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0화] 제7장 전쟁의 시대(4)



남경군(南京軍)이 북방 전선으로 출진하기 직전,

경월공주 주서연은 주유검을 만나길 청했다.

“내가 아무래도 악운에는 강한 모양이야. 가혼(假婚)이라고는 해도 지금껏 목숨이 붙어있는 걸 보면.”

주유검은 짐짓 대범한 모습을 보이며 말했다.

물론 이건 허세에 가까웠다.

바로 전날까지만 하더라도 주서연과 얽힌 저주에 벌벌 떨지 않았던가. 옆에서 지켜보던 숭정제가 탄식할 정도로 안쓰러운 모습을 보였었다.

하지만 미녀 앞에서는 사내대장부처럼 의젓한 모습을 보이고픈 게 바로 사내의 마음이다. 주유검도 마찬가지였기에 그는 대수롭지 않은 척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위기는 지금부터가 아니옵니까? 여진은 야차처럼 사납고, 악귀보다도 지독하다 들었습니다. 이제 곧 명군을 이끌고 저들의 영토에서 싸워야 할 것이온데, 소첩은 천신만고 끝에 얻은 지아비를 잃을까 걱정입니다.”

주서연과 혼약을 나눴음에도 주유검은 멀쩡히 살아있다.

그 소식으로 남경 전역이 떠들썩했다.

경월공주의 혼약자들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주유검이 유일했다. 드디어 경월공주가 진정한 배우자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저주는 빗나갔다.

주유검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그 증거였다. 황후가 될 여인과 혼인을 하고서도 무사하니, 필시 주유검이 명나라의 황제가 될 것이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소녀와의 초야를 피하신 이유를 물어도 되겠사옵니까? 혹여라도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어렵지 않게 소녀와 혼인할 수 있었을 텐데.”

“떳떳하지 못한 방법이 싫었기 때문이다. 당당하게 남경으로 돌아와 너를 맞이하고 싶다.”

어젯밤 주서연은 큰 결심을 하고서 주유검이 머무는 객궁을 찾았다.

하지만 주유검은 초야를 거부했다.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여진과의 전면전을 앞두고 무책임한 행위를 할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전쟁에서 돌아와 정식으로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면 될 일이다.

주유검은 오로지 주서연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초야를 거부한 것이지, 결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거부한 것이 아니었다.

“이기고 돌아온다. 그러니…….”

“예, 안심하고 기다리겠사옵니다.”

의도치 않게 딱딱한 어조로 말했지만, 주서연은 방긋 웃으며 그의 말에 화답했다.

이미 출병 준비는 모두 끝났다.

강왕 주경과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눴고, 많은 군후와 호족들과도 이야기를 끝낸 뒤였다. 남경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이미 목적을 모두 이루었으니, 1만 5천의 병사를 이끌고 출병할 일만 남았던 것이다.

“출진하라. 전군은 북경으로 간다!”

주유검은 말에 올라 모든 장군들에게 명령했다.

이제부터 죽느냐 사느냐의 싸움이 시작된다. 전쟁에서 살아남는다면 주서연을 부인으로 맞이할 것이오, 죽는다면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되리라.

하지만 망설이지는 않았다.

수많은 노력과 위기 끝에 드디어 여기까지 왔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시작이다. 천하를 걸고 자웅을 겨룰 때가 왔다!’



1619년 6월.

1만 5천의 남경군은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상경길에 올랐다.

지금껏 조정의 모든 명령을 거부해온 남경이 스스로 지원군을 차출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만력제는 이를 크게 기뻐하며 남경의 군후들에게 상과 벼슬을 내렸으며, 동시에 남경군의 부원수(副元帥)에 신왕 주유검을 임명했다.

한편 새로운 바람은 조선(朝鮮)에서도 불어오기 시작했다.

명나라 조정이 여진과의 전면전에 조선을 개입시키면서 점차 전쟁의 범위가 확대되고 있었다.



