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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제11장 초원의 늑대들(3)



산해총병 두송과 휘하의 두가병은 역전의 용사였다.

그 어떤 역경에서도 물러선 적이 없었다.

적이 아무리 많아도 나아가 싸워 이겼으며, 항상 승전보를 조정에 보냈었기에 군부로부터의 신임 역시도 두터웠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계범 전투는 지옥에 가까웠다.

여진의 기병대들은 일제히 진격하여 두가병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기병대들이 지나간 자리는 피와 살점으로 뒤엉킨 지옥도를 방불케 했다.

“으, 으아악!!”

“퇴각하라! 퇴각하라!”

두가병 장정들은 비명을 토해냈다.

이렇게 끔찍한 유린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지금껏 반란군과 오랑캐들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둔 두가병은 유린을 하는 입장에만 있었지 당하는 입장이 되어본 적이 없었다.

두송이 애써 진정시키려 했지만 혼란에 빠진 부대는 가망이 없었다.

기병대를 막기 위해 선두에 세운 장창부대와 방패부대는 이미 전멸했으며, 방어선이 뚫리자마자 병사들은 서로 살겠다며 도망치기에 바빴다.

“조몽린 총병이 전사했습니다!”

“다른 장수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생사를 알 수가 없습니다.”

전령들이 다급히 소식을 전달해왔다.

이미 다 틀렸다.

부대로서의 기능은 마비되었으며, 저항조차도 하지 못할 정도로 무너졌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가능성이 보이는 부대가 없었다. 여진 기병대가 철저히 아군을 유린하는 가운데, 남은 것이라고는 절망뿐이었다.

“류우절 장군과 시국동 장군에게 일러라. 군사들을 추슬러 사르후로 퇴각하라고!”

“자, 장군께옵서는…….”

“여기서 죽겠다. 아군이 퇴각할 시간을 벌어야 하니!”

두송은 수백 명의 친위기병대와 함께 돌격을 감행했다.

이미 전세는 여진에게로 넘어갔다.

하지만 그것이 물러설 이유는 되지 않았다. 비록 우둔하다는 평가를 받는 장수였지만, 적어도 그는 명나라 황실을 향한 충성심만큼은 대단했다. 두송은 결코 오랑캐들에게 항복하지 않으리라 맹세하고는 적진을 향해 나아갔다.

“여기 산해총병 두송이 있다!”

그는 전장의 한가운데서 고함을 치며 달려갔다.

그러자 여진 기병들이 몰아쳐오기 시작했다.

적장의 수급은 여진족에게 있어 최고의 무훈이었다. 누르하치에게 바친다면 장군의 자리를 얻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였다. 두송은 부장들에게 명령하여 자신의 대장기를 크게 펄럭이도록 했다.

“이놈들!”

두송의 창이 여진 기병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는 수많은 전장을 돌파한 맹장다운 무력을 선보였다.

팔기군을 상대로도 물러서지 않는 담대함과 여진 장수를 거뜬히 상대해내는 창술. 두송의 목숨을 건 특공에 아군 병사들 역시 감화되기 시작했다.

“두송 총병을 따르라!”

“명군들이여, 분전하라!”

유린당하기만 하던 두가병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멀리서 전황을 지켜보고 있던 누르하치에게 있어서는 몹시도 불쾌한 상황이었다.

“다이샨을 보내라.”

명나라의 희망을 짓밟아버리기 위함이었다.

누르하치는 제일의 무력을 자랑하는 둘째 아들 다이샨을 보내면서 적들을 유린하라 명령했다.

이윽고 다이샨과 그의 휘하 부대들이 출격했다.

다이샨은 무순 전투에서 장승음을 죽인 바가 있었다. 누르하치의 혈육이면서 동시에 팔기군 최강의 전사로 유명한 인물이 전장을 가로지르며 두송에게 접근했다.

“총병, 저기를 보시옵소서!”

부장이 크게 소리쳤다.

거대한 무언가가 오고 있었다. 수많은 여진 장수를 쓰러트린 두송은 숨을 고르며 부장이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들었다.

“총병을 지켜라!”

“이 짐승 놈아, 내가 상대해주마!”

친위무장들이 잇달아 뛰쳐나가며 다이샨을 저지했다.

다이샨은 맹렬하게 질주하는 짐승을 연상시켰다.

