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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원소의 능력을 다루어 마른하늘에서 불타는 비를 내리게 하고, 적의 심장에 얼음의 창을 던져 넣는다.

이처럼 사람들은 강력한 육체 능력과 각성한 마력을 사용해 괴물과 싸우는 이들을 가리켜 헌터(Hunter)라고 부른다.

힘의 차이에 따라 등급이 나뉘지만, 헌터라 불린다는 것만으로도 말 그대로 인간을 넘어선 초인과 같은 존재라 볼 수 있었다.

그런 마력과 특수 능력을 다루는 헌터가 범죄자가 되면 작게는 인명 피해를 일으키고, 크게는 상상도 못할 재앙을 터뜨렸다.

특히, 헌터 중에는 자신의 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폭주를 일으키는 이들도 있었다.

이와 같은 에너지 브레이크(Energy Break) 현상은 F급 능력자라 하더라도 짧은 시간 동안 A급에 맞먹는 힘을 발휘하게 만들었다.

F급 능력자의 에너지 브레이크만으로도 소도시 정도는 순식간에 폐허로 만들 수 있으니, 그 위험성은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에너지 브레이크를 일으킨 헌터는 이성을 잃고 날뛰며 자멸하는 경우가 많고, 그 이전에 다른 헌터들에게 제압당해 목숨을 잃는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간혹 에너지 브레이크를 일으키고도 살아남는 경우가 존재했다.

그런 이들은 마성에 물든 채 지하 세계로 숨어들었다.

강력한 힘을 얻게 된 그들은 사회의 규칙을 무시하며 많은 범죄를 일으켰다.

세계 각국의 정부는 이들을 블랙리스트(Blacklist)에 등록해 관리하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을 추종하는 무리가 생겨나며, 세계 곳곳에서 범죄가 들끓고 막심한 피해가 발생했다.

그러다 보니 세계 각국에선 헌터 범죄를 테러라 규정하고 이를 전담하는 특수부대를 창설, 운용하게 됐다.

대한민국 역시 헌터에 의한 테러 범죄를 전담하는 부대가 군 조직 내에 창설됐다.

하지만 자세한 정보는 보안을 이유로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0년이 지난 어느 날, 국영방송에서 방영되는 ‘PD 24시’란 고발 프로그램에서 ‘Counter Hunter Terror Special Operation Forces’, 약칭 CHT라고 불리는 특수부대가 소개됐다.

방송 이후의 파장은 엄청났다.

CHT 입대 지원자들은 약 3개월에 걸친 극한의 훈련을 거친 뒤, 정규 부대원으로 거듭나 3년간 작전을 수행했다.

그들은 가히 극한 직업이라고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극악한 조건 속에서 군 복무를 이어 나갔다.

능력자를 상대하다 보니 작전 중에 부상을 입는 게 비일비재하고, 목숨을 잃는 경우도 허다했다.

CHT 부대가 활동한 이래, 3년의 복무 기간을 모두 채우지 못하고 의병전역하는 인원이 전체 인원의 절반이 넘어간다는 건 결코 무시하고 넘길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CHT 부대의 인사참모 정의철 중령은 정강이에서 퍼져 나가는 엄청난 통증을 참으며 절뚝거리며 분주히 걸었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양 대위!”

“대위 양정숙!”

부르기만 기다렸다는 듯 놀라운 속도로 달려와 차렷 자세로 관등성명을 대는 여자.

정의철 중령의 직속 부관인 양정숙 대위는 잔뜩 일그러진 그의 표정을 보며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만 봐도 무슨 일을 겪은 것인지 대충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령관님께 또 조인트 까이셨구나, 한 소리 들을 수밖에 없겠네.’

양정숙의 예상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어? 지원 서류가 왜 하나도 없어!”

정의철 중령은 길길이 날뛰며 오른손에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양정숙 대위의 면전을 향해 던졌다.

“죄송합니다. 신문에 광고를 내고 입영 대상자들에게 홍보도 했는데, 효과가 전혀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방송의 여파가······.”

“핑계, 핑계, 핑계! 방송이나 볼 정도로 여유로우면 그놈의 핑계만 늘어놓지 말고, 직접 입영 대상자들을 찾아가서 지원 서류를 내밀어야지! 어디서 상관이 말하는데 말대꾸야? 이제 내가 아주 우습지?”

“대위 양정숙, 그렇지 않습니다!”

시퍼렇게 눈을 부라리는 정의철의 모습에 양정숙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눈을 돌렸다.

그러자 정의철 중령이 양정숙 대위에게 다가가 검지로 그녀의 이마를 꾹꾹 찔렀다.

