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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제9장 두 명의 왕(1)



이혼이 아집이 강한 성격으로 변한 데는 전쟁의 후유증이 그 원인으로 작용했다.

평화로운 온실에서만 자란 왕자가 전쟁의 참화를 겪으며 어떻게 변했을까.

광인(狂人)이라 불린 형 임해군(臨海君)을 반면교사로 삼은 덕분에 무분별한 망나니로 전락하지는 않았지만, 상처가 점차 안으로 곪기 시작하면서 고집스런 성격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무분별한 궁궐 공사로 재정은 파탄에 이르렀다.

더욱이 무리한 군사 징집과 훈련으로 국방비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낭비되면서 국고에 바닥이 드러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서인과 백성들을 빌미로 삼으면, 없는 반란을 만들어내는 것은 일도 일이지.”

이이첨의 오른팔 노릇을 하던 이위경이 직접 움직였다.

이위경은 서인(西人) 출신이지만 인목왕후를 폐위시키는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그 후에도 유폐된 왕후를 암살하려 하는 등, 과격한 행동을 벌이면서 강경파 성향을 보여 왔다. 현 상황에서 흉계를 펼칠 정도로 대담한 사람은 이위경이 유일했다.

하지만 그런 이위경도, 이이첨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신왕이 벌써 임금을 만나러 갔단 말이냐!”

축시(丑時: 1시-3시)에 접어든 늦은 새벽이다.

게다가 홍승주가 임금의 내관과 접촉한 지 불과 한 시진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기도 했다.

벌써 신왕과 임금이 움직였단 말인가!

서인 세력을 반란에 연루시키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고 있던 이위경으로서는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아직 준비조차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거늘, 벌써부터 양 거두들이 회담을 가지고 말았다.

“제조상궁의 보고이니 확실합니다. 일찍 잠이 든 임금이 갑작스레 새벽에 기침해서 인경궁(仁慶宮)으로 향하였다 합니다.”

“인경궁? 아직 다 짓지도 않은 별궁이 아니더냐. 아직도 뼈대밖에 없는 건물일 터인데.”

“임금이 장소를 인경궁으로 잡으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북인들이 예상한 회담 장소는 경덕궁(慶德宮)과 창덕궁(昌德宮)이었다. 행궁(行宮)에도 세작을 파견했지만 설마 인경궁이 회담 장소일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임금에게 당했다.

주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인경궁을 장소로 발탁한 것이다. 그 간교함에 이위경조차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대단한 배짱이 아닌가.

대국의 황손을 설마 다 짓지도 않은 인경궁으로 모실 줄이야.



* * *



홍승주는 매우 기분이 좋지 않았다.

대명의 황손을 설마 이런 을씨년스러운 폐옥(廢屋)으로 부를 줄이야.

그나마 새벽의 찬바람 정도는 막아줄 만했지만, 건물자재들이 쌓여 있는 인경궁은 폐옥만도 못한 건물임이 분명했다.

“조선 임금의 힘이 되어줄 폐하의 교지입니다.”

“교지 말씀이십니까? 대명의 황제께서 내리신…….”

주유검이 꺼낸 교지는 이혼으로서도 예상치 못한 물건이었다.

이미 대낮에 교지를 받지 않았던가.

여진 정벌의 파병 문제를 두고 황제의 엄명이 적힌 교지를 받들었었다.

본디 사절단이 가져오는 황제의 교지는 단 하나.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둘 이상의 교지가 내려오기도 하지만, 하나를 넘지 않는다는 게 전통적인 외교적 관례였다. 교지를 남발하면 황명의 무게가 가벼워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고, 제후국에서도 크게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이었다.

‘대신들 앞에서 보여준 교지는 가짜……. 그렇다면 이게 진짜란 건가.’

이혼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왕세자보다도 나이가 어리다고 들었거늘.