* * *



동일한 시각.

조선에서도 역시 여진 정벌을 앞두고서 갑론을박이 오고 가고 있었다.

명나라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출진하느냐 마느냐.

출진한다면 병력의 규모는 어디까지 잡느냐. 그리고 총대장의 자리에 어느 장수를 임명하느냐. 병력의 진군경로와 명나라 군단과의 합류지점을 어디로 예상하느냐.

그 모든 것들을 단기간에 정하려고 하니 더욱 큰 혼란이 벌어졌다.

명나라 황제가 조선에 지원을 요청하는 조서를 전달한 것은 불과 한 달 전으로, 조선은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에 지원군을 모두 편성해야 했다.

“아직 명확하게 결정내린 것은 아니니 대신들은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조선군왕 이혼은 좌우 대신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 발언에 예조판서 이이첨이 이의를 제기했다.

“전하, 그렇다면 아직 전하께서는 확고하게 결정을 내리시지 않은 것입니까?”

“그렇소. 조선팔도가 기아에 허덕이거늘, 지원군을 보낼 여력이 어디 있단 말이오? 게다가 정해진 기간 안에 지원군을 편성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왜란이 끝난 지도 많은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국란 이후의 기근과 가난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왜적들에 대비하기 위해 국방력을 강화시키느라 민심이 흉흉해졌고,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피폐해졌다.

이런 마당에 군사를 징집해 대규모 원정을 꾀한다?

조선팔도의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따름이었다.

“명나라는 재조지은의 나라입니다.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임진년과 정유년에 명나라에게서 입은 은혜에 대한 도리를 다하지 않으려 하시옵니까?”

병조판서 유희분 역시도 이이첨과 뜻이 같았다.

지금의 조정을 장악한 파벌은 대북인(大北人) 세력이었다. 그들은 오랑캐들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음은 물론, 명나라를 상국으로 모시면서 사대주의에 입각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대북인은 명나라의 여진 정벌에 당연히 참전해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성균관의 유생들 역시 명나라에게서 입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점차 국론을 지원군 파병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백성들의 고단함에 대해 토로하는 자는 없군.’

무거운 군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야만 한다.

구휼미를 내리지는 못할지언정, 도리어 곡식을 빼앗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

신하들은 입을 모아 파병을 요구하고 나섰고, 글 좀 배웠다는 성균관 학자들도 모두 그리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나라를 돕는 게 먼저일까.

아니면 조선의 백성들을 보살피는 게 먼저일까. 적어도 신하와 유생들 중, 후자에 대해 생각하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하오나 전하……, 명나라 조정에서 연이어 조서가 도착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만 확답을 내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의정 정인홍이 말했다.

더 이상 시일을 끌 수도 없게 되었다. 가을이 되면 명군이 대대적으로 여진 정벌군을 일으킬 것이다.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하지만 시간은 마냥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대로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였다가는 명나라 황제로부터 진노를 받게 되는 것은 물론, 조선의 모든 유교세력들이 왕을 배격하려 들 게 분명했다.

“그동안 열심히 병사를 조련하지 않았습니까? 임진년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특히 훈련도감의 병사들이 용맹하고 출중하니, 필시 오랑캐들을 토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희분의 말에 이혼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딴 말이나 하는 놈이 병조판서를 하고 앉아 있으니.

지금껏 훈련시킨 도감군(都監軍)은 북방의 여진과 남쪽의 왜적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조정대신들이 도감군을 지원군으로 보내자고 하니, 이혼으로서는 얼토당토않은 의견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전쟁에 보내면 많은 병사들을 잃게 될 건 자명했다.

군사를 모두 잃게 되면 조선은 또다시 무기력한 약소국이 되고 만다. 임진년의 왜란을 통해 이혼은 힘없는 나라가 얼마나 무기력하게 짓밟히는지를 경험했고, 두 번 다시는 백성들이 비참함을 겪게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하지만 왜란의 후유증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명나라 조정에 아국의 사정을 호소하여 준비가 끝나는 대로 뒤늦게나마 합류하겠다는 뜻을 보이시지요.”