“눈 돌리지 말고, 날 똑바로 쳐다봐.”

“대위 양정숙.”

양정숙은 억지로 정의철과 시선을 마주쳤다.

정의철은 어금니를 악물고 말을 잘근잘근 씹어뱉듯 속삭였다.

“분명히 말하는데, 당장 지원 서류 받아와. 사기를 치든 미인계를 쓰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원 서류 받아오란 말이야! 오늘 내로 지원 서류를 가져오지 못하면 옷 벗을 줄 알아. 알겠어?”



***



내 이름은 최대길. 파릇파릇한 스무 살의 신입생이다.

1학기가 끝난 시점에서 남들은 여행이니 뭐니 들떠 있지만, 나는 나날이 늘어나는 고민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다음 학기 등록금을 마련할 생각에 벌써부터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학자금 대출을 신청하면 당장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졸업 후에 상환하느라 등골이 휜다는 악명이 자자하다 보니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로또에 당첨된다면 또 모를까······.’

남은 길은 학자금 마련을 위해 휴학계를 내고 2년 정도 돈을 버는 것뿐이었다.

고개를 휘휘 저어 헛된 망상을 떨쳐 낸 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신문을 펼쳐 들고 구인 광고를 살폈다.

그때, 다른 일자리에 비해 급여 조건이 두 배 정도 나은 광고가 눈길을 끌었다.



특수부대원을 모집합니다.

자격 요건 : 만 18세에서 35세 사이의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남녀. 신체검사 및 인성 검사 결과,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을 경우 누구나 가능. 헌터 우대

급여 조건 : 생명 수당 포함 월 300만 원 보장

근무 환경 : 전화 문의

국가가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바로 전화 주세요.

지원문의: 010-7788-1004 모병 담당자 대위 양정숙.



‘군인인데 월급을 300만 원이나 준다고?’

깜짝 놀라는 것도 잠시, 얼마 전 술자리에서 잔뜩 취한 선배가 횡설수설하던 말이 떠올랐다.

전역한 지 얼마 안 돼 짧은 머리인 그는 술에 취하기만 하면 자신의 군 생활을 자랑했는데, 자부심이 아주 대단했다.



- 너희들 1004부대라고 들어는 봤냐? 내가 거기 출신이야.’



선배는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걸 매번 강조하며, 돈 벌려고 힘든 군 생활을 감내하려 했으나 막상 경험해 보니 생각보다 쉬웠다는 소감을 밝혔다.

‘3일 말린 멸치처럼 삐쩍 마른 선배도 견뎠으니 나라고 못하진 않을 텐데··· 어차피 군대는 다녀와야 하는 거고, CHT 부대만 아니면 되잖아.’

선배는 항상 술주정의 말미에 CHT에는 절대 지원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왜 그런 말을 꺼냈는지는 곯아떨어진 그의 혼잣말 너머로 사라져서 알 수가 없었다.

군 생활을 하면서 1년에 3,000만 원 이상 벌 수 있다면 일석이조였다.

당장 전화를 걸자, 연결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밝은 목소리의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부대 모병 담당 양정숙 대위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요즘 시대에 전파가 닿지 않는 곳이 있는지, 부대 이름이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저··· 광고 보고 전화를 드렸는데요.”

[네? 아, 혹시 방송을 보셨나요?]

“방송이요? 아니오. 저는 신문을 보고 연락드리는 겁니다. 제가 알바를 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갑작스런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어서 말끝을 흐리고 말았는데, 상대는 오히려 잘됐다는 듯 밝게 말을 이어 나갔다.

[아, 그러시군요. 혹시 헌터 등록자이신가요?]

“일반인입니다.”

[흐음, 그럼 일반 병사로 지원하시는 거군요.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스무 살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입대 지원을 도와드릴까요?]

왠지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서 굉장히 다급한 느낌이 전해졌다.

‘성격이 급한 건가?’

“잠깐만요.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 그걸 먼저 확인하고 싶습니다.”

[지원 서류는··· 네? 아, 무엇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나의 제지에 양정숙 대위의 말투가 한결 조심스러워졌다.

“정말 한 달에 300만 원씩 주는 건가요?”

[물론이에요. 그뿐만 아니라, 계급이 오르면 급여도 인상됩니다.]

“근무 환경은 전화 문의라고 적혀 있는데, 일반 육군이랑 다른 게 있나요?”

[네. 저희는 특수부대라 의무 복무 기간이 3년으로, 일반 사병보다 조금 더 깁니다. 또한 별도의 후반기 교육도 세 달 정도 받아야 합니다.]

“3년이나 군 복무를 해야 한다고요?”

