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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제12장 사르후 결전(3)



상간애로 군사를 물린 누르하치에게 급보가 전해졌다.

“주유검이 군세를 이끌고 혼하(渾河)에 진을 쳤습니다.”

“먼저 움직였다라. 명백한 도발이군!”

전령의 말에 도르곤이 답했다.

팔기군을 상대로 전면전을 걸고 있었다. 그 오만함에 도르곤은 치가 떨렸다. 사르후와 계범에서 적들이 승전을 거뒀다 해도, 그건 고작해야 작은 승리에 지나지 않았다.

적들은 승리에 취해 근거 없는 오만을 부리고 있었다. 도르곤은 후금의 장수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결전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분명 놈들도 자신들에게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움직였을 리가 없습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홍타이지의 말에 누르하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부자의 대화에 장수들은 물론, 홍타이지를 제외한 다른 자식들까지도 말하는 바를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팔기군은 최강이다.

근자에 몇 차례 쓴맛을 보기는 했어도 그전까지는 싸움에서 진 적이 없으며, 명나라를 상대로 백전불패의 업적을 남기지 않았던가. 사르후에 진을 친 명나라군을 상대하는 건 어렵지만, 놈들이 직접 거점을 버리고 평야로 나왔다면 물러설 이유가 없었다.

“아군이 전투를 서두르는 것처럼, 저들 역시 서두르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놈들이 왜 서두른단 말인가?”

코가친의 말에 누르하치가 물었다.

시간은 놈들의 편이다. 군량이 현저히 부족한 자신들과는 달리, 지금도 명군은 요동벌판을 가로지르는 보급로를 통해 군량을 공급받고 있었다. 진을 치고 방어로만 일관하면 아군이 말라죽는 것을 볼 수 있을 터. 그런데도 주유검은 군사를 움직였다.

“저들에게 필요한 것은 승전보와 성과입니다. 황제의 명령을 받은 군대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병력만 잃고 주둔한 채로 군량만 까먹고 있다면, 명나라 조정이 뭐라 생각하겠습니까? 게다가 지금 황제는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명나라 조정이 썩었다는 건 천하가 다 아는 일이지.”

“두송과 이여백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황제가 정벌군을 크게 압박할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주유검이 장기전으로 몰고 가는 게 불가능하다는 말이로군.”

장기전으로 몰고 간다면 명나라는 확고하게 승기를 점할 수 있다.

명나라의 봉쇄령으로 여진은 무역길이 모두 막혀 식량을 확보하지 못했다. 더욱이 만주에서 대대적으로 벌인 농토개간에도 실패했기에, 당장 먹을 식량조차 마련하기가 어려웠다.

“놈들이 결전을 택한 게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게로군.”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에 응해줘야지. 절대로 이 전쟁은 장기전으로 진행돼서는 안 된다.”

누르하치는 결전을 받아들였다.

주유검이 직접 군사를 몰고 혼하로 내려왔으니, 응당 강을 건너 놈들과 결전을 치러야 마땅했다.

만주인은 걸어온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오만 섞인 도발을 받아들여 결전을 치를 것이다.

“놈들은 아군만 보면 도망치기 바쁜 겁쟁이에 불과합니다!”

“소장들이 나아가 놈들을 쓸어버리겠습니다.”

장수들은 한목소리로 결전을 주장했다.

그들은 강한 확신에 차있었다. 명나라 놈들이 스스로 산을 내려왔다는 것은 곧 사지로 걸어 들어왔다는 뜻이었다.

놈들을 도륙 내어 혼하를 피로 물들이겠다.

오만한 한족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르도록 해줄 것이다.



홍타이지가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혼하로 향했다.

이미 혼하는 명나라 대군이 진을 친 상태였다. 명나라 진영을 크게 우회하면서 동태를 살피기 시작한 홍타이지는 명나라가 결전을 각오하였음을 눈치 챘다.

“적어도 6만은 넘어 보이는구나.”

“과연 대단한 군세입니다. 다 무너진 명나라에 저런 정예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홍타이지의 말에 용골대가 답했다.

그곳에는 6만의 군세가 진영을 이루고 있었다.

크게 살수(殺手)와 포수(砲手), 사수(射手)로 나뉜 부대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한편, 좌군과 우군에는 요동마병이 대기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혼하가 내려다보이는 고지들마다에는 놈들이 자랑하는 화포들까지 배치된 상태였다.

