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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제12장 사르후 결전(1)



주유검의 유격군에 편성된 요동마병은 팔기군에 결코 뒤지지 않는 기동력을 자랑했다.

요동마병은 무순에서 크게 무수관으로 우회하여 사르후의 후미를 공격했다.

사르후에 도착한 총사령관 양호에게 집중하고 있던 후금군으로서는 난데없이 봉변을 당한 격이 되어버렸다. 덕분에 요동마병은 무순에서 당한 앙갚음을 할 수 있었다.

“적병 2천을 토벌했습니다.”

“비록 대장들을 놓치기는 했지만 고무적인 성과입니다.”

이유한과 신백이 호기롭게 보고했다.

사르후 전투에 이은 아군의 두 번째 승리였다. 계속해서 뼈아픈 패전을 겪던 명나라 입장에서는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적들이 고륵채로 퇴각하였습니다.”

“고륵채의 적들은 아마도 본대와 합류할 것 같습니다.”

무장들의 보고에 주유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암울한 전황 그 자체였지만, 적어도 병사들에게 희망을 안겨줄 수 있는 승리를 따냈다. 이번 승리를 통해 팔기군이 무적의 군단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 것이었다.

“조문조 장군, 김응서 장군. 지금 당장 2만의 군대를 끌고 가서 놈들이 주둔한 고륵채를 모조리 불태워라.”

“예!”

사르후에서 퇴각한 적들은 사기를 잃은 상태였다.

가만히 고륵채에 주둔한 채 본군의 귀환을 기다릴 요량이겠지. 하지만 주유검은 놈들이 편안하게 재정비를 취하도록 내버려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신왕 전하, 어서 이여백 총병을 구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로군이 아군의 지원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총사령관 양호가 말했다.

앞서 보냈던 전령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명령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이여백의 태도에 양호는 크게 분노했지만, 그래도 같은 아군이 아닌가. 남로군을 모두 잃는다는 것은 몹시도 뼈아픈 손실이었다.

“이미 죽었을 텐데 어찌 구한단 말이오? 기어코 태자하를 건너 청하보까지 갔다면 잔병조차 추스르지 못할 정도로 전멸했을 텐데.”

“그, 그건 그렇사오나…….”

“총사령은 무수관을 지켜주시오. 적들이 무수관을 돌파하여 무순과 심양을 노리면 아군은 퇴로를 완전히 뺏기게 되니.”

“……예.”

두송과 이여백이 죽었다.

아직 이여백의 생사는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주유검의 단언에 양호는 그가 죽었을 거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렀음에도 남로군으로부터는 그 어떠한 소식도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빈손으로 북경에 돌아가면 난 죽는다! 폐하께서 총애하던 두 장군들까지 잃었으니, 아무리 나라도 살아남기는 어렵겠지.’

병력의 반절이 사라졌다.

위풍당당하게 북경을 나와 요동에 도착했거늘, 성과도 없이 두 장군들을 잃었다. 연속된 불운과 패전으로 양호는 크게 자신감이 꺾인 상태였다.

전의를 상실해버린 양호는 결국 주유검의 명령 같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난 그저 황손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설령 패전하게 된다 해도… 내 잘못은 아니다. 아니어야만 한다.’

양호는 총대장으로서의 그릇이 아니었다.

두 군단장과 수많은 병사들을 잃었음에도, 자신이 빠져나갈 궁리만 하기 바빴다. 그래서 양호는 도망치듯 주유검에게 전권을 주고는 무수관으로 가버렸다.

[양호에게 거점방어를 맡겼으니, 무순관에서 크게 실책을 범할 일은 없을 게다.]

‘지금껏 수많은 전장을 떠돈 짬밥이 있을 테니까요. 적들이 아무리 도발해도 두송처럼 돌격을 감행하는 일은 없겠죠. 그러기에는 겁이 많은 성격이니.’

[그리고 마림에게 전령을 보내거라. 북로군이 이제 곧 도착할 테니.]

‘예, 알겠습니다.’

숭정제에게 들은 대로 주유검은 좌우의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드디어 북로군을 움직일 때가 왔다.

예허부의 병력을 흡수한 북로군은 상당한 전력이었다. 여진 기병대를 다수 편입시킨 만큼, 기동성 역시 빠를 수밖에 없었다.



