖아.”

일단 저들이 물러서는 걸 선택한 순간, 기세를 탄 한상혁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싫으면 한판 붙어보고.”

“쯧, 기억력도 좋군.”

“칭찬은 됐고, 총알을 넘겨.”

한상혁의 요구가 도를 지나쳤다 여기는지, 행동거지가 가벼운 남자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이대로 그냥 물러설 거야?”

“그냥 줘. 여기서 시간을 너무 오래 지체했어.”

그 순간, 한상혁 차려 총 자세를 풀더니, 오른손을 등 뒤로 숨겨 손가락을 분주히 움직였다.

처음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엄지를 위쪽으로 세운 다음 아래로 돌리는 걸 보고 습격을 준비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둘 중 한 사람이 총알을 빼기 위해 탄창을 제거하면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누군가는 고무탄에 맞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데 조달영은 한술 더 떠서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방금 전에 평화적으로 협상을 끝냈는데, 굳이 위험을 무릎 쓸 필요가 있을지 의구심이 생겼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마음먹은 이상, 나 혼자 손을 놓고 있어봐야 의미가 없었다.

최대한 빠르게 적을 제압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을 배제하는 게 나을 터였다.

그때, 지시를 받은 남자가 약실에 장전된 탄을 제거하기 위해 총구를 들어 올린 채 장전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조달영에게서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내 등을 찔러 댔다.

헌터 특유의 마력이 주변을 잠식했으나, 한상혁이나 두 남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남자가 약실에서 튕겨 나온 탄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이는 순간, 한상혁이 소리를 내질렀다.

“지금!”

신호와 동시에 조달영의 몸이 화살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헉! 야, 쏴!”

당황한 남자가 소리쳤지만, 허리를 숙인 상태라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조달영은 어느새 상대 앞에 도착한 상태였다.

‘빠르다!’

조달영의 속도는 내 예상을 크게 웃도는 수준이었다.

그는 커다란 덩치가 무색할 정도로 민첩하게 움직였다.

만약 총검술 대전에서 처음부터 능력을 썼다면, 나는 어떤 반항도 할 수 없었으리라.

‘잠깐? 그럼 조달영에게 이긴 형님은 대체 어느 정도로 강한 거지? 그리고 어마어마한 기운을 내뿜은 김태웅 중령은?’

내가 잠시 다른 생각을 떠올리고 있으니, 한상혁이 내 어깨를 툭 치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뭐 해? 정신 차려!”

말을 마친 한상혁이 달려 나가자, 나도 허겁지겁 뒤를 쫓았다.

‘그래, 고민은 나중에 천천히 해도 돼.’

나는 총을 움켜쥐고 내달렸다.

그때, 조달영은 이미 대검으로 상대를 내려찍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엇? 이 느낌은!’

“다들 조심해!”

순간, 나는 전신을 압박하는 거대한 기운을 느끼며 경고를 날렸다.

그건 김태웅 중령에게서 느낀 기운에 버금갈 정도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김태웅 중령의 기운이 성난 사자와 같다면, 지금 느껴지는 것은 그보다는 순한, 발톱을 세운 고양이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퍼엉!

내 외침과 동시에 커다란 폭발음이 터져 나오고, 경쟁자들이 있던 장소에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그건 바로 조달영이었다.

“뭐, 뭐야?”

“크윽, 제기랄!”

한상혁은 갑작스런 상황에 걸음을 멈춘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조달영은 고통스런 표정을 지어 보이며 서둘러 일어나 자세를 갖추려 애를 썼다.

하지만 충격이 적지 않은 모양인지 좀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란 나도 그 자리에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누구냐! 정체를 드러내라!”

그때, 자욱한 먼지를 헤치며 누군가가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

설마 내가 노린 이가 능력자였던 것일까?

하지만 그림자의 형체가 뚜렷해지자, 나는 제3자가 끼어들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모습을 드러낸 이가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호호호, 나름 보는 재미가 즐거웠어.”

그녀는 제법 상냥하게 들리는 음성으로 우리를 칭찬하듯 말을 꺼냈다.

