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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제12장 사르후 결전(2)



사르후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변화의 조짐은 사르후가 아닌 남쪽에 위치한 조선의 국경에서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관전보에 주둔한 동로군의 공격을 명령받은 망굴다이는 군사를 돌렸다.

난데없는 변화에 유정은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뒤를 추격하자니 기습을 받을까 우려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강을 넘어라! 조선을 쳐라!”

“저 강만 넘으면 조선이다!”

용맹한 여진의 전사들은 폭이 좁은 곳을 골라 강을 빠르게 넘었다.

요동지역과 조선의 국경은 그 거리가 가까웠다. 더욱이 망굴다이의 부대는 압록강과 인접한 관전보에 있었으므로 한 걸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 적이다!”

“적들이 온다!”

의주는 명나라에서 수송한 군량을 모아두던 보급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벌떼처럼 몰려든 여진 군세에 의주성은 크게 흔들렸다. 미처 강을 넘어서 쳐들어올 줄은 몰랐다는 듯, 병사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시작했다.

“히끅! 대체 무슨 소란이냐.”

의주성의 방위를 맡은 평안도 관찰사 박엽은 어여쁜 기생들의 부축을 받으며 등장했다.

며칠 동안 밤새도록 술을 퍼마시느라 술병이 난 그였다. 과음으로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관자놀이를 짓누르고 있었다.

“여진족입니다! 여진 놈들의 기습입니다!”

“무슨 헛소리냐. 요동에서 피터지게 싸우고 있을 여진 놈들이 여긴 왜 와?”

“진짭니다! 성 너머에 팔기군의 깃발들이 휘날리고 있습니다!”

“이놈이 아침부터 더위를 먹었나?”

부관의 보고에 박엽은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라고 여겼다.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군략에 아무런 소질도 없던 박엽은 북인 파벌의 연줄만을 이용해서 출세한 인물이었다. 그런 박엽에게 팔기군의 기습은 마른하늘의 날벼락과도 같았다.

“어, 어서 조참판을 불러라! 조참판을 불러!”

“이미 달려갔사오나…….”

“그런데 뭐? 이놈이 왜 말을 하려다 말어?”

박엽과 마찬가지로 분호조참판 윤수겸 역시도 전날 밤까지 기생들과 질펀하게 정사를 즐긴 상태였다.

그는 그만 허리에서 힘이 빠져 관아로 오지 못한다는 말을 전했다고 했다.

부관은 윤수겸이 부하들과 함께 도망쳤을 것이라 생각했다. 불운하게도 북방에 배치된 두 지방관들은 이이첨 일파에 의해 임명된 낙하산 인사에 지나지 않았다.

“대, 대체 도원수는 뭘 하고 있단 말이냐! 요동으로 갔으면 여진 놈들을 죄다 쓸어버렸어야지!”

박엽은 강홍립을 탓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강홍립이 여진족의 침입이 의심된다면서 출병 전에 충고를 했었지만, 도원수와 직급이 동등한 관찰사였던 박엽은 그 충고를 무시했다.

그는 후방지역인 이 의주까지 적이 쳐들어올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관전보의 군량수송에도 태업을 일삼던 박엽은 결국 독 안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다.

“우선 시급함을 알리는 봉화를 놓겠습니다.”

“그런다고 아군이 오겠느냐?”

“해봐야 아는 거 아닙니까!”

부관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어디론가 달려 나갔다.

의주성이 당장 무너질 일은 없었다.

여진족은 공성전에 미숙했다. 더욱이 빠른 속도로 강을 가로질러 왔을 것이니 장기전에 대비한 군량을 준비했을 리도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이를 믿고 의주성에 기대어 적을 막아야만 했다.



망굴다이는 의주성을 보며 점령하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 의주성 따위는 아무래도 좋을 문제였다. 감히 명나라에 붙어 여진에 칼을 들이민 조선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걸로 좋았다.

“모든 고을을 약탈하고 불을 질러라! 눈에 보이는 건 사람이든 가축이든 죄다 죽여라!”

의주성 일대는 삽시간에 쑥대밭이 되었다.

