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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제11장 초원의 늑대들(4)



선봉장 두송과 1만의 두가병이 전멸했다.

전장 전역에 충격적인 비보가 전해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무공을 탐내느라 사르후를 거쳐 계범까지 공격했던 두송의 어리석음에 탄식하면서도, 선봉군의 소실을 보충하기 위한 대안을 짜내야 할 때였다.

“보고 드립니다. 북로군의 마림 총병이 이제 곧 사르후에 합류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북로군에서 온 전령의 보고에 양호의 본대에 소속된 장수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북로군은 무탈하구려.”

“북로군이 합류해준다면야 병력에서 놈들에게 밀리지는 않을 거요.”

병력이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은 보정총병 왕선이 무사히 사르후를 지켜낸 덕분이었다.

만약 사르후가 누르하치에게 재점령되었다면 각 군단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구심점 역할을 하는 사르후 거점은 온전히 명군에게 점령되어 있었다. 무순성을 지난 본군과 유격군 역시 이제 곧 사르후에 도달할 예정이었다.

“문제는 남로군입니다. 동로군이야 관전보에 계속 주둔하고 있지만, 남로군의 이여백 총병으로부터는 아무런 소식도 없습니다. 무언가 변고가 일어난 게 아닐까 걱정이 될 뿐입니다.”

한 유격장의 우려에 양호는 즉시 남로군으로 전령을 보냈다.

서둘러 사르후에 합류하라는 서한과 함께였다.

선봉군이 전멸하고 두송이 죽었다. 황제가 총애하던 장수가 죽었으니 그 여파는 총대장인 자신에게까지 미칠 터. 자칫 피해가 더욱 확산이라도 되면 곤란해진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가더라도 황제의 진노를 살까 두려웠다.

‘대체 두송은 뭘 하다 죽었고, 이여백은 왜 소식이 없는 것인가! 사르후에 합류하라고 누누이 일렀거늘. 어째서 이놈이고 저놈이고 내 명령을 들어 처먹지를 않느냔 말이다!’

장수들의 잇따른 개인행동에 양호는 노골적인 앙심을 품었다.

이미 죽어버린 두송도 그렇지만, 남로군의 이여백은 매우 괘씸한 인간이었다. 요동에서 굴러먹던 것을 무장으로 키워준 게 자신이거늘, 어찌하여 작전을 무시하고 연락까지 끊어버린단 말인가.

“우선 시급히 사르후로 가야 합니다. 북로군이 이제 곧 합류할 것이니, 총사령께서 몸소 지휘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이네. 즉시 사르후로 가겠네.”

양호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직접 사르후에 가서 지휘를 한다면 결코 누르하치의 얄팍한 꾀에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라 확신하는 듯했다.

하지만 누르하치의 교활한 작전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사르후를 재점령하지 못한 것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남로군의 이여백이 개인적인 원한을 앞세워 본거지로 쳐들어오리라는 것은 상정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한편 유격군 역시 선봉군의 전멸소식을 접하고 있었다.

“남로군은 버린다.”

“이여백 총병을 말씀이십니까?”

주유검의 돌발적인 발언에 놀란 건 명나라 장수들만이 아니었다. 강홍립과 김응서 등 조선의 장수들 역시 놀라워하고 있었다.

이여백은 이성량의 아들이자 이여송의 동생이다.

독단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고는 하나, 황제가 총애하고 있는 인물들 중 하나였다. 그런 인물을 버린다는 것은 보통 독한 마음을 품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씁쓸하오나 전하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장수들 중 홍승주만이 주유검의 의견에 찬성했다.

남로군의 진군경로를 예측해본다면 요양을 벗어나 청하보(淸河堡)에 도달하였을 것이다. 청하보는 사르후에서는 거리가 먼 지역인 반면, 여진 본거지의 앞마당 역할을 하는 아골관(鴉鶻關)과는 비교적 가까웠다.

지원군을 섣불리 보냈다가는 오히려 병력만 잃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선봉군의 공백으로 큰 타격이 전가된 지금, 병력의 손실은 심사숙고하여 결정할 일이었다.

