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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제8장 조명회맹(1)



대국의 파병요구를 신하국인 조선이 거절했다.

처음에는 시일을 질질 끌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점차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지더니, 이제 와서 조선 조정은 파병요구에 대해서 기피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임진년에 그토록 도와줬더니 이제 와서 모르쇠로 일관할 셈인가? 명나라와 조선 간의 외교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명나라가 여진에게 패할 것은 자명한 일이니까요. 구멍이 숭숭 뚫린 명나라가 사납기로 유명한 여진족을 상대로 낙승을 거두리라 생각하는 게 멍청한 거지.”

주유검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중립외교를 선택한 광해군의 판단은 지극히 옳았다.

돌아가는 정세를 본다면 여진 쪽이 우세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국수주의에 빠진 명나라 조정과 사대주의에 빠진 조선 조정이 쌍으로 헛짓거리를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조선은 대명의 신하국이 아니냐. 게다가 임진년과 정유년에는 대명으로부터 지원까지 받은 나라이거늘, 어찌 아국을 돕지 않는다는 것이냐.]

숭정제가 물었다.

명나라 황제로서 당연한 의견이었다. 많은 명나라인들 역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은혜를 입은 조선이 대국인 명나라의 부름에 따라야 한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우리가 도와줬으니 너희도 도와줘라.

조선의 나라 사정이 빈곤하다고는 하나, 왜란 당시에 명나라 역시 빈곤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런데도 원군을 보내줬으니, 응당 조선에서도 지원군을 반드시 보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각 좀 해봅시다, 영감님. 비실비실한 뒷방늙은이 같은 명나라가 새파랗게 젊고 혈기 넘치는 여진을 상대로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어요? 본래의 역사대로 흘러간다면 이번 원정은 명나라의 대패로 끝나는 건 물론, 요동 지역까지 모조리 다 뺏기면서 끝나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정신 나간 놈팡이라면 모를까, 어느 누가 구멍 난 조각배에 몸을 실으려 하겠습니까? 결국 천하의 운명을 결정하는 건 실질적인 무력이잖아요.”

사르후 결전(薩爾滸 決戰).

여진과 대명, 그리고 조선이 개입된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명나라는 대파하고 장성 이북의 세력권을 모두 상실했으며, 동시에 여진은 나라를 세우는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조선은 군사적 쇠퇴를 겪다가 훗날 여진족의 침입으로 온갖 굴욕(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게 된다.

사르후 결전은 동아시아 일대의 세력구도를 완전히 뒤바꾼 역사적 사건이었다. 오랫동안 명나라를 쇠퇴의 길로 빠트린 만력제가 사망하고, 조선군왕 이혼이 인조반정으로 몰락하면서 황제와 왕이 교체되기에 이른다.

“우리는 그 전투에서 이겨야 하고요.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의 도감군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주유검은 이혼의 결정을 훌륭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두 세력 사이에서 생존의 길을 찾는 중립외교. 그것은 매우 훌륭한 선택이었다. 자국을 지키기 위해 명나라와 여진 사이를 조율하며 평화와 실리를 챙기는 외교 전략은 박수를 받아야 마땅했다.

하지만 주유검은 조선이 참전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명나라가 여진을 상대로 불리한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조선의 도감군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넌 자꾸 조선군왕의 편을 드는구나. 미래의 조선인이라고 해서 자꾸 편을 드는 것이냐. 너는 짐과 맹약을 나눈 맹우이거늘, 자신의 위치를 계속 망각하는 것 같다.]

“아니 그럼 조선인인 내가 조선왕의 편을 들지, 명나라 황제를 먼저 챙깁니까? 지금까지 거품 물 정도로 개고생 했으면 됐지.”

[어허! 짐 덕분에 천하절색의 미녀를 부인으로 두지 않았느냐. 짐이 부추기지 않았다면 너는 평생 홀로 살 몸이었거늘. 이 배은망덕한 녀석!]

“그,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어지는데…….”

숭정제는 치사하게도 주유검의 약점을 걸고 넘어졌다.

어디 사는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는 몰라도, 남을 협박하고 빈정거리는 재주가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었다,

“일단 의견 좀 정리해봅시다.”

주유검이 탁자 앞으로 걸어가 펼쳐 놓은 지도를 가리켰다.

그는 숭정제와 함께 단둘이서 앞으로의 방침에 대해 의논하던 중이었다.

