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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제12장 사르후 결전(4)



양군의 대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주유검이 예상했듯, 전장의 고요함을 먼저 깬 것은 후금의 선봉군이었다. 선봉군이 움직이면서 드디어 사르후 결전이 본격적으로 막이 올랐음을 알렸다.

“주유검을 쳐라!”

“최대한 신속하게 돌파한다!”

후금의 선봉장은 이희필과 공염수였다.

사르후와 계범에서 당한 치욕을 만회하기 위해서였다. 두 장수들은 족히 1만이 넘는 군세를 이끌고 있었는데, 그들은 일제히 혼하의 얕은 개울을 건넌 후 명나라의 군진을 향해 전진했다.

“전하, 적들이 오고 있습니다.”

“발포 준비.”

홍승주의 말에 주유검이 짧게 답했다.

물보라를 반으로 가르며 전진해오는 팔기군은 과연 대단했다. 단순히 오랑캐의 병력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기병대들은 모두 잘 벼려진 병장기와 두터운 갑옷을 입고 있었다.

군율은 확고했으며, 오와 열을 맞춘 돌격진형으로 공세를 가해왔다. 그들의 위용과 용맹은 하늘을 찔렀고, 화포를 앞에 두고도 물러섬이 없었다.

“발포하라!”

“모조리 다 쓸어버려라!”

화포장들이 소리치며 명령했다.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화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으며 포탄을 쏘아냈다. 높게 솟은 포탄이 개울에 박히면서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고, 그 충격에 후금의 여러 기병들이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크아악!”

“무, 물러서지 마라!”

빗발치는 포탄의 소나기에 후금에서는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공염수를 보좌하던 부장이 죽은 것은 물론, 심지어 포탄에 대장기까지 꺾이고 말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화포의 위력에 병사들은 싸우기도 전부터 어깨를 움츠렸다.

“화살이 옵니다!”

“방패를 들어라! 방패를 들어!”

화포 뒤에 이어진 궁수들의 일제사격.

하늘을 새카맣게 물들일 정도로 무수히 많은 화살비들이 쏟아졌다.

정작 활을 맞게 된 팔기군은 궁수부대의 모습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적의 궁수부대들이 방패 뒤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로인해 방패를 드는 것이 늦었다.

다수의 병사들이 이번에는 활에 맞아 쓰러졌다. 전방에 섰던 기병대들이 고슴도치가 된 것은 물론, 후금에서 무명을 떨치던 용장들까지도 눈 먼 화살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돼, 됐다! 빠져나왔다!”

방패를 높게 든 팔기군 기병이 외쳤다.

그가 들고 있던 방패에는 수십 발의 화살들이 꽂혀 있었다. 그런 방패들로 인해 기병들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고난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개(開)!”

명나라 장수들의 명령에 방패부대들은 일제히 방패를 걷었다.

그 순간, 팔기군은 자신들을 조준하고 있는 화승총병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불씨가 심지에서 타오르는 가운데, 새카만 총신의 화승총들은 발포 명령을 기다렸다.

“오랑캐 놈들을 다 죽여라!”

“미개한 놈들에게 진정한 화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자!”

순간, 커다란 총성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수천 발에 가까운 총탄들이 빗발쳤다. 그것들은 화살비를 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던 팔기군을 노리고 있었다. 이윽고 총탄세례가 강타하면서 그 일대에 죽음을 뿌리고 다녔다.

“커억!”

“으아악!!”

장거리에서 쏜 총탄은 갑옷을 뚫지 못한다.

하지만 근거리에서 가해진 총탄세례는 갑옷을 뚫고 군마의 뇌수에까지 박힌다.

명나라가 자랑하는 화승총병들의 위력. 지금껏 팔기군은 그들을 요행으로 격파해왔지만, 전면전에서는 이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

“제2진 준비!”

총탄을 쏜 병사들이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후열에서 대기하고 있던 또 다른 화승총병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가까이 다가오는 팔기군을 조준하고는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방패를 들어서 막아라!”

“끝까지 버텨라. 놈들에게 지옥을 보여주자!”

이희필과 공염수는 병사들을 강하게 독려했다.

하지만 연이어 가해진 총탄세례 앞에서는 무력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짙은 화약 냄새를 가르며 쏘아지는 총탄의 위력 앞에 다수의 기병대들이 패주했다.

“크악!”

이희필의 바로 앞에 있던 친위기병이 쓰러졌다.

선봉장을 호위하던 병사가 쓰러지면서 그는 적의 공격에 노출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이희필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고삐를 당겼다.

