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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지옥 같은 제식훈련 주간이 지나갔다.
그 후, 본격적인 훈련을 위해 총기 수여식이 진행됐다.
“161번 훈련병, 차지혁! 총기 번호 009008, 009008.”
“162번 훈련병, 김유신. 총기 번호 009010, 009010.”
중대장이 소총을 건네주면 훈련병은 총신에 적힌 총기 번호를 크게 외친다.
당연하게도 총신에 적힌 총기 번호는 모두가 다 달랐다.
여기 있는 훈련병들의 군번이 모두 다른 것처럼.
그리고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나는 중대장에게 건네받은 총기의 번호를 확인하고 크게 외쳤다.
“173번 훈련병, 최대길! 총기 번호 009119, 009119! 이상입니다!”
다행히도 총번이 엄청나게 쉬었다.
끝자리가 소방서 긴급 출동 번호니 까먹을 수가 없었다.
총기 수여식을 마치고 각자 지급받은 총기를 든 채 생활관으로 복귀하자, 강기오 중사는 평소와 다르게 약간 부드러운 인상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뭐, 그래봐야 여전히 독사지만.
“지급받은 총기는 여자 친구처럼 소중하게 다뤄야 합니다. 개인 총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타인에게 양도해선 안 됩니다. 당연히 상급자가 달라고 해도 절대 넘겨줘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총기 번호는 달달 외워서 총기 소지 시 관등성명과 함께 총기 번호를 함께 보고합니다. 알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교관이 시범 삼아 물어보겠습니다. 161번 훈련병.”
“네. 161번 훈련병, 차지혁! 제 총기 번호는 009008, 009008! 이상입니다!”
“아주 훌륭합니다. 다른 훈련병들도 161번 훈련병이 대답한 것처럼 하면 됩니다. 알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역시 차지혁은 무서운 독사도 인정하는 에이스 훈련병이었다.
“그럼 지금부터는 교관이 총기의 각 부분의 명칭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강기오 중사는 소대원들을 천천히 돌아보더니, 역시나 나를 콕 집어 입을 열었다.
“173번 훈련병.”
나는 목소리가 작다고 트집 잡힐지도 몰라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173번 훈련병, 최대길! 제 총기 번호는 009119, 009119! 이상입니다!”
“잠시 교관이 설명할 수 있게 총을 건네주도록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우렁차게 대답하며 재빠른 동작으로 총을 강기오 중사에게 건넸다.
그 역시 내가 이렇게 빠르게 행동할 줄은 몰랐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봤다.
“173번 훈련병.”
“173번 훈련병, 최대길!”
“정신 똑바로 안 차립니까?”
“예?”
나는 무심결에 되묻고는 곧바로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엎드려.”
“엎드려!”
“하나에 정신을, 둘에 차리자. 하나!”
“정신을!”
“둘!”
“차리자!”
“교관이 분명 개인 총기는 절대로 타인에게 양도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다시 한 번 말하는데, 개인 총기는 절대 타인에게 양도하지 않습니다. 본 교관을 포함해 연대장님이나 훈련소장님께서 달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목소리 하나는 우렁차서 마음에 듭니다. 다시 일어나서 자리에 앉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벌떡 일어나서 자리에 앉자, 강기오 중사가 총을 다시 내게 건넸다.
“173번 훈련병, 최대길!”
나는 황급히 총을 받아 들었지만, 강기오 중사는 단단히 붙잡은 채 손을 놓지 않았다.
강기오 중사를 멀뚱히 쳐다보는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훈련병.”
“173번 훈련병, 최대길!”
“상급자가 총기를 만질 경우, 어떻게 해야 됩니까?”
“관등성명과 함께 총기 번호를 대야 합니다!”
“맞습니다. 그럼 배운 대로 합니다.”
이번에야말로 기회가 왔다.
나는 당당히 목 놓아 소리쳤다.
“173번 훈련병, 최대길! 제 총번은······.”
‘어라, 내 총기 번호가 뭐였지?’
