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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제8장 조명회맹(3)



조선의 왕세자 이지는 신하들과 함께 제물포에 도착하여 명나라 사절단을 기다렸다.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 이이첨,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 유희분.

조선 조정을 손에 쥐고 있는 대신들이 기꺼이 마중에 나섰다. 북인들에게 있어 신왕 주유검은 강경파 노선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미리 면식을 익혀서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판을 깔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급보입니다! 명나라 사절단이 오던 도중, 해상에서 왜구의 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전령이 다급하게 달려와 보고를 했다.

주유검의 함대가 바다에서 왜구의 해적선들과 교전을 치르고 있는 것을 발견한 상선이 먼저 제물포에 도착하여 정보를 전해온 것이었다.

그 소식에 이지는 크게 경악했다.

그는 아직 어려 경험이 없는 왕세자였다. 다급하게 벌어진 상황에 어찌 대처하면 좋을지 몰라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다, 당장 구원군을 파견해야 합니다!”

“우선 제물포의 수군 병력을 급파시키겠습니다!”

이이첨과 유희분은 신속하게 대응했다.

조선의 바다에서 명나라 황족이 죽어서는 안 된다.

게다가 하필이면 왜구라니! 미연에 왜구를 막지 못했다는 책임을 조선이 지게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이첨과 유희분에게 있어서도 최악의 결과였다.

“소장들에게 맡겨주십시오!”

제물포의 수군 장수들은 군함을 띄웠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군함들을 동원했다.

새롭게 건조된 군함을 비롯하여 왜란에 동원된 귀선과 판옥선에 이르기까지. 제물포의 수군에게 비상령을 내리고 당장 출격하도록 명령했다.

“저, 저기 선단들이 오고 있습니다!”

제물포의 수군 함대가 출격하기 직전.

수평선 너머에서 명나라 사절단과 상선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상선들의 돛대에 있는 왜적들의 수급이었다.

주인 잃은 머리들이 마치 전리품처럼 걸려 있었는데, 이를 본 많은 신하들은 놀란 기색을 보였다. 전란을 겪어본 적이 없던 왕세자는 거의 졸도하기 직전으로 경악에 빠졌다.

“저하, 우선 신왕 전하께 사죄를 올려야 합니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조선의 바다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일들은 모두 아국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이이첨의 충고에 이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명나라 사절단이 제물포에 상륙했다.

우선 주유검을 호위하는 병력들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고, 뒤이어 주유검이 항구에 발을 디뎠다. 조선에 도착한 게 제법 신기했는지 그는 발을 구르며 주변을 둘러보기까지 했다.

“부, 불미스러운 일이 있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조선을 대표해 왕세자 이지가 전하께 사죄드리겠습니다.”

이이첨이 이른 것처럼 이지는 주유검 앞에 나아가 고개를 숙였다.

그 말에 주유검이 답했다.

“왜구들이야 벌레처럼 생겨나는 족속들이지 않소? 우글거리는 벌레들을 모두 구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조선이 괘념할 필요는 없지 않겠소.”

주유검의 발언에 이지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유검은 조선에 그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았다.

다른 사절단이었으면 조선의 치안문제를 시작으로, 어째서 다급하게 지원군을 파견하지 않았냐면서 문책을 했을 것이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주유검이 조선어에 능숙하다는 것이었다.

어색한 말투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역관(譯官)들에 비해 떨어지는 실력은 결코 아니었다.

“우선은 의복을 갈아입고 싶은데 잠시만 기다려주겠소?”

주유검은 왜적들과의 백병전으로 인해 피로 범벅인 상태였다.

홍승주가 선실로 대피할 것을 권유했지만, 주유검은 결국 이를 듣지 않고 직접 갑판에서 왜적들과 싸움을 벌였다.

그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었다.