사르후와 계범에서 당한 치욕을 씻겠다.

당시 패전을 겪은 장수들은 겁쟁이처럼 뒤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이 결전에서 죽고자 이미 각오를 다진 뒤였다.

“적의 장창입니다!”

“뛰어넘어라! 무게로 압살시킨다!”

화약연기가 걷히자마자 보인 것은 명나라의 선두를 지키고 있던 방패였다.

방패진형 사이로는 날카로운 장창들이 튀어나와 있었다. 대놓고 돌격하면 처참하게 죽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팔기군은 도리어 온몸을 던져버리는 기행을 벌였다.

무게중심이 방패에 가해졌다.

두 명의 병사들이 방패를 지탱하고 있었지만 병사와 군마의 무게를 버텨낼 수는 없었다. 장창은 두터운 살덩이에 박히면서 위력을 잃었고, 뒤이어 진격해온 기병대에 의해 진형은 무너져 내렸다.

“공격하라!”

“쌍수도 부대, 놈들의 목을 쳐라!”

적들이 방어 진영을 뚫고 난입했다.

하지만 힘겹게 안으로 들어온 팔기군 병사들은 고개를 들기도 전에 목이 날아갔다.

쌍수도를 든 병사들이 전면에 나서며 적과 군마의 머리를 잘랐다. 방어를 돌파하느라 대부분의 체력을 소진한 팔기군에게는 미처 이에 대처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명나라의 6만 군세는 하나의 원앙진(鴛鴦陣)을 이루고 있었다.

기병의 돌격으로 방어 진형이 뚫렸음에도 그들은 주저하는 기색이 없었다. 뒤이어 쌍수도부대들이 물러섬과 동시에 당파부대들이 진격하면서 적병을 사정없이 찔렀다.

“죽어라, 이 오랑캐 놈들아!”

“오랑캐 따위에게 물러서지 마라!”

고지 위에 포진된 화포들도 연이어 불을 뿜었다.

연속해서 포탄들이 떨어졌다. 선봉군의 뒤를 잇던 후속부대들이 연이어 격파 당했고, 심지어 대장기 아래에 있던 대장까지도 포탄에 맞아 쓰러져야 했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포탄과 탄환이 빗발치면서 화약 냄새가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명군과 후금군이 치열하게 격돌하는 광기어린 싸움 속에서, 조선의 장수들은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이게 지옥도지……. 마치 살아있는 지옥을 보는 듯하구나.”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강홍립이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포탄이 떨어지며 후금 병사의 팔다리를 찢어발겼다. 포탄의 충격으로 군마들이 높게 솟구쳤다가 다시 지면으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팔기군은 고함을 토해내면서 병장기를 높이 치켜들고 자신들의 용맹을 뽐냈다.

“놈들은 마치 죽음을 모르는 듯합니다.”

“그동안 명나라를 도탄에 빠트린 용병들답군.”

하지만 이 결전에서 물러날 수 없는 것은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격변하는 정세 속에서 살아남고자 한다면 이 결전에서 승리할 수밖에 없었다. 강홍립이 명령을 내리자 공격을 알리는 깃발들이 일제히 올랐다.

“조선의 용맹한 병사들이여, 공격하라!”

“조선을 위하여!”

좌영장 김응하, 우영장 이일원이 군사를 끌고 다니며 방어 진형을 돌파한 후금군을 공격했다.

전선에는 시체더미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 시체더미들을 비집고 들어온 후금군은 크게 지친 상태였다. 덕분에 조선군은 용맹한 후금군을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전하, 조선군이 움직였습니다.”

“이대로 전선을 고착시킨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지는 건 여진이다. 깃발을 올려 요동마병을 출격시켜라.”

“예!”

본군에서 요동마병의 군기가 올랐다.

좌군과 우군의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요동마병이 드디어 움직였다. 크게 전장을 우회한 그들은 혼하를 건너 진격해오던 후금군의 옆구리를 공격하며 맹위를 떨쳤다.

공염수와 이희필의 선봉군은 크게 흔들렸다.

난데없이 가해진 기병의 급습에 개울을 건너던 팔기군은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진 놈들아! 여기가 네놈들의 무덤이다!”

“멈추지 마라! 모조리 짓밟아라!”

명군은 병과들의 운용에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깃발과 고각으로 신호를 보내면서 부대들의 지휘에 막힘이 없었다. 유능한 장수와 정예병들이 만들어낸 연계에 후금군은 야전에서 처음으로 명나라에 고전하고 있었다.

“저기 이희필이다!”

