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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제11장 초원의 늑대들(1)



사르후 전투에서 서로군이 첫 승전을 거뒀다.

십만 대군의 사기가 크게 치솟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선봉군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선봉군의 승전만큼 아군의 사기를 높이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두송의 승전에 많은 장수들이 환호성을 보내왔다.

“과연 대단하시군.”

북로군의 마림도 승전에 찬사를 보냈다.

비록 소소한 결과일지도 모르나 첫 승전보를 전했다는 게 중요했다.

두송이 선봉장에 임명되었다는 것에 우려를 표명한 장수들도 여럿 있었으나, 지금만큼은 두송의 승전보를 하나같이 기뻐했다.

“누르하치는 만주의 부족들을 억압하려 하고 있소. 우리 예허부는 옛적부터 대명의 은혜를 입은 부족이니, 지금부터라도 누르하치와 싸우겠소!”

해서여진의 예허부가 누르하치에게 반기를 들었다.

명나라가 정벌군을 일으키기 전부터 그들은 명과 내통하고 있었다.

비록 예허부의 중진들이 공주를 누르하치에게 시집보낼 정도로 깊은 관계를 맺고는 있었지만, 휘하 부족들은 누르하치의 강압적인 정책이 부족의 문화를 말살하고 있다며 오래전부터 불만을 품어왔다.

“고맙소. 누르하치를 멸하고 그대들을 부족의 우두머리로 세워 주리다.”

북로군의 마림과 예허부의 반란세력은 손을 잡았다.

2만에 불과했던 북로군에 예허부 병력이 합류하면서 3만이 훌쩍 넘어서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불어난 3만 병력은 누르하치에게 있어서도 매우 골치 아픈 존재가 될 터였다. 예허부의 패륵 김태길, 부족장 포양고가 길잡이 역할을 자청했고, 덕분에 북로군은 낯선 지역에서도 길을 잃은 채 헤매지 않을 수 있었다.

“아군은 곧장 사르후로 진군할 것이오. 그곳에서 아군과 합류한 뒤, 전군이 일제히 진격하여 누르하치의 수급을 베고 대명의 깃발을 다시금 이 땅에 세우려 하오.”

“우리 예허부도 돕겠습니다. 대명과의 평화를 깨트린 것은 누르하치입니다!”

여진족도 매번 대명에게 수탈만 당해온 것은 아니었다.

특히 예허부는 명나라와의 교역으로 많은 이윤을 챙겨온 부족이었다.

당연히 여진과 명나라의 외교적 불화가 그들에게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누르하치로 인해 교역길이 완전히 막혀버리면서 예허부는 숨도 못 쉴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 모든 책임이 누르하치에게 있다.

예허부에서 반란을 일으킨 김태길과 포양고가 쥔 명분이었다. 예허부에는 아직도 어느 편에 설지 몰라 망설이는 예하 부족들이 많았지만, 명나라가 유리해지면 곧바로 군사를 보내올 게 분명했다.

“누르하치가 부족들을 모두 복속시켰다고는 하나, 속으로는 불만을 가진 부족들이 많습니다. 그 불화를 이용한다면 손쉽게 누르하치를 궤멸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김태길이 유창한 중원어를 구사하며 말했다.

야인여진처럼 무식한 야만인들이 있는가 하면, 해서여진의 예허부처럼 한인문화를 받아들인 부족도 적지 않았다. 누르하치의 적은 명나라만이 아니었다. 그를 괴롭히는 진정한 복병은 명나라의 관습과 문화를 따르고 있는 여진부족들 전부였다.

“우선 개원(開院)에서 철령(鐵嶺)을 지나 사르후로 합류할 것이오.”

명나라와 여진의 연합군 3만은 남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누르하치의 본거지인 혁도아랍에서 집결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작전을 수립하기 전에 주유검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병력의 집결지가 사르후로 변경되었다.

마림은 순순히 주유검의 의견을 따랐다.

그 역시 누르하치의 팔기군을 위협적이라 생각하고는 각개격파의 위험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남로군을 이끄는 이여백은 요동총병 이성량의 차남이자 제독 이여송의 동생이었다.

철령이씨는 오랫동안 철령을 다스려왔던 가문이었다.

그동안은 세력을 떨치며 여진부족을 복속시켜 왔지만 이성량이 죽으면서 가문이 몰락하기 시작했고, 철령이씨에 복종하는 부족장 중 하나였던 누르하치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가문의 재산과 영지들을 모조리 빼앗겨버렸다.