아무렇게나 기른 머리카락과 시커먼 숯검정을 칠한 얼굴로 인해 도저히 인간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그 해괴한 모습에 명나라 장수들은 잠시 멈칫거렸지만, 이내 칼을 뽑아들며 다이샨에게 달려들었다.

“크악!”

“마, 막아라! 괴물 같은 놈이다!”

수많은 장수들이 달려들었음에도 다이샨을 막아내지 못했다.

다이샨은 서슬 퍼런 대검을 휘두르며 장수들을 베어갔다.

용맹하던 장수들이 연이어 당하자 병사들이 겁을 먹었는지 좌우로 갈라졌다. 덕분에 다이샨은 장정들을 무자비하게 뚫으며 진격할 수 있었다.

여진 최강의 장수 다이샨.

수많은 장정들을 뚫어낸 그가 드디어 두송과 교전에 들어갔다.

“산짐승 같은 오랑캐들답게 짐승 같이 생긴 놈이로구나!”

두송이 일갈하며 창을 휘둘렀다.

하지만 용맹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이샨이 휘두른 대검에 창이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 고작 일격에 용맹하던 두송은 최후를 맞이했다. 몸이 크게 베인 두송은 말에서 굴러 떨어져 죽었고, 두송의 죽음에 분노한 부장들 역시 다이샨과 그 휘하 병사들에게 목이 달아났다.

“다이샨 패륵께서 적장을 죽이셨다!”

“으하하하! 역시 패륵이시다!”

여진 병사들의 함성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용맹과 무력에 있어서는 다이샨을 따라올 자가 없었다.

다이샨의 무명을 경외하던 전사들은 병장기를 치켜들며 다시 한 번 함성을 내질렀다.

“과연 대단하십니다, 패륵.”

휘하 장수의 감탄에도 불구하고 다이샨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다음 사냥감을 향해서 말고삐를 당겼을 뿐이었다. 이윽고 다이샨을 따라 진격하면서 팔기군은 전장에 남아있는 적들을 모조리 유린했다.



* * *



계범에서 패주한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누르하치는 패잔병들을 용서치 않았다.

항복해오면 살려주는 것이 그동안의 원칙이었지만, 그 원칙은 침략군에 한해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명군을 모조리 학살하면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부하들과 함께 도망치던 명나라의 유격장들은 모두 사로잡혀 참수 당했으며, 전장에서 죽은 자와 도망치다가 사냥 당한 자들까지 합하여 수천에 달하는 병력들이 겨우 반나절 만에 모두 죽고 말았다.

“공격하라!”

“오늘 안으로 사르후를 탈환한다!”

누르하치는 여세를 몰아 사르후를 공격했다.

사르후는 보정총병 왕선이 지키고 있었다.

불과 1만도 안 되는 병력이 주둔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놀랍게도 팔기군의 맹습을 여러 번이나 물리치면서 저력을 토해냈다.

깊게 파둔 참호.

그리고 사르후 산의 고지들마다 배치된 화포들까지.

더욱이 명나라 보병들이 다루는 불랑기포(佛狼機砲) 때문에 번번이 기병대의 진격이 가로막히고 있었다.

“분전하라! 이 사르후는 아군의 집결지다. 집결지를 빼앗기면 우리들에게 내일은 없다!”

계범 전투의 패전으로 사기가 꺾였다고는 하나, 전쟁에서 패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승산은 있었다.

하지만 사르후를 끝까지 사수해내야만 가능한 경우였다. 그렇기에 왕선은 아군이 결집될 수 있도록 구심점 역할을 할 사르후를 끝까지 지켜내려 했다.

“쏴라!”

“오랑캐들이 온다!”

화승총들이 불을 뿜었다.

화포들이 일제히 발포되는 한편, 언덕 위에 있던 궁병들이 활을 쏘며 달려들던 여진 기병대를 좌절시켰다.

명군은 방어전에 있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누르하치는 많은 군사를 잃은 후에야 그것을 인정했다. 적들도 마냥 허수아비만은 아니었다.

“코가친, 승산이 있어 보이느냐?”

“어렵습니다. 이미 사르후 산 전체가 명군의 요새가 되어버렸습니다.”

두송의 정예군단을 완파한 것까지는 좋았다.

