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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제9장 두 명의 왕(4)



여진 정벌전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임금의 참전 결정과 함께 도감군은 빠르게 움직였다.

도원수(都元帥)에 강홍립을, 부원수에 김경서를 임명하면서 1만 7천의 군사권을 위임했다. 도원수와 부원수를 임명하는 한편, 부대를 이끌 장수들을 연이어 임명하면서 지휘계통 또한 확립했다.

“이제 조선에서 할 일은 끝났다.”

남은 시간은 한 달하고도 보름.

주유검 역시도 하루빨리 명나라로 돌아가 부대를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선에서 할 일은 매듭지었다 해도, 본국의 전쟁준비가 미처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감축 드립니다. 전하께서 거두신 쾌거가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지 조선은 정벌전에 대해 미온한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본격적으로 전쟁 준비에 나섰으니, 이 모든 공이 주유검에게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불을 지피는 데 성공했다. 조선이 북방으로 나아가기 위한 불이다.’

조선의 판세가 임금 이혼에게로 넘어갔다는 것은 피부로도 느낄 수 있었다.

지금껏 왕을 옥죄고 있던 모든 족쇄들이 풀렸다.

명나라가 정식으로 그를 조선군왕에 책봉했다. 더욱이 황제가 직접 폐모살제를 부정한 지금, 어느 누구도 이혼을 막지 못할 것이다. 북인(北人)과 서인(西人)의 몰락이 시작된 한편, 왕의 총신들이 성장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하온데 조선왕의 조건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전쟁이 끝난 뒤에 확답을 주겠다고 했다.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지.”

이혼은 주유검에게 동맹의 또 다른 조건을 걸었다.

조선 왕실의 여인을 신왕의 측비(側妃)로 두고 싶다.

이혼과 주유검은 이미 한 배를 탄 입장이다. 하지만 보다 확고하게 믿을 수 있는 신뢰의 상징이 필요했다. 더욱이 이혼으로서는 주유검과 확고하게 동맹을 맺고 있다는 증거를 천하 사람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상호적 거래에 가까운 혼인동맹이다.

갑작스레 주유검이 마음에 들어 인척관계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리는 없으니, 정치적인 교섭으로 인해 타협된 혼인동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왕은 네가 황제가 되리라 확신하고 있다. 게다가 명나라는 정비가 아이를 낳지 못해 측비의 소생이 다음 대의 황제가 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지금껏 정비의 소생이 황제가 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이니.]

‘신하들이 까불면 황제가 매제(妹弟)라고 협박할 수도 있겠군요. 측비의 소생이 황제라도 되면 그야말로 수지맞는 거고요.’

주유검은 이혼의 맏아들인 이지보다도 어리다.

하지만 신분 앞에서 나이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장차 매제가 될 사람이 황제가 된다는 것, 그것만이 이혼에게는 중요한 요점이리라.

‘물론 그 소유욕 깊으신 정비가 받아들일지가 미지수겠지만요. 다짜고짜 뺨이나 맞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부인들을 단속하는 게 지아비의 역할이지.]

숭정제는 마치 남의 일이라는 듯이 답했다.



* * *



주유검이 남경과 조선을 바쁘게 돌아다니며 군대를 모으고 있던 시각, 누르하치 역시도 바쁘게 움직이며 결전의 준비를 이어가고 있었다.

“공격하라!”

“항복하는 자에게는 관대를, 저항하는 자에게는 죽음을 내리리라!”

팔기군들이 요동을 누비기 시작했다.

무려 수만 기에 이르는 기병군단들은 일제히 진격하며 명나라의 요새와 성곽들을 점령해나갔다.

땅따먹기는 여진족에게 매우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총병 장승음의 패전으로 이미 요동의 병력은 궤멸된 상태였다. 견고한 성과 요새를 믿고 버티던 명나라의 장수들은 누르하치의 신묘한 전술 앞에 가로막혀 거점들을 모두 내줘야 했다.

누르하치는 단순히 기병군단의 전력만을 믿고 움직이는 우장(愚將)이 아니었다.

짐승을 사냥하면서 터득한 전술과 직감과 본능에 따른 판단은 언제나 정확했고, 매번 팔기군에게 빛나는 승리를 선사했다.

