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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입대 당일 새벽.
친구들과 밤새도록 마신 술기운이 아직 남은 탓인지 머리가 띵했다.
양정숙 대위에게 건네받은 300만 원.
덕분에 나는 친구들과 일주일 내내 원 없이 술을 퍼마실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새 입대 날이 밝아오고 말았다.
화장실에서 간단하게 샤워를 마친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틀 전, 이발소에서 머리를 짧게 잘랐다.
평생 한 번도 이렇게 까까머리가 되어본 적이 없던 터라 어색하기만 했다.
손끝에 전해지는 까슬까슬한 느낌조차 꿈을 꾸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참을 어색하게 거울을 바라보던 나는 옷을 대충 주워 입고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친구 놈들을 내버려 둔 채 역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이지만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그중에는 간혹 짧은 머리의 또래 남자들이 보였다.
서로 말은 걸지 않아도 눈이 마주치면 왠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들 역시 나와 다르지 않은지, 내 쪽을 힐끔힐끔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훈련소행 자기부상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왔다.
듣기엔 서울에서 부산까지 두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는데, 직접 타는 건 처음이었다.
기차에 올라타 자리를 찾은 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나 곧 코끝을 찌르는 술 냄새에 이마를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많이 마셨나?”
혼자 중얼거린 나는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 나서 연락처를 뒤져 전화번호 하나를 찾아냈다.
하지만 쉽사리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 애꿎은 머리만 만지작거렸다.
기차가 출발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마지못해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응, 아들.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무슨 일이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힘이 없어 보였다.
“엄마, 나 할 말 있어.”
[뭔데? 너 혹시 사고 쳤니?]
“아니야, 그런 거.”
엉뚱한 질문에 먹먹하던 감정이 맥없이 풀린 탓에 괜히 심술이 나서 언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곧장 밀려드는 죄스러움에 괜히 중얼거리듯 그리운 두 글자를 내뱉었다.
“엄마······.”
[뭔데? 빨리 말해. 엄마 출근해야 되는데, 불안하게 하지 말고.]
“엄마··· 나 군대 갔다 올게.”
[뭐라고? 아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군대? 언제 가는데?]
나의 갑작스런 통보에 엄마의 말이 빨라졌다.
적잖이 당황했다는 게 수화기 너머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괜히 가슴이 찡했다.
나는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으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오늘.”
[오늘? 아니, 무슨 군대를 그렇게 급하게 가? 기다려 봐. 엄마가 오늘 가게 문을 닫더라도······.]
급하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니야. 그냥 나 혼자 갔다 올게. 이미 기차 탔어. 엄마··· 사랑해.”
[아들······.]
“걱정하지 마. 잘 다녀올게.”
나는 더 말을 하다간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런 후,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작별 인사를 전했다.
“야, 나 간다.”
[뭐? 너 언제 나갔냐? 아이고, 머리야. 아니, 우릴 깨우지도 않고 혼자 쌩하고 가면 어떻게 해? 지금 어디냐? 같이 가줄게.]
“됐어. 잠이나 계속 처 자.”
[인마,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봐야지. 섭섭하게 이럴 거야?]
나는 친구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코를 골아대던 놈이 잘도 일어나겠다. 됐고, 나중에 휴가 나오면 보자. 벌써 기차 탔어.”
[야! 너······.]
“시끄럽고, 끊는다.”
엄마에겐 일부러 입대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괜히 엄마가 따라오면 헤어질 때,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마지막 환송을 부탁했지만, 녀석들은 몸도 못 가눌 정도로 뻗어버렸기에 그냥 혼자 가기로 마음을 바꿨다.
잠깐 멍하니 창밖을 바라본 것 같은데, 오늘따라 시간이 빨리 흐르기라도 하는지 기차는 순식간에 논산역에 도착했다.
‘입대 시간이 언제까지였지?’
나는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입영통지서가 담긴 봉투를 꺼냈다.
그때,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렸는데, 입영통지서 말고도 다른 종이 하나가 봉투 밖으로 삐져나왔다.
이게 뭔가 싶은 나는 종이를 꺼내 확인했다.
그곳엔 내가 지원한 특수부대에 대한 소개 사항이 작은 글자로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 귀하의 대헌터 테러 특수작전부대 지원을 환영합니다.
안내문에는 CHT 부대의 활동 내용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지만, 크게 흥미를 끄는 부분은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줄에 적혀 있는 내용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만약 정당한 사유 없이 입대를 거부할 시, 경우에 따라 지급받은 계약금의 열 배를 배상해야 합니다.
그 순간, 술이 확 깨고 말았다.
‘잠깐, 이게 뭐라고 적혀 있는 거야? 내가 지원한 부대가 CHT라고? 지원을 취소하려면 계약금의 열 배를 뱉어내라고?’
이미 일주일 동안 술값으로 다 날리고, 수중에 남은 돈이라곤 차비밖에 없었다.
서류를 자세히 훑어보지도 않고 여자에 홀려 사인한 결과가 이것이었다.
“허······.”
갑자기 밀어닥친 허탈감에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그때, 한 가족이 내 옆을 지나치며 수군거렸다.
“아이고, 저 사람 봐. 혼자 군대 가려니까 심란한 모양이네. 불쌍하기도 해라.”
“에잉, 남자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 이런 일로 울긴 왜 울어?”
“당신은 공익이라 모르는 거 아니에요?”
“어허, 이 사람이··· 사람들이 듣겠소.”