분명 엄청 쉬운 번호라는 건 기억났다.
하지만 얼차려를 받는 동안 머릿속이 리셋되었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어, 그러니까······.”
사나운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며 눈앞에 있다 보니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훈련병, 엎드려.”
가만히 내 대답을 기다리던 강기오 중사가 낮게 말했다.
“제 총번은··· 엎드려입니다!”
“풋!”
“큭.”
내 멍청한 대답에 소대원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소대원들이 왜 웃는지 몰라 잠시 멍하니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엎드렸다.
엎드린 채 얼차려를 기다리는데, 강기오 중사가 다시 나를 일으켜 세웠다.
“훈련병, 일어납니다.”
“네!”
아직도 몇몇 소대원들이 입을 틀어막고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나는 전혀 웃을 수가 없었다.
강기오 중사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를 꽉 깨문 채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야 하자, 절로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 탓에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아낸 소대원들이 긴장한 상태로 숨을 죽였다.
바로 그 순간, 마침내강기오 중사가 폭발했다.
“전체 어깨동무 실시!”
“실시!”
“제군들은 같은 생활관을 쓰고 고락을 함께하는 소중한 전우입니다. 옆에서 동기가 실수한 게 그렇게 웃긴 일입니까!”
“아닙니다!”
“하나에 동기를, 둘에 사랑하자. 하나.”
“동기를!”
“둘.”
“사랑하자!”
“파도 타지 말고, 동작 일치시킵니다. 하나!”
“동기를!”
“둘.”
“사랑하자!”
“절대 동기의 실수에 웃지 않습니다, 알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오늘도 우리 소대는 얼차려를 받고야 말았다.
원인을 따지면 결국 또 나였다.
한차례 폭풍이 몰아친 뒤, 강기오 중사는 총기 명칭을 설명해 주고는 생활관을 나섰고, 생활관에는 훈련병들만 남게 됐다.
나는 동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런 나의 표정을 읽었는지, 차지혁이 말을 걸어왔다.
“대길아, 괜찮아. 누구든 실수할 수 있어. 하다 보면 잘할 거야.”
“죄송합니다, 형님. 다들 정말 미안합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앞으로 잘하면 되잖아.”
“그래그래. 그냥 운동하는 셈 치고 하는 거지. 솔직히 여기서 대길이만큼 힘든 사람은 없어.”
“맞아. 독사한테 찍혀서 매일 아침부터 얼차려를 받는데,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니잖아.”
동기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내 기분을 풀어주려 노력했다.
나는 그런 동기들의 따스한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런데 그때, 생활관 제일 구석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휴, 찐따 새끼들. 다들 뭐가 좋다고 지랄들인지. 병신 새끼 하나 때문에 굳이 안 받아도 될 얼차려를 벌써 몇 번이나 받았는데, 참 속도 좋다.”
그의 발언은 나를 겨냥한 게 아니라, 소대원들을 싸잡아 비꼬는 말이었다.
당황한 내가 돌아보자, 침상 맨 끝을 차지한 그가 노골적으로 나를 노려봤다.
180번, 이름은 한상혁.
항상 얼차려를 받을 때면 투덜대던 녀석이다.
나이는 나랑 동갑인 걸로 아는데, 있는 집 자식이라도 되는지 항상 건방진 표정과 태도 탓에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었다.
내 잘못으로 피해를 준 건 맞지만, 방금 전에 한 말은 조금 도가 지나쳤다.
“큭큭, 뭘 꼬나봐?”
“방금 그 말 취소하고, 모두한테 사과해.”
“발끈하기는. 욕을 먹으니까 기분은 나쁜 모양이네?”
“아니. 나를 비난하는 건 괜찮아. 내가 잘못한 게 맞으니까. 그런데 다른 동기들까지 싸잡아 비난하는 건 잘못이라고 생각해.”