이여백에게 있어 누르하치는 철천지원수였다.

그는 가문을 몰락시킨 원흉이었다. 많은 장수들은 대명에 반란을 일으킨 누르하치를 토벌하고 국운을 살리기 위해서 참전했지만, 이여백은 오로지 개인적인 원한으로 참전했다.

“요양이 이토록 피폐해질 줄이야. 누르하치 이놈……! 내 반드시 놈의 수급을 취하리라!!”

철령이씨 가문의 본거지였던 요양은 북방제일의 교역지로 유명한 도시였다.

하지만 그 위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누르하치가 요양을 모조리 초토화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는 도시를 점거하고 철령이씨를 멸문시키면서 끔찍한 칼날을 휘둘렀다.

과거 이성량이 누르하치의 조부와 부친을 죽인 것이 그 이유였다.

비록 사소한 실수에서 비롯된 사고였다고는 하나, 누르하치는 자신의 조부와 부친을 죽인 이성량을 용서치 않았다. 결국 또 다른 복수가 복수의 꼬리를 물게 된 셈이었다.

“관료양부총병 하세현, 2천의 병력을 이끌고 도착했습니다.”

“관의주참장사 이회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원임군의 유격장들을 비롯해, 요동에 웅거하던 세력들이 집결했다.

그들 모두는 이여백의 부친인 이성량을 따르던 군벌 출신이었다.

누르하치의 대두로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군벌들이 이여백에게 합류하면서 각자 2천의 병력을 이끌고 오게 된 것이었다.

“모두들 고맙소. 그대들과 힘을 합쳐 누르하치의 수급을 거둘 것이오. 내 부친의 원수를 갚고 저 오랑캐들에게 빼앗긴 고토를 되찾읍시다.”

“하늘에 계신 주군의 원수를 갚는 일입니다.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어느덧 이여백의 군사는 2만을 훌쩍 넘어서게 되었다.

십만으로 출발한 원정군은 점점 군세를 불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북로군이 예허부의 반란세력과 합류하였듯, 남로군의 이여백 역시 요동에서 군벌들을 동참시키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병력이 증강되었다.

“누르하치는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오?”

“사르후에서는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혁도아랍에 틀어박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과연 겁쟁이 같은 놈이오.”

누르하치와 팔기군의 동태는 아직까지도 확인되지 않고 있었다.

사르후에서 선봉군이 승리를 거뒀다.

병사들이 죽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누르하치의 움직임에 다들 강한 경각심을 느끼고 있었다.

“유격장들이 모두 집결했습니다.”

“그럼 이제 누르하치의 목을 취하러 가자. 전군 혁도아랍으로 간다!”

이여백의 명령에 부장 장응창이 물었다.

“하오나 총병, 총사령관께서는 집결지를 사르후로 잡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아군이 사르후에 몰리는 만큼, 적들도 분명 사르후를 집중하고 있을 게 아니냐. 서로 대치하고 있는 틈을 노려 놈들의 본거지를 불태워버리겠다. 누르하치만 죽이면 알아서 흩어질 오랑캐들이다. 번거롭게 놈들과 전면전을 펼칠 이유가 없다.”

설령 작전이 대성공을 거둔다 해도, 총사령관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반역죄에 해당된다.

하지만 이여백은 혁도아랍을 공격하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가문의 원수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철령이씨를 멸족시키고 터전이었던 요양을 쑥대밭으로 만든 누르하치를 결코 용서할 수는 없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아버님과 형님이 계신 곳으로 보내주마, 누르하치!’

이여백은 이를 바득 갈며 중얼거렸다.

아직 팔기군의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여백은 개인적인 복수에 눈이 멀어 군사를 움직였다. 휘하에 모인 2만 병력에 대한 신뢰가 매우 깊기 때문이었는데, 설령 누르하치와 혁도아랍에서 싸우게 된다 하더라도 충분히 격퇴할 수 있을 거라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 * *



동로군의 유정은 관전보에 머물며 조선에서 보내온 군량들을 보급하고 있었다.

관전보에서 계속해 북진하면 혁도아랍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는 시시각각으로 전투의 양상을 보고받는 한편, 전령을 압록강 너머로 보내어 평양에 있을 조선의 임금에게도 보고를 올렸다.

“총사령이 신호를 보내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린다. 혁도아랍에서 공방전이 벌어지면 우리들의 역할이 중요해질 것이다.”

사르후와는 거리가 먼 관전보에 주둔하고 있는 동로군이었지만, 그 역할만큼은 다른 어느 군단보다도 중요했다.