현재 육군의 복무 기간은 2년이었다.

예전엔 복무 기간이 18개월까지 줄어들 거라는 희망적인 소식이 들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몬스터가 튀어나온 이후, 다시 꾸준히 늘어 24개월로 돌아가고 말았다.

[네.]

“그건 어째서인가요?”

[특수부대원으로 활동하려면 일반 사병들이 받는 훈련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후반기 교육을 이수하지 못하면 정규 부대원으로 편입되지 못하고 육군으로 배치될 겁니다.]

“아니, 그게 무슨······.”

[그렇다 하더라도 훈련 기간 동안엔 300만 원씩 지급될 겁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전화를 막 끊으려는데, 여자가 급히 만류하며 크게 소리쳤다.

[잠깐만요!]

“네?”

[아직 설명을 못 드린 부분이 있는데, 후반기 훈련을 무사히 수료하고 자대에 편입되면 장려금으로 2,000만 원을 즉시 지급해 드려요. 복무 기간이 조금 길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저희 부대에 정규 대원으로 편입되면 병장 기준으로 월 기본 급여만 380만 원 선이고요, 작전에 투입되면 생명··· 아무튼, 작전 수당 같은 것들이 추가로 지급되기에 엄청난 목돈을 마련하실 수 있어요.]

“하지만······.”

[당장 훈련소를 마치고 받는 장려금에 3년간 무사히 복무하면 1억 5,000만 원, 여기에 각종 수당을 더하면 못해도 2억이고, 최대 3억까지도 벌 수 있어요. 솔직히 스무 살에 이 정도 금액은 대한민국 어디를 가도 못 벌죠. 전역하고 나도 고작 스물네 살인데, 누가 그 나이에 3억이나 모을 수 있을까요? 보통은 불가능하죠. 안 그런가요?]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설명을 끝마친 여자는 잠시 숨을 골랐다.

중간에 뭔가 이상한 단어를 들었는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왜냐하면 후반기 훈련을 마치면 2,000만 원을 받는다는 것과 스물네 살에 3억을 모을 수 있다는 것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기 때문이다.

“그럼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정규 대원이 되면 작전에 투입된다 하셨는데, 수당까지 나오는 거면 위험한 일 아닌가요?”

[호호호, 그건 기밀이라 자세한 설명을 해드릴 순 없어요. 하지만 요즘 세상에 안전한 일자리가 얼마나 있을까요? 게다가 다들 한 번씩 거쳐 가는 군 생활인데, 지원자님도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다른 지원자 상담도 있어서 서둘러 결정하시면 좋겠어요.]

군대라는 걸 제외하면 정말 좋은 조건이다.

비록 복무 기간이 3년이나 되지만, 이 정도라면 경쟁률이 엄청난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1년을 더 허비해야 한다는 생각에 결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선배의 충고가 떠올랐다.

“그럼 제가 가는 특수부대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아, 지원자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양정숙 대위는 내 대꾸를 마저 듣지도 않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눴다.

핸드폰 수화기를 막은 모양인지, 웅얼거리는 말소리만 들려왔다.

그러던 중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발언을 불쑥 꺼냈다.

[지원자님, 정원이 다 차는 바람에 모집을 마감해야겠습니다. 그럼 이만······.]

“하겠습니다, 지원!”

[으음, 잠깐만요.]

내 다급한 요청에 양정숙 대위는 곤란하다는 듯한 기색을 내비치며 누군가와 다시 대화를 나눴다.

[다행스럽게도 지원자님까지만 서류를 올리라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감이 얼마 안 남아서 바로 서류 작성하셔야 되는데, 시간 괜찮으신가요?]

“예!”

[그럼 혹시 지금 계시는 곳이 어딘가요? 가장 빠른 곳으로 이관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순순히 대학의 이름과 학과 건물을 알려줬다.

그러자 그녀는 굉장히 반색하며 기쁘다는 듯 말을 꺼냈다.

[다행히 가까운 곳이네요. 제가 지금 바로 서류를 가지고 찾아뵙겠습니다.]

“아, 네.”

내가 대답을 마치자마자 전화는 끊어졌다.

엉겁결에 군대에 지원한 나는 여전히 얼떨떨할 뿐이었다.

‘원래 특수부대 지원은 다 이렇게 하는 건가?’

수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3억을 벌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통화를 마친 뒤, 30분 동안 멍하니 야외 벤치에 앉아 모병관을 기다렸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등록금으로 나갈 돈을 제하고도 수중에 남을 2억을 어떻게 쓸지 상상의 나래를 펼쳤기 때문이다.

“최대길 지원자님?”