“그럼 애초에 네가 잘하면 되잖아. 다른 소대 애들한테 들었는데, 너 때문에 우리 소대를 죽음의 소대라고 부른다더라. 아침에 눈 뜨자마자 얼차려받고, 자기 전에도 구르는 소대는 훈련소를 통틀어서 우리뿐이라는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우리는 한배를 탄 거나 마찬가지야. 그런 의미에서 말이 지나친 건 맞지.”
한상혁과 대각선 끝에 앉은 차지혁이 나서자, 한상혁은 이죽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아주 성인군자 나셨네. 여기저기서 에이스라고 떠받들어 주니까 좋지? 내가 다 봤어, 남들 다 자고 있을 때 소대장이 당신 데리고 나가는 거. 뭐, 앞으로 잘 봐줄 테니까 사인이라도 한두 장 해달라고 했을 게 빤하지.”
“그건······.”
“됐고, 앞으로 서로서로 피해 안 주게 조심하고 삽시다. 어차피 5주 훈련만 끝나면 뿔뿔이 흩어져서 다시 볼 사이도 아닌데. 그리고 그쪽도 저 병신 새끼 챙겨준다고 누가 좋은 기사라도 한 줄 써준답니까? 군대까지 와서 어렵게 이미지 관리 같은 거 하지 말고, 성격대로 합시다.”
“야, 한상혁!”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뭐라고 한마디 쏘아붙이려던 찰나, 생활관 문이 벌컥 열리며 강기오 중사가 들어왔다.
“누가 떠들라고 했습니까!”
덕분에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173번 훈련병!”
하~ 또 걸렸다, 젠장.
이 정도면 전생에 강기오 중사랑 무슨 원수지간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다.
“173번 훈련병, 최대길!”
“자리에 앉습니다.”
“네!”
웬일로 얼차려 없이 그냥 넘어가는 그의 모습에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행여나 마음이 변할까 싶어 얼른 자리에 앉아 각을 잡자, 강기오 중사가 용건을 전했다.
“소대에서 금일 중식 잔반 처리 지원자를 두 명 선발하겠습니다. 지원자 있습니까?”
잔반 처리, 말 그대로 병사들이 먹고 남은 음식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군대 말로 소위 뺑이 친다는 강도 높은 일이 바로 잔반 처리였다.
훈련소 인원 전부가 먹고 남기는 잔반이기에 그 양이 엄청난 것은 둘째 치고, 냄새 때문에라도 모두가 기피하는 일 중 하나였다.
아니나 다를까, 소대원 모두가 입을 꾹 다문 채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지원자 없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본 교관이 임의로 선발······.”
“제가 하겠습니다!”
그 순간, 나는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음?”
“173번 훈련병, 최대길! 제가 하겠습니다!”
강기오 중사는 나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더니 질문을 던졌다.
“아무도 하기 싫어하는 일에 나선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됩니까?”
“제 실수로 몇 번이나 동기들에게 피해를 끼쳤습니다. 비록 큰일은 아니지만, 조금이나마 동기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훈련병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그럼 남은 한 명은······.”
“173번 훈련병, 최대길. 교관님께 질문 있습니다.”
“뭡니까?”
“남은 한 명은 제가 데려가고 싶은 사람을 고르고 싶습니다.”
강기오 중사는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173번 훈련병은 누구와 함께 가고 싶습니까?”
“저는······.”
내가 입을 여는 순간, 소대원 전체가 내 시선을 피했다.
오직 한 명, 차지혁만이 나를 바라보며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형님. 당신은 진정 천사입니까?’
내가 지목할 사람은 차지혁이 아니기에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나서 한 사람을 지목했다.
“저는 180번 훈련병과 함께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173번 훈련병과 180번 훈련병이 지원 나가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럼 두 사람은 지금 즉시 활동복으로 환복한 후에 행정실 앞에 대기합니다.”
갑자기 내게 지목당한 한상혁은 느닷없이 벌어진 상황에 나를 노려봤다.
난 녀석의 눈빛을 가볍게 무시하며 옷을 갈아입은 뒤, 쌩하니 생활관을 나섰다.
꼴좋다, 새끼야. 그러게 평소에 마음을 곱게 썼어야지.
