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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제11장 초원의 늑대들(5)



남로군 본대를 공격한 반란군은 극히 소규모였다.

겨우 5백 남짓을 넘지 않았을 뿐더러, 이여백과 장군들이 있는 본대와도 거리가 멀었다. 이여백도 바보가 아니고서야 투항해온 군사들을 가까이 배치시킬 리가 없었던 것이다.

“총병께 전해라. 얼마 되지 않으니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투항한 여진병력을 지휘하던 가암도사 이극태는 전령을 보냈다.

친위부대를 인솔하여 반란군을 쳐부수면 될 일이었다. 군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지만 혼란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제아무리 놈들이 발악한다 해도, 총병을 노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여백의 본진에서 벌어졌다.

“투항해온 여진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다른 여진부족들은 어떤지 살펴봐라!”

“더러운 오랑캐 놈들이 투항하겠답시고 대거 몰려올 때부터 수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본대에 소속된 유격장들이 여진족에 대한 불신을 쏟아냈다.

투항한 여진부족은 물론, 과거 이성량을 따랐던 군벌들이 합류한 것에도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변방을 떠돌며 오랑캐의 풍습을 받아들이고 세력을 확대시킨 놈들이었다. 여진족에 대한 미움이 강한 만큼, 그들을 향한 불신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이회충 장군과 대유광 장군의 부대가 적을 막아서고 있습니다!”

좌익과 우익이 앞으로 나서며 팔기군의 공세를 막아냈다.

물론 완전히 막아낸 것은 아니었다. 맹렬하게 돌격해오는 팔기군의 기습에 보병부대들이 선두에서부터 갈려나가고 있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것은 일선을 지휘하고 있는 이회충과 대유광도 알 수가 없었다.

“투항한 여진족의 수가 상당하지 않습니까? 족히 수천이 넘습니다. 놈들이 모두 한통속일지도 모릅니다!”

“그리되면 외통수에 몰린 격이 아닌가.”

명나라 장수들은 자중지란을 일으켰다.

내부로 받아들인 투항군들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의심. 팔기군의 기습을 받아 혼란스러워진 이여백에게는 매우 곤혹스런 상황이었다.

“일단 뒤로 물러나 태세를 정비한다! 그리고 정지범 장군과 염명태 장군은 부대를 이끌고 투항한 여진병력을 경계하도록.”

“하옵시면 저들이 만약 의심 가는 모습을 보일 경우에는…….”

“목을 쳐도 좋다! 전권을 위임하겠다.”

“예!”

이여백의 명령은 표면적으로는 그리 나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의 명령은 도리어 군대를 더욱 위태롭게 만들고 말았다.

“우, 우리를 죽일 셈인가?”

“우리 부족은 결코 대명에 반역을 일으킬 생각이 없소!”

날카로운 장병기를 든 부대들이 접근해오자 여진병력은 크게 술렁였다.

앞서 반기를 들었던 병력은 순식간에 모두 토벌되었다. 하지만 내부에서 벌어진 반란으로 조정군과 투항병력 사이에는 분열이 일어났다.

“더,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

부족장 중에 하나가 칼을 뽑아들었다.

본대에서 온 정예부대가 다가올수록 분열의 틈새는 더욱 크게 벌어졌다.

“칼을 집어넣어라!”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칼을 뽑아드느냐, 더러운 오랑캐가!”

서로가 서로를 더욱 불신하게 되었다.

이제는 칼을 들이밀 수밖에 없는 지경에까지 내몰렸다. 심지어 그들 사이에 거친 욕설까지 오고가면서 대립은 격화되었다.

서로 대립을 이어나가던 중.

한 병사가 크게 소리쳤다.

“팔기군이 온다아아아!!”

외침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진부족들은 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으아악!”

“누르하치가 온다!!”

그 이후부터는 아비규환의 상태에 접어들었다.

팔기군이 좌군과 우군을 격파하고 본대까지 돌파했다는 소식은 실로 절망적이었다. 더 이상 대명과 이여백에게 승기가 없다고 판단한 여진족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한편 3만 대군이 자멸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누르하치는 웃음을 터트렸다.

“작은 맹독이라도 커다란 짐승을 죽이는 법이지. 이여백아, 넌 네 아비처럼 전쟁이라는 게 뭔지를 모른다.”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병력의 격차.

그리고 전술과 전략의 유무와 정확성이다. 이 중 무엇 하나도 우세한 게 없는 이여백이 누르하치의 팔기군에게 패배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적들의 기세도 제법 매섭습니다.”

“놈들이 스스로 무너지지 않았다면 자칫 어려울 뻔했습니다.”

후금의 장수들이 누르하치에게 말했다.

