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0
다음 달 진급과 동시에 CHT 부대의 대대장으로 내정된 김태웅 소령은 발령을 앞두고 논산 훈련소를 찾았다.
CHT 부대의 특성상, 우수한 훈련병들을 우선적으로 차출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김태웅 소령이 원한다고 해서 무조건 선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명받은 병사가 동의해야 최종적으로 CHT 부대의 병사가 된다.
김태웅 소령은 병사들의 훈련 상태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고자 총검술 평가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실망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600여 명의 훈련병들 중 쓸 만한 병사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조달영 D급, 김을수 F급… 호오, 저 병사는 B급 수준인가?”
분주히 평가를 내려보지만, 예선 심사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몇몇 각성한 이들을 제외하면 그의 관심을 끄는 병사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지루한 평가가 이어지고, 마침내 열여섯 번째 조의 예선이 시작됐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이 김태웅 소령의 눈에 들었다.
173번을 달고 있는 훈련병이었다.
서둘러 서류를 확인해 본 김태웅 소령은 눈살을 찌푸렸다.
‘음, 일반 지원자로군.’
이미 확보된 자원이라 실망한 게 아니었다.
CHT에 지원한 병사가 예선 심사를 엉망으로 치렀기에 골치가 아팠다.
게다가 방향감각이 결여됐는지, 왼쪽과 오른쪽도 구분하지 못하고 모든 동작을 반대로 펼쳤다.
그러던 중 김태웅 소령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얼굴이 누굴 닮았는데… 그냥 착각인가?’
김태웅 소령은 확인할 겸, 훈련병을 찾아갔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몸을 주물럭거리며 상태를 확인했다.
양손의 악력은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균등하고, 이제 막 만들어져 가는 육체는 제법 탄력적이었다.
김태웅 소령은 간단한 질문을 던지며 정보를 얻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아는 이의 아들이었다.
김태웅 소령은 더 고민하지도 않고 총검술의 자세를 바꿀 것을 명했다.
그리고 이어진 예선 심사.
움직임은 1차 때보다 훨씬 민첩하고 정교해졌다.
‘역시 핏줄은 핏줄인 건가. 잘 가르치면 쓸 만하겠군. 노말인 게 아쉬워.’
김태웅 소령은 능력을 더 확인해 보기 위해 일단 합격시키자 마음먹었다.
그런데 심사위원 중 한 명은 눈깔이 삐었는지, 다른 병사를 합격시키려 했다.
‘뭐야, 이 새끼는?’
김태웅은 강 중령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이 눈여겨본 173번을 합격시켰다.
당연하게도 강 중령은 당장 태클을 걸었고, 김태웅 소령은 한 가지 제안을 던졌다.
두 병사를 대결시켜 이긴 쪽을 합격시키자고.
하지만 강 중령은 계속해서 계급으로 밀어붙이려 했다.
짜증이 치솟은 김태웅 소령은 가볍게 마력을 방출해 상대를 압박했다.
그제야 시끄럽게 짖어 대던 똥개 한 마리가 꼬리를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 직후에 진행된 대결.
173번은 기습을 당한 게 분했는지, 상대를 개머리판으로 때려 기절시켰다.
그러고 나서 최종 합격 판정을 받았음에도 그리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대에게 일격을 허용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김태웅 소령은 그런 성격까지도 아주 만족스러웠다.
‘근성이 아주 좋군.’
김태웅 소령은 찝찝해하는 173번에게 최고 수준의 훈련을 약속했다.
마침내 본선이 시작되자, 김태웅 소령은 관람석에 앉아 자신이 점찍은 173번을 살폈다.
그런데 김태웅 소령의 부대 마크를 알아본 사람들이 다가와 친한 척 말을 걸어 댔다.
“안녕하십니까, 소령님. 혹시 CHT에서 오셨습니까?”
김태웅 소령은 귀찮은 마음에 대답 대신 마력을 방출했다.
“으윽!”
기세를 견디지 못한 날파리들은 서둘러 자리를 떠났고, 덕분에 그의 주변은 폭탄이 터진 것처럼 휑하니 비어버렸다.
편하게 경기를 관람할 수 있게 된 김태웅 소령의 입가엔 만족스런 미소가 그려졌다.
173번 훈련병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눈을 팔고 있다가 상대에게 일격을 허용했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맹공을 펼쳤다.
결국 가볍게 상대를 제압한 훈련병은 승리를 기뻐하는 듯싶더니, 김태웅 소령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푹 숙였다.
‘하하하! 완벽하게 이기지 못했다, 이 말이지? 아주 기특해.’
김태웅 소령은 세공되지 않은 원석을 바라보듯 눈을 반짝였다.
이어진 2차전은 173번 병사에게 더욱 불리한 싸움이었다.
상대가 D급 능력자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173번 병사는 능력자를 상대로 아주 훌륭한 경기를 선보였다.
이번에도 개머리판으로 상대를 후려쳐 역전을 노렸을 땐, 김태웅 소령마저 주먹을 불끈 쥘 정도로 긴박감이 넘쳤다.
‘제대로 들어갔어. 빨리 마무리해야 해!’
어느새 김태웅 소령은 173번 훈련병을 응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D급 능력자는 본능적으로 마력을 개방해 의식을 회복한 뒤, 재빨리 반격에 나섰다.