조문조와 김응서가 이끄는 조명 연합군은 고륵채를 공격했다.

패주하여 물러나 숨을 고르고 있던 후금군에게 있어서는 지옥 같은 일이었다. 제대로 된 방책조차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적에게 제대로 된 응전을 할 수는 없었다.

“퇴각하라!”

“고륵채에서 물러난다. 진채를 뽑아라.”

명군의 급습에 공염수와 이희필은 서둘러 퇴각을 명령했다.

재빠르게 판단한 덕분에 병력의 피해는 많지 않았다. 피로에 지친 후금군은 다시금 말에 올랐고, 부리나케 도망치면서 고륵채 거점을 상실했다.

“젠장, 이제 대가한을 무슨 면목으로 뵌단 말이오?”

“우선 적에 대한 정보를 알려드려야 하오. 지금껏 상대한 명군과는 차원이 다르지 않소.”

후금의 두 장군들은 병력을 끌고 팔기군이 오고 있을 남쪽으로 퇴각했다.

이윽고 고륵채를 점거하게 된 명군은 후금군의 진채를 모조리 불태웠다. 해가 저물어가는 시각에 산등성이가 붉게 타올랐다. 불그스름하게 타오르는 산등성이는 주변 어디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그 이변을 목격한 것일까.

맞은편의 계범에 있던 후금군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계범의 병력이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내가 응전할 테니 믿고 맡겨주쇼.”

김응서의 말에 조문조가 직접 칼을 빼들고 고륵채에서 출격했다.

그는 자신의 군세를 몰고 가서 계범의 병력을 박살냈다. 지금까지 승자의 여유를 부리던 후금군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자 함이었는지, 추격에 추격을 거듭하여 다수의 병력을 패주시켰다.

“고륵채가 불타고 있다. 전군 공격하라!”

때마침 북쪽에서 내려온 마림이 군세를 이끌고 계범을 공격했다.

무려 3만 4천에 달하는 북로군의 공격을 계범의 방어군은 막을 수가 없었다. 두송이 패전한 이후부터 여진은 계범을 철통같이 지켜왔지만, 전 방향에서 시작된 공격으로 고륵채에 이어 계범까지 상실하게 되었다.

“누르하치가 오기 전에 준비를 끝내야 한다. 어서 서둘러라!”

계범을 점령한 마림은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

주변에 참호를 깊이 파고 고지들마다 화포를 설치하게 했다. 계범 산을 요새화시키는 한편, 언제 적이 올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주변으로 정찰병들을 내려 보냈다.

“우리들도 손을 거들겠네.”

“한 배를 탄 사이가 아닌가. 생사를 함께할 것이니 돕는 건 당연한 일이지.”

패륵 김태길과 포양고가 준비 작업을 거들었다.

누르하치에게 반기를 들었으니 그들도 명군과 운명을 함께하게 된 처지였다. 전쟁에서 패하면 명군은 물론 자신의 부족들도 모두 죽는다. 그렇기에 예허부 병력은 명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총병!”

유격장 장세봉이 달려와 마림에게 보고했다.

“무슨 일인가.”

“누르하치입니다! 팔기군 본대가 오고 있습니다!”

그 말에 마림은 물론 모든 장수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반절에 달하는 명군의 병력을 유린하고 학살한 누르하치가 드디어 사르후 전장에 도착했다. 구름처럼 몰려드는 대군세의 등장에 명군은 비명을 토해냈다.

“누, 누르하치다……!”

“팔기군이 왔다!”

요동을 휩쓴 역병이 왔다.

여진부족을 통일하고 만주를 제패한 누르하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된 병사들은 두 다리를 크게 떨어야 했다.



* * *



누르하치는 침음을 토해냈다.

깊은 불쾌감을 숨기지 않겠다는 듯, 사로잡은 명군 포로들을 모조리 학살하며 울분을 대신 표현했다.

“내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도리어 역공을 가할 줄이야.”

누르하치가 불쾌감을 드러낸 것은 거점을 빼앗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빼앗긴 거점이야 다시 되찾으면 그만이다. 거점 하나에 시시콜콜 무게를 두어서야 전쟁 같은 건 해먹지도 못할 것이다.