남로군 장수인 이회충과 대유광은 과연 뛰어났다. 팔기군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결코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였고, 도리어 분전하면서 팔기군을 위협하기까지 했다.

“저런 혼란 속에서 거짓정보가 퍼지는 건 당연한 일이지. 놈들은 공포와 두려움에 질려있다. 사소한 위협이라도 저들에게는 호환마마보다도 두려울 게다.”

팔기군은 장거리를 달려오느라 지쳐있었다.

제아무리 여진 기병대가 기동력이 우수하다고는 하나, 휴식 없이 요동벌판을 가로지르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만약 남로군이 저력을 다했다면 패하게 된 쪽은 팔기군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민 패륵, 이제 네가 나서라.”

“알겠습니다, 대가한.”

아민이 이끄는 팔기군 부대가 진격을 개시했다.

어린애를 상대하는 것 같은 이 싸움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아민이 지휘하는 기병부대가 돌격해오자 그동안 어렵사리 버티고 있던 좌군과 우군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죽을힘을 다해 버티던 방어선에도 마침내 한계가 찾아온 것이었다.

“적장 이여백은 목을 내밀어라!”

아민과 그의 부대들은 방어선을 돌파했다.

방어선 다음에는 이여백의 본대가 버티고 있다.

하지만 내부 소란으로 아무런 준비조차 하지 못한 본대는 많은 정예 병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으하하하! 멍청한 한족 놈들아, 이깟 실력으로 우리들과 자웅을 겨루려 했던 것이냐!”

“가소로운 놈들, 네놈들은 전쟁을 모른다.”

말 위에서 창을 휘두르자 등을 보이지 않는 적병이 없었고, 활을 쏘아 맞지 않는 적병이 없었다.

너무도 손쉬운 사냥이었다.

여진전사들은 산짐승을 사냥하는 게 오히려 더 어렵겠다며 이여백의 군사를 깔보는 모습을 보였다.

“이놈들아, 대명에는 인물이 없는 줄 아느냐!”

장응창이 이끄는 부대가 역습을 개시했다.

갑작스레 뛰쳐나온 병력에 아민의 부대는 가로막히고 말았다. 꽁무니를 보이며 도망치기 바쁘던 적병들을 상대할 뿐이었던 팔기군에게는 돌발적인 변수로 작용했다.

“저놈이 우두머리다!”

정예부대들이 급습해오자 아민은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누르하치의 조카인 아민은 경험이 적은 젊은 장수였다. 무예와 지휘에는 능통했지만 돌발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어서 피하십시오.”

“일단 저희들이 막겠습니다.”

아민의 친위기병들이 움직여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장응창의 부대는 그들을 노리지 못했다. 병사들이 뒤섞인 아수라장이 반으로 갈라지면서 거대한 짐승이 달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혀, 형님!”

패륵 다이샨이 군사들을 이끌고 참전했다.

거대한 칼로 장응창의 목을 벤 것은 물론, 역습을 노리던 명군의 기회를 짓밟아버렸다.

“적장의 목은 내가 가져가겠다. 아민, 너는 병사들을 이끌고 배신자들을 포위해라.”

“무운을 빌겠습니다, 형님.”

다이샨의 참전으로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갔다.

남로군의 좌익과 우익은 완전히 궤멸. 더욱이 본군까지도 위태로워지면서 전투의 판도가 후금에게로 완전히 넘어갔다.

“하지만 이래서는 다이샨 패륵에게 모든 공을 빼앗기는 꼴이 아닙니까?”

부하의 불평에 아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어쩌겠느냐. 다이샨 형님의 무용은 만주제일이다. 적진을 돌파하는 데 있어 조금의 어려움도 없으실 테지.”

다이샨은 홍타이지와는 달리 사람을 끄는 재주가 없었다.

용맹스런 장수도, 뛰어난 책사조차 보유하지 못했다. 그런 다이샨이 다른 패륵보다 뛰어난 무훈을 자랑하는 것은 타고난 무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여백아!!”

다이샨이 고함을 지르자 이여백은 크게 떨었다.

그것은 마치 짐승이 우는 소리와 같았다. 살의 짙은 고성에 놀랐는지, 타고 있던 군마조차 겁에 질린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하세현 장군!”

이여백의 앞을 막은 하세현이었지만, 곧이어 다이샨에게 목이 달아나고 말았다.

이미 본진은 다이샨에게 돌파되었다.

돌파된 구멍을 통해서 후금의 군사들이 잇달아 쳐들어왔고, 결국 이여백은 고립무원의 처지에 내몰리고 말았다.

“네놈은 누구냐!”

“대가한 누르하치의 차남 다이샨이다.”

“그 빌어먹을 놈의 아들이렷다!”

