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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제11장 초원의 늑대들(2)



대명의 정벌군은 15만에 육박하는 병력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문제점은 서로 뿔뿔이 흩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북로군의 마림은 예허부 병력과 함께 철령을 지나는 중이었고, 남로군의 이여백은 요양에서 출발하여 태자하를 건너는 중이었다.

한편 다른 군단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동로군의 유정은 관전보에서 팔기군의 습격을 받고 있었으며, 총사령관 양호가 이끄는 병력은 유격군을 이끌고 있는 주유검과 함께 이제야 요하를 넘기 시작하고 있었다.

“적들이 계범(界凡)에도 진을 치고 있다면 응당 나아가 격퇴해야 할 일이다!”

사르후 전투의 승전으로 들떴는지, 두송은 부장들에게 다시 한 번 공세를 명령했다.

1만의 두가병은 무적이다.

이미 그 무명을 듣고 놀란 누르하치가 도망치지 않았던가. 주변에 군세가 없음을 확인한 두송은 허무하게 무너진 사르후와 마찬가지로 계범 역시 그리 될 것이라 단언하고 있었다.

“하오나 총병, 총사령의 명령을 잊으셨소! 더 이상은 안 되오!”

보정총병 왕선은 크게 반발했다.

이미 서로군은 선봉대로서의 역할을 무사히 해냈다.

더 이상의 군공은 탐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군은 심양성과 무순성에 무혈입성했으며, 앞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사르후까지 점령해냈다.

아군의 십만 대군이 주둔하기 위한 거점으로는 이만하면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을 모르는 욕심에 두송은 다시 한 번 후금군의 거점을 박살내겠다며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사르후에서 승리를 거뒀거늘, 어찌 보정총병은 염려를 하는 것이오? 걱정 마시오, 이번에도 분명 아군이 큰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니.”

“총병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여진족 따위야 얼마든지 싸워도 이길 수 있습니다.”

사르후 전투에서 얻은 자신감 때문일까.

원임총병 조몽린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유격장들이 두송의 의견에 찬성하고 나섰다.

“두가병만 있으면 충분하오. 나머지 병력은 무순과 심양, 그리고 사르후의 방어군으로 보내겠소.”

“그리되면 전선이 지나치게 길어지오. 아군만으로는 동서로 길게 이어진 전선 모두를 감당할 수가 없소!”

두송의 작전은 지나치게 위험했다.

자칫 적들이 급습이라도 가했다가는 모든 부대들이 와해될 우려가 있었다. 사르후 전투처럼 계범에서도 능히 승리를 거둘 수 있다면 모를까, 누르하치가 가만히 좌시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누르하치는 수백 년 동안 합쳐지지 않았던 여진부족들을 모두 복속시킨 인물이었다.

그런 비범한 인물이 아군의 약점을 간파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 그렇기에 왕선은 결사반대를 내비쳤지만, 결국 일은 군사권을 가진 두송의 뜻대로 흘러가게 되었다.

“나는 사르후에 남아 군사를 이끌고 있겠소. 혹여 계범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사르후로 철수하시오.”

왕선은 끝까지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직속부대를 이끌고 사르후에 주둔하기로 했고, 이에 두송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르후를 맡기는 것으로 옆에서 쫑알거리던 잔소리꾼을 내칠 수만 있다면, 이는 오히려 바라던 바였기 때문이었다.

“그럼 총병께서는 아군의 승전보나 기다리시오. 아군이 또다시 멋지게 승전을 거둘 터이니!”

두송은 다시 1만의 두가병을 이끌고 출병했다.

그는 점령한 사르후를 지나 맞은편에 위치한 계범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마침 적들은 사르후와 마찬가지로 계범 산에 진을 치고서 성을 쌓고 있었다. 이에 장수들은 사르후 전투처럼 자신들이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둘 것이라 기대했다.

“깃발을 들어라!”

두송의 명령에 1만 병력은 일제히 깃발을 추켜올렸다.

위풍당당하게 진군하여 적들을 신속하게 격파한다.

대명의 선봉군으로서 명예를 떨어트려서는 안 된다. 그는 한껏 위상을 드높이고자 고각소리를 크게 울리게 했고, 병사들에게 함성을 내지르며 적들을 위협하도록 명령했다.

“왕선 총병은 너무 걱정이 많아서 탈입니다.”

“계범에서 승전을 거두신다면 무명이 천하에 닿을 것입니다.”

장수들 역시도 두송과 마찬가지로 태평스런 모습을 보였다.

저번 전투에서 이겼으니 이번 전투에서도 이길 것이다.