난 애써 눈물을 훔친 후에 내 옆을 스쳐 지나간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아들인 듯 보이는 남자가 머쓱하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그런 모습이 더욱 처량하게 느껴진 것인지,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한 번씩 날 쳐다보고 지나갔다.
‘일단 배상할 돈이 없으니, 입대는 해야지.’
괜스레 눈물이 또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고 훈련소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훈련소에 가까워질수록 도로 양쪽에 줄지어 늘어선 차들을 볼 수 있었다.
주차장으로 보이는 넓은 공간에는 관광버스도 여러 대가 주차돼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나는 삼삼오오 모여 훈련소 입구를 통과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들었다.
대부분 부모님이나 친구들과 함께 온 듯한데, 아주 간혹 가다 여자 친구와 꽁냥꽁냥하는 기만자 놈들도 보였다.
그런 모습에 왠지 마음 한구석이 더욱 허전해졌다.
나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입소식이 예정된 연병장으로 이동했다.
연병장 바깥쪽의 계단처럼 만들어진 공간에서는 몇몇 병사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서서 입소 예정자들과 그들을 배웅하러 온 사람들을 안내했다.
이미 자리를 잡은 사람들을 피해 난 멀찌감치 구석 자리로 가서 앉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스탠드를 채웠고, 그들이 싸 온 피자나 치킨 냄새가 솔솔 풍겼다.
꼬르륵.
‘그러고 보니 밥을 안 먹었네. 배고프다.’
그때,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우와, 연예인이다!”
고개를 들어 다른 이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눈을 돌리자, 저 멀리서 엄청난 인파에 파묻힌 남자 하나가 연병장 쪽으로 걸어왔다.
얼굴 뒤로 후광이 번쩍이는 기분이 느껴질 정도로 남자의 외모는 눈부셨다.
‘저 사람은······.’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지만, 언뜻 드라마에서 몇 번 본 기억이 있는 얼굴이었다.
“횩사마!”
“지횩 씨!”
남자를 포위한 아주머니들 입에서 갖가지 호칭들이 흘러나왔다.
개중에는 일본인도 있는 모양이었다.
훈련소 주차장에 관광버스들이 서 있더라니, 저 배우가 입대한다는 소식에 일본에서 여기까지 수백 명이 단체로 배웅하러 나온 듯싶었다.
정말 대단한 팬심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연병장 계단 앞까지 몰려온 아줌마들을 향해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일본어로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러자 아줌마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계단 아래로 내려갔지만, 더 이상 양보는 없다는 듯 그 앞에 진을 치듯 섰다.
아마 아줌마들이 계단을 차지하면 입소자들이 자리할 공간이 없어지기에 매니저가 통제한 것으로 보였다.
잠시 후, 남자 연예인은 아줌마들에게 뭐라고 인사를 하더니, 계단 위로 터벅터벅 올라와 주변을 살피고는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 모습에 나는 괜히 긴장이 됐다.
‘설마 나한테 오는 건 아니지?’
그런데 내 예상을 비웃듯 그는 떡하니 내 옆에 앉았다.
가까이서 본 남자의 얼굴은 어디 한 군데 흠잡을 곳이 없을 정도로 잘생겼다.
절로 뿜어져 나오는 후광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눈이 마주친 나는 어색함을 씻어보려 슬쩍 미소 지었다.
그러자 남자 배우도 나를 보며 덩달아 웃음을 띠었다.
같은 남자임에도 영혼이 빨려 들어갈 것처럼 치명적인 모습.
‘핫!’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이쪽을 바라보던 아줌마들이 크게 술렁거리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날 부러워하는 듯한 눈빛에 저 사람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휴우, 무슨 군대 가는 날까지 따라오고 난리야. 그런데··· 혼자 왔어요?”
남자는 귀찮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내 친근한 말투로 말을 걸어왔다.
“예? 아, 네.”
남자는 내 입에서 풍기는 술 냄새를 맡았는지 잠시 미간을 좁혔다가, 곧 피식 웃으며 굳은 표정을 풀었다.
“밤새도록 술이라도 마셨나 보네요. 아~ 부럽다. 딱 보니까 대학생 같은데··· 스무 살?”
“네. 스무 살이요.”
“크, 좋을 때네. 혹시 나 누군지 알아요?”
“그게··· 연예인이신 건 알겠는데, 제가 원래 TV 볼 시간이 없어서······.”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이자, 남자는 의외라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뭐, 관심이 없으면 그럴 수도 있지. 그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하죠. 배우 차지혁입니다. 나이는 서른이고.”
차지혁.
그제야 나는 그가 누군지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어릴 때, 그가 출연한 드라마와 영화를 간신히 떠올린 것이다.
그런데 그는 몇 년 전에 찍은 영화로 한국과 일본에서 대박을 터트리고, 최근에는 일본에서만 활동한다고 들었다.
듣기로는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만 해도 몇 편이나 되는 대 배우였다.
그런 사람이랑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게 될 줄이야.
“안녕하세요, 최대길입니다. 대학생이고요.”
“대길? 오오, 이런 우연도 있네요.”
“네? 왜 그러세요?”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원래 내 본명이 대길이거든. 그게 마음에 안 들어서 지혁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긴 했지만. 이런 게 인연이라는 건가? 반가워, 동생.”
차지혁은 어느새 내게 말을 놓고 있었다.
어차피 나이도 열 살이나 차이가 나니까, 별로 신경 쓰이진 않았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분위기를 맞춰주었다.
“저도 반갑습니다, 대길이 형님.”