칼에 베일 뻔하기도 했는지 의복이 여러 군데 찢어져 있었고, 피로 얼룩진 옷소매는 마치 전투를 치르고 온 무장을 보는 듯했다.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지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 * *



왕세자 이지가 마차를 권유했지만 주유검은 애써 기마를 선택했다.

둘은 함께 말을 몰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특히 조선의 왕인 이혼에 대해서였다. 주유검은 왜란의 영웅으로 유명한 광해군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부왕께서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집무를 보시고,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에 잠이 드십니다. 조선팔도에는 아직도 참화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백성들의 삶이 피폐하고 곤궁하니, 그 노고와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 아니겠소. 자그마치 7년 동안이나 싸웠으니.”

주유검이 답했다.

제물포에서 한양부까지 향하는 동안 수많은 고을들을 지났다.

조선 측이 사절단을 위해 많은 준비들을 했겠지만, 왜란의 흔적을 모두 감출 수는 없었는지 안타까운 광경들을 여러 번이나 보았다.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

미처 복구하지 못한 폐허와 사나운 전화가 쓸고 지나간 황무지까지.

왜구들이 얼마나 잔혹하게 조선팔도를 쓸고 지나갔는지, 무려 20년이나 지났는데도 그 참화가 남아있을 정도였다.

“조선의 세자께서는 자랑스러우시겠소. 왜란의 영웅을 부왕으로 두시고 있지 않소?”

“전하께서 그리 봐주시니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이혼은 조선에서 혼군(昏君)과 명군(名君)이라는 평가가 엇갈리는 군주다.

하지만 명나라에서는 광해군을 대부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근래에 들어 외교가 악화될 조짐을 보이기는 하나, 어린 나이에 세자의 몸으로 무능한 부왕을 대신해 조선팔도를 돌며 의병들을 지원한 광해군의 무훈은 명나라 장수들에게 깊은 교훈을 주었다.

“조선의 병조판서가 동행하고 있다 들었소만.”

주유검의 부름에 곧장 유희분이 고개를 내밀었다.

“예, 신왕 전하.”

유희분은 신왕이 자신을 부른 것에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그는 대국의 황손과 교분을 쌓고 싶었다.

어떻게 주유검에게 접근할지 망설이고 있던 찰나였다. 주유검의 부름을 유희분은 출세로 이어지는 기회라 여기고 있었다.

“어찌 군대를 파견하지 않는 것이오? 아직 기한이 남았다고는 하나, 지금껏 확답을 피하고 있으니 황제 폐하께서도 고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시거늘.”

“소신이 임금께 고하여 조치토록 하겠나이다. 일단 도감군의 소집은 끝마쳤으니, 윤허를 받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송구하다는 듯 유희분은 고개를 숙였다.

현재 평안도 4군에 1만 7천의 도감군 병력이 상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이혼이 명나라의 부탁을 어느 정도 듣고 있다는 구실을 세우려는 것일 뿐, 실상 도감군 병력은 출병준비는 하지 않고 대기상태만 유지하고 있었다.

설마 이를 눈치 채고 한 말인 걸까.

주유검의 힐난 섞인 말에 유희분은 식은땀을 흘렸다.

“소신들이 나아가 다시 한 번 주청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황손 전하께서는 부디 안심하시고 기다려주십시오.”

“부탁하리다, 부원군.”

이이첨의 말에 주유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유검의 눈에 이이첨은 그리 곱게 보이지 않았다.

임금을 기만하고 조정 세력을 독점하고 있는 간신의 존재가 달갑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광해군의 실적(失績)들 중 대부분에 이이첨이 관여되어 있음을 볼 때, 인조반정의 명분과 구실은 이이첨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명군을 끌어내린 희대의 간신.

광해군을 옹립한 일등공신임과 동시에,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데 가장 원인이 된 인물이 바로 그였다. 광해군의 치세를 오랫동안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제거되어야 할 인물이기도 했다.



* * *



이혼은 직접 신하들을 이끌고 숭례문(崇禮門)까지 마중을 나왔다.