“정벌 시작까지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조선의 지원군과 합을 맞출 여유가 얼마 없다는 거죠. 지금 당장이라도 조선이 지원군 파병을 시작해야만 그나마 여유가 생깁니다.”

[문제는 어떻게 조선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느냐 인데……. 그게 관건이겠구나.]

“그렇죠. 조선 조정을 장악한 북인(北人) 세력들은 명나라에 협조적이긴 한데……. 문제는 왕이에요. 왕은 명나라의 편에 설 생각도, 여진의 편에 설 생각도 없습니다. 군사를 보내긴 보내되, 목숨 걸고 여진과 싸우려 들지는 않을 겁니다.”

본 역사에서 광해군은 결국 사르후 전투에 참전하기 위해 도원수 강홍립에게 군사를 주어 요동에 파병했다.

여기까지는 좋다.

문제는 조선이 전력을 다해 명나라를 지원하려 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도원수 강홍립은 사르후 전투에서 단 한 번도 전면에 나선 적이 없었으며, 병력에 피해는 볼지언정 여진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최대한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한 몸이 되어 싸워야만 한다.

표면적인 군신관계가 아닌, 공동 운명을 짊어진 전우가 될 수만 있다면 전쟁은 유리한 판도에서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운명체라……. 당장 친구 사귀기도 어려운 마당에, 목숨을 서로 맡길 수 있는 혈맹 만들기가 쉬운 일일까요?”

[어렵지. 언제는 쉽고 간단한 일이 있었더냐?]

“차라리 전투에서 싸우는 게 낫지, 머리 쓰는 일은 젬병인데.”

주유검은 불만을 토로했다.

어떻게 이 난국을 타개해야 할까. 그나마 기대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광해군에 관한 지식’이 아닐까.

광해군은 명군(名君)이냐 암군(暗君)이냐를 두고 명백하게 의견이 갈리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만큼 수많은 역사가들이 관심을 두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전후의 내치(內治)에 대해서는 많은 부정적 평가를 들을지언정, 외치(外治)의 외교에 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다수 받고 있었다.

[혈맹이란 무릇 필수불가결한 관계에서 결정된다. 서로에게 꼭 있어야 하는 존재, 결코 없어서는 안 될 관계일수록 견고한 동맹을 이룰 수 있다. 동일한 목적과 상호보완의 관계를 쌓을 수만 있다면 철천지원수라도 손을 잡는 법이다. 오월동주(吳越同舟)라고 하지 않느냐.]

“그 말은 곧…….”

광해군에게 있어 주유검은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 되어야 했다.

실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광해군에게 있어 황제국, 재조지은 같은 체면치레에 불과한 명분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보다 확실한 실리를 조선에게 안겨줘야 한다.

하지만 과연 광해군의 속내를 알 수나 있을까?

광해군은 왕자 시절부터 속을 내비치지 않는 걸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부왕(父王)인 선조조차도 아들인 광해군의 속내를 도통 모르겠다고 발언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을 정도였다.



* * *



주유검은 만력제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반드시 조선이 이번 원정에 참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왜란으로 단련된 조선 도감군의 우수성과 조선화포의 위력, 그리고 조선의 지리적 요점과 전략적인 필요성을 장대하게 거론하면서 명나라 조정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오게 했다.

“신왕 전하의 말씀이 지극히 타당하십니다. 조선이 군을 이끌고 참전해준다면 여진의 누르하치는 배후를 경계할 수밖에 없습니다. 병법에 이르길, 적의 앞과 뒤를 잡으면 능히 열 명의 적도 물리친다고 하였습니다. 폐하, 조선에게 다시 한 번 출병을 명하시지요.”

병부상서 양호가 말했다.

그는 이번 원정의 총사령관을 맡은 몸이기도 했다. 더욱이 만력제로부터 많은 총애를 받고 있었으므로, 그의 말이 고집불통 황제의 귀에 쏙쏙 들어간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적의 앞과 뒤를 잡으면 전쟁에서 필승을 거둘 수 있다.

만력제도 아주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황제는 아니었기에, 전략적으로 볼 때 조선의 참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군왕이 답을 보내오지 않고 있잖느냐. 고얀 놈들, 설마 짐이 내린 은혜를 잊은 건 아니겠지…….”

만력제는 심드렁한 모습을 보였다.

황제는 지금껏 조선이 자신을 재조지은의 천자라 추앙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왔다. 스스로를 항상 명군이라 칭했고, 자신이 죽어서 묻힐 무덤의 건설비용에 8백만 냥을 썼다.