“하하하, 대길이한테 대길이라고 불리니까 기분이 좀 이상하네. 그래도 앞으로는 지혁이라고 불러줘. 말했다시피, 대길이란 이름은 좀 별로거든.”
차지혁이 환하게 웃음을 터트리자, 계단 앞에 진을 친 아줌마 부대가 술렁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어가 쉬지 않고 들려왔다.
“형님, 저분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응. 네가 부럽다고 하네.”
“제가요? 이해가 안 되네요. 이제 잠시 후면 군인 신세가 되어버리는데······.”
“뭐? 하하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그냥 나 때문이라고 생각해. 내가 너랑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까 그런 거야. 이거,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다.”
“미안할 게 뭐 있나요. 또 볼일도 없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그나저나 이제 곧 시작할 모양이네.”
차지혁은 생각하는 것조차 싫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비어 있던 연병장에 어느새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낡은 스피커를 통해 방송이 울려 퍼졌다.
[곧 입소식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입소자 여러분께서는 연병장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방송이 반복해서 되풀이되자, 계단에 앉은 이들이 술렁였다.
누군가의 아들, 친구, 애인을 떠나보내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껴안거나 가져온 음식을 입에 넣어줬다.
그리고 주변의 시선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대범하게 작별의 키스를 나누는 연인들도 있었다.
나는 함께 온 사람이 없기에 망설임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벌써 가게? 너무 일찍 나가면 사람들의 시선이 쏠릴 거야.”
“음, 그럼 조금 더 있다 갈까요?”
나는 슬그머니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렇게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입소 장병들이 좀체 움직이질 않자 장내 방송의 내용이 바뀌었다.
[이제 입소식을 진행해야 할 시간입니다. 귀빈 여러분은 입영 장병들이 연병장으로 나올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십시오.]
그제야 입소자들이 하나둘 연병장으로 나가 줄을 섰다.
그걸 지켜보던 차지혁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우리도 이제 가자.”
“네, 형님.”
자리에서 일어선 차지혁은 아줌마 부대를 향해 환한 미소를 뿌리며 손을 흔들었다.
“너도 한 번 해봐.”
“네? 제가요?”
“응. 잘하면 오늘 기사 1면에 나랑 같이 얼굴이 실릴지도 모르잖아.”
나는 얼떨결에 그를 따라 쭈뼛거리며 손을 흔들었는데, 차지혁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끝을 쯧쯧, 찼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좀 웃어봐. 동생은 웃는 얼굴이 예뻐서 보기 좋을 것 같으니까.”
“아하하, 빈말이라도 감사합니다.”
일제히 울음을 터뜨리는 일본 아줌마들을 뒤로한 채 나는 차지혁과 함께 연병장을 향해 걸었다.
우리 두 사람이 통제에 따라 줄을 서자, 흐느낌은 아예 통곡이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입소식 예행연습은 흔들림 없이 시작됐다.
미리 예정됐다는 듯 내 왼쪽에 서 있던 차지혁이 앞으로 나갔다.
입소자 대표는 대게 지원자를 받는다고 들었는데, 장정들 사이를 돌아다니던 간부가 차지혁을 콕 집어 지명한 걸 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차지혁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살짝 얼굴을 찌푸렸지만, 이내 표정을 관리했다.
다시 혼자 남겨진 나는 몇 번의 예행연습을 건성건성 넘겼다.
그러고 나서 시작된 정식 입소식은 내 예상과 달리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그럼 지금부터 입소 신고가 있겠습니다. 입소자 대표, 앞으로.]
차지혁은 처음 끌려갈 때는 은근 불만을 표했지만, 몇 번 연습하다 보니 나름 재미가 붙었는지 호명되자마자 잽싸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충성!”
“충성.”
과연 천만 배우랄까.
그는 실수 없이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신고를 마쳤다.
그 후로 무난하게 입소식이 끝나자 선두에 선 인솔자가 외쳤다.
“앞으로 갓!”
구령에 맞춰 수백 명의 입소자가 움직였다.
“왼발, 왼발.”
인솔자가 계속해서 외쳐 대지만, 입소자들의 걸음은 제각각이었다.
양 떼마냥 우르르 몰려가는 꼴에 군기는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드디어 입소자들이 움직이자, 계단 쪽에서는 한동안 볼 수 없을 이의 이름을 애타게 불러 댔다.
“정용아!”
“상현아!”
“두석아!”
그러자 입소자들 사이에서도 개중 울음을 터트리는 이들이 나왔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주목을 끄는 것은 차지혁을 부르는 소리였다.
“횩사마!”
“지횩 씨!”
수백 명이 외치는 소리에 다른 이들의 외침은 순식간에 묻히고 말았다.
어느덧 연병장을 벗어나 배웅하던 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쉬운 마음에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군복 차림의 훈련병들이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야 진짜 군 생활이 시작된다는 생각에 나는 두려움 반, 설렘 반인 감정을 느꼈다.
그건 나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대부분의 이들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훈련하러 가나 봐.”
“우리도 곧 저렇게 되겠지.”
약간 어수선한 분위기에 인솔자가 나서서 크게 소리쳤다.
“이동간에 떠들지 않습니다! 발 맞춰 걷습니다!”
모자를 푹 눌러쓴 탓에 표정을 확인할 순 없지만, 인솔자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다만, 당장 일이 터지는 않아 조금 안심하려던 찰나, 나는 우려가 현실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입소식이 치러진 장소보다 다섯 배는 큰 연병장에 들어서는 순간, 한 남자가 높은 단상 위에서 미동도 없이 동상처럼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인솔자의 통제에 따라 우리는 곧 오와 열을 맞춰 시립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단상 위의 남자는 전혀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우리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잔뜩 긴장해 연신 마른침을 삼키는데, 남자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반갑습니다. 본 교관은 앞으로 제군들의 교육 훈련과 훈육을 담당할 강기오 중사입니다.”