지옥 같은 제식훈련 주간이 지나갔다.
그 후, 본격적인 훈련을 위해 총기 수여식이 진행됐다.
“161번 훈련병, 차지혁! 총기 번호 009008, 009008.”
“162번 훈련병, 김유신. 총기 번호 009010, 009010.”
중대장이 소총을 건네주면 훈련병은 총신에 적힌 총기 번호를 크게 외친다.
당연하게도 총신에 적힌 총기 번호는 모두가 다 달랐다.
여기 있는 훈련병들의 군번이 모두 다른 것처럼.
그리고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나는 중대장에게 건네받은 총기의 번호를 확인하고 크게 외쳤다.
“173번 훈련병, 최대길! 총기 번호 009119, 009119! 이상입니다!”
다행히도 총번이 엄청나게 쉬었다.
끝자리가 소방서 긴급 출동 번호니 까먹을 수가 없었다.
총기 수여식을 마치고 각자 지급받은 총기를 든 채 생활관으로 복귀하자, 강기오 중사는 평소와 다르게 약간 부드러운 인상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뭐, 그래봐야 여전히 독사지만.
“지급받은 총기는 여자 친구처럼 소중하게 다뤄야 합니다. 개인 총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타인에게 양도해선 안 됩니다. 당연히 상급자가 달라고 해도 절대 넘겨줘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총기 번호는 달달 외워서 총기 소지 시 관등성명과 함께 총기 번호를 함께 보고합니다. 알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교관이 시범 삼아 물어보겠습니다. 161번 훈련병.”
“네. 161번 훈련병, 차지혁! 제 총기 번호는 009008, 009008! 이상입니다!”
“아주 훌륭합니다. 다른 훈련병들도 161번 훈련병이 대답한 것처럼 하면 됩니다. 알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역시 차지혁은 무서운 독사도 인정하는 에이스 훈련병이었다.
“그럼 지금부터는 교관이 총기의 각 부분의 명칭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강기오 중사는 소대원들을 천천히 돌아보더니, 역시나 나를 콕 집어 입을 열었다.
“173번 훈련병.”
나는 목소리가 작다고 트집 잡힐지도 몰라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173번 훈련병, 최대길! 제 총기 번호는 009119, 009119! 이상입니다!”
“잠시 교관이 설명할 수 있게 총을 건네주도록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우렁차게 대답하며 재빠른 동작으로 총을 강기오 중사에게 건넸다.
그 역시 내가 이렇게 빠르게 행동할 줄은 몰랐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봤다.
“173번 훈련병.”
“173번 훈련병, 최대길!”
“정신 똑바로 안 차립니까?”
“예?”
나는 무심결에 되묻고는 곧바로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엎드려.”
“엎드려!”
“하나에 정신을, 둘에 차리자. 하나!”
“정신을!”
“둘!”
“차리자!”
“교관이 분명 개인 총기는 절대로 타인에게 양도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다시 한 번 말하는데, 개인 총기는 절대 타인에게 양도하지 않습니다. 본 교관을 포함해 연대장님이나 훈련소장님께서 달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목소리 하나는 우렁차서 마음에 듭니다. 다시 일어나서 자리에 앉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벌떡 일어나서 자리에 앉자, 강기오 중사가 총을 다시 내게 건넸다.
“173번 훈련병, 최대길!”
나는 황급히 총을 받아 들었지만, 강기오 중사는 단단히 붙잡은 채 손을 놓지 않았다.
강기오 중사를 멀뚱히 쳐다보는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훈련병.”
“173번 훈련병, 최대길!”
“상급자가 총기를 만질 경우, 어떻게 해야 됩니까?”
“관등성명과 함께 총기 번호를 대야 합니다!”
“맞습니다. 그럼 배운 대로 합니다.”
이번에야말로 기회가 왔다.
나는 당당히 목 놓아 소리쳤다.
“173번 훈련병, 최대길! 제 총번은······.”
‘어라, 내 총기 번호가 뭐였지?’
