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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제9장 두 명의 왕(2)



주유검이 제안한 동맹은 부족한 근거와 부실한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과연 명나라가 강성한 여진족과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장차 명나라의 황제가 될 것이라 선언한 주유검의 발언에도 문제점이 많을뿐더러, 명나라가 얌전히 만주 땅을 내어줄 거라는 확신도 없었다.

그건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와서 북방의 옛 땅을 회복하자고 외친들 어느 누가 믿어줄까?

단군조선과 고구려란 나라는 이미 사라져버렸고, 세종대왕이 4군 6진을 개척한 이래로 조선은 영토 확장의 야망을 꿈속의 꿈이라고 치부해버렸다.

“역시 왜란의 영웅은 달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을 쏟아낼 줄이야. 그게 바로 영웅의 기개라는 건가.”

인경궁의 회담은 종료되었다.

그 뒤로도 많은 문답들이 오고 가기는 했지만 이렇다 할 확답을 내리지 못한 채 끝나버리고 말았다.

두 명의 왕이 모여 의논한 회맹(會盟).

비록 비공식적인 자리였다고는 하나, 매우 의미 있는 자리였다. 물론 이혼이 동맹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일장춘몽에 불과한 이야기겠지만, 조선이 이를 받아들이는 순간 역사는 다시 한 번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전하께서 몸소 나서셨거늘, 확답을 주지 않다니. 무례한 작자들입니다. 동맹에 관해 다시 생각할 일입니다.”

“나라의 존망을 결정짓는 일이다. 함부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지 않느냐.”

결국 이를 결정짓는 것은 사르후 결전의 승리뿐.

이혼의 고민은 과연 명나라가 여진과 싸워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었다.

전성기의 명나라였다면 믿고도 남았겠지만, 지금의 명나라는 거듭 쇠퇴를 이어나가며 몰락해가고 있었다. 제아무리 승산이 있다고 떠든다 한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으면 믿을 수 없기 마련이다.

“두 다리가 후들거리는군. 잠시 쉬었다 가자.”

객궁으로 향하던 길목에서 주유검은 주저앉아버렸다.

홍승주는 누가 볼까 두렵다며 불안에 떠는 모습을 보였지만, 주유검은 개의치 않았다. 어느 누가 보기라도 하면 멍청한 명나라 황손이 궁궐에서 길을 잃었다고 말하면 될 뿐이다. 워낙에 넓은 궁궐이라 처음 오는 사신이 길을 잃는 경우는 다반사였으니까.

‘설마 그 광해군과 가까이에서 이야기를 나누게 될 줄이야. 이거야말로 타입슬립의 진면목 아니겠습니까?’

[뭐라 지껄이는지 통역을 부탁한다.]

‘영감님이 과거로 돌아가서 촉나라 유비를 눈앞에서 봤다고 생각해보십쇼.’

[그거 대단한 일이 아니더냐! 소열제를 두 눈으로 본다는 것은!]

‘지금 제 기분이 바로 그렇단 겁니다.’

서적과 문헌으로만 봤던 위인을 실제로 만난다는 것은 가슴이 벅찬 일일 것이다.

물론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불가능한 일이기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게 아닐까. 위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역사를 바꾼다. 역사를 좋아하는 남자라면 누구나가 생각해 봤을 법한 공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지금 주유검은 그것을 이뤄냈다.

“전하, 새벽녘이옵니다.”

“나도 눈으로 보고 있다.”

어둡기만 했던 하늘이 점점 밝아오고 있었다.

그림자처럼 확실하게 보이지 않았던 주변 풍경들도 점차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주유검과 홍승주는 자신들이 길을 헷갈리는 바람에 서궁(西宮: 덕수궁) 근처까지 와버렸음을 깨달았다.

“냉큼 빠져나가자. 자칫 경을 칠라.”

“누가 전하께 감히 경을 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무리가 있다면 이 홍승주가 처리하겠습니다.”

“처리고 뭐고 창피해죽겠으니까 어서 빠져나가잔 말이다!”

주유검이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설마 서궁까지 와버렸을 줄이야.

아무리 길이 어두워 방향을 분간하기 어려웠어도 그렇지, 하필이면 다른 곳도 아니고 서궁이란 말인가!

서궁은 선왕의 계비(繼妃)인 인목왕후가 유폐된 곳이다.

신하는 물론 궁녀조차도 감히 얼씬거리지 않는다고 알려진 장소이니 만큼, 서둘러 자리를 떠야 했다.

“으악!”

급하게 방향을 틀던 주유검은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누군가와 몸이 부딪치고 만 것이었다.

정작 부딪친 사람은 멀쩡한데 본인만 뒤로 나가떨어지는 창피를 겪어야 했다.

“저, 전하!”

홍승주는 경악성을 토해냈다.

설마 자객인가!

칼자루를 손에 쥐고서 그는 주유검의 앞에 섰다. 그리고는 예상치 못한 복병이라도 만난 것처럼 한껏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앞 좀 제대로 보고 다니거라!”