“총을 든 포수들이 너무 많다.”

홍타이지가 놀라워한 것은 화승총병들의 존재였다.

물론 화승총은 많은 제약과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병기였다. 전투가 피아를 분간하기 어려운 난전으로 전환되는 순간, 함부로 사격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주유검도 익히 알고 있겠지.’

적진을 바라보며 난색을 표하던 홍타이지에게 찢어질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탄이 날아옵니다!”



꽈아아앙!!



말들이 일제히 앞발을 들며 비명을 토해냈다.

경고사격이었는지 포탄이 떨어진 곳은 홍타이지 부대와 떨어진 장소였다. 하지만 돌발적인 굉음에 군마들이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쿨럭쿨럭! 괘,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다.”

“저, 저런 무식한 놈들이!”

용골대는 얼굴을 붉히며 적진을 노려보았다.

매캐한 화약 냄새가 바람을 타고 날아들었다.

안전거리에서 대치하고 있던 홍타이지의 군사들은 난데없는 봉변을 당하고 말았다. 충분히 거리를 벌렸음에도 불구하고, 바람이 크게 불어온 탓에 포탄이 예상보다 멀리 날아든 것이었다.

“조금만 더 바람이 세게 불었다면 자칫 삼도천을 건널 뻔했구나.”

“위험합니다. 우선 피하시지요.”

“그래. 그래야겠다.”

포격의 정밀도가 상당했다.

이번 포격으로 홍타이지는 주유검 휘하의 명나라 포병들이 몹시도 매서운 실력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바람의 방향과 세기까지 계산했다. 무턱대고 쏘기에만 바빴던 다른 적의 군세와는 차이점이 보였다.

‘총포술에 능한 부대가 분명하다. 남만인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사교(邪敎)까지 받아들였다고 하더니, 과연 예상하기 어려운 자로군.’

홍타이지는 웃음을 터트리며 고삐를 당겼다.

더 이상 얻을 것이 없어 보였기에 말머리를 돌려 본군에 합세하기로 한 것이었다.



* * *



홍타이지가 물러나기 무섭게 팔기군의 본대가 혼하에 도착했다.

명나라의 6만 군세와 후금의 8만 병력이 혼하에서 충돌했다. 양 군세는 강을 사이에 둔 채로 대치에 들어갔다.

“저들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먼저 공격을 감행하겠습니까?”

“공격할 수밖에 없을 것이오. 전투를 서두르는 건 저쪽도 마찬가지일 터이니.”

부원수 김경서의 물음에 도원수 강홍립이 답했다.

그 역시 긴장되는 눈치였는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싸움을 통해서 천하의 주인이 누구인지 판가름이 날 것이다. 강홍립은 자신이 천하의 주인을 정하는 중요한 결전에 참전하고 있음을 무겁게 받아들였다. 이 결전을 통해 고국인 조선의 운명 역시도 결정될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총대장이 안 보입니다. 출격했을 때부터 코빼기도 안 보이지 않습니까.”

“군사만 보내고 총대장은 여전히 무순관에 있을 것이오.”

“예? 이 중차대한 결전에 총대장이 꽁무니를 뺐단 말입니까?”

“왜란에서도 그러지 않았소. 위험한 전투는 모두 충무공에게 넘기고, 자신은 모든 공을 독식하는 데만 바빴지. 그런 위인이오. 기대하지 않는 게 이로울 거요.”

표면적인 총대장은 양호이나, 실질적으로 군사를 지휘하는 인물은 주유검이다.

고작해야 열여덟에 불과한 젊은 청년에게 운명이 걸려있음에 김경서는 혀를 내둘렀다. 물론 무능력한 양호보다야 낫겠지만, 경험이 적다는 점이 불안감을 일으켰다.

“겨우 열여덟의 황손이 결전을 지휘하다니… 이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조용히 하시오. 병사들이 자칫 동요할 수 있소.”

김경서의 말에 강홍립은 강하게 주의를 주었다.

지금에 와서 안달복달한다고 한들, 달라질 건 없었다. 이 결전의 목표는 단 하나, 적들을 이기는 것뿐이었다.