결국 173번 훈련병은 거기까지였다.
일반인과 능력자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격차로 인해 패배한 것이었다.
‘그에 비해… 나머지 시합들은 영 못 봐주겠군.’
173번 훈련병이 실려 나간 뒤, 김태웅 소령은 자신의 흥미를 자극하는 병사를 찾지 못했다.
그렇게 하품을 쩍쩍 해 대는 사이, 어느덧 결승전이 치러졌다.
결승전에 출전한 두 사람은 모두 능력자였다.
그중 한 명은 173번 훈련병에게 질 뻔한 D급 능력자, 조달영이었다.
김태웅 소령은 자신의 앞에 놓인 서류를 뒤적여 조달영의 상대가 누군지 확인했다.
‘차지혁? B급 능력자가 기껏 연예인이나 하고 있었다고?’
김태웅 소령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시합을 준비하는 차지혁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솔직히 B급 능력자라면 헌터로 활동하는 게 당연했다.
‘뭐, 배우로 먼저 성공한 탓도 있겠지만, 타인을 상처 입히는 걸 꺼리는 성격 때문인가?’
차지혁은 지금껏 치른 시합 내내 상대와 직접 맞부딪치지 않는 건 물론이고, 상대를 상처 입히지 않도록 힘을 조절하기까지 했다.
김태웅 소령은 더 볼 것도 없겠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시합이 끝나길 기다렸다.
독기가 없는 병사는 작전 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했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금세 죽을 거라면 차출하는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차지혁은 여태껏 보여준 모습과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는 화가 잔뜩 난 황소처럼 돌진해 거칠게 공격을 퍼부었다.
조달영이 마력을 개방하며 대항했으나, 한 번 기울어진 승기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음,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로군. 어떤 게 본모습이지?’
김태웅 소령은 까슬까슬 돋아난 턱수염을 긁으며 생각에 잠겼다.
‘저 정도면 즉시 전력으로 투입해도 문제없어 보여. 등급에 비해 전투력이 약하긴 한데… 설마 치유 능력자인가? 그렇다면 더더욱 놓칠 수 없지.’
차지혁의 우승으로 관람석에서 난리가 난 것과 달리, 김태웅 소령은 차분하게 앞으로 계획을 수립해 나갔다.
다른 부대의 장교들이 차지혁을 서로 자기 부대로 데려가겠다며 난리일 때, 김태웅 소령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다.”
[선배? 아직 살아 계신 거요?]
“그래. 너한테는 꼭 부고장을 보낼 테니까, 그전까지는 걱정 마라.”
[크크크, 난 하도 연락이 없어서 죽은 줄 알았소.]
“꼭 죽길 바랐다는 말투로군.”
[그럴 리가. 선배가 하루빨리 이쪽으로 돌아오길 눈 빠지게 기다리는 식구가 몇인데. 나도 그중 하나고.]
“아직 놈을 잡지 못했다.”
[하아, 이제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소?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포기하고 말고는 내가 정해.”
[쩝, 하여간 고집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됐고. 너희가 해줘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응? 갑자기 뭔 일?]
“차지혁이란 배우가 이번에 훈련소에 입소했어. 슬쩍 약점을 캐봐. 여자든 돈이든, 그를 옭아맬 수 있는 정보라면 뭐든 좋아.”
[차지혁? 그게 정말이요?]
“시끄러. 30분 줄 테니까, 정보나 확실하게 보내.”
[그건 10분이면 충분하고, 정말 차지혁을 실제로 본 거요?]
이야기가 길어질 조짐이 보이자, 김태웅 소령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
내가 의식을 회복했을 땐 이미 모든 경기가 끝난 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차지혁이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길아, 정신이 좀 드냐?”
“…네, 형님. 그나저나 여긴 어딥니까?”
“연병장에 마련된 구급 텐트야.”
“형님, 저… 진 겁니까?”
“그래. 하지만 아주 잘 싸웠어.”
차지혁이 슬며시 미소 지어 보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패배의 슬픔이 아니라, 조금 더 분발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다.
“하아…….”
“대길아, 너무 마음 쓰지 마.”
“그냥… 분해서요. 제가 이길 수 있었는데…….”
차지혁은 말없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빛이 터져 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따스한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나는 깜짝 놀라 차지혁을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도 차지혁의 손이 닿으면 체력도 회복되고, 근육통도 사라지곤 했다는 게 떠올랐다.
“형님, 설마 각성자세요?”
내 물음에 차지혁은 미소와 함께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비밀로 해달라는 뜻이리라.
“아, 형님은 몇 위세요?”
“그게…….”
차지혁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때, 강기오 중사가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었는데, 무슨 일인지 그의 표정이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그는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전혀 여유가 없어 보였다.
그러던 중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잘됐다는 듯 이야기를 꺼냈다.
“173번 훈련병, 정신이 들었습니까?”
“173번 훈련병, 최대길! 정신 차렸습니다!”
“어지럽거나 속이 메스껍지는 않습니까?”
“네, 멀쩡합니다!”
“나중에 어지럽다고 훈련에서 열외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합니다. 정말 괜찮습니까?”
“아무 문제없습니다!”
“좋습니다. 161번 훈련병과 173번 훈련병은 지금 즉시 생활관으로 복귀합니다.”
