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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제8장 조명회맹(2)



1619년 7월.

한양부(漢陽府) 경복궁(景福宮).

이혼은 고위급 인사들을 국경에 배치시키는 한편, 측근을 훈련대장과 경기감사에 두는 등의 과감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명분과 정통성이 약한 군주일수록 군사력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인다.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였음에도 이혼이 정권을 무사히 잡고 있었던 것은 그에게 막강한 군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하, 명나라가 출병하기까지 불과 두 달도 남지 않았습니다.”

대제학 박승종이 우려스러운 듯 말했다.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 그렇잖아도 민심이 흉흉해지고 있는 이 때, 조정의 북인들마저도 등을 돌린다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질 위험이 컸다.

북인은 오랑캐에 관해서 강경한 입장이었고, 명나라에 대해서는 사대주의를 표명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이혼은 중립외교를 표명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사건건 외교에 대해서는 북인과 알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알고 있소.”

“어서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이이첨과 그 일파들은 비록 지금은 전하께 충성하고 있사오나, 언제 돌아설지 알 수 없는 자들입니다.”

외부가 혼란스럽고, 내부도 분열을 겪고 있었다. 왜란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한 상황은 아니었다.

북인의 영수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 이이첨.

즉위 이전에는 이혼의 강력한 후견인이 되어준 총신(寵臣)이었지만, 지금은 권좌를 탐낼 뿐인 간신에 지나지 않았다. 북인들을 결집시켜 다른 파벌들을 억누르는 한편, 권력을 불려나가며 왕의 권위를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전하, 서인(西人)들의 동태가 수상하다는 보고입니다.”

무장 정충신이 보고를 올렸다.

이혼이 즉위한 이후부터 서인들은 크게 몰락했다. 인목대비의 유폐를 반대하다가 유배형을 당하거나, 스스로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간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서인들이 다시 결집하고 있었다.

김류와 이귀가 주축이 되어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다. 정충신을 보내어 그들을 항시 감시토록 할 정도로 이혼은 그들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명나라에서 사신이 온다고 들었습니다. 명 황제의 황손인 신왕 주유검이 직접 온다지요?”

“그 소식으로 도성이 크게 시끄러워졌지요. 설마 직계황족이 올 줄은 이 노구도 미처 몰랐습니다.”

정충신의 말에 박승종이 답했다.

명나라의 직계황족이 직접 조선에 사절단으로 온다. 조선이 건국된 이래, 단 한 번도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사절단을 이끄는 인물은 무려 황제의 손자이자 황태자의 아들이 아닌가. 도성을 비롯하여 조선팔도가 크게 시끄러워지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설마 명나라기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올 줄이야…….”

이혼이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조선의 개입을 원한단 말인가.

자신의 손자를 보내면서까지 조선에 지원군을 요구하는 황제의 행동에 그는 골머리가 아파왔다.

‘신왕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은 곧 황제를 기만하는 일이다. 북인은 물론 남인과 서인까지 들고 일어서겠지. 어쩌면 군부에서도 반란이 벌어질지 모른다.’

신왕 주유검이 온다는 소식에 각 부처에서는 상소들이 빗발쳤다.

명나라 황제가 크게 진노한 것이 분명하다.

황손인 신왕 주유검을 직접 보내 잘잘못을 묻고 하문하고자 할 것이니, 왕과 조정은 무릎을 꿇고 명나라에 원군을 보내야 한다. 상소문들의 내용은 모두 그러했다.

“이놈들은 대체 누구의 신하란 말이냐! 조선의 신하인지, 명나라의 신하인지 분간치를 못하겠구나. 이런 육시랄 놈들!”

이혼은 시정잡배들이나 할 법한 욕설을 토해냈다.

세자 시절에 조선팔도를 떠돌면서 배운 욕들이었다. 항상 몸가짐을 조심하는 이혼이었지만,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솟으면 욕을 쏟아내기 일쑤였다.

‘설마 신왕 주유검이 직접 올 줄이야. 몽골의 십만 대군을 상대로 승전을 거둔 황족이라고 들었는데.’

주유검은 북인들에게 있어 영웅으로 추대 받고 있었다.

명나라의 황손이며, 북방 오랑캐들에 대해 강경노선을 주장하고 있다.