누르하치가 강하게 분노한 것은 자신이 사르후에 놓은 덫을 파훼해버린 인물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내 전술을 간파한 놈이 있을 줄이야. 과연 명군에도 나름 인물이 있다는 게로군. 부대의 운용에 막힘이 없다. 필시 우리 군의 배치를 훤히 꿰뚫어보고 있는 게 확실하다.’

적장이 눈에 보이면 찬사라도 해주고 싶었다.

지금껏 어울리는 적수가 없었거늘, 이제야 비로소 나타난 것 같았다.

“죽여주십시오, 대가한!”

명군에게 패주한 이희필과 공염수가 누르하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가한의 병력을 잃은 죄는 죽음으로 씻어야 한다. 적에게 등을 보이고야 말았으니, 목숨을 구걸해도 살아남기가 어려울 터였다.

“적이 오거든 퇴각하라 지시한 건 나다. 너희들의 죄는 아니다.”

누르하치는 두 장수들을 용서했다.

그 대신 적에 대한 정보를 물었다. 이제 싸우게 될 적이 어떤 놈인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총대장 양호와 신왕 주유검, 그리고 북로군의 총병 마림이 사르후에 도착했습니다.”

“신왕 주유검이라……. 몽골을 격퇴한 그 황족이로군. 요즘 들어 빈번하게 이름이 들리는구나.”

“그렇습니다, 대가한.”

세 명의 대장들 중, 주유검의 존재가 눈에 띄는 건 당연했다.

햇병아리일뿐더러, 북경의 직계황족이 아닌가. 황손이 직접 병사를 이끌고 이 험준한 요동지역에 왔다는 것부터가 매우 놀라웠다.

“그래, 신왕의 나이가 몇이라고 하던가?”

“올해로 열여덟……, 아직 장가도 못간 어린놈입니다.”

“으하하하! 그런 놈에게 우리 팔기군이 패전할 줄이야.”

한 장수의 설명에 누르하치는 웃음을 터트렸다.

과연 세상일은 누구도 모른다더니, 천하의 이 누르하치가 그런 어린놈에게 쓴맛을 보게 될 줄이야! 본인이 생각해도 매우 우스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군의 장수였다면 내 손녀딸을 내어줬을 것을. 미숙한 젊은 놈이 배짱 한 번 좋구나. 그래, 사내대장부라면 응당 그래야지!”

누르하치의 말에 후금의 장수들은 안색이 흐려졌다.

마치 자신들을 힐난하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장수들은 눈앞에 주유검이 보이면 즉시 그 목을 베어버리겠노라 다짐했다.

“소장을 보내주신다면 놈들이 점령한 거점을 탈환해보이겠습니다.”

“아니다. 놈들에게 선수를 빼앗겼을 때부터 우리는 이미 외통수에 몰리게 된 것이다.”

적들은 분명 사르후와 계범에 만반의 준비를 갖춘 뒤일 것이다.

우수한 화포와 방어 진형. 그것은 후금이 미처 가지지 못한 명나라의 장기 중 하나였다. 높은 고지를 점령한 저들에게 뻔히 보이는 공격을 해서 아까운 군사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놈들이 고륵채를 모두 불태웠다면, 아군이 편히 머물 수 있는 거점이 없습니다.”

군사 코가친의 말에 누르하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은 이미 아군의 움직임을 읽고 있다.

고륵채가 모조리 불타면서 방어거점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다시 말해 사르후 주변에는 후금군이 편히 머물 거점 따위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제법 머리를 썼군. 하지만 전쟁은 이제 갓 시작되었을 뿐이다.’

이 전쟁은 단순한 영토분쟁이 아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국운이 걸린 중차대한 결전이었다. 그 결전에서 누르하치는 결코 패배할 생각이 없었다.

“우선 상간애(尚間崖)로 퇴각한다. 군사를 물려라.”

“예, 알겠습니다.”

사르후를 앞에 둔 팔기군은 퇴각을 선언했다.

당장에라도 사르후를 향해 총공세를 펼치고 싶었지만, 화포로 무장한 명나라 진영은 함부로 치기가 어려웠다.

“어린놈에게 당해서 군사를 물려야 하다니. 평생의 치욕으로 남겠군.”

사르후를 등에 지고 말머리를 돌렸다.

하지만 이내 아쉬운 마음이 들었는지 누르하치가 혀를 차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