체격이 장대한 천하장사일 거라는 주유검의 예상과는 달리, 부딪친 사람은 왜소한 체격을 가진 여인이었다.

게다가 주유검보다도 어려 보이는 처자였다.

꾀죄죄한 행색이었지만 기품이 느껴지는 용모를 가진 그 여인은 주유검과 홍승주를 번갈아보며 미심쩍은 눈빛을 보냈다. 하긴 난데없이 서궁 근처를 배회하는 두 장정을 본다면 어느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놈! 아니, 이년! 이 분이 누구인 줄 알고 감히…….”

“됐다. 그냥 가자.”

여인의 고압적인 말에 홍승주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이내 주유검이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그를 제지했다.

새벽녘에 장정 둘이 다 큰 처자를 두고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제아무리 명나라의 황손이라고는 해도 서궁 근처를 배회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곤욕을 치를 수도 있었다. 물론 조선이 직접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겠지만, 개인적으로도 창피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국의 공주와 부딪쳐놓고, 사과도 없이 그냥 갈 셈이냐! 무례한 자들 같으니.”

처자가 주유검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두 발이 붙은 것처럼 주유검의 걸음이 멈춰 섰다. 옷깃을 당기고 있는 처자의 근력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무, 무슨 힘이……! 그런데 뭐, 공주라고?’

[조선의 여인들은 뭐가 이렇게 세냐? 나는 네가 뒤로 고꾸라져 죽은 줄 알았다!]

숭정제의 비명을 뒤로 한 채.

공주라고 신분을 밝힌 처자에게 예를 다하며 주유검은 고개를 숙였다.

“궁궐은 처음이라 그만 무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공주마마께서 넓은 아량으로 헤아려주십시오.”

처음 보는 처자의 신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공주라고 밝혔으니 그저 공주라고 생각하면 그만일 뿐이다. 진짜 공주건 가짜 공주건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소란이 벌어질까 두려워 잠시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좋아요. 지금이라도 무례를 사과하니 넓은 아량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죠.”

자신의 신분을 공주라고 밝힌 여인은 새침한 모습을 보였다.

지금 시시비비를 가리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는 알고나 있는 걸까.

하지만 주유검은 신분을 밝힐 생각이 전혀 없었다. 구태여 조선 궁궐에서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궁핍한 의복을 입은 서궁의 공주라……. 인목왕후의 소생인 정명공주로군. 대외적으로는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을 텐데. 인적이 드문 새벽녘이라서 잠시 나온 건가.’

그녀와 연관되어 좋을 것은 없었다.

정명공주임을 알아챈 주유검은 더더욱 연관되어서는 안 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급히 자리를 뜨려 했다. 무례를 인정하고 사과를 한 덕분인지 정명공주는 순순히 지나가도록 허락해주었다.

하지만 의문의 복병이 주유검을 가로막았다.

“감히 이 분이 뉘신 줄 알고! 네 이년, 대명의 황손이신 신왕 주유검 전하이시다!”

지금껏 분노를 억눌러 왔던 걸까.

모욕으로 얼굴이 시뻘게진 홍승주가 사방이 떠나갈 듯한 목소리로 주유검의 신분을 알렸다.

대명의 황손이 제후국의 궁궐에서 신분조차 애매한 여인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홍승주는 황손의 옥체를 상하게 한 것으로도 모자라, 무엄하게도 옷깃까지 잡는 만행을 부린 여인에게 엄벌을 내릴 요량인 듯했다.

“무슨 소란이야?”

“서궁에서 남정네의 목소리가 들렸어.”

그런데 주변이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새벽녘의 시간임에도 일을 시작한 궁인들이 있기 마련이다.

갑작스레 울려 퍼진 남정네의 외침에 놀랐는지 궁인들이 하나둘씩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조용히 일을 무마하고 지나가려 했던 주유검의 계획이 산산 조각나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 * *



이혼의 가장 큰 경쟁자는 동생 영창대군이 아닌, 대군의 친모였던 인목왕후였다.

인목왕후와의 알력다툼으로 인해 영창대군을 죽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선조가 죽고 고립무원의 처지에 몰린 인목왕후는 결국 서궁으로 유폐를 당하게 되었고, 혹시 이혼이 아들에 이어 딸도 죽일까 두려워 정명공주의 생사를 의도적으로 숨겼다.

정명공주의 나이는 올해로 열일곱.

왕실 여인들은 열 살 전후로 남편감을 고르는 게 다반사였지만, 정명공주는 대외적으로는 죽은 사람이다 보니 혼인을 할 수 없었다.

“전하께옵서는 조선의 왕실 사정에 빠삭하신 것 같사옵니다.”

“미리 준비를 해두었을 뿐이다.”

홍승주의 말에 답하며 주유검은 대수롭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광해군과 인목왕후, 그리고 영창대군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인물들이다.

혈육 간의 다툼이 끊이질 않았던 조선 왕실이지만, 그 중에서도 광해군에 얽힌 골육상쟁은 특히 유명했다. 형이 동생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비록 계모이기는 하나 자신의 모친을 유폐시킨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었다.