“알겠습니다!”
나와 차지혁은 강기오 중사의 인솔에 따라 텐트 밖으로 나왔다.
그 순간, 그가 어째서 허둥지둥 달려왔는지 알 수 있었다.
수많은 장교들이 텐트 밖에 진을 치고 앉아 차지혁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차지혁이 얼굴을 내미는 순간, 그들의 열렬한 구애가 이어졌다.
“차지혁 훈련병, 나는 63사단 인사과장 김일우 대위라고 하네. 훈련소를 수료하면 자네를 우리 사단으로 차출하고 싶네.”
“차지혁 훈련병, 나는 77연대에서 온 김정수 대위네. 부디 우리 부대를 선택하는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바라겠네.”
“777 특공여단입니다. 차지혁 훈련병, 우리 부대는 창설한 지 40년째인 유서 깊은 부대입니다!”
“한라산 부대에서 왔습니다. 우리 부대는 제주도에 위치해 있어 물 맑은 경치와 싱그러운 공기 속에서 근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인파에 갇힌 채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강기오 중사도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사람들이라 그런지 함부로 제지를 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압사당하겠다 여기던 그때.
쿠구궁!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연병장 바닥이 진동하며, 모래 알갱이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잠시 지나갑시다.”
저 멀리서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인파를 헤치며 거침없이 다가왔다.
남자의 거칠 것 없다 태도에 사람들은 길을 비켜주기 바빴다.
당당한 걸음걸이로 우리 앞에 멈춰 선 건 바로 김태웅 소령이었다.
그는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김태웅 소령의 등장에 주변을 둘러싼 이들 중 누군가가 경악성을 내질렀다.
“검은 유령!”
김태웅 소령은 소리친 이를 슬쩍 바라본 뒤,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꺼냈다.
“CHT 부대에서 나온 김태웅 소령입니다. 우리 부대에 대해선 특별히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CHT 부대에 주어진 권한으로 기초 군사훈련을 수료할 예정인 훈련병을 선발하려 합니다. 다들 자리를 비켜주시면 좋겠습니다.”
“그야 그렇지만, 그건 훈련병이 동의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상식적으로 차지혁 훈련병이 댁의 부대로 지원할 이유가 없습니다.”
“맞습니다. 아무리 CHT 부대라도 이런 식으로 우리의 병사 선발을 막을 권리는 없습니다.”
주변의 장교들은 벌 떼처럼 달려들어 김태웅 소령을 비난했다.
“다들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계신 모양인데…….”
김태웅 소령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커다란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가리켰다.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어리둥절해진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기 있는 훈련병은 CHT 부대의 지원자입니다. 그는 현재 부상을 입은 상태죠.”
순간, 김태웅 소령은 내 앞으로 큼지막한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훈련병.”
“173번 훈련병, 최대길!”
“아주 재미있는 싸움을 하더군.”
“감사합니다!”
김태웅 소령은 그 상태로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차지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자네도 아주 잘 싸웠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도 최대길 훈련병과 함께 우리 부대로 오지 않겠나?”
차지혁은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바로 답변을 드리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김태웅 소령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지금 당장 대답하라는 뜻은 아니었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 답변은 3주 후에 듣도록 하겠네. 지금은 최대길 훈련병이 많이 다친 모양이니, 그를 부축해 생활관으로 복귀하는 게 어떤가?”
그 말에 차지혁은 뭔가 눈치챈 듯 조금 목소리를 키워 큰 소리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소령님께서 제안해 주신 내용은 깊이 고민한 뒤에 긍정적인 답변을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김태웅 소령은 흡족한 표정을 만면에 드러내며 주변의 장교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방금 들으셨다시피, 여기 있는 차지혁 훈련병은 나의 선발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컥!”
당장 누군가가 끼어들어 항변하려 했으나, 김태웅 소령의 매서운 시선에 목이 막힌 것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혹시라도 포기하지 않는 분들이 있을까 염려돼 말씀드리자면, 저희 부대가 선발 중인 인원에게 몰래 접촉하시는 걸 저는 절대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가만있지 않으면 어쩔 텐가!”
예선 심사에서 이미 한 번 당한 적이 있는 강 중령이 버럭 호통쳤다.
김태웅 소령은 입술을 비틀어 냉소를 흘리며 강 중령에게 다가가 허리를 살짝 굽혔다.
그러고 나서 커다란 손으로 입가를 가리더니, 다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경고를 보냈다.
“저희 유령들이 강 중령님을 찾아갈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상관없으십니까?”
대놓고 협박하는 태도에 강 중령은 눈을 부릅뜬 채 아무 말 못하고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자, 이렇게 모여 계시지 말고, 다들 부대로 복귀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김태웅 소령의 해산령에 차지혁은 얼른 나를 부축했다.
그래도 내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낮게 소곤거렸다.
“부상병, 부상병.”
“아이고, 머리야아!”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나는 얼른 꾀병을 부렸다.
“훈련병들은 날 따라오라.”
김태웅 소령이 앞장서서 걸어가자, 바닷물이 갈라지듯 수많은 인파들이 화들짝 놀라 비켜섰다.
내 혼신을 다한 연기 덕분인지, 그게 아니면 서슬 퍼런 김태웅 소령의 엄포 덕분인지 모르지만, 더 이상 차지혁에게 귀찮게 달라붙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아쉬운 눈초리로 입맛을 다실 뿐이었다.