분명 엄청 쉬운 번호라는 건 기억났다.
하지만 얼차려를 받는 동안 머릿속이 리셋되었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어, 그러니까······.”
사나운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며 눈앞에 있다 보니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훈련병, 엎드려.”
가만히 내 대답을 기다리던 강기오 중사가 낮게 말했다.
“제 총번은··· 엎드려입니다!”
“풋!”
“큭.”
내 멍청한 대답에 소대원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소대원들이 왜 웃는지 몰라 잠시 멍하니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엎드렸다.
엎드린 채 얼차려를 기다리는데, 강기오 중사가 다시 나를 일으켜 세웠다.
“훈련병, 일어납니다.”
“네!”
아직도 몇몇 소대원들이 입을 틀어막고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나는 전혀 웃을 수가 없었다.
강기오 중사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를 꽉 깨문 채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야 하자, 절로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 탓에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아낸 소대원들이 긴장한 상태로 숨을 죽였다.
바로 그 순간, 마침내강기오 중사가 폭발했다.
“전체 어깨동무 실시!”
“실시!”
“제군들은 같은 생활관을 쓰고 고락을 함께하는 소중한 전우입니다. 옆에서 동기가 실수한 게 그렇게 웃긴 일입니까!”
“아닙니다!”
“하나에 동기를, 둘에 사랑하자. 하나.”
“동기를!”
“둘.”
“사랑하자!”
“파도 타지 말고, 동작 일치시킵니다. 하나!”
“동기를!”
“둘.”
“사랑하자!”
“절대 동기의 실수에 웃지 않습니다, 알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오늘도 우리 소대는 얼차려를 받고야 말았다.
원인을 따지면 결국 또 나였다.
한차례 폭풍이 몰아친 뒤, 강기오 중사는 총기 명칭을 설명해 주고는 생활관을 나섰고, 생활관에는 훈련병들만 남게 됐다.
나는 동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런 나의 표정을 읽었는지, 차지혁이 말을 걸어왔다.
“대길아, 괜찮아. 누구든 실수할 수 있어. 하다 보면 잘할 거야.”
“죄송합니다, 형님. 다들 정말 미안합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앞으로 잘하면 되잖아.”
“그래그래. 그냥 운동하는 셈 치고 하는 거지. 솔직히 여기서 대길이만큼 힘든 사람은 없어.”
“맞아. 독사한테 찍혀서 매일 아침부터 얼차려를 받는데,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니잖아.”
동기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내 기분을 풀어주려 노력했다.
나는 그런 동기들의 따스한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런데 그때, 생활관 제일 구석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휴, 찐따 새끼들. 다들 뭐가 좋다고 지랄들인지. 병신 새끼 하나 때문에 굳이 안 받아도 될 얼차려를 벌써 몇 번이나 받았는데, 참 속도 좋다.”
그의 발언은 나를 겨냥한 게 아니라, 소대원들을 싸잡아 비꼬는 말이었다.
당황한 내가 돌아보자, 침상 맨 끝을 차지한 그가 노골적으로 나를 노려봤다.
180번, 이름은 한상혁.
항상 얼차려를 받을 때면 투덜대던 녀석이다.
나이는 나랑 동갑인 걸로 아는데, 있는 집 자식이라도 되는지 항상 건방진 표정과 태도 탓에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었다.
내 잘못으로 피해를 준 건 맞지만, 방금 전에 한 말은 조금 도가 지나쳤다.
“큭큭, 뭘 꼬나봐?”
“방금 그 말 취소하고, 모두한테 사과해.”
“발끈하기는. 욕을 먹으니까 기분은 나쁜 모양이네?”
“아니. 나를 비난하는 건 괜찮아. 내가 잘못한 게 맞으니까. 그런데 다른 동기들까지 싸잡아 비난하는 건 잘못이라고 생각해.”