조선의 임금이 직접 사절단을 맞이하기 위해 숭례문까지 나온 경우는 없었다.

제물포에 먼저 왕세자를 보내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직접 마중을 나온 것이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지만, 명나라의 직계황족이 직접 사절단을 이끌고 온 사례도 없었으므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세자와 비슷한 나이라고 들었다. 뱃길을 이용하면 그리 먼 거리는 아니겠지만 설마 조선에까지 올 줄이야. 혈기왕성한 젊은 나이라서 그런 것인가?”

“전하께옵서도 세자 시절에 조선팔도를 누비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사직이 위태로웠기 때문이 아닌가.”

“명나라 역시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그래서 황손이 직접 조선에 온 게 아니겠습니까.”

이혼의 물음에 대제학 박승종은 거침없이 답했다.

그는 명나라의 현 상황을 크게 비관적이라고 정의 내렸다.

명나라는 왜란 당시의 조선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무능한 임금과 탁상공론밖에 모르는 신하들, 그리고 무능한 장수들까지. 오히려 조선보다 더 열악했으면 열악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쇠퇴를 거듭하던 명나라에 황족의 이름 하나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박승종은 신왕 주유검의 모습이 세자 시절의 임금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 말에 이혼은 대제학이 농담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자신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이첨과 유희분이 세자와 동행하였다고 들었다. 여우같은 놈들, 어린 세자를 제쳐두고 신왕과 교분을 틀 셈이로군.”

“어쩌면 자신들의 위세를 신왕에게 보여주려는 목적일지도 모릅니다. 예조판서와 병조판서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것입니다. 저들끼리 파병 문제를 거론하여 결정하려 할지도 모릅니다. 신왕이 사절단을 이끌고 온 목적이 바로 거기에 있지 않습니까.”

“육시랄.”

이혼은 거친 욕설을 입에 담았다.

훈련도감과 국경에 포진된 장수들의 대부분은 이혼의 심복들이었지만, 그 밑의 부장들은 북인의 입김을 받고 있는 이이첨의 사람들이었다. 더욱이 이이첨 일파의 2인자인 유희분은 병권을 책임지는 병조판서가 아닌가.

북인들의 세력이 조정의 권력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이이첨과 유희분이 손을 잡고 일을 꾸민다면 독단으로 파병 문제를 결정짓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 모략에 신왕 주유검이 명분이 되어주는 순간, 병권과 함께 명분까지도 북인들에게 넘어가게 될 것이다.

“우선 저들에게 신왕이 넘어가지 않도록 저지해야 한단 말인가. 조선의 운명이 설마 명나라의 황족에게 달리게 될 줄이야. 굴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네.”

“참으셔야 합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서슬 퍼런 칼날 위에 서계시옵니다.”

칼날 위에서 무사히 걸어갈 수 있을까?

중심을 잃고 넘어지면 죽게 된다. 왕위에 올랐을 때부터 이미 각오한 일이기는 했지만, 나라의 운명이 명나라 황족에게 걸려있음을 이혼은 치욕스럽게 여겼다.

‘과인이 다스리는 조선은 그 어떠한 외세에도 굴복하지 않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왜놈과 여진, 그리고 명나라도! 어느 누구도 조선을 경시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조정의 무능으로 조선팔도의 백성들이 왜놈들에게 치욕을 겪었다.

그 과거를 이혼은 결코 잊지 않고 있었다. 와신상담의 심정으로 뼈에 새겼다. 두 번 다시는 조선의 백성들이 외세의 침략에 굴복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 맹세했다.

“신왕 전하와 사절단이 오고 있사옵니다.”

무관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숭례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신하들은 옷매무새를 부지런히 정돈하기 시작했다.

이혼 역시 딱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두 주먹을 쥐고서 심호흡을 했다.

이제 곧 신왕 주유검과 만나게 된다.

직접 명나라의 황족과 만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왜란의 영웅이라도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