“전하. 소첩이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정명공주는 고개를 푹 숙이며 사죄를 청했다.

이를 공식적으로 걸로 넘어진다면 큰 문제가 될 건 분명했다.

물론 조선으로서도, 명나라로서도 밝혀봤자 좋을 것은 없는 일이다. 시집도 안 간 공주와 소란을 겪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입방아를 찧어댈 것인가. 주유검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개의치 마라. 나도 수족을 잘못 둔 책임이 있으니. 지금도 후회하고 있는 중이다.”

주유검의 눈길에 홍승주가 고개를 숙였다.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궁궐의 지리에 밝은 정명공주 덕에 궁인들에게 발각당하는 일은 막을 수 있었지만, 괜히 일을 크게 벌인 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온데 전하께옵서는 어인 일로 조선에 오셨는지요?”

정명공주가 물었다.

그녀는 바깥 사정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지금껏 그녀는 죽은 사람으로서의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왔다. 이혼이 생사를 알게 되면 죽일지도 모른다. 인목왕후와 정명공주, 두 모녀는 매일 불안에 떨며 서궁에서 유폐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조명 동맹을 위해서다.”

“전하께서 직접 말씀이옵니까?”

“시급을 다투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홍승주가 멀리서 주변을 경계하는 가운데, 인적이 드문 공간에서 정명공주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 장소에서건 인적이 드문 장소가 있기 마련이다.

특히 정명공주와 관련된 주변 장소들에 한해선 궁인들이 얼씬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 궁궐에서 그녀는 호환마마보다도 무서운 역병 취급을 받고 있었다.

[하여간 멍청한 녀석. 평소에는 잘한다 싶다가도 어째 매번 중요한 순간에는 이런 식으로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니는 건지. 스스로를 가혹한 궁지에 몰아넣는 걸 좋아하는 취향인 건 아니겠지…….]

숭정제의 눈에는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한심스레 보일까.

“대비(大妃)와 함께 살고 있는 건가. 고달프겠군. 유폐생활은 미처 겪어보지 못했지만 몹시 힘들다는 건 알고 있다.”

“괘, 괜찮사옵니다.”

주유검의 말에 정명공주가 낯빛을 흐리며 답했다.

자신은 죽은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는 열일곱밖에 되지 않은 어린 공주에게 있어 잔인한 환경이었다. 이복오빠가 조선의 군주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서민들보다도 더욱 궁핍하고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일이었다.

‘애석하지만 나는 광해군과 손을 잡고 있다. 광해군의 정통성을 위협하는 인목왕후와 정명공주의 편을 들어줄 수는 없지.’

잔인한 일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두 모녀의 편을 들어주는 건 불가능했다.

대국의 황손이라 해도, 제후국의 사정에 일일이 관여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왕후와 공주는 군왕의 정통성을 위협하는 정적이 아닌가. 비록 공주는 시대의 희생양이었지만, 인목왕후는 선왕의 총애를 이용해 광해군을 세자의 자리에서 몰아내려는 계획을 꾸민 적이 있었다.

[역시 조선의 공주가 미색이 뛰어나구나. 조선의 여인들이 미색이 곱고 빼어나다는 건 명나라에서도 유명한 일이지.]

‘임금의 정통성을 위해서라도 편을 들어줄 수 없다는 제 말 잊으셨어요?’

이런 상황에서도 나불거릴 여유가 있다는 건가.

주유검은 숭정제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무시해버렸다. 물론 정명공주가 아름답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좀 있으면 아침이 온다.”

“예, 저도 이제 궁으로 돌아가 봐야겠지요. 어마마마께서 기침하실 시간이옵니다.”

주유검이 정명공주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그 뜻을 헤아렸는지, 정명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를 뵌 사실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사옵니다. 그리고 혹여 전하께옵서 빠져나가시는 데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돕겠습니다.”

“고맙다.”

첫 만남부터 삐걱거렸지만, 주유검은 정명공주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딱한 처지라고 생각했다.

연민과 동정에 가까운 마음이다. 그녀는 왕실의 알력싸움으로 인해 피해를 본 가엾은 공주일 뿐이었다.

“전하, 혹여 오신 까닭이 여진 때문이옵니까? 궁궐에 연금된 몸이나 궁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문득 궁금증이 든 걸까.

정명공주가 주유검에게 물었다.

“네 말대로 나는 여진과 싸우게 된다. 대명과 조선이 왜적들을 모두 몰아낸 것처럼, 다시 한 번 양국이 손을 잡고 오랑캐를 몰아낼 것이다.”

천하를 두고 오랑캐와 싸운다.

정명공주의 귀에는 매우 허황된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주유검의 진지한 표정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으나 천하와 전쟁에 걸린 무게감은 알고 있었다.

“무운을 빌겠습니다.”

“너도 무사하길 바란다.”

짧게 인사를 나누고 둘은 곧바로 헤어졌다.

정명공주는 몇 번이고 고개를 돌리며 주유검을 바라보았지만, 정작 주유검은 발을 돌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