그는 눈에 보이는 명성을 좋아하고, 줄곧 과장된 모습만을 쫓았다.

겉치레를 강조하면서 자신에 대한 명성과 평가를 중요하게 여기는 만력제에게 있어, 조선의 미온한 대응은 실로 불쾌한 결과였다.

“조선군왕에게 엄중하게 경고를 하셔야 합니다. 소국의 왕이 폐하의 엄명을 감히 거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천자의 위엄을 세우고 대명의 굳건함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예부상서 명백이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말했다.

지금껏 예부상서는 대명과 군신관계를 맺은 신하국들에게 항상 강경한 정책을 펼쳐왔다. 무거운 조공을 신하국들에게 요구했고, 심지어 신하국이 보낸 상단들에게 무리한 조건을 달기도 했다.

그 결과 많은 신하국들이 대명과 단절하기에 이르렀다.

서역(西域)과 서장(西藏)의 부족국가들이 적으로 돌아섰으며, 북방의 오랑캐들 역시 명나라를 적대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무력과 압력을 행사할 뿐이라면 조선이 과연 따르겠습니까? 불신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동맹이라면 아예 없느니만 못합니다. 아국이 조선에 은혜를 베풀어 저들이 자발적으로 나설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주유검의 말에 만력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황태자 주상락을 몹시도 미워하는 황제였지만, 황태자의 아들인 주유검의 발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수긍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안이 있느냐? 짐과 재상들이 모인 자리에서 내놓은 발언이니만큼, 그 무게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황제의 경고 섞인 발언에 주유검은 확신에 찬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는 제후국의 왕에게 교지(敎旨)를 내려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교지?”

“지금의 군왕은 정통성이 크게 약한 임금입니다. 선왕의 서자(庶子)이며, 왕세자였던 형 임해군이 폐위되면서 그 자리를 물려받았습니다. 더욱이 조선에서는 지금의 임금이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였다는 이야기까지 돌고 있기에 정치적으로도 크게 입지가 약한 편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조선 임금의 명분과 정통성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주유검의 의견에 만력제는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깟 종이 한 장으로 조선을 전쟁에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열 장이든 백 장이든 쓸 자신이 있었다.

“하오나 폐하! 조선의 임금은 서자 출신이옵니다. 공식적으로 아국의 조정이 정통성을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조선의 임금 이혼은 어미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 천인공노할 인물입니다!”

하지만 조정의 재상들이 크게 이의를 제기했다.

지금껏 명나라가 광해군의 즉위를 거부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서자가, 그리고 장자가 아닌 그 동생이 왕위를 물려받는다는 전례를 만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명나라의 어지럽게 얽힌 황위계승과도 연관이 있었으므로 재상들이 계속해서 반대해온 것이었다.

“모두 조용히 하라.”

하지만 만력제의 생각은 달랐다.

짐짓 얼굴을 굳히며 좌우 대신들을 침묵시켰다.

자신 또한 황태자 주상락을 미워하고 삼황자 주상순을 총애하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조선의 임금에게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조선의 선왕이 내린 결정이 마치 자신의 속내를 대변해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임금은 왕자 시절부터 무예에 출중하고 군략에 능하다고 들었다. 필시 휘하의 장수들 역시 날래고 용맹할 게 틀림없다. 왜란 당시에 싸운 조선군의 위명 역시 익히 들어왔다.”

“그렇습니다, 폐하. 조선의 무장들 역시 날래기로는 아국의 무장에 뒤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일당백의 지원군이 참전해준다면 여진과의 전쟁은 이미 이긴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양호는 조선을 크게 치켜세웠다.

명나라의 병부상서는 왜란에 참전한 경험이 있었고, 조선군과 이순신을 크게 고평가하고 있는 인물 중에 하나였다.

특히 양호는 그 정도가 매우 심했다. 조선의 내정에 개입하여 이순신에게 충무공(忠武公)이라는 시호를 내리도록 선조를 압박했으며, 조선 조정에 의해 평가가 절하된 장군과 의병장들을 스스로 변호할 정도였다.

“폐하, 소손이 예부와 의논하여 교지를 대필하여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하라.”

주유검의 제안을 만력제는 윤허했다.

어차피 직접 쓸 생각도 없었다. 오랫동안 붓을 들지 않았던 만력제였기에, 예부에게 맡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교지 안에 적힌 글씨체가 엉망진창이면 도리어 비웃음거리가 될 터. 체면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만력제로서는 피하고픈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