뜬금없이 등장한 여성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연신 박수를 치며 웃었다.

헬멧의 실드 안쪽으로 보이는 얼굴은 기껏해야 20대 초반 정도에 불과했다.

이런 극한 상황만 아니라면 웃을 때마다 진하게 드러나는 보조개가 매력적인 여성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미안해. 아기자기하게 노는 건 재미있는데, 나도 할당량을 빨리 채워야 해서 말이야.”

여자는 대치 중이던 두 경쟁자와 우리를 번갈아 보며 눈빛을 반짝였다.

‘아기자기? 놀아?’

누구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저 여자의 눈에는 우리가 소꿉장난이라도 하는 걸로 보인 모양이다.

“너는 누구지?”

“나? 이름을 물어보는 거라면… 유미야. 성은 비밀, 난 약한 남자는 관심 없거든.”

객관적인 상황만 놓고 보자면, 그녀는 건장한 남성 다섯 명에게 포위당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우리 따위는 언제든지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인지, 그녀에게서는 일말의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겨우 몸을 추스른 조달영이 우리 쪽으로 합류했다.

그러자 그녀는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아, 그쪽은 아까 때려서 미안해. 괜찮지? 힘을 조절해서 살살 치긴 했는데, 혹시 어디 부러졌으면 의무대에서 치료받도록 해.”

“조심해. 능력자다. 그것도 상당히 강력해.”

그녀가 뭐라고 말하든 조달영은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우리에게 전파했다.

그러자 한상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기운을 느꼈기에 한상혁만큼 놀라진 않았다.

그때, 자신을 유미라 밝힌 여자가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약한 애들을 괴롭히는 건 안 좋아하는 편이야. 그러니까 반항하지 말고 그냥 죽어주지 않을래?”

“하, 그러니까 네 말은 일곱 명의 할당량을 채워야 하니까 우리를 공격하겠다는 거 아냐?”

한상혁의 질문에 유미가 미소 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나는 10주 안에 100명을 탈락시켜야 해.”

“100명? 일곱 명이 아니라?”

나는 그녀가 뭔가를 착각했다 여기며 되물었다.

그러자 유미는 검지를 좌우로 흔들며 혀끝을 찼다.

“그건 너희 같은 일반 병사들에게 해당하는 조건이고, 나는 장교라 조건이 더 까다로운 거야. 하아, 왜 이런 걸 시키나 몰라. 나는 빨리 임무에 투입되고 싶은데…….”

“장교라고?”

새로운 정보가 주어지자, 나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생존 테스트가 신병들로만 진행되는 게 아니라, 장교까지 더해지면 난이도가 껑충 뛰어오른다.

‘이게 통과가 가능한 게 맞아?’

나는 생존 전략을 크게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때, 유미의 뒤쪽에 서 있던 경쟁자들이 체념한 듯 말을 내뱉었다.

“하하, 오늘은 어쩐지 재수가 좋더라니… 끝이 안 좋군. 씨발, 고작 이틀 남았는데…….”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하잖아.”

유미가 고개를 돌려 돌아보는 순간, 두 사람은 그녀를 향해 총을 겨눴다.

“이대로 탈락할 순 없지!”

하지만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유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무형의 기운이 그들을 속박했기 때문이다.

“크윽!”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지 마. 나도 나름 사정이라는 게 있거든.”

유미는 움직이지 못하는 남자의 총에서 대검을 뺏어 들더니, 둘의 목 부분을 살짝 그었다.

“젠장!”

욕지거리를 내뱉은 남자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자, 이제 너희가 탈락할 차례야. 일단 너부터.”

유미는 바닥에 떨어진 총을 주워 가장 가까이 있는 조달영에게 겨눴다.

그 모습을 본 한상혁이 다급하게 그녀를 제지했다.

“잠깐!”

“왜? 설마 나한테 반했다거나 하는 헛소리를 지껄이려는 건 아니지?”

여태까지 나는 한상혁을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었다.

세상에는 많은 또라이가 존재하겠지만, 유미라는 이름의 여자는 그중에서도 아주 상또라이가 분명했다.