북쪽에서 온 오랑캐 군세에 백성들은 도망치기 바빴고, 고을의 초옥들이 모두 불타면서 매캐한 연기가 치솟았다.

망굴다이가 명령한 것은 철저한 파괴였다.

사내와 아녀자를 닥치는 대로 죽였고, 소와 돼지까지도 철저히 도륙내면서 주변 일대를 피바다로 만들었다.

“조선이 이토록 나약한 곳일 줄은 몰랐습니다.”

“주변에 병사라고는 한 명도 없습니다. 모두 달아나거나 성에 숨은 모양입니다.”

여진 장수들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들의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의주성에서 피어올린 봉화가 주변 일대의 군사들을 모두 소집시켰기 때문이었다.

“오랑캐들을 모조리 척살하라!”

“어딜 오랑캐 따위가 국경을 넘느냐!”

만포첨사 정충신, 경기감사 박자흥이 서쪽과 남쪽에서 군사를 몰고 왔다.

압록강은 쉽게 뚫렸을지언정, 그 주변은 이혼이 직접 임명한 무관들이 지휘하고 있었다. 더욱이 임금이 평양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평양에서 직접 군사를 몰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싸워볼 만합니다! 조선군은 오합지졸로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섬나라 놈들에게 벌벌 떨던 놈들입니다.”

장수들의 말에 망굴다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휘하에는 1만의 병력이 있었다. 기병대를 선두에 세워 돌파를 명령한다면 능히 조선군을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놈들은 섬나라 놈들에게 고작해야 보름 만에 수도까지 빼앗기지 않았는가.

이대로 적들을 돌파하여 보급을 채운 뒤, 놈들의 수도인 한양까지 진군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놈들이 진을 치고 있다. 단숨에 내려가 박살내버리자.”

“예!”

팔기군은 구름처럼 진형을 형성했다.

조선군의 주력은 보병부대. 고작해야 여기저기서 몰려든 잡병 따위가 감히 아국의 기병대를 상대로 막아낼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단숨에 꿰뚫고 한양을 친다.

“공격하라!”

망굴다이의 외침과 함께 1만의 군세가 움직였다.

빠른 속도로 조선군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늘 위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포탄처럼 보이는 검은 물체가 팔기군의 머리 위로 떨어졌고, 지면을 때리는 순간 시뻘건 화염이 치솟았다.

“으아악!!”

“화포다! 산개하라!”

폭발하는 포탄 속에서 작고 날카로운 파편들이 튀었다.

포탄 한 발에 수십 명의 병사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팔다리가 찢긴 병사가 바닥을 뒹굴고, 울음소리를 내던 군마가 화포소리에 놀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장군, 피하셔야 합니다!”

“닥쳐라! 싸움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장수들의 부축에 망굴다이는 가까스로 일어섰다.

화포의 충격으로 말에서 굴러 떨어진 그였다. 다리는 절뚝거렸지만 싸우지 못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둥둥둥둥둥!!



그때, 전장 너머에서 북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다른 지역에서 지원군이 도착한 것이었다. 고립무원의 처지에 몰린 망굴다이에게 지원이 올 리는 만무했으니, 가세하려는 조선군이 분명했다.

“오랑캐들을 모두 섬멸하라!”

“강을 건너온 놈들에게 자비는 없다.”

병마절도사 남이흥, 체찰부사 장만.

이혼이 북방에 배치시킨 장수들이 잇달아 몰려들었다.

망굴다이의 실수는 의주에서 너무도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침공에 그치지 않고 대대적인 파괴공작을 일삼느라 시간을 지체하고 말았다.

“병사들은 우리가 많다! 모조리 다 죽여주마!”

지원군이 가세했다 해도, 조선군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망굴다이는 아군이 1만 군세라는 점을 내세우며 용전을 다그쳤다. 이대로 물러났다가는 팔기군의 패륵 자리를 빼앗길 것이라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전황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도 아니었다.

급하게 달려왔는지 조선군은 많은 화포를 보유하지 못했다. 많은 수의 화포를 대동했다면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후금이 쓸려나갔겠지만, 싸움은 백중지세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망굴다이는 결국 퇴각을 명령했다.