“저놈이 바로 대장이다!”

명나라 병사들에 의해 후금의 기병대는 길이 막혀버렸다.

돌파력을 잃은 기병부대는 보병에게 손쉬운 먹잇감이다.

이희필은 이미 수많은 호위 병력을 잃은 뒤였다. 혼하를 건너 여기까지 오는 동안 진영에 큰 구멍이 생겼고, 그 구멍으로 명나라 병사들이 들이닥치며 이희필을 노렸다.

“개 같은 명나라 놈들아, 이 이희필이 쉽게 쓰러질 거란 생각은 마라!”

이희필은 크게 칼을 휘두르며 적병을 물러나게 만들었다.

그는 지금 매우 지친 상태였다.

명나라 진영까지 돌격하는 동안 수많은 사선을 겪은 그였다. 여기까지 살아서 온 것만으로도 기적적인 일이었다.

“내가 죽더라도 내 뒤에 본대가 오고 있다!”

이희필이 크게 고함을 쳤다.

그와 동시에 호위 병력들이 들이닥치며 명나라 병사들을 노렸다.

하지만 명나라 병사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미리 장전된 불랑기포들이 불을 뿜었다. 철막대기처럼 생긴 불랑기포가 일제히 격발되면서 탄환들이 이희필과 호위 기병에 명중했다.

“크하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이희필은 쓰러졌다.

아무리 용맹한 그라도 수십 발의 탄환을 맞고는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걸치고 있던 갑옷이 떨어져 나감과 동시에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희필이 죽었다!”

“적장이 쓰러졌다!”

병사들이 크게 일갈하며 적장 이희필의 죽음을 알렸다.

누르하치에게 임명된 선봉장 중에 한 명이 죽었다. 명군은 전령들을 보내 그 소식을 전 부대에 알리는 것은 물론, 고각을 크게 울리며 병사들의 사기를 고무시켰다.

“서둘러 수습해라. 이제 곧 놈들의 본대가 온다.”

“예, 알겠습니다.”

본대에서 조문조, 손전정이 군사를 이끌고 출격했다.

무너진 진형을 다시 세워야 한다. 적의 본대를 상대하게 된다면 더 힘든 상황에 봉착할 터. 어떤 상황에서도 원앙진은 무너져서는 안 된다.

“누르하치의 본대는 어디에 있는가?”

“아직 혼하 너머에 있습니다. 사태를 관망하려는 모양입니다.”

“비록 선봉을 격퇴했다 해도, 적이 유리하다는 것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총성들이 크게 울릴 때마다 팔기군이 말에서 떨어져 나갔다.

귀를 멀어버리게 할 것 같은 포성과 함께 혼비백산한 후금군은 등을 보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교전에 들어갔던 선봉군은 그저 일부의 병력일 뿐, 상대해야 할 적들은 강 너머에 차고도 넘쳤다.

“남로군 병사의 말에 따르면, 이여백 장군을 죽인 적장은 다이샨이라는 놈이다. 두송을 죽인 놈도 바로 그놈이라지. 누르하치는 분명 이번에는 무지막지한 아들놈을 보낼 것이다.”

주유검이 우려를 담아 말했다.

맹장 다이샨도, 그리고 지장 홍타이지도 아직 출격하지 않았다.

안심할 수는 없었다. 적장을 쓰러트렸다 해도, 누르하치의 양 날개는 아직도 건재했다. 그 날개를 부러뜨리지 않는 한, 승기는 찾아오지 않을 터였다.



부우우우우우!!



지지부진하게 전황이 이어지고 있던 그때.

전령 역할을 하는 병사들이 뿔나팔을 크게 불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우를 잃은 공염수는 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퇴각을 명령했고, 곧이어 혼하를 건너온 전 병력이 등을 보이며 물러섰다.

“저, 적이 물러나고 있습니다!”

“겨우 전초전에 불과했다는 건가? 이리 쉽게 물러서다니, 누르하치답지 않군.”

홍승주의 말에 주유검 역시 믿기 힘들다는 모습을 보였다.

왜 군사를 물린 거지?

선봉대가 비록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고는 하나, 이희필과 공염수는 아군의 방어 진영을 무너트리는 데 성공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면 효율적으로 아군을 붕괴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놈들이 아군의 복병을 눈치 챈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개원총병 마림이 북로군의 정예를 이끌고 뒤에 매복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전면전이 되었다면 강을 건너 적의 본영을 공격했을 것이다. 이를 간파한 것인지 누르하치는 군사를 물리고는 방비를 강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