김태웅 소령은 방금 전 위협을 가한 강 중령을 어깨 너머로 바라보며 대수롭지 않게 말을 건넸다.
“강 중령님, 방금 한 말은 그냥 혼잣말이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
“큭… 이 일은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지, 김 소령.”
“그러시든지.”
연병장을 벗어나 생활관 건물 앞에 도착하자, 강기오 중사가 그제야 말을 꺼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충성!”
나는 여느 때보다 훨씬 군기 잡힌 경례를 올리는 강기오 중사를 신기한 듯 쳐다봤다.
그런데 정작 김태웅 소령은 경례를 받는 둥 마는 둥 대충 넘어갔다.
“그래. 오랜만이군, 강 하사. 아니, 이제 중사인가?”
“그렇습니다, 팀장님.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강 하사? 팀장님? 둘이 아는 사이인가?’
내가 의아해할 때, 김태웅 소령이 강기오 중사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중사 강기오!”
“잘 지내는 것처럼 보여서 기분 좋군. 얼굴이 아주 훤해졌어.”
“감사합니다, 팀장… 아니, 소령님.”
“소령은 개뿔. 나는 언제나 자네의 팀장이야. 그보다, 자네가 남아 있었다면 작전 팀 하나를 맡겼을 텐데… 아쉬울 뿐이야.”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그리고 진급 축하드립니다, 김 중령님.”
“그냥 팀장이라고 부르라니까.”
“아닙니다!”
김태웅 소령은 바짝 군기 잡힌 목소리로 대답하는 강기오 중사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쩝, 교관 생활 몇 년 하더니, 아주 밥맛이 다 됐군.”
“…죄송합니다.”
“됐어. 그건 그렇고, 여기 두 사람은 모두 자네 소대원인가?”
“그렇습니다.”
“음, 아주 잘 가르쳤군. 역시 독사다워. 내 마음에 아주 쏙 들 만큼 훌륭한 병사들이야.”
“감사합니다!”
김태웅 소령의 칭찬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그럴 때마다 강기오 중사는 딱딱하게 답변했다.
정말 지인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럼 들어가 보게. 나도 이만 가봐야겠군.”
김태웅 소령이 말을 마치고 몸을 돌리자, 강기오 중사가 경례를 올렸다.
“충성!”
“어휴, 훈련소가 사람 하나 완전히 버려놨네. 충성.”
투덜거리듯 한마디를 남긴 김태웅 소령은 그대로 등을 돌려 멀어져 갔다.
나는 그때 강기오 중사가 김태웅 소령을 몹시 불편해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들어가지.”
“알겠습니다.”
강기오 중사는 우리를 이끌고 생활관 건물로 들어가려 했으나, 다시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김태웅 소령이 갑자기 우리를 불렀기 때문이다.
“아참, 최대길, 차지혁.”
“173번 훈련병, 최대길!”
“161번 훈련병, 차지혁!”
“다음에 만났을 때가 기대되는군. 둘 다 말이야.”
“감사합니다!”
일단 답은 했지만, 나는 될 수 있으면 김태웅 소령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대대장의 얼굴을 계속 마주한다는 건, 전역할 때까지 내내 가시방석에 앉아 있어야 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기대는 무슨. 다음에 부디 얼굴 볼 일 없기를 바랍니다.’
내가 속으로 투덜거리는 사이, 김태웅 소령은 차지혁에게 말을 건넸다.
“차지혁 훈련병, 우승 축하하네, 그리고 앞으로도 오래 볼 수 있다면 좋겠군.”
“감사합니다. 하지만 소령님의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하하하, 성급하군. 곰곰이 생각해 보게. 우리는 아마 오래 보게 될 거야. 자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자발적으로 내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강제로 끌려가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네.”
“네?”
말을 마친 김태웅 소령은 그대로 몸을 돌려 떠나갔다.
김태웅 소령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그제야 강기오 중사가 입을 열었다.
“생활관으로 입장합니다.”
어째서인지 그의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입장!”
생활관으로 돌아온 우리는 소대원들에게 둘러싸여 격한 환영을 받았다.
물론, 그 주인공은 차지혁이었다.
차지혁 덕분에 주말 동안 자유 시간을 누릴 뿐 아니라 치킨 파티까지 하게 되었으니, 이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는 소대원들에게 차지혁을 내주고 무리 속에서 빠져나와 생활관 침상 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에는 굳은 표정의 한상혁이 앉아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갔다.
내 접근을 알아챈 한상혁은 몹시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으나, 이내 포기한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는 게 즐거웠다.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가며 광대가 아플 지경이었다.
“한상혁.”
“왜?”
“왜? 뭐 잊은 것 없냐, 동생아?”
“…….”
“왜 대답이 없냐, 동생아?”
내가 끈질기게 추궁하자, 한상혁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형님이 말씀하시는데 대답은 해야지.”
“쳇, 형님은 무슨.”
“어라? 한 입으로 두말하겠다는 거야?”
“……형님.”
어금니를 악문 한상혁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뭐라고? 목소리가 작아서 잘 안 들리는데?”
“아니라고, 형님 새끼야!”
‘흐흐흐, 오늘 밤은 모처럼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겠다.’