강기오 중사의 목소리는 매우 높은 톤에 사람을 찍어 누르는 듯 독특한 느낌을 풍겼다.
얼핏 들으면 여자가 억지로 무게를 잡으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인파 속에서 피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야, 여자야?”
“뼈대를 봐라. 남자잖아.”
“야, 여자도 운동하면 저 정도 떡대는 만들 수 있어.”
주변에서 속삭이듯 대화를 주고받는 소리가 내 귓가를 간질였다.
그때,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강기오 중사가 버럭 호통을 쳤다.
“교관이 말하는데 누가 떠듭니까!”
강기오 중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우리를 노려봤다.
나는 맨 앞 열에 서 있던 터라, 제법 가까이서 그의 얼굴을 살필 수 있었다.
놀랍게도 강기오 중사는 크게 소리치면서도 표정에 변화가 전혀 없었다.
그건 마치 겉만 사람의 형태를 띤 기계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강기오 중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마주치듯 연병장을 둘러보았다.
아주 찰나에 불과하지만, 나 역시 그와 시선을 마주치고 말았다.
그 순간, 주변의 공기가 갑자기 무겁게 내려앉으며 몸을 옥죄는 것처럼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여러분은 이제 민간인이 아닙니다. 교관은 현재 제군들의 정신 상태가 훈련을 받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의 썩어 빠진 정신을 재무장하기 위해 얼차려를 부여하겠습니다. 앉아.”
갑작스런 지시에 수백이 넘는 인원들이 우왕좌왕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인솔 조교들이 빠르게 주위로 퍼지며 제각기 소리쳤다.
“제자리에 앉습니다! 복명복창합니다. 앉아!”
몇몇 눈치 빠른 이들이 자리에 앉자, 나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 쪼그려 앉았다.
“빨리, 빨리 움직입니다!”
수백 명의 인원이 한꺼번에 앉으려 하자 먼지가 풀풀 날리고, 먼저 앉은 사람의 얼굴에 엉덩이를 들이미는 온갖 불상사가 발생했다.
사람들이 앉는 걸 확인하고 나서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자, 강기오 중사가 으르렁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행동이 왜 이렇게 굼뜹니까? 일어서.”
자리에 앉은 이들이 우르르 일어섰다.
여전히 반응속도가 제각각 다르기에 모두 한 번에 일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복명복창합니다. 앉아.”
“앉아.”
“목소리 크게 합니다. 일어서.”
“일어서!”
그 후로도 몇 번이고 앉았다 일어서는 걸 반복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잠잠하던 속이 더부룩해지며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일어서.”
“일어서!”
수십 번을 반복한 탓인지, 수백 명의 입에서 제법 한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강기오 중사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지, 단상에서 내려와 장병들 사이를 걸어 다녔다.
“앉아.”
“앉아!”
그때, 더는 참지 못할 정도로 구토가 올라오자 나는 황급히 일어서며 오른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직 일어서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앉습니다.”
강기오 중사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어색함을 무마하려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옛말에도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게 오히려 역효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웃어?”
나는 급히 표정을 굳혔지만, 강기오 중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더욱 강하게 압박했다.
“제군은 지금 교관이 장난하는 것처럼 보입니까? 아니면 교관이 우습게 보입니까?”
“그게 아니라······.”
나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변명을 늘어놓으려 했다.
그런데 너무 긴장한 탓인지, 구역질이 다시 목젖을 강타하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 순간, 내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자, 강기오 중사는 황급히 다가와 나를 붙잡으려 했다.
나는 강기오 중사를 밀어내기 위해 앞으로 팔을 뻗었지만, 그는 이미 내 어깨를 단단하게 붙잡은 뒤였다.
“무슨 일입니까. 힘들면 힘들다고 말합니다.”
“죄송한데, 화장실 좀··· 우읍!”
젠장, 늦었다.
“우읍! 우우읍! 우웨엑!”
나는 강기오 중사와 마주 선 상태에서 배 속에 있던 모든 것을 입으로 뿜어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안주는 안 먹고 술만 퍼 마신 터라 건더기는 하나도 없이 액체만 솟구쳤다는 것이지만······.
전혀 위로가 될 수 없는 게, 사람의 얼굴에 토사물을 뿜었다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순식간에 시큼한 향이 퍼져 나가고, 그 여파로 여기저기서 헛구역질을 해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강기오 중사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나를 지탱해 주며 여전히 굳건히 서 있었다.
하지만 싸늘한 눈초리는 더욱 칼처럼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는 눈이 마주친 나를 보더니 오른쪽 입꼬리만 당겨 올리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훈련병, 다 끝났습니까?”
“···예, 예!”
“훈련병, 이름이 뭡니까?”
“최대길인데요.”
“요? 군대에서는 ‘다’나 ‘까’로 대답합니다.”
“아, 최대길입니다.”
“최대길 훈련병, 본 교관의 별명이 뭔지 압니까?”
“글쎄요······.”
내가 무심결에 또 요를 써서 답하자, 강기오 중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곧장 내 눈을 마주 보며 싸늘한 미소를 드러냈다.
“본 교관의 별명은 독사입니다.”
그 말처럼 나를 바라보는 강기오 중사의 눈이 맹독을 품은 독사처럼 번들거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 망했다. 내 군 생활······.’