두 눈을 크게 치켜뜨며 이여백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곱게 자란 철령이씨의 도련님이 다이샨의 상대가 될 리는 없었다. 그는 몇 번 칼을 휘두르지도 못하고 말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총병!”

“어서 총병을 구출하라!”

뒤늦게 명나라 장수들이 달려와 이여백의 구원에 나섰다.

하지만 이미 전세는 역전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말에서 떨어진 이여백은 목이 부러져 죽었고, 달려온 휘하 장수들은 본진을 포위한 여진 병사들에게 모두 죽었다.

“명나라 놈들은 모조리 죽이고 놈들에게 투항했던 부족들은 살려둬라.”

누르하치가 전 병력에게 명령을 내렸다.

싸움에서 사로잡힌 명나라 병사들을 모두 죽여 그 시체를 강에 빠트리는 한편, 갈팡질팡 도망치던 여진부족들은 누르하치에게 끌려오게 되었다.

자신을 배반한 부족장들을 지그시 바라보던 누르하치가 입을 열었다.

“적로부족의 우두머리가 아니신가? 내 소집령을 거부하더니 결국 딴마음을 품었던 모양이군.”

“사, 살려주시오! 제, 제발!”

“어찌 그리 떠는가? 배반을 결심할 정도였으면 그에 걸맞은 각오를 했었어야지.”

누르하치의 말에 그의 뒤에 서있던 장수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갓 태어난 어린 양처럼 벌벌 떠는 부족장들의 모습이 실로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이 누르하치가 전투에서 패했더라면 그대들은 분명 내 시체에 온갖 치욕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부족장들을 속박하고 있던 밧줄을 풀어주기까지 했다.

“다시 나를 위해 싸워라.”

누르하치는 자신을 배반했던 부족장들을 용서했다.

그 모습에 다이샨이 이의를 제기했다.

“아버님, 놈들은 아버님을 배반했습니다. 만주의 규율에 따라 극형에 처하셔야 마땅합니다.”

다이샨의 말은 지당했다.

반란을 용서해주면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나는 법이다.

내부의 화근이 될지도 모른다. 그는 이번 일을 계기로 아버지의 무명이 꺾일까 우려스러웠다.

“넌 전투에는 귀재이나, 전쟁을 너무 모른다.”

누르하치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아들 홍타이지에게 그에 따른 답변을 하게 했다.

“형님, 이미 이자들은 명나라가 이빨 빠진 호랑이인 것을 경험했습니다. 저들이 가진 나약함과 간교함, 그리고 비굴함까지도. 저들은 결코 두 번 다시 대명에게 손을 벌리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확신하느냐?”

다이샨이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이에 홍타이지가 답했다.

“대명의 무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저들이 명나라를 따른 이유는 명이 대국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군에게 이리도 무참히 깨졌으니 더 이상 저들은 대명을 대국으로 보지 않을 것입니다.”

홍타이지의 말에 누르하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침략군은 사르후에 많이 남아있었다.

그들을 모두 상대하기 위해서라도 병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더욱이 저들은 이제 더 이상 명나라에 빌붙지 않을 것이니, 후금의 충실한 군대로서 싸우리라.

“사르후로 가자. 가서 놈들을 모조리 깨부수자!”

누르하치의 호기로운 선언에 후금의 장수들은 말머리를 돌렸다.

‘사르후에서 예상 못한 복병을 만나기는 했지만 상관없다. 나의 시대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청하보에서 벌어진 싸움은 후금의 승리로 끝났다.

누르하치의 본거지인 혁도아랍으로 진군하던 남로군 3만이 전멸했다.

동로군의 유정이 관전보에 발목이 묶여 있었기 때문에, 이로 인해 사실상 후금은 명나라를 병력에서 압도하게 되었다.

“보고 드립니다!”

전령이 달려와 누르하치 앞에 부복했다.

“무슨 일이냐? 사르후의 상황은 어찌 되었고?”

“공염수, 이희필 장군이 패전하여 고륵채(古勒寨)까지 후퇴한 상황입니다.”

“뭣이?”

누르하치는 물론 후금의 장수들도 전령의 보고에 놀란 모습을 보였다.

공염수, 이희필에게 사르후의 견제를 명령했었다. 적이 공세를 걸어오면 군대를 물리라고까지 명령하였거늘, 어찌하여 병력을 잃고 패주한단 말인가.

“총대장 양호의 부대가 사르후에 도착하였사온데, 배후에 있던 신왕 주유검의 부대가 선회하여 아군의 배후를 곧장 공격했습니다.”

“당장 사르후로 가겠다.”

전투의 승리로 화색을 띄기가 무섭게 낯이 붉어졌다.

누르하치는 고삐를 잡아당기며 사르후로 향하는 걸음을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