조선에 너무 깊이 들어왔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적진에서 오랫동안 싸워봤자, 놈들의 병력만 계속해서 충원될 뿐이다.

“젠장! 퇴각하라, 퇴각하라!”

요동의 결전을 앞에 두고 조선에서 많은 병력을 잃을 순 없다.

후금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명나라 군대의 궤멸이다. 강을 건너 조선의 본군과 교전을 벌일 정도로 여유롭진 못했다.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조선군을 패퇴시킬 순 있겠지만,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 * *



의주 일대에서는 전투가 진행되고 있는 한편, 요동은 소강상태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상간애로 퇴각한 팔기군의 본대.

그리고 사르후에는 명군이 주둔한 채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후금은 명나라가 어떻게 나올지 동태를 살폈고, 명나라 역시 후금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동태를 살피기에 바빴다.

“아군의 사기는 어떤가?”

“승전을 크게 기뻐하는 병사들도 많지만, 싸움에서 패전하고 돌아온 패잔병들의 상태가 좋지 못합니다.”

주유검의 물음에 홍승주가 답했다.

대패를 경험한 서로군과 남로군의 패잔병들도 사르후에 합류했다. 하지만 상태는 좋지 못했다. 겁을 집어먹은 상태였고, 팔기군의 군기만 보아도 벌벌 떨었다. 압도적인 패전을 겪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산을 의지하여 농성만 취할 뿐이라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전황을 뒤집는 건 불가능하다.”

“소장도 그걸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이대로 적의 공세를 막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명나라는 누르하치의 토벌과 후금의 멸망을 목적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지지부진한 전황을 완전히 뒤엎어버릴 비책이 필요했다.

“가만히 기다린다고 해서 누르하치의 목이 굴러들어올 일은 없다. 더욱이 사기가 오른 여진족이 서로 분열하리라는 기대를 할 수도 없게 되었지.”

끝장을 낼 것이었다면 남로군이 건재했어야 했다.

이여백이 이성량의 아들이라는 점을 내세우며 여진족을 흔들어놓았다면 전황이 크게 달려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아쉬움을 토로할 수는 없었다.

이미 그들은 팔기군에 대패하여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군사를 이끌고 나가 일전을 노리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전장에서 돌아온 조문조가 주유검에게 건의했다.

그의 의견에 여러 장수들은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두송과 이여백이 연달아서 패전했다. 섣불리 군사를 움직였다가는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고 여겼다.

“괜찮은 방법이다.”

주유검이 지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말에 조문조가 화색을 보인 반면, 다른 장수들은 사색이 되어 주유검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야전이라고 해서 반드시 기병군단이 이길 거라는 보장은 없다. 등껍질 안으로 들어간 거북이마냥 이 사르후에 틀어박혀 있을 이유 역시 없다.”

산을 의지한 채 농성한다.

물론 거점방어에 있어서는 그만한 묘책도 없겠지만, 너무 방어로만 일관하다가는 보급로를 차단당할 우려가 있었다. 주유검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기산 전투의 마속을 떠올렸다. 마속 같은 최후를 맞는 일은 피하고 싶었기에, 후금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도록 무겁게 압박해야 했다.

“일단 적의 본대는 상간애까지 퇴각한 상황입니다. 저들이 움직임을 눈치 채더라도 이미 아군이 진형을 형성한 뒤일 것입니다.”

“하지만 기병군단을 상대로 야전을 택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이겠습니까? 용맹하던 두송 장군이 당하지 않았습니까. 적의 꾀에 넘어갈까 우려스럽습니다.”

보정총병 왕선이 이의를 제기했다.

자신들은 황제의 명령에 따라 누르하치를 토벌하기 위해서 왔다. 주유검의 의견은 물론 정석대로였지만, 서로군이 무너지는 광경을 지켜본 왕선으로서는 우려스런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는 잘 안다. 하지만 산에 틀어박혀만 있어서는 후금에게로 기운 전황이 아군에게 유리해지지는 않는다.”

전황을 뒤집기 위한 격변이 필요했다.

주유검은 모든 장수들을 불러 모으며 결전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장수들이 있는 반면, 왕선처럼 우려스런 반응을 보이는 장수들 역시도 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