입대 당일 새벽.
친구들과 밤새도록 마신 술기운이 아직 남은 탓인지 머리가 띵했다.
양정숙 대위에게 건네받은 300만 원.
덕분에 나는 친구들과 일주일 내내 원 없이 술을 퍼마실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새 입대 날이 밝아오고 말았다.
화장실에서 간단하게 샤워를 마친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틀 전, 이발소에서 머리를 짧게 잘랐다.
평생 한 번도 이렇게 까까머리가 되어본 적이 없던 터라 어색하기만 했다.
손끝에 전해지는 까슬까슬한 느낌조차 꿈을 꾸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참을 어색하게 거울을 바라보던 나는 옷을 대충 주워 입고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친구 놈들을 내버려 둔 채 역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이지만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그중에는 간혹 짧은 머리의 또래 남자들이 보였다.
서로 말은 걸지 않아도 눈이 마주치면 왠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들 역시 나와 다르지 않은지, 내 쪽을 힐끔힐끔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훈련소행 자기부상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왔다.
듣기엔 서울에서 부산까지 두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는데, 직접 타는 건 처음이었다.
기차에 올라타 자리를 찾은 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나 곧 코끝을 찌르는 술 냄새에 이마를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많이 마셨나?”
혼자 중얼거린 나는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 나서 연락처를 뒤져 전화번호 하나를 찾아냈다.
하지만 쉽사리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 애꿎은 머리만 만지작거렸다.
기차가 출발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마지못해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응, 아들.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무슨 일이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힘이 없어 보였다.
“엄마, 나 할 말 있어.”
[뭔데? 너 혹시 사고 쳤니?]
“아니야, 그런 거.”
엉뚱한 질문에 먹먹하던 감정이 맥없이 풀린 탓에 괜히 심술이 나서 언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곧장 밀려드는 죄스러움에 괜히 중얼거리듯 그리운 두 글자를 내뱉었다.
“엄마······.”
[뭔데? 빨리 말해. 엄마 출근해야 되는데, 불안하게 하지 말고.]
“엄마··· 나 군대 갔다 올게.”
[뭐라고? 아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군대? 언제 가는데?]
나의 갑작스런 통보에 엄마의 말이 빨라졌다.
적잖이 당황했다는 게 수화기 너머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괜히 가슴이 찡했다.
나는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으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오늘.”
[오늘? 아니, 무슨 군대를 그렇게 급하게 가? 기다려 봐. 엄마가 오늘 가게 문을 닫더라도······.]
급하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니야. 그냥 나 혼자 갔다 올게. 이미 기차 탔어. 엄마··· 사랑해.”
[아들······.]
“걱정하지 마. 잘 다녀올게.”
나는 더 말을 하다간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런 후,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작별 인사를 전했다.
“야, 나 간다.”
[뭐? 너 언제 나갔냐? 아이고, 머리야. 아니, 우릴 깨우지도 않고 혼자 쌩하고 가면 어떻게 해? 지금 어디냐? 같이 가줄게.]
“됐어. 잠이나 계속 처 자.”
[인마,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봐야지. 섭섭하게 이럴 거야?]
나는 친구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코를 골아대던 놈이 잘도 일어나겠다. 됐고, 나중에 휴가 나오면 보자. 벌써 기차 탔어.”
[야! 너······.]
“시끄럽고, 끊는다.”
엄마에겐 일부러 입대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괜히 엄마가 따라오면 헤어질 때,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마지막 환송을 부탁했지만, 녀석들은 몸도 못 가눌 정도로 뻗어버렸기에 그냥 혼자 가기로 마음을 바꿨다.
잠깐 멍하니 창밖을 바라본 것 같은데, 오늘따라 시간이 빨리 흐르기라도 하는지 기차는 순식간에 논산역에 도착했다.
‘입대 시간이 언제까지였지?’
나는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입영통지서가 담긴 봉투를 꺼냈다.
그때,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렸는데, 입영통지서 말고도 다른 종이 하나가 봉투 밖으로 삐져나왔다.
이게 뭔가 싶은 나는 종이를 꺼내 확인했다.
그곳엔 내가 지원한 특수부대에 대한 소개 사항이 작은 글자로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 귀하의 대헌터 테러 특수작전부대 지원을 환영합니다.
안내문에는 CHT 부대의 활동 내용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지만, 크게 흥미를 끄는 부분은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줄에 적혀 있는 내용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만약 정당한 사유 없이 입대를 거부할 시, 경우에 따라 지급받은 계약금의 열 배를 배상해야 합니다.
그 순간, 술이 확 깨고 말았다.
‘잠깐, 이게 뭐라고 적혀 있는 거야? 내가 지원한 부대가 CHT라고? 지원을 취소하려면 계약금의 열 배를 뱉어내라고?’
이미 일주일 동안 술값으로 다 날리고, 수중에 남은 돈이라곤 차비밖에 없었다.
서류를 자세히 훑어보지도 않고 여자에 홀려 사인한 결과가 이것이었다.
“허······.”
갑자기 밀어닥친 허탈감에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그때, 한 가족이 내 옆을 지나치며 수군거렸다.
“아이고, 저 사람 봐. 혼자 군대 가려니까 심란한 모양이네. 불쌍하기도 해라.”
“에잉, 남자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 이런 일로 울긴 왜 울어?”
“당신은 공익이라 모르는 거 아니에요?”
“어허, 이 사람이··· 사람들이 듣겠소.”