주유검이 걸출한 인물일 것이라고는 생각했던 이혼이었지만, 아직은 경험이 미숙한 젊은 황손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 예상은 빗나갔다.

그는 세상의 눈을 속이면서까지 무언가를 준비하려 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될 역사의 비틀림을 만들기 위해서.

“뜻밖의 말씀이군요. 하온데 고(孤)에게 먼저 귀띔을 해주시는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전하의 용단에 따라 이 교지가 세상에 드러날 수도, 영영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리에 동석하고 있던 강홍립과 홍승주의 표정이 삽시간에 변했다.

의도적으로 황제의 교지를 숨기겠다는 말인가?

그건 대역죄다. 황제의 이름으로 내려진 교지를 의도적으로 숨긴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반역죄가 분명했다. 그런데 어찌 제후국의 임금 앞에서 그것을 당당하게 선언한단 말인가.

그 해답을 이혼이 입에 담았다.

“대명의 폐하와는 이미 말을 끝내신 일이로군요.”

황제 역시 이번 회담을 알고 있다.

이번 일은 아무래도 황손인 주유검 혼자서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범주가 아니었다.

멍청하고 무능한 황제라도 여진 정벌에 조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을 터. 여진을 정벌하는 것에 목을 매기 시작한 황제를 설득하는 것은 매우 손쉬운 일이었겠지. 덕분에 주유검은 황제의 심기를 이용해서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교지의 내용을 봐도 되겠습니까. 읽어 보지 않고서는 확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물론이지요.”

주유검은 흔쾌히 수락했다.

이를 감사하게 받아든 이혼은 봉인을 풀고서 교지를 활짝 펼쳤다. 교지의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이혼의 인상이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당혹스러움과 환희.

두 가지의 감정이 공존하는 가운데, 이윽고 이혼이 입을 열었다.

“천자께서 고의 즉위를 인정하신다고 하셨습니까?”

제후국의 임금이 즉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천자의 승인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혼은 즉위 때부터 지금까지 대명으로부터 승인을 받아내지 못했다.

이혼이 서자 출신의 차남이라는 것이 결격사유였으며, 명나라 내부의 후계구도에 큰 소란으로 불거질 것 같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대명이 이혼을 조선의 임금으로 아예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인정하지 않은 것뿐이지, 사실상 이혼을 임금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임금이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은 것이었다.

“뿐만이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지금껏 즉위의 인정이 늦은 것에 대해 임금께 ‘사과’를 하셨고, 향간에 떠도는 불쾌한 소문(폐모살제)에 대해서도 전혀 근거 없는 낭설이라 치부하셨습니다.”

인목왕후를 폐위시킨 주모자는 북인 세력이다.

이이첨과 이위경 일파의 사주로 결정된 만행이라 몰아가면 이혼에게 돌아갈 타격은 매우 희박할 터였다.

더욱이 동생 영창대군을 죽인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실질적으로 이혼이 영창대군을 죽였다는 증거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왕제(王弟)가 죽었음에도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인데, 공식적으로는 영창대군의 신변을 맡은 정항의 부주의로 제때 끼니를 주지 않아 굶어죽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근거 없는 낭설이라……. 황제 폐하께서 직접 고를 비호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교지에 이미 그렇게 적혀 있지 않습니까.”

이혼과 주유검의 담화를 듣고 있던 강홍립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 교서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지금껏 임금이 마음대로 왕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불완전한 정통성 때문이 아니던가. 황제가 정통성의 인정은 물론, 폐모살제의 주장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배격하고 있으니 저 교서가 세상에 밝혀진다면 조선 내부에 큰 파장을 미치게 될 것은 분명했다.

‘전하! 반드시 저 교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강홍립의 소리 없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이혼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조용히 호롱불이 타들어가면서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게 얼마나 되었을까. 그제야 이혼이 입을 열었다.