다음 달 진급과 동시에 CHT 부대의 대대장으로 내정된 김태웅 소령은 발령을 앞두고 논산 훈련소를 찾았다.
CHT 부대의 특성상, 우수한 훈련병들을 우선적으로 차출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김태웅 소령이 원한다고 해서 무조건 선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명받은 병사가 동의해야 최종적으로 CHT 부대의 병사가 된다.
김태웅 소령은 병사들의 훈련 상태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고자 총검술 평가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실망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600여 명의 훈련병들 중 쓸 만한 병사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조달영 D급, 김을수 F급… 호오, 저 병사는 B급 수준인가?”
분주히 평가를 내려보지만, 예선 심사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몇몇 각성한 이들을 제외하면 그의 관심을 끄는 병사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지루한 평가가 이어지고, 마침내 열여섯 번째 조의 예선이 시작됐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이 김태웅 소령의 눈에 들었다.
173번을 달고 있는 훈련병이었다.
서둘러 서류를 확인해 본 김태웅 소령은 눈살을 찌푸렸다.
‘음, 일반 지원자로군.’
이미 확보된 자원이라 실망한 게 아니었다.
CHT에 지원한 병사가 예선 심사를 엉망으로 치렀기에 골치가 아팠다.
게다가 방향감각이 결여됐는지, 왼쪽과 오른쪽도 구분하지 못하고 모든 동작을 반대로 펼쳤다.
그러던 중 김태웅 소령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얼굴이 누굴 닮았는데… 그냥 착각인가?’
김태웅 소령은 확인할 겸, 훈련병을 찾아갔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몸을 주물럭거리며 상태를 확인했다.
양손의 악력은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균등하고, 이제 막 만들어져 가는 육체는 제법 탄력적이었다.
김태웅 소령은 간단한 질문을 던지며 정보를 얻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아는 이의 아들이었다.
김태웅 소령은 더 고민하지도 않고 총검술의 자세를 바꿀 것을 명했다.
그리고 이어진 예선 심사.
움직임은 1차 때보다 훨씬 민첩하고 정교해졌다.
‘역시 핏줄은 핏줄인 건가. 잘 가르치면 쓸 만하겠군. 노말인 게 아쉬워.’
김태웅 소령은 능력을 더 확인해 보기 위해 일단 합격시키자 마음먹었다.
그런데 심사위원 중 한 명은 눈깔이 삐었는지, 다른 병사를 합격시키려 했다.
‘뭐야, 이 새끼는?’
김태웅은 강 중령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이 눈여겨본 173번을 합격시켰다.
당연하게도 강 중령은 당장 태클을 걸었고, 김태웅 소령은 한 가지 제안을 던졌다.
두 병사를 대결시켜 이긴 쪽을 합격시키자고.
하지만 강 중령은 계속해서 계급으로 밀어붙이려 했다.
짜증이 치솟은 김태웅 소령은 가볍게 마력을 방출해 상대를 압박했다.
그제야 시끄럽게 짖어 대던 똥개 한 마리가 꼬리를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 직후에 진행된 대결.
173번은 기습을 당한 게 분했는지, 상대를 개머리판으로 때려 기절시켰다.
그러고 나서 최종 합격 판정을 받았음에도 그리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대에게 일격을 허용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김태웅 소령은 그런 성격까지도 아주 만족스러웠다.
‘근성이 아주 좋군.’
김태웅 소령은 찝찝해하는 173번에게 최고 수준의 훈련을 약속했다.
마침내 본선이 시작되자, 김태웅 소령은 관람석에 앉아 자신이 점찍은 173번을 살폈다.
그런데 김태웅 소령의 부대 마크를 알아본 사람들이 다가와 친한 척 말을 걸어 댔다.
“안녕하십니까, 소령님. 혹시 CHT에서 오셨습니까?”
김태웅 소령은 귀찮은 마음에 대답 대신 마력을 방출했다.
“으윽!”
기세를 견디지 못한 날파리들은 서둘러 자리를 떠났고, 덕분에 그의 주변은 폭탄이 터진 것처럼 휑하니 비어버렸다.
편하게 경기를 관람할 수 있게 된 김태웅 소령의 입가엔 만족스런 미소가 그려졌다.
173번 훈련병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눈을 팔고 있다가 상대에게 일격을 허용했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맹공을 펼쳤다.
결국 가볍게 상대를 제압한 훈련병은 승리를 기뻐하는 듯싶더니, 김태웅 소령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푹 숙였다.
‘하하하! 완벽하게 이기지 못했다, 이 말이지? 아주 기특해.’
김태웅 소령은 세공되지 않은 원석을 바라보듯 눈을 반짝였다.
이어진 2차전은 173번 병사에게 더욱 불리한 싸움이었다.
상대가 D급 능력자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173번 병사는 능력자를 상대로 아주 훌륭한 경기를 선보였다.
이번에도 개머리판으로 상대를 후려쳐 역전을 노렸을 땐, 김태웅 소령마저 주먹을 불끈 쥘 정도로 긴박감이 넘쳤다.
‘제대로 들어갔어. 빨리 마무리해야 해!’
어느새 김태웅 소령은 173번 훈련병을 응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D급 능력자는 본능적으로 마력을 개방해 의식을 회복한 뒤, 재빨리 반격에 나섰다.