난 애써 눈물을 훔친 후에 내 옆을 스쳐 지나간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아들인 듯 보이는 남자가 머쓱하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그런 모습이 더욱 처량하게 느껴진 것인지,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한 번씩 날 쳐다보고 지나갔다.
‘일단 배상할 돈이 없으니, 입대는 해야지.’
괜스레 눈물이 또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고 훈련소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훈련소에 가까워질수록 도로 양쪽에 줄지어 늘어선 차들을 볼 수 있었다.
주차장으로 보이는 넓은 공간에는 관광버스도 여러 대가 주차돼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나는 삼삼오오 모여 훈련소 입구를 통과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들었다.
대부분 부모님이나 친구들과 함께 온 듯한데, 아주 간혹 가다 여자 친구와 꽁냥꽁냥하는 기만자 놈들도 보였다.
그런 모습에 왠지 마음 한구석이 더욱 허전해졌다.
나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입소식이 예정된 연병장으로 이동했다.
연병장 바깥쪽의 계단처럼 만들어진 공간에서는 몇몇 병사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서서 입소 예정자들과 그들을 배웅하러 온 사람들을 안내했다.
이미 자리를 잡은 사람들을 피해 난 멀찌감치 구석 자리로 가서 앉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스탠드를 채웠고, 그들이 싸 온 피자나 치킨 냄새가 솔솔 풍겼다.
꼬르륵.
‘그러고 보니 밥을 안 먹었네. 배고프다.’
그때,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우와, 연예인이다!”
고개를 들어 다른 이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눈을 돌리자, 저 멀리서 엄청난 인파에 파묻힌 남자 하나가 연병장 쪽으로 걸어왔다.
얼굴 뒤로 후광이 번쩍이는 기분이 느껴질 정도로 남자의 외모는 눈부셨다.
‘저 사람은······.’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지만, 언뜻 드라마에서 몇 번 본 기억이 있는 얼굴이었다.
“횩사마!”
“지횩 씨!”
남자를 포위한 아주머니들 입에서 갖가지 호칭들이 흘러나왔다.
개중에는 일본인도 있는 모양이었다.
훈련소 주차장에 관광버스들이 서 있더라니, 저 배우가 입대한다는 소식에 일본에서 여기까지 수백 명이 단체로 배웅하러 나온 듯싶었다.
정말 대단한 팬심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연병장 계단 앞까지 몰려온 아줌마들을 향해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일본어로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러자 아줌마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계단 아래로 내려갔지만, 더 이상 양보는 없다는 듯 그 앞에 진을 치듯 섰다.
아마 아줌마들이 계단을 차지하면 입소자들이 자리할 공간이 없어지기에 매니저가 통제한 것으로 보였다.
잠시 후, 남자 연예인은 아줌마들에게 뭐라고 인사를 하더니, 계단 위로 터벅터벅 올라와 주변을 살피고는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 모습에 나는 괜히 긴장이 됐다.
‘설마 나한테 오는 건 아니지?’
그런데 내 예상을 비웃듯 그는 떡하니 내 옆에 앉았다.
가까이서 본 남자의 얼굴은 어디 한 군데 흠잡을 곳이 없을 정도로 잘생겼다.
절로 뿜어져 나오는 후광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눈이 마주친 나는 어색함을 씻어보려 슬쩍 미소 지었다.
그러자 남자 배우도 나를 보며 덩달아 웃음을 띠었다.
같은 남자임에도 영혼이 빨려 들어갈 것처럼 치명적인 모습.
‘핫!’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이쪽을 바라보던 아줌마들이 크게 술렁거리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날 부러워하는 듯한 눈빛에 저 사람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휴우, 무슨 군대 가는 날까지 따라오고 난리야. 그런데··· 혼자 왔어요?”
남자는 귀찮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내 친근한 말투로 말을 걸어왔다.
“예? 아, 네.”
남자는 내 입에서 풍기는 술 냄새를 맡았는지 잠시 미간을 좁혔다가, 곧 피식 웃으며 굳은 표정을 풀었다.
“밤새도록 술이라도 마셨나 보네요. 아~ 부럽다. 딱 보니까 대학생 같은데··· 스무 살?”
“네. 스무 살이요.”
“크, 좋을 때네. 혹시 나 누군지 알아요?”
“그게··· 연예인이신 건 알겠는데, 제가 원래 TV 볼 시간이 없어서······.”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이자, 남자는 의외라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뭐, 관심이 없으면 그럴 수도 있지. 그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하죠. 배우 차지혁입니다. 나이는 서른이고.”
차지혁.
그제야 나는 그가 누군지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어릴 때, 그가 출연한 드라마와 영화를 간신히 떠올린 것이다.
그런데 그는 몇 년 전에 찍은 영화로 한국과 일본에서 대박을 터트리고, 최근에는 일본에서만 활동한다고 들었다.
듣기로는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만 해도 몇 편이나 되는 대 배우였다.
그런 사람이랑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게 될 줄이야.
“안녕하세요, 최대길입니다. 대학생이고요.”
“대길? 오오, 이런 우연도 있네요.”
“네? 왜 그러세요?”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원래 내 본명이 대길이거든. 그게 마음에 안 들어서 지혁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긴 했지만. 이런 게 인연이라는 건가? 반가워, 동생.”
차지혁은 어느새 내게 말을 놓고 있었다.
어차피 나이도 열 살이나 차이가 나니까, 별로 신경 쓰이진 않았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분위기를 맞춰주었다.
“저도 반갑습니다, 대길이 형님.”