계범 또한 사르후와 마찬가지인 상황이라고 판단했기에 장수들이 안심하고 병력을 이끄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계범은 사르후와는 달랐다.

불운하게도 두가병은 계범 인근에 도달하고 나서야 그것을 깨닫게 되었다.

“쏴라!”

“드디어 놈들이 왔다!”

계범에 매복하고 있던 후금군들은 일제히 활을 겨눴다.

사르후가 점령당하기 전, 후금은 병사들을 은밀하게 계범으로 보냈다.

승전보에 두가병이 축배를 드는 동안, 여진족 병사는 전신을 나무덩굴과 잎사귀 등으로 위장한 채 좁은 틈새에 숨어 있었다.

무려 5천에 달하는 병력이었다.

더욱이 그 병력들은 여진부족의 사냥꾼 출신들로서, 산짐승은 물론 하늘 위의 제비까지 쏴서 맞출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문제될 것 없다! 고작해야 언덕에 불과한 산이다. 물러서지 말고 진격하라!”

두송은 칼을 빼들며 군사들에게 진격명령을 내렸다.

천하의 명나라 군이 오랑캐의 화살이 두려워 물러설 수는 없었다.

게다가 자신은 십만 대군을 이끌 선봉대를 맡은 몸이 아닌가. 두송은 아군이 충분히 분전한다면 이 정도의 난관 따위야 언제든 돌파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장수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능히 이길 수 있는 법이다. 지금껏 두가병은 아무리 많은 적이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가 싸웠다. 고작해야 오랑캐 따위에게 등을 보인다면 면목이 서지 않을 것이다.

“공격!”

“우리들은 두가병이다! 우리의 용맹을 보여주자!”

공방전에 있어서는 두가병이 유리했다.

잘 정돈된 병장기와 견고한 갑옷을 입은 정예보병은 여진족에게는 없는 가장 큰 무기였다. 조악한 화살이 얼마가 빗발치든, 갑옷과 방패를 믿고 나아간다면 적에게 백병전을 걸어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누르하치 역시 이를 간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예보병을 선봉에 세우고 적진을 강행 돌파한다. 이는 명나라의 기본적인 전략이자 수법이었다. 그는 당연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판단했다.

피이이이익!!

신호탄 역할을 하는 불꽃무리가 계범의 하늘을 물들였다. 그리고 그 순간, 땅이 움직였다.

“저기 한족 놈들이 보인다!”

“공격하라! 우리 형제들의 원수를 갚아주자!”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면서 멀리 보이던 지평선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자그마치 6만에 이르는 팔기군이었다.

각 부대의 깃발들을 일제히 흔들면서 진격해오는 팔기군의 존재에 두가병은 크게 흔들렸다. 지면이 크게 울릴 때마다 병사들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갔다. 수많은 전투를 경험한 정예병들이었기에 자신들이 함정에 빠졌음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어서 산으로 올려 보낸 군사를 회군시켜라! 그리고 좌익군과 우익군을 불러들여 군진을 형성하라!”

두송은 급하게 명령을 내렸다.

현재 아군은 계범을 공격하기 위해 부대가 나뉜 상황이었다.

이미 산으로 올라가버린 부대는 맹렬한 화살공격에 발목이 잡혀버렸고, 계범을 포위하고 있던 병력은 진형을 크게 확산시킨 상태였다.

“가, 감히 나를 함정에 빠트려? 고작해야 오랑캐 따위가! 이 두송은 적이 아무리 많더라도 물러서지 않는다!!”

부장들은 퇴각을 거론했지만 두송은 뽑아든 칼을 집어넣을 생각이 없었다.

저 무리들 속에 누르하치가 있다.

설령 죽더라도 누르하치와 함께 죽을 것이다. 적어도 선봉대가 적의 대군을 앞에 두고서도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는 용맹함은 보여줘야 한다.

두송은 지평선 너머로 보이는 팔기군을 응시했다.

정작 싸움에 임할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해버렸지만, 두송은 자신의 무명을 위해 기꺼이 싸우다 죽겠다며 끝까지 자리를 고수했다.



* * *



한편 유격군은 요하를 넘고 있는 상황이었다.

화포를 실은 수레들이 많다보니 진군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요하를 건너자마자 차츰 속도가 붙으면서 심양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유격군은 심양성에 나부끼는 명나라 군기를 확인했다.

병사들은 드디어 강행군을 끝내고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음에 기뻐했다. 한편 주유검은 전령을 보내 서로군의 상황을 살펴보라고 명령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뭔가 변고가 생길 것 같아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신백 장군, 1백 기를 이끌고 사르후로 가서 상황을 확인하라.”