결국 173번 훈련병은 거기까지였다.
일반인과 능력자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격차로 인해 패배한 것이었다.
‘그에 비해… 나머지 시합들은 영 못 봐주겠군.’
173번 훈련병이 실려 나간 뒤, 김태웅 소령은 자신의 흥미를 자극하는 병사를 찾지 못했다.
그렇게 하품을 쩍쩍 해 대는 사이, 어느덧 결승전이 치러졌다.
결승전에 출전한 두 사람은 모두 능력자였다.
그중 한 명은 173번 훈련병에게 질 뻔한 D급 능력자, 조달영이었다.
김태웅 소령은 자신의 앞에 놓인 서류를 뒤적여 조달영의 상대가 누군지 확인했다.
‘차지혁? B급 능력자가 기껏 연예인이나 하고 있었다고?’
김태웅 소령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시합을 준비하는 차지혁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솔직히 B급 능력자라면 헌터로 활동하는 게 당연했다.
‘뭐, 배우로 먼저 성공한 탓도 있겠지만, 타인을 상처 입히는 걸 꺼리는 성격 때문인가?’
차지혁은 지금껏 치른 시합 내내 상대와 직접 맞부딪치지 않는 건 물론이고, 상대를 상처 입히지 않도록 힘을 조절하기까지 했다.
김태웅 소령은 더 볼 것도 없겠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시합이 끝나길 기다렸다.
독기가 없는 병사는 작전 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했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금세 죽을 거라면 차출하는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차지혁은 여태껏 보여준 모습과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는 화가 잔뜩 난 황소처럼 돌진해 거칠게 공격을 퍼부었다.
조달영이 마력을 개방하며 대항했으나, 한 번 기울어진 승기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음,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로군. 어떤 게 본모습이지?’
김태웅 소령은 까슬까슬 돋아난 턱수염을 긁으며 생각에 잠겼다.
‘저 정도면 즉시 전력으로 투입해도 문제없어 보여. 등급에 비해 전투력이 약하긴 한데… 설마 치유 능력자인가? 그렇다면 더더욱 놓칠 수 없지.’
차지혁의 우승으로 관람석에서 난리가 난 것과 달리, 김태웅 소령은 차분하게 앞으로 계획을 수립해 나갔다.
다른 부대의 장교들이 차지혁을 서로 자기 부대로 데려가겠다며 난리일 때, 김태웅 소령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다.”
[선배? 아직 살아 계신 거요?]
“그래. 너한테는 꼭 부고장을 보낼 테니까, 그전까지는 걱정 마라.”
[크크크, 난 하도 연락이 없어서 죽은 줄 알았소.]
“꼭 죽길 바랐다는 말투로군.”
[그럴 리가. 선배가 하루빨리 이쪽으로 돌아오길 눈 빠지게 기다리는 식구가 몇인데. 나도 그중 하나고.]
“아직 놈을 잡지 못했다.”
[하아, 이제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소?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포기하고 말고는 내가 정해.”
[쩝, 하여간 고집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됐고. 너희가 해줘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응? 갑자기 뭔 일?]
“차지혁이란 배우가 이번에 훈련소에 입소했어. 슬쩍 약점을 캐봐. 여자든 돈이든, 그를 옭아맬 수 있는 정보라면 뭐든 좋아.”
[차지혁? 그게 정말이요?]
“시끄러. 30분 줄 테니까, 정보나 확실하게 보내.”
[그건 10분이면 충분하고, 정말 차지혁을 실제로 본 거요?]
이야기가 길어질 조짐이 보이자, 김태웅 소령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
내가 의식을 회복했을 땐 이미 모든 경기가 끝난 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차지혁이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길아, 정신이 좀 드냐?”
“…네, 형님. 그나저나 여긴 어딥니까?”
“연병장에 마련된 구급 텐트야.”
“형님, 저… 진 겁니까?”
“그래. 하지만 아주 잘 싸웠어.”
차지혁이 슬며시 미소 지어 보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패배의 슬픔이 아니라, 조금 더 분발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다.
“하아…….”
“대길아, 너무 마음 쓰지 마.”
“그냥… 분해서요. 제가 이길 수 있었는데…….”
차지혁은 말없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빛이 터져 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따스한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나는 깜짝 놀라 차지혁을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도 차지혁의 손이 닿으면 체력도 회복되고, 근육통도 사라지곤 했다는 게 떠올랐다.
“형님, 설마 각성자세요?”
내 물음에 차지혁은 미소와 함께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비밀로 해달라는 뜻이리라.
“아, 형님은 몇 위세요?”
“그게…….”
차지혁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때, 강기오 중사가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었는데, 무슨 일인지 그의 표정이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그는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전혀 여유가 없어 보였다.
그러던 중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잘됐다는 듯 이야기를 꺼냈다.
“173번 훈련병, 정신이 들었습니까?”
“173번 훈련병, 최대길! 정신 차렸습니다!”
“어지럽거나 속이 메스껍지는 않습니까?”
“네, 멀쩡합니다!”
“나중에 어지럽다고 훈련에서 열외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합니다. 정말 괜찮습니까?”
“아무 문제없습니다!”
“좋습니다. 161번 훈련병과 173번 훈련병은 지금 즉시 생활관으로 복귀합니다.”