대제학 박승종이 능숙하게 새로운 물꼬를 텄다.

여진과 명나라의 결전에 조선을 개입시켜서는 안 된다.

가능하다면 슬그머니 싸움에서 빠지는 게 상책이다. 조선에는 지원을 보낼 여력이 없을뿐더러, 쇠락하는 명나라를 위해 군사력을 낭비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결전에서 명이 이긴다면, 그때 군사를 보내도 늦지 않는다는 말이로군. 적어도 명에 대한 체면치레는 할 수 있을 테니. 과연 대제학다운 의견이로구나.’

잠자코 박승종의 말을 듣던 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에서 누가 이길지는 아무도 모른다. 명나라가 십만 대군을 보낸다고 한들, 변변찮은 수준의 명나라가 사나운 여진을 상대로 이길지는 미지수였다.

싸움의 승패에 따라서 조선의 외교노선이 바뀔 것이다.

명이 이긴다면 그대로 명을 따를 것이오, 여진이 승리를 거둔다면 오랑캐와의 화의를 택할 것이다.

“대제학의 말이 지극히 타당하오. 조선의 존망과 백년대계가 걸린 일이니 심사숙고하여 결정할 내용이라 생각하오.”

이혼은 또다시 시간 끌기에 돌입했다.

아직 확고하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도 있었다. 지원군 파병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명나라에게서 승산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패전을 예상하고 있는 전쟁에서 병사들의 고귀한 목숨을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과연 명나라가 여진을 이길 수 있을까?

명나라가 크게 우세를 점하고 있다면 모를까, 번번이 오랑캐들에게 깨지는 모습만 보인 명나라를 불신하는 건 당연했다.

“명 황제의 진노를 어찌 감당하실 것이옵니까? 시일을 끌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렇습니다. 황제께서는 조선의 참전을 오매불망 기다리실 것입니다.”

신하들의 말에 이혼은 속으로 비웃음을 던졌다.

명나라 무장들이 과연 조선군을 귀하게 대접이나 할까? 왜란 당시에 보급품을 채운다는 명목으로 명군들이 군현과 고을을 약탈한 적도 있지 않은가. 저들에게 있어서는 조선 역시 오랑캐의 범주에 속하는 나라에 불과했다.

병사를 보내봤자 소모품으로 여겨질 게 분명했다. 그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사대주의에 빠진 신하들은 명나라의 은혜를 부르짖으며 조선에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재야의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은 물론, 조정의 북인(北人) 역시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임진년의 은혜를 갚아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이이첨이 짐짓 협박에 가까운 발언을 내놓았다.

조정을 차지하고 있는 북인의 영수가 바로 이이첨이었다. 영의정 정인홍에게 관록이 밀려 2인자로 머물러야 했던 그였지만, 이제는 정인홍이 나이가 들어 퇴관을 앞둔 몸이었기에 이이첨이 모든 실권을 이어받게 되었다.

이이첨은 왕의 중립외교를 매번 반대해왔다.

화의를 요청하는 후금의 사신을 죽여야 한다고까지 말했으며, 과격한 행동을 벌이며 여진과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음을 주장했다.

“소신 역시 이이첨과 의견이 같사옵니다.”

“좌승지 이위경, 이하동문입니다.”

북인 파벌의 많은 신하들이 왕의 의견에 반대하고 나섰다.

반드시 도감군을 보내 명나라를 도와야 한다. 그들은 은혜를 입은 대국을 돕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인의를 져버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못을 박았다.

‘망할 놈들, 명나라가 승산이 있어야 도와주지. 승산도 안 보이는 전쟁에 어떻게 병사들을 보낸단 말인가?’

신하들의 격렬한 반대에 봉착했다.

이에 이혼은 욕설을 중얼거리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