[이여백은 누르하치에게 가솔을 모두 잃었다. 그리고 남로군의 장수들 역시 이여백과 마찬가지로 누르하치를 크게 증오하고 있다. 정벌에 참전한 이유도 누르하치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이지, 전쟁의 승패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 게 분명하다.]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작전을 개무시하고 병력을 움직인다라. 이놈의 명나라는 너무 파격적이어서 종종 할 말을 잃고 맙니다.’

이여백의 이탈은 명령체계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행동이었다.

두송과 이여백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총대장 양호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물론 원래부터 무능력의 대명사에 온갖 비리사건으로 유명한 인간이다 보니, 어느 장수들도 양호를 경외하고 있지는 않았다.

“강홍립 원수, 화포들은 잘 따라오고 있는가?”

“걱정 마십시오. 무사히 사르후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조선의 화포들은 화력이 상당한 것으로 유명하다 들었다. 활약을 기대하고 있겠네.”

“예. 맡겨주십시오.”

조선의 화포병기들은 왜적과의 전쟁에서 큰 활약을 선보였다.

화승총과 홍이포를 비롯하여 조선의 화포병기들까지. 조명 연합군은 총과 화포로 무장한 신식군대들을 그 주력으로 삼고 있었다.

“그래도 남로군을 마냥 버릴 수는 없지. 아군을 냉정하게 버리는 모습을 보였다가는 병사들 사이에서 소란이 벌어질 테니.”

주유검은 날랜 기병들을 뽑아 전령으로 내려 보냈다.

물론 이것은 생색내기에 불과했다. 전령들에게는 위험하다고 판단되거든 즉시 본군으로 귀환하라 일렀다. 설혹 전령이 무사히 도착한다 하더라도, 이여백이 결코 들어먹지 않으리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난관이로군. 이렇게 될 줄 알고는 있었다만, 일군을 지휘하는 장수란 자들이 이토록 무능할 줄이야.]

‘예상하고 온 거잖습니까.’

물론 주유검이라고 해서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무려 1만의 병력이 떼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남로군은 이제 곧 팔기군 본대의 공세를 받아 전멸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죽음을 두고 ‘상정범위’였다고는 함부로 말할 수가 없었다.



* * *



본군의 예상대로 남로군은 요양을 벗어나 청하보에 도착한 상태였다.

수많은 군기들을 펄럭이면서 남로군 2만은 여진족의 본거지인 혁도아랍을 향해 진군했고, 곧이어 아골관을 앞에 두게 되었다.

“저희 적두여진은 이여백 총병을 따르겠습니다.”

“봉산여진 역시도 마찬가지로 총병을 따르겠소!”

철령이씨를 따르던 여진부족들이 속속 이여백에게 합류했다.

누르하치의 후금은 사상누각과 같았다. 건국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통성이 약했다. 오로지 무력을 이용해 쌓아올린 나라이니 만큼, 위태로운 입지는 어쩔 수가 없었다.

“모두 고맙네. 누르하치를 멸망시키고서 그대들에게 금은보화는 물론 수많은 봉읍이 하사될 것임을 내 약속하지. 어디 그뿐인가? 내가 직접 황상께 벼슬을 청해보겠네.”

이여백은 그들을 모두 끌어안았다.

누르하치에게 원한과 증오를 가진 이들이라면 모두가 아군이었다. 병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일이었기에, 두 팔 벌려 여진부족들을 환영했다.

“총병! 총대장의 급보입니다. 서둘러 사르후에 합류하셔야 합니다!”

본군에서 보낸 전령이 남로군에 도착했다.

전령은 후금군으로 둘러싸인 요동지역을 가로지르며 구사일생으로 도착했지만, 정작 이여백은 양호의 명령을 들을 마음이 없었다.

“이미 혁도아랍이 눈앞인데 어찌 군사를 돌릴 수 있겠는가. 아골관을 함락시키면 혁도아랍을 공격할 수 있으니 이 싸움은 대명의 승리나 다름없네.”

“하지만 이건 총대장의 명령입니다! 지금 명령을 거부할 생각이십니까!”

“걱정 말게. 놈들의 본거지를 모조리 불태우고 돌아갈 것이니. 그때 가서 용서를 구하면 되지 않겠는가.”

혁도아랍이 가까워졌다.

드디어 원수를 죽일 수 있게 되었다. 가문의 원한을 갚을 날이 왔다.

