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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제8장 조명회맹(4)



주유검은 조선에서 황제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았다.

도착한 당일에 임금과 대신들에게서 차례대로 인사를 받고, 왕족들도 모두 빠짐없이 인사를 하러왔다.

조선의 반응은 매우 과장될 정도였다.

하지만 직계황족이 방문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보니 조선에서도 어떻게 대처할지 난감하기만 할 터였다.

[방금 전에 인사를 올린 옹주(翁主)들이 귀엽지 않더냐. 조선과 확고한 동맹을 맺기 위해서는 혼인만큼 좋은 게 없지 않겠느냐.]

“이미 혼인했잖습니까. 경월공주한테 백년해로를 맹세한 게 엊그제인데, 벌써 있으셨습니까. 여인이 독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데 영감님은 무섭지도 않아요?”

객궁에 머물고 있던 숭정제와 주유검은 조선에 온 소감을 말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둘 다 사내라서 그런지 가장 먼저 나온 이야기는 바로 조선의 옹주들에 관한 것이었다.

조선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확실히는 모르지만, 혼인식을 올리지 않은 어린 옹주들을 중점으로 인사를 올리러 온 게 주유검은 수상쩍었다.

주유검은 코가 꿰일 수도 있음을 주의하고 있었지만, 숭정제는 양국의 동맹을 위해서라면 그럴 수도 있다며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라는 말을 남겼다.

“그건 아니잖습니까. 영감님 영감님하고 불러줬더니 노망이라도 난 겁니까?”

[어허! 누가 정비(正妃)로 들이자고 했느냐. 남경과의 동맹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짐 역시 알고 있다. 내 말은 조선의 옹주를 측비(側妃)로 들이자는 이야기였다.]

말이 아예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조선 사대부의 여식이 명나라의 궁녀로 들어가는 경우는 지금까지 빈번하게 있어왔다.

그러니 조선의 옹주를 측비로 맞이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만약 주유검이 훗날 황제가 되는 순간 측비 역시 후궁의 자리에 오를 것이니, 조선으로서도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렇지, 부인을 얻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눈을 돌립니까? 정신 좀 차리십쇼. 다른 곳에 한눈 팔 여유가 있으면 조명 동맹에 대해서 생각 좀 하시고요.”

[쯧, 하여간 고지식한 녀석. 자손을 번창시키는 것 또한 황제의 큰 의무이거늘.]

“그런 의무는 나중에 일을 다 해결하고 나서 생각합시다.”

주유검의 말에 숭정제는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주유검은 서로의 입장이 상이하게 바뀐 기분이 들었다.

오히려 자신이 사태 해결의 촉구를 권유하는 입장이라니. 평소에는 숭정제가 어르고 달래서 주유검을 설득시키는 게 다반사였는데, 조선에 오고 나서부터는 주유검이 오히려 숭정제를 타이르는 모습이 되어버렸다.

[왜 이렇게 적극적이냐? 물론 짐으로서는 한없이 기쁘긴 하다만……. 네가 뭘 잘못 먹은 게 아닌지 수상쩍구나.]

“내 나라에서 체면 구기는 짓은 하지 말자는 거죠. 4백 년 전의 고국으로 돌아온 내 입장도 좀 생각해주십쇼.”

주유검에게 인사를 올린 왕족들은 직계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인원을 자랑했다.

흔히 선조의 자식이라고 하면 임해군(臨海君)과 광해군(光海君)만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선조는 수많은 자식들을 본 임금으로 유명했다. 맏아들보다도 한참이나 어린 후궁들을 여럿 두어 13명의 서자와 9명의 서녀를 두면서 왕계를 번창시켰다.

‘문제는 늦깎이에 새로운 정비를 들였다는 거지. 정비에게서 태어난 영청대군이 왕실 후계를 완전히 뒤엎어버렸으니.’

물론 동생을 죽인 건 광해군이다.

하지만 죽일 빌미를 제공한 건 아버지 선조였다. 정비를 들이기 전에 자신의 사후에 벌어질 후계문제에 대해 생각을 했어야 했다.