“어찌 고가 동생을 죽이지 않았다고 확신하십니까? 동생인 영창대군은 선왕의 하나뿐인 적자(嫡子)였습니다. 서자 출신인 고에게 있어 가장 위협적인 정적이었지요. 그 아이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존재만으로도 세자의 위치를 위협했습니다. 선왕께서도 내심 대군이 왕위를 잇기를 바랐습니다. 이 모든 정황이 고가 동생을 죽였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아니겠습니까.”

영창대군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동참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신하들이 영창대군의 죽음을 두고 모의한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일부러 묵인했다.

적자인 영창대군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서자 출신으로서 왕위에 오른 자신의 불안한 처지로 인해 두려워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서자 출신의 임금과 적자 출신의 대군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저, 전하!”

강홍립이 목소리를 높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혼과 시선을 마주하면서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명나라의 호의를 받아들이자는 의미였다. 그럼에도 이혼은 뜻을 굽히지 않고 주유검의 답변을 기다렸다.

“작금의 조선에 있어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닐 텐데요. 왕제의 죽음이 조선의 앞날을 막을 정도로 중요합니까?”

누르하치의 등장으로 세력구도가 완전히 무너졌다.

여진의 급성장과 명나라와 조선의 쇠퇴.

앞으로 다가올 혼란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양국이 손을 잡아야 했다. 거대한 적과의 싸움에서 승패를 가늠하기도 어려운 마당에, 집안사정으로 왈가왈부하고 있을 시간조차 아까웠다.

“전하께서 동생이신 영창대군을 죽인 일에 대해서는 제가 감히 관여할 바가 아닙니다. 저는 장차 대명을 이끌어갈 군주로서 전하와 이야기를 나누고픈 것입니다.”

주유검은 당당하게 말했다.

자신이 곧 명나라의 황제가 될 것이라고.

그 말에 홍승주와 강홍립은 적잖이 놀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주유검의 말에도 이혼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주유검이 언젠가 대명의 황제가 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는 외세로부터 침략당하지 않는 조선을 원하고 있습니다. 7년 간 왜란을 겪으면서 백성들의 고초를 두 눈으로 보았고, 군사력이 약한 나라가 외세로부터 어떤 치욕을 겪는지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주유검의 진심에 이혼 역시 지금껏 이루고자 했던 사명을 입에 담았다.

두 번 다시는 오랑캐들에게 침략당하지 않겠다.

깊은 각오가 섞인 말에 주유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광해군이라는 인물이 보낸 생애를 볼 때, 조선의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선이 여진 정벌에 나설 경우, 대명은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만주(滿洲). 저 여진족들이 만주라 자칭하는 북방의 넓은 땅을 조선의 영토로 드리겠습니다.”

요동과 만주의 분할점령.

주유검이 구상하고 있는 계획은 여진족이 차지하고 있는 넓은 영토를 둘로 분할하는 것이었다.

이는 다분히 조선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원래부터 요동과 만주 모두가 명나라의 영토였음에도 불구하고 주유검은 조선에 만주를 할양하겠다고 제안했다. 냉정하게 분석하면 조선에게만 유리한 조건일 뿐이지만, 조선이 본격적으로 파병에 나설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으로는 충분하다 여겼다.

“…….”

주유검의 제안에 이혼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등에서 서늘한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뺨에서는 경련이 일어났다.

산전수전을 모두 겪으며 난세를 극복한 이혼이었지만, 지금 그는 숨이 막힐 정도의 긴장감을 느껴야 했다.

‘고구려(高句麗)… 아니 단군조선(檀君朝鮮)의 부활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단군께서 세우신 아침의 나라가 과인의 손에 의해 다시 세워진다면…….’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였다는 오명도 씻을 수 있다.

부왕의 그늘을 벗어나는 것은 물론, 조선의 그 어떤 대왕들보다도 위대한 업적을 남긴 최고의 군주라는 평가를 받으리라.

오랫동안 꿈꾸었던 염원.

사명으로 간직한 장대한 꿈이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