거기까지는 모두 누르하치의 작전대로였다. 놈들은 어리석게도 덫인 줄도 모른 채 파고들었고, 결국 그 어리석음으로 인해 황천길로 떨어졌다.

하지만 사르후는 어떤가?

병력의 우위를 이용해서 당장 사르후를 점령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참호와 목책을 두른 사르후 산은 하나의 산성이 되어버렸고, 여진이 자랑하는 기병대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여전히 승기는 대가한께 있습니다. 이여백이 이끄는 부대가 혁도아랍으로 진군해오고 있다 합니다.”

요동은 이미 여진의 땅이 되었다.

부대의 이동은 물론 사소한 움직임까지도 모두 여진의 정찰병에게 감시당하고 있었다.

코가친의 말에 누르하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여백이라. 그 아비였던 이성량과 마찬가지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놈이다. 주제도 모르는 놈이 어리석게도 군사를 몰고 혁도아랍으로 오고 있었다.

“내 드디어 철령이씨 놈들을 모조리 죽일 때가 왔나 보군. 이여백, 그놈을 죽여 이성량이 뿌리내린 혈육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겠다.”

누르하치는 철군을 명령했다.

두들겨도 열리지 않는 문에 미련을 두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여기서 시간을 축내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명나라 군단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있는 지금이야말로, 저들의 약점을 충분히 이용해야 할 때였다.

철령을 넘은 북로군이 드디어 무순성에 도착했다.

유격군과 양호의 본대는 심양성을 넘어 혼하를 건너고 있었고, 동로군의 유정은 여전히 관전보에서 공방을 치르고 있었다.

“사르후가 워낙 꽉 막혀있어 북쪽의 군대와 서쪽에서 밀려드는 군대는 막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여백이 이끄는 부대는 다릅니다. 서로 동떨어져 개별행동을 하고 있으니, 충분히 노려볼 만합니다.”

“놈이 내게 기회를 주는구나. 사르후가 막혀서 내심 불안했거늘.”

“이여백을 격파하면 명군도 흔들릴 겁니다. 이미 두송이 계범에서 죽지 않았습니까.”

두송의 죽음이 명군의 사기에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했다.

무려 1만에 이르는 병력이 전멸했다.

이로써 팔기군의 위명이 명나라의 십만 대군을 옥죄기 시작하겠지. 요하를 건너 원정을 온 군사들이니만큼, 사기에 매우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공염수, 이희필.”

“부르셨습니까, 대가한.”

누르하치의 부름에 두 장수들이 부복했다.

“너희들은 사르후를 감시해라. 적들이 움직이더라도 결코 공격하지 말고 맡은 자리에서 대기하도록.”

“알겠습니다.”

누르하치는 우선 사르후에서 눈을 돌리기로 했다.

언젠가는 함락시켜야 할 곳이기는 하나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주제도 모르는 이여백이 부족의 본거지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그를 상대해야 할 때였다.

그러나 본거지가 노려지고 있음에도 누르하치는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이여백은 대장의 재목도 안 되는 소인배였다. 이성량의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놈을 대장으로 임명한 명나라 황실이 우습게 느껴졌다.

“수백 년의 역사를 품은 나라가 괜히 멸망하는 게 아니구나.”

누르하치는 중후한 웃음을 흘렸다.

지금까지 수많은 나라들이 건국과 멸망을 반복해왔다.

어느 나라도 멸망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나라가 멸망하기 전, 여러 번이나 징조가 발생하면서 망국의 위험을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망국의 군주들이 결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군사를 모으라. 이여백을 죽이러 직접 가겠다.”

누르하치는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까지 흘린 피로는 부족하다.

만주인들을 갈취하고 수탈한 한족들을 향한 원한과 증오는 겨우 이 정도에서 그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시체로 산을 이루고 피로 바다를 이룰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따르겠습니다, 대가한.”

“반드시 이여백을 죽여 보이겠습니다.”

후금의 무장들이 누르하치의 뒤를 이었다.

사르후를 포위하고 있던 팔기군은 전선을 이탈했다.

1만을 그대로 사르후에 남긴 채, 누르하치는 나머지 본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말 머리를 돌렸다. 이에 왕선은 적의 움직임을 경고하는 전령을 보냈지만, 어느 누구도 여진의 감시망을 뚫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