조선팔도를 모두 버리고 의주로 도망친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둘째 아들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여자를 왕비로 들인 걸까. 조선의 전성기를 연 세종대왕조차도 새로운 왕비를 들이는 걸 거부했거늘. 여러모로 저평가될 수밖에 없는 임금이다.

“전하, 홍승주이옵니다.”

“들어오라.”

문이 열리면서 홍승주가 들어왔다.

“조선의 임금에게 소식을 넣어두었습니다.”

“잘했다.”

“하온데 소신은 전하께서 왜 조선의 임금에게 은밀히 독대를 청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외교에 관한 일이라면 문무백관들이 모두 모여 있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외교에 관한 일이 아니다. 군사에 대한 일이지.”

조선의 4군에 주둔한 1만 7천의 병력.

그 병력이 허무하게 도성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그대로 북진하여 여진 정벌에 참전할지는 조선과의 교섭에 따라 결정된다.

물론 조선 조정의 여론만 자극해도 파병은 문제없이 성사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큰 문제는 광해군의 진심을 끌어내는 것이다. 조선군을 지휘하는 장수들의 대부분이 광해군의 심복이니만큼, 진심에서 우러난 출병 명령이 반드시 필요했다.

“우선 그 진심의 문을 열 수 있는 패가 이쪽에 있기는 한데…….”

주유검이 품속에서 교지를 꺼내들며 말했다.

명나라 사절단이 궁궐에 도착하면서 조선 임금에게 먼저 교지를 건넸다.

하지만 이것은 그 교지와는 전혀 다른 내용의 교지였다. 명나라 황제의 인장이 찍힌 2개의 교지. 그리고 이 교지의 정체는 사절단은 물론 명나라의 예부(禮部)도 모르고 있었다.

“폐하께 간청하여 어렵사리 얻어낸 교지다. 이 교지만 있다면 조선의 임금도 가벼이 여기지는 못할 테지.”

사절단이 임금에게 건넨 교지는 여진 정벌의 파병을 원하는 형식적인 내용에 불과했다.

그 교지는 내용이 다소 격하기는 했지만, 명나라가 매번 조선 조정에 보내던 교지의 기본적인 형식을 벗어나지는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교지는 달랐다.

명나라는 물론, 조선의 역사를 크게 뒤흔들 수도 있는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다.



* * *



현재, 조선의 정권을 쥐고 있는 인물은 이이첨이다.

지금의 임금을 옥좌에 올린 왕좌지재라는 평가도 받았지만, 동시에 조정을 뒤흔드는 권신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었다.

조선의 육조를 손아귀에 쥔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에게 있어 궁내에 염탐꾼을 숨기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는 신왕과 임금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꾸미든,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리라 장담했다.

“신왕이 임금에게 독대를 요청했다라……. 허허,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기에.”

“마냥 방관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닙니다. 자칫 위태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이이첨의 태연자약한 태도에 유희분이 나섰다.

왜란이 끝났다고는 하나,

조선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와 같았다.

오로지 임금만을 따르는 왕당(王黨). 이이첨과 유희분을 따르는 대북(大北). 그리고 김류와 김자점, 이귀를 따르는 서인(西人)의 무리들까지.

게다가 조선에 온 명나라 황손,

장차 황태자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지도 모르는 인물이니만큼, 재야의 서인 파벌들이 눈독을 들이는 건 당연할 터였다.

“그딴 건 아무래도 좋네. 내가 신경 쓰는 건 신왕이 임금에게 독대를 요청한 목적이네.”

이이첨은 오랫동안 이혼을 섬겨온 신하였다.

그렇기에 그가 고집불통에 외골수 같은 성격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 고집불통을 설득하려면 커다란 것을 내놓아야 한다.

외교는 곧 거래와 같고, 거래는 서로 흡족할 만한 것을 내놓아야만 비로소 성립된다. 이이첨은 명나라 전역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 황손이 대체 이혼에게 무엇을 건넬지가 궁금했다.

“당연히 파병이 아니겠습니까? 군사가 부족하니, 그 부족한 병력만큼 우리 조선에서 채워갈 요량이겠지요.”

“단순히 파병이 목적이었다면 애써 임금에게 독대를 청하는 노력은 하지 않았겠지! 조정의 여론을 쥐고 흔들기만 해도 알아서 결정될 테니까.”