북인들이 주장하고 있는 사상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분명 이이첨이 먼저 선수를 치려고 할 터. 어쩌면 신왕을 등에 업고 권좌에 오르기 위한 정통성으로 삼으려 할지도 모른다.

“명나라의 직계황족이 직접 사절단을 이끌고 조선에 온 사례가 있는가?”

“어, 없습니다…….”

“그럼 원군을 목적으로 오는 게 분명하군.”

이혼은 주유검을 골칫거리처럼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가 싫다는 건 결코 아니었다.

신왕 주유검은 불과 열여덟. 맏아들인 왕세자 이지보다도 어린 나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을 토벌하고 여진 정벌을 준비하고 있는 주유검은 왜란 시절에 조선팔도에서 분조(分朝)를 이끌었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멸망의 기로에 놓인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인가. 과연 뛰어난 인물이 아닐 수 없구나.’

서로 간에는 깊은 공통점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외교는 별개의 문제다. 서로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해도, 조선의 참전여부를 두고 많은 잡음이 일어날 것은 분명했다.



* * *



명나라의 직계황족이 조선으로 향하는 사절단을 이끈다.

그 소식에 조선팔도는 크게 뒤집혔다.

그리고 명나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명나라의 황족이 직접 사절단을 이끌었다는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타국으로 황족이 가는 경우는 대개 인질문제 때문이었다.

황족을 조선에 보내는 것에 대해 황실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신료들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명나라로서도 황제의 교지를 전달하는 사신 역할을 황족이 직접 수행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소장이 직접 따르겠습니다.”

병사들을 대동하고 있던 홍승주가 동래항(東萊港)에서 주유검을 맞이했다.

청주(青州)에서 배를 타고 조선으로 향한다.

조선의 제물포(濟物浦)에 상륙하여 곧장 한양부로 갈 예정이었다. 항상 명나라 사절단이 이용하는 경로였으므로 문제될 것은 없었다.

“전하께서는 도통 헤아릴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갑자기 남경에 다녀오시더니 이제는 조선으로 향하시겠다고 하시지를 않습니까. 혹여 전하의 옥체가 상하실까, 소장은 그것이 염려스러울 따름입니다.”

“아직 젊지 않은가. 내 나이 겨우 열여덟인데. 벌써부터 노환으로 쓰러질 리도 없고.”

“그런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홍승주가 괜한 불안감을 보이는 것일 수도 있었다.

명나라의 동래항과 조선의 제물포.

양국의 상단들이 항상 들락날락거리는 지역이라고는 하나, 황해(黃海)에 왜구가 출몰했다는 소식도 간혹 들려오는 상황이었다.

“소인들이 전하를 호위토록 하겠습니다.”

“믿고 맡겨주십시오.”

동래항을 거점으로 삼고 있던 상단주들이 주유검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자칫 주유검과 사절단들이 조선으로 향하던 중 봉변이라도 당할까 두려워했다. 흉흉한 사건이라도 벌어졌다가는 무역길이 끊길지도 모른다. 동래항의 상단에게 있어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무역은 사활이 걸린 일이었기에, 자발적으로 주유검을 돕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동래항의 상단들이 합심하여 주유검과의 동행을 약속했다.

그들이 보유한 사병과 상선들은 왜구들을 소탕한 경험이 다수 있었고, 사병들 중 일부는 조정군의 수병 출신이었다.

“소인들 같은 상인들에게 있어, 황해는 앞마당처럼 훤한 곳입니다. 작은 암초와 섬들이 많기는 하나, 상단들이 사용하는 해로를 통해 제물포로 간다면 문제될 게 없습니다.”

“최대한 빨리 갈 수 있겠나?”

주유검의 말에 상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윽고 주유검과 사절단 일행들이 함선에 올랐다.

그리고 주유검이 오른 함선을 기준으로 상선들이 호위를 서기 시작했다.

상선들은 군함에 가까운 성격을 띠고 있었다. 많은 물자를 실은 상선을 노리고 왜구들이 빈번히 습격을 했기 때문인데, 언제든지 해적선을 격침시킬 수 있도록 화포까지 장착해놓고 있었다.

갑판 위에 선 주유검에게 숭정제가 말했다.