“경하 드립니다, 대가한.”

“명나라 놈들이 꼼짝을 하는군요.”

누르하치는 군사를 몰며 20여 개의 성을 빼앗았다.

명나라의 대군이 오기 전, 요동을 온전히 자신의 영토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단기간에 요동의 모든 성을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결전의 전세를 자신에게 이롭도록 판도를 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멧돼지를 잡을 때는 항상 덫을 놓는 법이다. 잘 기른 사냥개와 맹금도 빼놓을 수 없지.”

결전의 땅이 될 요동 전역이 누르하치의 덫이었다.

명나라의 토벌군이 요동으로 진입해오는 즉시 날카로운 덫이 다리를 붙잡게 되리라. 누르하치가 요동 정벌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의 결전에 대비하기 위한 사전작전과도 같았다.

“대가한!”

장수 하나가 달려와 누르하치의 앞에 부복했다.

“무슨 일이냐.”

“홍타이지 공자께서 심양(瀋陽)을 점령하셨습니다!”

요동성(遼東省)의 성도(省都)인 심양을 점령했다.

불과 2천도 안 되는 소규모 병력으로 명나라 최고의 요새인 심양을 점령했다는 것은 가히 기적에 가까웠다.

누르하치도 2개월 정도는 걸릴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덟 번째 아들 홍타이지가 불과 2주 만에 점령해버린 것이다. 명나라 병사들을 모조리 죽이고 심양의 백성들을 사로잡았다는 말에 후금의 장수들은 들뜬 목소리로 기뻐했다.

“됐다! 심양이 넘어온 이상, 명나라 놈들에게 승기는 없다!”

누르하치가 허벅지를 내리치며 외쳤다.

이제 명나라 군대들은 무조건 심양으로 진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멍청한 황제는 오랑캐들에게 심양을 내어준 것은 굴욕이라며 모든 군단장들에게 탈환을 명령하겠지. 적들의 움직임을 훤히 꿰뚫어보고 있으니, 이를 이용해서 되받아치는 일만 남아 있었다.

“그럼 수성전은 없는 겁니까?”

한 장수의 물음에 누르하치가 답했다.

“성곽에 숨기만 해서는 명나라 놈들을 쓸어버릴 수 없다. 내가 직접 팔기군을 통솔하여 놈들을 유린해버릴 것이다.”

수성전이 될 것이라 생각한 장수들도 더러 있었다.

고구려가 쌓은 옛 성들이 아직도 요동에 남아있었다.

요동을 차지했던 요(遼)와 금(金)은 고구려의 옛 성들을 다시 쌓아올렸다. 견고한 성곽과 적의 침입을 불허하는 철옹성의 구조를 띄고 있어 수성전에 유리하기는 하겠지만, 기세가 오른 신흥 기마민족에게 있어 수성전은 그저 겁쟁이용 싸움에 불과했다.

“다이샨.”

“예, 아버님.”

누르하치의 부름에 둘째 아들 다이샨이 답했다.

다이샨은 무예에 능한 여진족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인물이었다.

말 위에서 창을 휘둘러 죽이지 못한 적장이 없었으며, 칼 한 자루를 쥐고 적진으로 돌격해서 적장을 죽이고 스무 명에 이르는 적병들을 죽인 걸로 유명했다. 요동 전투에서 총병 장승음을 죽인 것 역시 다이샨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르하치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의 못생긴 용모 탓이었다. 들창코와 툭 튀어나온 광대뼈, 부리부리한 눈매까지. 미형으로 생긴 홍타이지와는 전혀 다른 생김새였다.

“심양에서 홍타이지를 도와 부대를 이끌고 주변의 요새들을 점령해라.”

“알겠습니다.”

이윽고 다이샨이 물러가자, 그동안 누르하치의 뒤에 서있던 참모가 다가왔다.

“전하, 다이샨 공자를 너무 홀대하시는 건 아닌지요? 다이샨 공자는 전하의 둘째 아드님이지 않습니까.”

“코가친. 우리 부족은 한족 놈들처럼 장자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가장 유능한 아들에게 그 뒤를 넘길 뿐이지.”