유희분의 말에 이이첨의 목소리가 짐짓 사나워졌다.

가장 중요한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게 그로서는 너무도 답답한 일이었다.

명나라의 황손과 조선의 임금이 나눌 밀약(密約)은 필시 역사를 크게 뒤흔들 사건이 될 터. 거기에 끼지 못한다는 것에 불안감을 느꼈다.

‘신왕이 원하는 건 임금의 결단이다. 사력을 다해 여진과 싸워줄 것을 바라고 있다……. 왜란의 영웅인 임금이라면 능히 누르하치와도 대적이 가능할 터. 명나라가 불을 지펴주기만 한다면 왜란의 영웅이 다시 깨어나는 계기가 되겠지.’

과연 그 불씨가 될 계기가 무엇일까.

신왕이 해야 할 일은 사그라지기 직전인 장작불에 불씨를 놓는 일이었다. 비록 다 꺼져가는 장작불일지라도 불씨를 만나는 순간 활활 타오르는 화염이 되겠지.

그것은 일찍이 조선을 되살린 화염이었다.

그 화염이 다시금 타오르며 조선의 두 번째 전성기를 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조선의 군권이 임금에게 넘어가는 순간, 이 이이첨은 죽은 목숨일 테니.’

조선과 임금에 맹목적인 충성을 다할 뿐이었던 과거의 이이첨이었다면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권력과 재물에 눈이 멀어버린 간신이 되었을 뿐이었다.

그 간신은 조선의 전성기가 다시금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자신의 안위와 가문을 지키기 위해 조선의 부활을 짓밟아버리려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독대를 막아야 하네.”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명나라 황족을 건드리는 건 아무래도 위험이 큽니다.”

“나도 그렇게까지 과격한 수를 쓰고 싶지는 않네. 명나라 황족을 건드릴 수는 없지.”

“하오시면……?”

“임금이 가장 격하게 반응하던 게 뭐던가?”

유희분의 물음에 이이첨이 말했다.

서자 출신의 임금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바로 반란이었다.

임금을 두고 감히 광인이라 부를 정도로 반란에 대해서 그는 매우 민감했다. 직접 국문을 주도한 것은 물론, 모진 고문들을 행하였기에 의금부에서 죽어나가는 죄인들이 차고 넘칠 정도였다.

언제 누가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불안감. 선왕인 아버지로부터 끝내 인정받지 못했다는 배신감까지. 왕을 건드릴 수 있는 수단은 차고 넘칠 정도였다.

“임금은 예전부터 이미 망가졌네. 왜란의 영웅이 다시 돌아오길 학수고대하겠지만 쉬운 일은 아니지. 어디 사람의 마음이 그리 쉽게 돌아서지던가?”

“선왕에게서 미움을 받고, 끝내 인정받지 못한 아들이 아닙니까.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못난 아비가 아들을 망친 셈이지. 명군이 될 자질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말이야.”

이이첨은 임금을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딱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선왕과 신하, 그리고 백성들로부터 모두 외면당한 임금이 아닌가. 제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 나락으로 떨어질 운명이었으니, 어찌 딱한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왕을 보필하는 신하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조정의 대부분은 이이첨의 북인들이 모두 장악하고 있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왕은 고립무원의 처지에 내몰릴 것이다. 신왕 주유검이라는 예상치 못한 복병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별일 아니라고 여겼다.

“옥사(獄事)로 또다시 조선이 술렁거리겠군. 김류와 이귀를 옭아매면 나머지 일은 간단할 걸세. 원래부터 역모를 의심받던 작자들이 아닌가.”

“이번 기회에 서인들의 뿌리를 뽑아버리겠습니다. 거기에 왕의 측근까지 골라서 섞으면 더욱 완벽해지지 않겠습니까? 허균도 그런 식으로 보내버렸고요.”

이이첨과 유희분은 구체적인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이 일은 두 왕이 회맹을 가지기 전에 완성되어야만 한다.

대명과 조선의 관계는 현상유지로도 족한 것이었다. 대명을 위해 군사는 파견하되, 왕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지 않도록 견제를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