“알겠습니다!”
나와 차지혁은 강기오 중사의 인솔에 따라 텐트 밖으로 나왔다.
그 순간, 그가 어째서 허둥지둥 달려왔는지 알 수 있었다.
수많은 장교들이 텐트 밖에 진을 치고 앉아 차지혁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차지혁이 얼굴을 내미는 순간, 그들의 열렬한 구애가 이어졌다.
“차지혁 훈련병, 나는 63사단 인사과장 김일우 대위라고 하네. 훈련소를 수료하면 자네를 우리 사단으로 차출하고 싶네.”
“차지혁 훈련병, 나는 77연대에서 온 김정수 대위네. 부디 우리 부대를 선택하는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바라겠네.”
“777 특공여단입니다. 차지혁 훈련병, 우리 부대는 창설한 지 40년째인 유서 깊은 부대입니다!”
“한라산 부대에서 왔습니다. 우리 부대는 제주도에 위치해 있어 물 맑은 경치와 싱그러운 공기 속에서 근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인파에 갇힌 채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강기오 중사도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사람들이라 그런지 함부로 제지를 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압사당하겠다 여기던 그때.
쿠구궁!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연병장 바닥이 진동하며, 모래 알갱이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잠시 지나갑시다.”
저 멀리서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인파를 헤치며 거침없이 다가왔다.
남자의 거칠 것 없다 태도에 사람들은 길을 비켜주기 바빴다.
당당한 걸음걸이로 우리 앞에 멈춰 선 건 바로 김태웅 소령이었다.
그는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김태웅 소령의 등장에 주변을 둘러싼 이들 중 누군가가 경악성을 내질렀다.
“검은 유령!”
김태웅 소령은 소리친 이를 슬쩍 바라본 뒤,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꺼냈다.
“CHT 부대에서 나온 김태웅 소령입니다. 우리 부대에 대해선 특별히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CHT 부대에 주어진 권한으로 기초 군사훈련을 수료할 예정인 훈련병을 선발하려 합니다. 다들 자리를 비켜주시면 좋겠습니다.”
“그야 그렇지만, 그건 훈련병이 동의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상식적으로 차지혁 훈련병이 댁의 부대로 지원할 이유가 없습니다.”
“맞습니다. 아무리 CHT 부대라도 이런 식으로 우리의 병사 선발을 막을 권리는 없습니다.”
주변의 장교들은 벌 떼처럼 달려들어 김태웅 소령을 비난했다.
“다들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계신 모양인데…….”
김태웅 소령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커다란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가리켰다.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어리둥절해진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기 있는 훈련병은 CHT 부대의 지원자입니다. 그는 현재 부상을 입은 상태죠.”
순간, 김태웅 소령은 내 앞으로 큼지막한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훈련병.”
“173번 훈련병, 최대길!”
“아주 재미있는 싸움을 하더군.”
“감사합니다!”
김태웅 소령은 그 상태로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차지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자네도 아주 잘 싸웠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도 최대길 훈련병과 함께 우리 부대로 오지 않겠나?”
차지혁은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바로 답변을 드리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김태웅 소령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지금 당장 대답하라는 뜻은 아니었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 답변은 3주 후에 듣도록 하겠네. 지금은 최대길 훈련병이 많이 다친 모양이니, 그를 부축해 생활관으로 복귀하는 게 어떤가?”
그 말에 차지혁은 뭔가 눈치챈 듯 조금 목소리를 키워 큰 소리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소령님께서 제안해 주신 내용은 깊이 고민한 뒤에 긍정적인 답변을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김태웅 소령은 흡족한 표정을 만면에 드러내며 주변의 장교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방금 들으셨다시피, 여기 있는 차지혁 훈련병은 나의 선발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컥!”
당장 누군가가 끼어들어 항변하려 했으나, 김태웅 소령의 매서운 시선에 목이 막힌 것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혹시라도 포기하지 않는 분들이 있을까 염려돼 말씀드리자면, 저희 부대가 선발 중인 인원에게 몰래 접촉하시는 걸 저는 절대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가만있지 않으면 어쩔 텐가!”
예선 심사에서 이미 한 번 당한 적이 있는 강 중령이 버럭 호통쳤다.
김태웅 소령은 입술을 비틀어 냉소를 흘리며 강 중령에게 다가가 허리를 살짝 굽혔다.
그러고 나서 커다란 손으로 입가를 가리더니, 다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경고를 보냈다.
“저희 유령들이 강 중령님을 찾아갈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상관없으십니까?”
대놓고 협박하는 태도에 강 중령은 눈을 부릅뜬 채 아무 말 못하고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자, 이렇게 모여 계시지 말고, 다들 부대로 복귀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김태웅 소령의 해산령에 차지혁은 얼른 나를 부축했다.
그래도 내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낮게 소곤거렸다.
“부상병, 부상병.”
“아이고, 머리야아!”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나는 얼른 꾀병을 부렸다.
“훈련병들은 날 따라오라.”
김태웅 소령이 앞장서서 걸어가자, 바닷물이 갈라지듯 수많은 인파들이 화들짝 놀라 비켜섰다.
내 혼신을 다한 연기 덕분인지, 그게 아니면 서슬 퍼런 김태웅 소령의 엄포 덕분인지 모르지만, 더 이상 차지혁에게 귀찮게 달라붙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아쉬운 눈초리로 입맛을 다실 뿐이었다.