“큭! 개소리 지껄이지 마. 지금 총을 쏘면 소리를 들은 다른 놈들이 떼로 몰려올 거다. 그래도 괜찮아?”

한상혁은 방금 전 써먹은 작전을 유미에게 다시 한 번 사용했다.

하지만 유미는 한상혁의 말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응. 문제없는데?”

“뭐라고?”

“오는 대로 잡아서 머릿수를 채울 수 있으면 나야 좋지.”

“뭐? 잠깐!”

“그럼 잘 가.”

한상혁이 급하게 몸을 옆으로 던지며 피하려 했으나, 그 역시 유미의 기운에 속박당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탕!

“으악!”

한상혁이 머리에 고무탄을 맞고 쓰러지자, 유미는 곧바로 조달영을 겨눴다.

D급 능력자인 조달영은 유미가 쏘아낸 기운에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는 듯 몸을 움찔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능력이지?”

“아, 너는 능력자였지?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서로 편하니까, 움직이지 좀 마.”

조달영은 어떻게든 속박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유미가 더욱 강한 기운을 뿜어내자 몸이 석상처럼 굳어졌다.

탕!

“크헉!”

조달영 역시 머리에 고무탄을 맞아 의식을 잃고 말았다.

이제 남은 건 나 혼자뿐.

유미는 내 쪽으로 사뿐사뿐 걸어오며 총구를 들이밀었다.

나는 총검술 기본자세를 취한 상태에서 다가오는 그녀를 찌르기 위해 팔을 당겼다.

하지만 나 역시도 그녀의 기운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게 도대체 뭐야!”

유미는 나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를 지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틱.

하지만 유미의 총엔 장전된 탄이 없어 공이가 허공을 때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어? 총알이 다 떨어졌네? 그럼 어쩔 수 없지.”

유미는 총을 대충 바닥에 던지고, 대검을 주워 들었다.

나는 어떻게든 기운에 저항하려 노력했지만, 의미 없는 발버둥에 불과했다.

그녀는 코앞까지 다가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너는 운이 좋은 편이야. 고무탄에 맞으면 엄청 아프다더라.”

“야, 이 미친년아!”

아무리 훈련이라지만 총으로 사람을 쏘고 칼로 찌르면서 웃는 게 정상은 아니리라.

“살살 해줄게, 가만있어. 네가 80명째거든. 이제 스무 명만 더 채우면 끝나. 이 속도면 내일 안에 끝낼 수 있는데, 그럼 CHT 부대의 신기록 갱신이란 말이야.”

유미의 대검이 정확히 내 머리를 노리고 휘둘러졌다.

그때였다.

나는 몸을 속박하던 기운이 약간 느슨해지는 느낌에 힘을 잔뜩 주며 팔을 내밀었다.

“미친 또라이 년아, 죽어!”

그 순간, 내가 내지른 총검 끝에 무언가가 걸리는 느낌을 받았다.

상당한 충격이 손끝을 통해 전해졌고, 깜짝 놀란 유미가 비명과 함께 뒤로 날아갔다.

“꺄악!”

비록 내가 한 일이지만, 스스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 그녀가 나가떨어진 곳을 살폈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유미는 아주 멀쩡해 보였다.

놀랍게도 그녀의 몸 주위로는 반투명한 보호막이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봤는데, 아마 내 공격이 닿긴 한 모양이었다.

“너… 방금 뭐 한 거야?”

아무리 욕을 들어도 상냥하던 그녀의 음성이 언제 그랬냐는 듯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든 얼굴엔 더 이상 미소가 맺혀 있지 않았다.

그녀는 대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싸늘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흐음, 너 때문에 생각을 바꿨어. 시시한 기록 따윈 아무래도 좋아. 아까 스무 명 남았다고 했잖아? 그거 너만 죽여서 채울 거야.”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서 샛노란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성난 그녀의 기운이 나를 엄습했다.

아무래도 아까는 내가 착각한 모양이다.

그녀는 순한 고양이 따위가 아니라 성난 암사자였다.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게 분명해 보였다.

‘하, 내 인생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