“하하하, 대길이한테 대길이라고 불리니까 기분이 좀 이상하네. 그래도 앞으로는 지혁이라고 불러줘. 말했다시피, 대길이란 이름은 좀 별로거든.”
차지혁이 환하게 웃음을 터트리자, 계단 앞에 진을 친 아줌마 부대가 술렁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어가 쉬지 않고 들려왔다.
“형님, 저분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응. 네가 부럽다고 하네.”
“제가요? 이해가 안 되네요. 이제 잠시 후면 군인 신세가 되어버리는데······.”
“뭐? 하하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그냥 나 때문이라고 생각해. 내가 너랑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까 그런 거야. 이거,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다.”
“미안할 게 뭐 있나요. 또 볼일도 없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그나저나 이제 곧 시작할 모양이네.”
차지혁은 생각하는 것조차 싫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비어 있던 연병장에 어느새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낡은 스피커를 통해 방송이 울려 퍼졌다.
[곧 입소식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입소자 여러분께서는 연병장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방송이 반복해서 되풀이되자, 계단에 앉은 이들이 술렁였다.
누군가의 아들, 친구, 애인을 떠나보내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껴안거나 가져온 음식을 입에 넣어줬다.
그리고 주변의 시선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대범하게 작별의 키스를 나누는 연인들도 있었다.
나는 함께 온 사람이 없기에 망설임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벌써 가게? 너무 일찍 나가면 사람들의 시선이 쏠릴 거야.”
“음, 그럼 조금 더 있다 갈까요?”
나는 슬그머니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렇게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입소 장병들이 좀체 움직이질 않자 장내 방송의 내용이 바뀌었다.
[이제 입소식을 진행해야 할 시간입니다. 귀빈 여러분은 입영 장병들이 연병장으로 나올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십시오.]
그제야 입소자들이 하나둘 연병장으로 나가 줄을 섰다.
그걸 지켜보던 차지혁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우리도 이제 가자.”
“네, 형님.”
자리에서 일어선 차지혁은 아줌마 부대를 향해 환한 미소를 뿌리며 손을 흔들었다.
“너도 한 번 해봐.”
“네? 제가요?”
“응. 잘하면 오늘 기사 1면에 나랑 같이 얼굴이 실릴지도 모르잖아.”
나는 얼떨결에 그를 따라 쭈뼛거리며 손을 흔들었는데, 차지혁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끝을 쯧쯧, 찼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좀 웃어봐. 동생은 웃는 얼굴이 예뻐서 보기 좋을 것 같으니까.”
“아하하, 빈말이라도 감사합니다.”
일제히 울음을 터뜨리는 일본 아줌마들을 뒤로한 채 나는 차지혁과 함께 연병장을 향해 걸었다.
우리 두 사람이 통제에 따라 줄을 서자, 흐느낌은 아예 통곡이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입소식 예행연습은 흔들림 없이 시작됐다.
미리 예정됐다는 듯 내 왼쪽에 서 있던 차지혁이 앞으로 나갔다.
입소자 대표는 대게 지원자를 받는다고 들었는데, 장정들 사이를 돌아다니던 간부가 차지혁을 콕 집어 지명한 걸 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차지혁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살짝 얼굴을 찌푸렸지만, 이내 표정을 관리했다.
다시 혼자 남겨진 나는 몇 번의 예행연습을 건성건성 넘겼다.
그러고 나서 시작된 정식 입소식은 내 예상과 달리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그럼 지금부터 입소 신고가 있겠습니다. 입소자 대표, 앞으로.]
차지혁은 처음 끌려갈 때는 은근 불만을 표했지만, 몇 번 연습하다 보니 나름 재미가 붙었는지 호명되자마자 잽싸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충성!”
“충성.”
과연 천만 배우랄까.
그는 실수 없이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신고를 마쳤다.
그 후로 무난하게 입소식이 끝나자 선두에 선 인솔자가 외쳤다.
“앞으로 갓!”
구령에 맞춰 수백 명의 입소자가 움직였다.
“왼발, 왼발.”
인솔자가 계속해서 외쳐 대지만, 입소자들의 걸음은 제각각이었다.
양 떼마냥 우르르 몰려가는 꼴에 군기는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드디어 입소자들이 움직이자, 계단 쪽에서는 한동안 볼 수 없을 이의 이름을 애타게 불러 댔다.
“정용아!”
“상현아!”
“두석아!”
그러자 입소자들 사이에서도 개중 울음을 터트리는 이들이 나왔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주목을 끄는 것은 차지혁을 부르는 소리였다.
“횩사마!”
“지횩 씨!”
수백 명이 외치는 소리에 다른 이들의 외침은 순식간에 묻히고 말았다.
어느덧 연병장을 벗어나 배웅하던 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쉬운 마음에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군복 차림의 훈련병들이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야 진짜 군 생활이 시작된다는 생각에 나는 두려움 반, 설렘 반인 감정을 느꼈다.
그건 나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대부분의 이들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훈련하러 가나 봐.”
“우리도 곧 저렇게 되겠지.”
약간 어수선한 분위기에 인솔자가 나서서 크게 소리쳤다.
“이동간에 떠들지 않습니다! 발 맞춰 걷습니다!”
모자를 푹 눌러쓴 탓에 표정을 확인할 순 없지만, 인솔자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다만, 당장 일이 터지는 않아 조금 안심하려던 찰나, 나는 우려가 현실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입소식이 치러진 장소보다 다섯 배는 큰 연병장에 들어서는 순간, 한 남자가 높은 단상 위에서 미동도 없이 동상처럼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인솔자의 통제에 따라 우리는 곧 오와 열을 맞춰 시립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단상 위의 남자는 전혀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우리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잔뜩 긴장해 연신 마른침을 삼키는데, 남자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반갑습니다. 본 교관은 앞으로 제군들의 교육 훈련과 훈육을 담당할 강기오 중사입니다.”