김태웅 소령은 방금 전 위협을 가한 강 중령을 어깨 너머로 바라보며 대수롭지 않게 말을 건넸다.
“강 중령님, 방금 한 말은 그냥 혼잣말이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
“큭… 이 일은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지, 김 소령.”
“그러시든지.”
연병장을 벗어나 생활관 건물 앞에 도착하자, 강기오 중사가 그제야 말을 꺼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충성!”
나는 여느 때보다 훨씬 군기 잡힌 경례를 올리는 강기오 중사를 신기한 듯 쳐다봤다.
그런데 정작 김태웅 소령은 경례를 받는 둥 마는 둥 대충 넘어갔다.
“그래. 오랜만이군, 강 하사. 아니, 이제 중사인가?”
“그렇습니다, 팀장님.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강 하사? 팀장님? 둘이 아는 사이인가?’
내가 의아해할 때, 김태웅 소령이 강기오 중사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중사 강기오!”
“잘 지내는 것처럼 보여서 기분 좋군. 얼굴이 아주 훤해졌어.”
“감사합니다, 팀장… 아니, 소령님.”
“소령은 개뿔. 나는 언제나 자네의 팀장이야. 그보다, 자네가 남아 있었다면 작전 팀 하나를 맡겼을 텐데… 아쉬울 뿐이야.”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그리고 진급 축하드립니다, 김 중령님.”
“그냥 팀장이라고 부르라니까.”
“아닙니다!”
김태웅 소령은 바짝 군기 잡힌 목소리로 대답하는 강기오 중사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쩝, 교관 생활 몇 년 하더니, 아주 밥맛이 다 됐군.”
“…죄송합니다.”
“됐어. 그건 그렇고, 여기 두 사람은 모두 자네 소대원인가?”
“그렇습니다.”
“음, 아주 잘 가르쳤군. 역시 독사다워. 내 마음에 아주 쏙 들 만큼 훌륭한 병사들이야.”
“감사합니다!”
김태웅 소령의 칭찬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그럴 때마다 강기오 중사는 딱딱하게 답변했다.
정말 지인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럼 들어가 보게. 나도 이만 가봐야겠군.”
김태웅 소령이 말을 마치고 몸을 돌리자, 강기오 중사가 경례를 올렸다.
“충성!”
“어휴, 훈련소가 사람 하나 완전히 버려놨네. 충성.”
투덜거리듯 한마디를 남긴 김태웅 소령은 그대로 등을 돌려 멀어져 갔다.
나는 그때 강기오 중사가 김태웅 소령을 몹시 불편해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들어가지.”
“알겠습니다.”
강기오 중사는 우리를 이끌고 생활관 건물로 들어가려 했으나, 다시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김태웅 소령이 갑자기 우리를 불렀기 때문이다.
“아참, 최대길, 차지혁.”
“173번 훈련병, 최대길!”
“161번 훈련병, 차지혁!”
“다음에 만났을 때가 기대되는군. 둘 다 말이야.”
“감사합니다!”
일단 답은 했지만, 나는 될 수 있으면 김태웅 소령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대대장의 얼굴을 계속 마주한다는 건, 전역할 때까지 내내 가시방석에 앉아 있어야 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기대는 무슨. 다음에 부디 얼굴 볼 일 없기를 바랍니다.’
내가 속으로 투덜거리는 사이, 김태웅 소령은 차지혁에게 말을 건넸다.
“차지혁 훈련병, 우승 축하하네, 그리고 앞으로도 오래 볼 수 있다면 좋겠군.”
“감사합니다. 하지만 소령님의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하하하, 성급하군. 곰곰이 생각해 보게. 우리는 아마 오래 보게 될 거야. 자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자발적으로 내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강제로 끌려가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네.”
“네?”
말을 마친 김태웅 소령은 그대로 몸을 돌려 떠나갔다.
김태웅 소령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그제야 강기오 중사가 입을 열었다.
“생활관으로 입장합니다.”
어째서인지 그의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입장!”
생활관으로 돌아온 우리는 소대원들에게 둘러싸여 격한 환영을 받았다.
물론, 그 주인공은 차지혁이었다.
차지혁 덕분에 주말 동안 자유 시간을 누릴 뿐 아니라 치킨 파티까지 하게 되었으니, 이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는 소대원들에게 차지혁을 내주고 무리 속에서 빠져나와 생활관 침상 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에는 굳은 표정의 한상혁이 앉아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갔다.
내 접근을 알아챈 한상혁은 몹시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으나, 이내 포기한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는 게 즐거웠다.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가며 광대가 아플 지경이었다.
“한상혁.”
“왜?”
“왜? 뭐 잊은 것 없냐, 동생아?”
“…….”
“왜 대답이 없냐, 동생아?”
내가 끈질기게 추궁하자, 한상혁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형님이 말씀하시는데 대답은 해야지.”
“쳇, 형님은 무슨.”
“어라? 한 입으로 두말하겠다는 거야?”
“……형님.”
어금니를 악문 한상혁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뭐라고? 목소리가 작아서 잘 안 들리는데?”
“아니라고, 형님 새끼야!”
‘흐흐흐, 오늘 밤은 모처럼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