“경계를 철저히 하라! 이제 곧 적들과 교전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강홍립의 선언에 조선의 장수들은 두 눈을 부릅떴다.

이제 곧 전쟁이다. 이 결전을 위해 조선을 떠나 명나라에서 요동까지 왔다. 선조들의 땅이었던 요동에서 결전이 벌어지게 되었음이 그들에게는 마치 운명처럼 느껴졌다.

“장창부대, 낭선부대! 절대로 물러서지 마라!”

“결코 적들을 본진에 들여서는 안 된다!”

무관들이 진형을 가로지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가운데, 드디어 결전이 임박했다는 긴장감이 사뭇 감돌았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기다리고 기다리던 결전의 시간이다.

“전하, 누르하치로 보이는 인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전장을 가로지르는 혼하를 향해 10여 명의 적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흰여우로 만든 목도리를 두른 인물이 바로 누르하치였다. 주유검은 드디어 후금의 우두머리와 마주하게 되었음에 마른침을 삼켰다.

“뭐라 소리를 지르고 있는뎁쇼?”

“짐승 놈이 뭐라고 지껄이는 건지.”

가까이 다가온 누르하치는 목에 핏대가 돋을 정도로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주유검의 본진에까지는 닿지 않았다. 이에 주유검은 말에 박차를 가하며 장군들과 함께 혼하로 접근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대들이 날 지켜주면 되지 않겠는가. 등 뒤에 대명의 군세가 있는데 뭐가 겁나겠는가?”

“목숨을 다해 전하를 지키겠습니다!”

홍승주의 우려에 주유검이 장난스레 답했다.

본격적으로 결전이 시작되기 전, 양군의 우두머리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주유검이 다가오고 있음을 목격한 누르하치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황명을 받들어 너희 오랑캐를 토벌하기 위해 온 신왕 주유검이다.”

“설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총대장이랍시고 나올 줄은 몰랐구나. 참으로 그 기개가 대단하다.”

누르하치는 주유검에게 찬사의 말을 했다.

비록 적장이나 훌륭한 기개가 아니던가. 지금까지 요동을 휩쓸고 다닌 팔기군 앞에서는 다 큰 장정도 도망치기 바빴거늘.

“신왕이여, 내 손을 잡는다면 우리 금나라의 최고공신으로 삼는 것은 물론, 내 손녀딸을 내어주도록 하겠다. 이미 멸망의 길에 접어든 명나라를 버리고 우리 금으로 오는 것이 어떻겠느냐? 맹세컨대 너를 무겁게 대우해주도록 하겠다.”

이에 주유검이 조소를 지으며 답했다.

“어찌 사람이 미개한 산짐승 따위와 어울릴 수 있단 말인가. 너희들은 결국 우리 안에서 키워지는 가축에 지나지 않는다.”

여진은 오랑캐 중에서도 가장 미개한 족속이다.

그동안 키워왔던 가축이 멋대로 우리 밖을 나가 주변을 헤집고 다니니 이를 근심할 뿐이다.

주유검의 독설에 후금의 장수들은 크게 발끈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장이라도 강을 건너가 요사스런 혓바닥을 나불거리는 어린놈을 죽이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하하하하!! 승자가 패자를 종놈으로 삼는 건 당연한 이치지. 우리 만주인들이 장성을 넘어 중원을 정복하고 너희 한족들을 모조리 노예로 삼아주겠다.”

“지금까지는 용케도 요동을 헤집고 다닌 모양이다만, 네놈들의 그 혈기가 만용이었다는 것을 이번 싸움에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래, 기대하고 있으마. 이번 싸움에서 널 사로잡아 병사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사지를 찢어버리겠다.”

기싸움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서로를 압박하기 위한 시간은 이걸로도 충분했다. 이제부터는 혓바닥이 아닌 창검으로 승부를 보게 될 터, 이를 위한 준비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말머리를 돌려 본진으로 돌아가던 주유검이 홍승주를 불렀다.

“이제 곧 여진 놈들이 쳐들어올 것이다. 저들의 기병군단은 강하다. 지금껏 싸웠던 적들과는 격이 다를 것이다.”

강을 사이에 둔 회전(會戰).

과연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나을지는 지금의 주유검으로서도 감히 장담할 수는 없었다.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전술도, 전략도 일체 없는 힘과 힘의 진검승부가 될 거라는 점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