강기오 중사의 목소리는 매우 높은 톤에 사람을 찍어 누르는 듯 독특한 느낌을 풍겼다.
얼핏 들으면 여자가 억지로 무게를 잡으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인파 속에서 피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야, 여자야?”
“뼈대를 봐라. 남자잖아.”
“야, 여자도 운동하면 저 정도 떡대는 만들 수 있어.”
주변에서 속삭이듯 대화를 주고받는 소리가 내 귓가를 간질였다.
그때,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강기오 중사가 버럭 호통을 쳤다.
“교관이 말하는데 누가 떠듭니까!”
강기오 중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우리를 노려봤다.
나는 맨 앞 열에 서 있던 터라, 제법 가까이서 그의 얼굴을 살필 수 있었다.
놀랍게도 강기오 중사는 크게 소리치면서도 표정에 변화가 전혀 없었다.
그건 마치 겉만 사람의 형태를 띤 기계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강기오 중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마주치듯 연병장을 둘러보았다.
아주 찰나에 불과하지만, 나 역시 그와 시선을 마주치고 말았다.
그 순간, 주변의 공기가 갑자기 무겁게 내려앉으며 몸을 옥죄는 것처럼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여러분은 이제 민간인이 아닙니다. 교관은 현재 제군들의 정신 상태가 훈련을 받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의 썩어 빠진 정신을 재무장하기 위해 얼차려를 부여하겠습니다. 앉아.”
갑작스런 지시에 수백이 넘는 인원들이 우왕좌왕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인솔 조교들이 빠르게 주위로 퍼지며 제각기 소리쳤다.
“제자리에 앉습니다! 복명복창합니다. 앉아!”
몇몇 눈치 빠른 이들이 자리에 앉자, 나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 쪼그려 앉았다.
“빨리, 빨리 움직입니다!”
수백 명의 인원이 한꺼번에 앉으려 하자 먼지가 풀풀 날리고, 먼저 앉은 사람의 얼굴에 엉덩이를 들이미는 온갖 불상사가 발생했다.
사람들이 앉는 걸 확인하고 나서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자, 강기오 중사가 으르렁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행동이 왜 이렇게 굼뜹니까? 일어서.”
자리에 앉은 이들이 우르르 일어섰다.
여전히 반응속도가 제각각 다르기에 모두 한 번에 일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복명복창합니다. 앉아.”
“앉아.”
“목소리 크게 합니다. 일어서.”
“일어서!”
그 후로도 몇 번이고 앉았다 일어서는 걸 반복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잠잠하던 속이 더부룩해지며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일어서.”
“일어서!”
수십 번을 반복한 탓인지, 수백 명의 입에서 제법 한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강기오 중사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지, 단상에서 내려와 장병들 사이를 걸어 다녔다.
“앉아.”
“앉아!”
그때, 더는 참지 못할 정도로 구토가 올라오자 나는 황급히 일어서며 오른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직 일어서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앉습니다.”
강기오 중사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어색함을 무마하려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옛말에도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게 오히려 역효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웃어?”
나는 급히 표정을 굳혔지만, 강기오 중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더욱 강하게 압박했다.
“제군은 지금 교관이 장난하는 것처럼 보입니까? 아니면 교관이 우습게 보입니까?”
“그게 아니라······.”
나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변명을 늘어놓으려 했다.
그런데 너무 긴장한 탓인지, 구역질이 다시 목젖을 강타하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 순간, 내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자, 강기오 중사는 황급히 다가와 나를 붙잡으려 했다.
나는 강기오 중사를 밀어내기 위해 앞으로 팔을 뻗었지만, 그는 이미 내 어깨를 단단하게 붙잡은 뒤였다.
“무슨 일입니까. 힘들면 힘들다고 말합니다.”
“죄송한데, 화장실 좀··· 우읍!”
젠장, 늦었다.
“우읍! 우우읍! 우웨엑!”
나는 강기오 중사와 마주 선 상태에서 배 속에 있던 모든 것을 입으로 뿜어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안주는 안 먹고 술만 퍼 마신 터라 건더기는 하나도 없이 액체만 솟구쳤다는 것이지만······.
전혀 위로가 될 수 없는 게, 사람의 얼굴에 토사물을 뿜었다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순식간에 시큼한 향이 퍼져 나가고, 그 여파로 여기저기서 헛구역질을 해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강기오 중사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나를 지탱해 주며 여전히 굳건히 서 있었다.
하지만 싸늘한 눈초리는 더욱 칼처럼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는 눈이 마주친 나를 보더니 오른쪽 입꼬리만 당겨 올리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훈련병, 다 끝났습니까?”
“···예, 예!”
“훈련병, 이름이 뭡니까?”
“최대길인데요.”
“요? 군대에서는 ‘다’나 ‘까’로 대답합니다.”
“아, 최대길입니다.”
“최대길 훈련병, 본 교관의 별명이 뭔지 압니까?”
“글쎄요······.”
내가 무심결에 또 요를 써서 답하자, 강기오 중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곧장 내 눈을 마주 보며 싸늘한 미소를 드러냈다.
“본 교관의 별명은 독사입니다.”
그 말처럼 나를 바라보는 강기오 중사의 눈이 맹독을 품은 독사처럼 번들거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 망했다. 내 군 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