“네. 양정숙 대위님인가요?”

누군가가 날 부르는 소리에 망상 속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엔 급하게 달려온 탓에 옷차림이 흐트러진 여성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네. 아까 통화한 모병 담당 양정숙 대위입니다. 바로 지원 서류를 작성하시죠.”

“네.”

양정숙 대위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작은 글씨가 빼곡히 들어찬 서류를 내밀었다.

얼핏 봐도 열 장은 넘어가는데다 글씨가 너무 작아 현기증이 일었다.

“그럼 잠깐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양정숙 대위는 바짝 다가와 앉더니, 보험 판매원 뺨칠 정도의 엄청난 속도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러다 보니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숨을 들이켜며 잠깐 말이 끊기는 것 외에 그녀는 정말 단 한순간도 쉬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서류를 다시 살펴보려 했으나, 그녀는 내가 작성해야 할 부분을 짚으며 동그라미 표시를 했다.

“일단 인적 사항을 적어주시고, 여기는 설명을 들었다는 체크를 해주시면 됩니다. 그 아래로는 전부 이해했다는 쪽으로 체크하면 빠르게 작성을 마칠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여기에 이름 적고 사인해 주세요.”

“잠깐 자세히 좀 읽어봐도 될까요?”

나는 이대로 이해도 못한 채 서류를 작성하고 싶지는 않기에 처음부터 꼼꼼히 읽어보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양정숙 대위가 갑자기 더욱 몸을 밀착시켜 왔다.

자연스레 그녀의 가슴이 내 오른팔을 강하게 압박했다.

언뜻 보기엔 그리 크지 않아 보이는데, 옷깃의 단추가 당장에라도 터져 나갈 듯했다.

게다가 위쪽에 풀어진 단추 사이로 속옷이 보였다.

나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서류에 고개를 처박았다.

양정숙 대위는 전혀 모른다는 듯 질문을 던져 왔다.

“어디가 궁금하신가요?”

“예? 아니, 조금 떨어지시는 게······.”

나는 서류를 읽어보려 안간힘을 썼지만, 옆에 바짝 붙은 그녀 때문에 글씨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필요한 부분을 짚어주시면 제가 빠르게 설명할게요. 앞서 전화로도 말씀드렸지만, 시간이 조금 촉박해요.”

나는 죄책감과 욕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헤맸다.

그러다 혹시 학교 내에 안 좋은 소문이라도 날까 싶어 서둘러 서류를 넘겨 댔다.

당연하게도 어떤 내용들이 쓰여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마지막 장까지 넘기고 나자, 양정숙 대위가 싱긋 웃으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더 궁금한 건 없으세요?”

“아, 네.”

“그럼 바로 서류를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나는 그녀의 안내에 따라 공란을 채워 나갔다.

그러다가 쉬이 넘길 수 없는 항목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신체 포기 및 사망 동의서?”

나는 당장 서류 작성을 멈추고 양정숙 대위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 별일 아니라는 듯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바라봤다.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셔도 돼요. 그냥 군법 때문에 동의를 받아야 할 뿐이에요.”

“아··· 예.”

양정숙 대위의 태연한 표정에 내가 너무 과한 반응을 보인 건 아닌지 민망할 정도였다.

나는 동의 체크를 한 뒤, 마지막 장의 사인까지 신속하게 마쳤다.

그러자 서류를 챙겨 봉투에 넣은 양정숙 대위는 빵빵한 흰색 봉투를 내게 건넸다.

“이건 뭔가요?”

“많지는 않습니다만, 지원 서류를 작성한 분들께 드리는 장려금입니다. 그냥 편하게 사용하시면 됩니다. 곧 입영통지서가 발송될 테니, 그전에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입소하는 길에 차비로 사용하시면 됩니다.”

‘우와, 특수부대는 이런 계약금도 주는 건가? 선배는 한 번도 그런 얘기는 안 했는데.’

봉투를 살짝 열어보니, 그 속에는 노란빛의 빳빳한 지폐가 두둑히 들어 있었다.

“헉!”

“왜 그러세요? 금액이 너무 적어서 실망하신 건가요?”

“그럴 리가요. 얼핏 봐도 100만 원은 넘어 보이는데요?”

양정숙 대위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네. 300만 원입니다.”

“네?”

나는 깜짝 놀라 돈 봉투를 무릎 위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양정숙 대위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입대하고 나면 사회에서 해보지 못한 일에 미련이 많이 남을 거예요. 그러니 여한이 없도록 시간을 보내라는 의미입니다. 그럼 저는 서류를 접수해야 돼서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군 생활 잘하시길 바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