“그럼 애초에 네가 잘하면 되잖아. 다른 소대 애들한테 들었는데, 너 때문에 우리 소대를 죽음의 소대라고 부른다더라. 아침에 눈 뜨자마자 얼차려받고, 자기 전에도 구르는 소대는 훈련소를 통틀어서 우리뿐이라는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우리는 한배를 탄 거나 마찬가지야. 그런 의미에서 말이 지나친 건 맞지.”
한상혁과 대각선 끝에 앉은 차지혁이 나서자, 한상혁은 이죽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아주 성인군자 나셨네. 여기저기서 에이스라고 떠받들어 주니까 좋지? 내가 다 봤어, 남들 다 자고 있을 때 소대장이 당신 데리고 나가는 거. 뭐, 앞으로 잘 봐줄 테니까 사인이라도 한두 장 해달라고 했을 게 빤하지.”
“그건······.”
“됐고, 앞으로 서로서로 피해 안 주게 조심하고 삽시다. 어차피 5주 훈련만 끝나면 뿔뿔이 흩어져서 다시 볼 사이도 아닌데. 그리고 그쪽도 저 병신 새끼 챙겨준다고 누가 좋은 기사라도 한 줄 써준답니까? 군대까지 와서 어렵게 이미지 관리 같은 거 하지 말고, 성격대로 합시다.”
“야, 한상혁!”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뭐라고 한마디 쏘아붙이려던 찰나, 생활관 문이 벌컥 열리며 강기오 중사가 들어왔다.
“누가 떠들라고 했습니까!”
덕분에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173번 훈련병!”
하~ 또 걸렸다, 젠장.
이 정도면 전생에 강기오 중사랑 무슨 원수지간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다.
“173번 훈련병, 최대길!”
“자리에 앉습니다.”
“네!”
웬일로 얼차려 없이 그냥 넘어가는 그의 모습에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행여나 마음이 변할까 싶어 얼른 자리에 앉아 각을 잡자, 강기오 중사가 용건을 전했다.
“소대에서 금일 중식 잔반 처리 지원자를 두 명 선발하겠습니다. 지원자 있습니까?”
잔반 처리, 말 그대로 병사들이 먹고 남은 음식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군대 말로 소위 뺑이 친다는 강도 높은 일이 바로 잔반 처리였다.
훈련소 인원 전부가 먹고 남기는 잔반이기에 그 양이 엄청난 것은 둘째 치고, 냄새 때문에라도 모두가 기피하는 일 중 하나였다.
아니나 다를까, 소대원 모두가 입을 꾹 다문 채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지원자 없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본 교관이 임의로 선발······.”
“제가 하겠습니다!”
그 순간, 나는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음?”
“173번 훈련병, 최대길! 제가 하겠습니다!”
강기오 중사는 나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더니 질문을 던졌다.
“아무도 하기 싫어하는 일에 나선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됩니까?”
“제 실수로 몇 번이나 동기들에게 피해를 끼쳤습니다. 비록 큰일은 아니지만, 조금이나마 동기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훈련병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그럼 남은 한 명은······.”
“173번 훈련병, 최대길. 교관님께 질문 있습니다.”
“뭡니까?”
“남은 한 명은 제가 데려가고 싶은 사람을 고르고 싶습니다.”
강기오 중사는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173번 훈련병은 누구와 함께 가고 싶습니까?”
“저는······.”
내가 입을 여는 순간, 소대원 전체가 내 시선을 피했다.
오직 한 명, 차지혁만이 나를 바라보며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형님. 당신은 진정 천사입니까?’
내가 지목할 사람은 차지혁이 아니기에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나서 한 사람을 지목했다.
“저는 180번 훈련병과 함께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173번 훈련병과 180번 훈련병이 지원 나가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럼 두 사람은 지금 즉시 활동복으로 환복한 후에 행정실 앞에 대기합니다.”
갑자기 내게 지목당한 한상혁은 느닷없이 벌어진 상황에 나를 노려봤다.
난 녀석의 눈빛을 가볍게 무시하며 옷을 갈아입은 뒤, 쌩하니 생활관을 나섰다.
꼴좋다, 새끼야. 그러게 평소에 마음을 곱게 썼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