“하오나 노골적으로 편애하신다면 짐짓 다이샨 공자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일까 염려스럽습니다.”

누르하치의 심복인 코가친은 북원(北元)의 빈민가 출신이다.

한족의 문화를 이어받은 몽골은 신분질서에 매우 엄격한 모습을 보였다.

북원의 사회에서 빈민가의 노비는 사람대접조차 받지 못했다. 그래서 코가친은 북원에서 탈출해 여진족의 부족원이 되었고, 이윽고 군문으로 들어와 여러 활약을 펼친 끝에 누르하치의 눈에 들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을 어떻게 쓰느냐다. 사람을 다루는 기술이야말로 천하로 이어지는 지름길이지. 홍타이지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 녀석 주변은 언제나 유능한 인재들로 넘치고 있지 않느냐. 하지만 다이샨을 봐라. 저놈은 강하고 용맹하긴 하나, 홀로 떠도는 늑대와 같다.”

용맹과 무예로만 본다면 어느 누구도 다이샨을 넘어서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인품이 떨어지고 지도력이 결여되어 있는 등, 지도자로서의 재능은 한없이 떨어졌다. 누르하치는 그것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이샨을 후계구도에서 일찌감치 제외시켜버렸다.

“벌써부터 후계를 정하신 것입니까?”

“코가친, 가장 큰 위협은 내부의 적이다. 언제 누가 내 목을 노릴지 모르지. 내가 죽더라도 그 의지를 이어줄 후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북방에서 나라를 세우고자 한 부족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건국 과정에서 좌절과 패망으로 사라지고 말았는데, 그 이유 중에 대부분은 내부 분열에 의해서였다.

수십, 수백에 이르는 부족들을 하나로 규합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문화와 풍습이 다른 오랑캐들은 서로 반목하고 경쟁하며 살아왔다. 설령 지금은 후금의 깃발 아래로 모두 모였다 해도, 언제 꿍꿍이를 부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번 결전에서 패배할 경우… 내 목을 베는 것은 명나라가 아니라 내부의 부족장들이 될 것이다.”

누르하치의 예상은 정확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르하치의 통치에 반대하는 부족장들이 모여 그를 칠 계획을 짜고 있었다. 강제로 편입된 해서여진(海西女眞)의 4부는 물론, 누르하치의 직속장수들도 기회만을 엿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반드시 이번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

절박한 심정인 것은 누르하치도 마찬가지였다.

“아민과 망굴다이를 불러라. 팔기군을 이끌고 결전의 땅으로 갈 것이다.”

“결정의 땅이라 하옵시면……?”

“사르후.”

코가친의 물음에 누르하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사르후가 천하를 건 결전의 땅이다.

요동성의 성도인 심양과 인접한 곳이었으며, 동시에 요하(遼河)를 건넌 명나라 군대들이 처음으로 맞닥뜨리게 될 지역이기도 했다.

지금껏 후금이 군사를 일으켜 요동의 성곽과 요새들을 점령한 것도 사르후의 결전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군사를 일으키기 이전부터 누르하치는 사르후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우리들이야말로 북방의 진정한 후예들이다. 기다려라, 주익균. 북경의 옥좌를 내가 찬탈할 것이니.”

천하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여진이 무순성을 함락한 이후 잠시 숨을 가다듬은 것은 폭풍전야일 뿐이었다.

고요했던 폭풍은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하며 요동을 쓸어버렸다. 결국 명나라는 20여 개의 요새와 성곽들을 여진에게 빼앗겨야 했고, 수만 명에 이르는 백성들이 여진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결전의 시기가 무르익었다.

어느 시대에서나 그러하였듯, 한족과 오랑캐들의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여진은 천하를 향한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명나라는 손에 쥔 천하를 지키기 위해 토벌령을 내렸다.

‘결전에서 승리하는 자가 천하를 쥔다.’

누르하치는 두 눈을 감으며 감상에 젖었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기다렸던가.

스물다섯의 젊은 나이에 천하를 향한 웅대한 포부를 꿈꿨다. 나이가 예순이 되어서야 비로소 천하를 향한 문이 열렸다. 반평생을 쏟아 부은 결과가 드디어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