“알겠습니다, 전하.”

곧이어 신백이 요동마병을 이끌고 사르후로 향했다.

그럼에도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군은 심양성과 무순성을 무혈로 점령한 것을 크게 기뻐하고 있었지만, 주유검은 이미 그럴 것임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아군이 사르후에 얌전히 주둔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서로 나뉘게 되어 각개격파를 당하게 된다. 군단장들이 처음 모였을 때부터 줄곧 이야기한 내용이었지만, 결국 모든 것은 군단장들에게 달린 일이었다. 특히 주유검은 줄곧 두송이 우려스러웠다.

[마음 같아서는 두송이라는 놈을 치워버리고 싶었다만, 우리 신분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결국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두송이 얌전히 사르후에 있어주기만을 바라는 것뿐이로구나.]

‘적어도 사람이라면 말을 알아들었을 텐데……. 동네 개새끼도 앉으라고 하면 얌전히 앉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인두겁을 쓴 사람새끼라면 그러면 안 되죠.’

[개와 사람이 같으냐.]

‘하긴 사람이 개보다 못하기도 하죠.’

[그렇지.]

현재 명나라의 사정을 보면 알 수 있는 문제였다.

개보다도 지능이 떨어지는 인간이 옥좌를 차지하고 있질 않나, 그 옆에 있는 뚱땡이도 아비를 쏙 빼닮아 지능이 월등히 떨어졌다. 그런 놈들이 목에 힘을 주고서 거들먹거린 탓에 이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까지 내몰리고 만 것이었다.

주유검은 명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결전에 출전했다.

흥망성쇠의 갈림길에 선 입장으로서 마음이 편할 수만은 없었다.

“전하, 심양성으로 들어가 푹 쉬시죠. 그동안의 강행군으로 노고가 많지 않았습니까?”

“알겠다.”

조문조의 말에 주유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이어진 강행군으로 병사들도 크게 지쳐있었다.

조바심이 든다고 무리하게 병사들을 다그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은 결전에 투자할 힘을 비축하고 있어야 할 때였다.

“그간 낙오한 병사는 없었나?”

“제법 있었습니다만 손전정 장군이 모두 인솔해올 것입니다.”

“조선군에 술과 고기를 보내라. 그들도 강행군으로 크게 지쳤을 터이니.”

“예!”

강행군으로 지쳤을 거라 예상했지만, 오히려 조선군은 쌩쌩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요하를 건너 요동에 도착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었다.

조선의 장수들은 스스로를 고구려의 후예라 자칭하고 있었고, 고구려의 옛 땅인 요동에 왔음에 감격하기까지 했다.

“영감님, 공주가 구태여 제게 거울을 준 이유가 뭘까요?”

이윽고 조문조가 물러나자, 주유검이 입을 열며 숭정제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는 품안에 두었던 거울을 꺼냈다.

그것은 날아오는 화살도 거뜬히 막아낼 수 있을 것처럼 제법 묵직했다. 설마 북경까지 와서 행운의 부적으로 거울을 건네줄 줄이야. 그 냉철한 성격의 공주가 민담에 불과한 미신을 믿고 있을 줄은 몰랐다.

[지아비가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여인네의 마음이 아니겠느냐?]

“설마 경월공주가 절 처음 보자마자 연모의 감정을 느꼈을 리는 없을 테고…….”

주유검은 주서연이 자신을 ‘사내’로서가 아닌 ‘황제’로서 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주서연은 야욕이 매우 큰 여인이었다.

그녀는 남경을 벗어나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황후가 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변변찮은 황족들을 물리고 자신을 선택한 것이고, 남경에서부터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주유검이 거울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는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그녀에게 약속을 했다.

그로 인해 북경으로 살아서 돌아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물론 그건 기쁜 일이지만 아직은 알 수 없는 감정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새색시의 손을 처음 잡아보는 숫총각도 아니고, 웬 시답잖은 생각이더냐. 하긴 넌 여자 손도 제대로 못 잡아봤다고 했지.]

“그 얘기가 여기서 또 왜 나옵니까?”

[현모양처 같은 부인이 기다리고 있는데 딴 생각이나 하는 네가 답답해서 그런다.]

“아직 신혼방도 차리지 않았는데 상대가 현모양처인지 조강지처인지는 어떻게 압니까?”

[그러니 일단 걱정은 집어넣으란 말이다. 아직 너와 공주는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으니.]

숭정제의 말에 주유검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 요동의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심야의 어둠을 횃불로 밝힌 심양성과 저 멀리 보이는 무순성. 그리고 그 너머에는 사르후가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