장기전으로 이어질 경우를 대비해 동로군은 군량들을 비축하고 있었다.

요동의 험준한 산길은 수송에 불리하다. 그래서 명나라는 해로를 통해 조선으로 군량을 수송했고, 조선은 수송 받은 군량을 압록강 위로 보내어 동로군에게 전달했다.

“포루를 배치해라. 적들이 혹여 군량을 노릴지도 모른다.”

“이곳 관전보는 절대로 함락되어서는 안 된다.”

유정은 장수로서 그리 뛰어난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어느 장수보다도 신중하기로 유명했다.

그는 명나라와 조선에서 수송해온 화포들을 전면에 배치하는 한편, 적이 쳐들어올 것으로 예상되는 방면마다 병사들을 배치했다. 더욱이 압록강 너머의 평양과 연계를 취하면서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지원을 부탁했다.

“너무 신중하신 것 아니십니까?”

“여긴 후방입니다. 적들이 올 리가 없지 않습니까.”

장수들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유정은 외골수처럼 방어준비를 명령했다.

그도 원래부터 이렇게 신중한 성격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왜란에 파병군으로 참전했던 시절, 그는 왜군으로부터 보급 창고들을 습격당해 아사 직전까지 굶은 적이 있었다. 그 고통과 아픔이 그를 신중한 성격으로 만들었고, 매사에 경계를 기울이며 의심을 품게 했다.

“설마 이 관전보에 또 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부장 조천정이 말했다.

관전보는 명나라보다는 조선에게 더 뜻 깊은 지역이었다.

왜란을 피해 몽진한 조선의 임금이 의주에 머무르고 있던 시절, 왜군이 평양을 넘어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에 임금은 사신을 보내어 명나라 영토 안으로 피신하고 싶다는 입장을 보내왔다.

하지만 명나라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조선의 임금이 명나라까지 와버리면 왜란에서 이길 승산이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명나라는 요동의 변방지역인 관전보를 내어주며 조선의 임금을 그곳에 머물게 했다.

“총병!”

그때, 깃발을 든 전령이 다급하게 본진으로 들어왔다.

이윽고 전령이 입을 열었다.

“팔기군이 곧장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그 수는 많지 않으나, 아마도 관전보의 보급로가 발각된 모양입니다!”

“전투준비를 취해라! 관전보를 중심으로 방어태세를 갖춘다!”

유정은 올 게 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바로 관전보에 주둔한 전군에 방어를 명령했다.

제아무리 용맹한 팔기군이라 해도, 화포로 무장한 방어진을 돌파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동로군은 그 병력이 1만 2천에 달했으므로 가벼이 공격했다가는 도리어 팔기군이 무너지게 될 터였다.

“다시는 오랑캐들에게 패배하지 않겠노라 맹세했다! 오랑캐 놈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줄 것이야!”

팔기군이 접근하자 관전보의 화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화염이 작렬하면서 팔기군은 쓰러져갔다.

후금의 병력을 지휘하던 망굴다이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지금껏 망굴다이는 화포의 위력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누르하치의 다섯 번째 아들인 망굴다이는 눈앞에 보이는 거점이 화약더미로 뒤덮인 철옹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병력을 물려라. 우리가 감히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방어에 돌입한 명군을 상대로 전면전을 택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더욱이 적군은 미리 거점을 잡아두고 화포로 무장한 상태가 아닌가. 놈들을 치려했다면 좀 더 빨리 와서 공격했어야 했다.

“하오나 패륵! 놈들의 군량창고를 불태우지 않으면 전황이 불리해집니다!”

“그 군량창고에서 군량이 나가지 않게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더냐.”

유정이 신중한 성격의 장수인 것처럼, 망굴다이 역시 신중한 성격의 장수였다.

관전보는 단순히 흙으로 쌓아올린 작은 읍성일 뿐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화포였다. 주변 지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화포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팔기군을 조준하고 있었다.

“각 부장들은 휘하병력을 이끌고 아군이 대군인 것처럼 위장하라. 나는 직속부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치겠다.”

적이 아무리 많은 군량을 가지고 있다 해도 단 한 톨의 쌀조차도 본군에 수송되지 못한다면 이는 없는 것과 진배없다.

망굴다이는 관전보의 길목마다 병사들을 배치했다.

병력을 속인 속임수는 언젠가 들통이 나겠지만, 적어도 시간벌이만큼은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 틈에 자신은 관전보에 군량을 보급하고 있는 조선의 수송부대를 쓸어버릴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