[드디어 조선에 가는구나. 네가 태어난 나라라고 들었다.]

‘지금으로부터 4백 년 뒤의 시대이긴 하지만요. 익숙하고 낯익을 것도 없어요. 아예 다른 세상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래도 감회가 새롭지 않겠느냐. 네 선조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르고.]

‘흐흠.’

숭정제의 말에 주유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솔직히 말해서 기대와 불안이 공존하고 있었다. 4백 년 전의 한국으로 간다는 감회와는 별개로, 왜란의 영웅으로 평가를 받는 광해군 이혼을 직접 만난다는 것도 기대가 되었다.

광해군.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

하지만 전란을 극복하고 조선팔도의 백성들을 구원한 영웅이라는 점은 모든 역사가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왕위에서 쫓겨난 암군으로 기록되기도 했지만, 후대에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명군이라는 평가도 생겨났다.

‘그러고 보면 조선의 임금과 영감님하고는 공통점이 있네요. 젊은 나이에 전란에 빠진 나라를 구하려고 사력을 다했다는 점에서요.’

그리고 또 다른 공통점.

광해군과 숭정제, 그들이 비운의 군주라는 점이었다.

광해군은 결국 인조반정으로 폐위 당했으며, 숭정제는 이자성의 반란군에게 북경이 함락당하면서 최후를 맞이했다.

두 명 모두 나라를 지키지 못한 혼군(昏君), 민족을 지키고자 했던 영웅이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었다. 극명하게 차이점이 생긴 이유는 구체적으로 정의내리지 못할 정도로 혼란스러운 정국을 헤쳐나간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리라.

[네가 그토록 치켜세울 정도의 영웅이라면 필시 걸출한 임금이겠지. 생전에 만났더라면 술잔을 기울이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꽃을 피웠을지도 모르겠구나.]

주유검은 임금 이혼을 만나기 위해 조선 행을 선택했다.

여진 정벌의 파병 문제를 매듭지어야 한다.

조명동맹(朝明同盟)의 확고함을 재확인하는 한편, 조선의 도감군을 휘하군단에 편입시킬 계획을 그는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전하, 바람이 찹니다. 혹여 옥체에 무리가 갈까 염려스럽습니다.”

“장군은 잔소리가 많군. 누가 보면 남경의 경월공주가 아니라 그대와 혼인한 줄 알겠소.”

주유검의 익살스런 말에 갑판에서 부지런히 일을 하던 상인들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홍승주가 노려보자 상인들은 시선을 피하며 몸을 내빼기 바빴다. 주변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그는 이내 헛기침을 하고는 주유검을 회유하듯 달래기 시작했다.

“소장은 어디까지나 충성심에서 비롯된 간언을 드리는 것입니다.”

“알고 있소. 그래서 내가 그대에게 호위를 맡긴 게 아닌가.”

“전하, 전적으로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누가 보면 냉철한 성격의 입시선생인 줄 알겠군.

물론 홍승주로서는 충성심에서 비롯된 간언이겠지만, 그 어마어마한 간언들을 매번 들어야 하는 주유검으로서는 잔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물론 듣기 싫어도 어찌할 수는 없었다.

홍승주는 훗날 명나라의 전군을 책임질 총사령관이 될 몸이기 때문이었다.

“설마 이 고요하고 잔잔한 바닷길에 무슨 사고라도 일어나겠소?”

주유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상인들의 고함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해적선이다!”

“네 개의 고리가 그려진 깃발, 야츠모리 가문이다!”

감히 상선의 무리를 습격한 해적 집단은 아무래도 왜구들 중에서도 나름 악명이 높은 걸로 보였다. 해적 주제에 당당하게 군기를 치켜든 걸 보면 전국시대에 세워진 해적 다이묘인 게 분명했다.

노잡이들이 세차게 노를 젓기 시작하면서 갑판이 크게 흔들렸다.

창검으로 무장한 사병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한편, 화포가 장전되면서 한껏 긴장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전하의 말씀처럼 정말 일이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우선 전투는 상단들에게 맡기시고 저와 함께 안전한 선실로 향하시지요!”

하여간 내가 못 살아!

감히 홍승주가 그런 말을 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의 속마음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