이여백에게 있어 총대장의 명령 따위는 아무래도 좋을 문제였다. 후금을 멸망시키고 돌아가기만 하면 잘못을 묻기는커녕 오히려 전쟁영웅으로 대접받게 될 것이었다.

“총병, 병력이 3만에 필적하고 있습니다.”

“아골관 따위야 단숨에 돌파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기병대를 보내면 혁도아랍까지는 한걸음입니다!”

부장 하세현과 장응창의 말에 이여백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장수들의 말이 옳았다.

이제 드디어 복수를 할 날이 온 것이다. 투항을 표시하는 여진부족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으니, 하늘에 있는 선조들이 돕고 있는 것 같았다.

이여백은 본군에서 온 전령을 매몰차게 돌려보냈다.

이제 곧 결전을 앞두고 있는 이때에 괜한 미련을 두고 싶지는 않았다. 결전의 칼을 뽑는 심정으로 본군의 명령을 무시했다.

“아골관의 병력은 겨우 5천도 되지 않는다. 그 5천은 분명 아군의 진격소식에 놀란 혁도아랍에서 보낸 최후의 병력이겠지. 모조리 쳐부수고 놈의 혈육들을 찢어발기겠다!”

이여백은 칼을 뽑아들며 병사들을 다독였다.

병사들의 사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아골관은 고작해야 흙으로 급조한 수준에 불과했고, 대군을 막기 위한 관문으로는 형편이 없었다. 어째서 후금이 본거지의 모든 병력을 아골관 따위에 의지하게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알 필요도 없다고 이여백은 생각했다.

“총병, 북쪽에서 대군세가 오고 있습니다!”

그때, 앞서 정찰을 나갔던 병사들이 일제히 달려와 보고했다.

사르후 공격을 포기한 팔기군이 북쪽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백전불패의 누르하치가 직접 대군을 몰고 온다는 소식에 군사들은 크게 동요했다. 특히 이여백에게 투항한 여진부족들은 누르하치의 무용을 잘 알고 있었다. 투항을 결심했음에도 누르하치가 두려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무려 5만이 넘는 군세였다.

대군세의 등장에 이여백 역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놈 이여백아! 쥐새끼마냥 주인이 없는 집을 노리려 하느냐! 네 부친과 형님이 저승에서 비통해하고 있겠구나!”

누르하치는 여러 아들들을 거느린 채 선두에 서있었다.

과거와 비교해 크게 달라지지 않은 그의 모습에 이여백은 이를 바득 갈았다. 가문에서 종노릇이나 하던 놈이 거들먹거리며 다시 등장하자, 분노가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대명에 거역한 역적 놈아! 지금껏 너의 선조들을 우리 가문에서 돌봐주었거늘, 어찌하여 배은망덕하게 반기를 든 것이더냐. 네놈에게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당장 그 칼을 뽑아들어 자결하거라!”

이여백의 외침에도 팔기군은 변화가 없었다.

누르하치의 통치에 거부하여 투항한 여진부족과는 격이 달랐다. 그들은 오로지 누르하치를 따르는 정예군으로서, 팔기군의 깃발들을 나부끼며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다.

“총병, 지금은 아군이 불리합니다. 우선 군사를 물려서 다시 진영을 세우시지요.”

장응창이 이여백에게 말했다.

병력에서도 명군이 크게 밀렸다.

누르하치는 기병군단을 운용하고 있는 반면, 명군은 3만의 보병이 대부분이었다. 더욱이 아골관 주변은 모두 평야였으므로 팔기군에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물론이네. 이회충과 대유광의 부대를 앞에 세우고 본군은 뒤로 물러나 진영을 다시 세우게.”

이여백은 수많은 전장을 누빈 무장이었다.

조선의 벽제관 전투에서 크게 활약하는 등, 기본적인 능력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없었다. 이대로는 아군이 크게 불리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이여백은 좌군과 우군을 방패삼아 반격을 노리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누르하치의 덫이 이여백의 발을 꽉 붙잡기 시작했다.

“대장기 아래에 있는 장수가 이여백이다!”

“흰색 투구를 쓴 놈을 죽여라!”

교전의 불씨는 내부에서부터 지펴졌다.

이여백에게 투항한 여진부족들 중, 누르하치와 내통하고 있던 병력들이 있었다. 누르하치의 등장을 신호로 기습을 계획했던 여진 전사들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