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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제7장 전쟁의 시대(3)



강왕 주경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당혹스런 상태였다.

“뭐, 뭣! 대체 몇 명이 모였다고……?!”

주경은 맏아들의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두 눈을 치켜뜨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부친의 태도가 매우 부담스러웠던 걸까.

남경도위 주명성이 시선을 돌리며 다시금 대답했다.

“8천입니다……. 남경, 아니 강남 전역에서 병력이 모여들었습니다.”

“그게 말이나 돼! 어떻게 8천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가 모였느냔 말이다!”

주경이 예상한 소집병력은 1천 내외였다.

어느 군후도 감히 남경의 황족들에게 맞서려 하지 않는다. 자칫 남경의 황족들 중 하나가 황위에 오를 경우, 가장 먼저 숙청의 대상으로 노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군후들은 남경 황족의 눈 밖에 날 것을 알면서도 군사를 보내왔는가.

“열흘 만에 8천이라니,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조금만 가도 확인이 가능했다.

구름처럼 모여든 병력들은 장거정의 개혁으로 탄생한 정예부대 절강보병이 확실했다. 날카로운 병장기와 갑옷으로 무장한 정예병이 모두 신왕의 휘하로 편입되었다.

“전하, 절강좌참의(浙江左參議)께서 오셨습니다.”

“어서 들라하라, 어서!”

좌참의 육선이 저택을 방문하였다는 소식에 주경이 서둘러 불러들였다.

어째서 군후들이 남경 황족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신왕에게 협조하기 시작하였는지를 물어보고 싶었다.

“좌참의, 그동안 별고 없으셨는가?”

“저는 안녕하지 못합니다. 강왕께선 저와 같은 동향에 동문인 사이온데 어찌 저에게 일언반두도 하지 않으신 겁니까?”

“그게 대관절 무슨 말인가.”

“황손과 손을 잡으신 것을 있습니다. 북경 황족과 손을 잡는다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훗날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못하겠습니까? 앞으로라도 강왕께 협력토록 하겠습니다.”

남경의 군후를 비롯해 중소호족과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소문을 들은 제후들은 분명 강왕 주경이 신왕 주유검과 손을 잡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소문을 듣고 뜻밖의 일이라 생각했지만, 무언가 약속한 게 있을 거라 기대하는 눈치였다.

“장차 신왕이 황제에 즉위하면 만천하를 손에 쥔 천자의 장인이 되시는 게 아니십니까? 장차 대명의 국구(國舅)가 되시는 겁니다! 오랫동안 전하를 섬긴 제가 아닙니까. 절대로 제 이름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남경에서 황제를 세운다고 한들, 겨우 반쪽짜리 천하를 다스리게 될 뿐이다.

하지만 신왕이 여진을 몰아내고 나라를 일으킨다면 드넓은 천하를 모두 손아귀에 쥘 수 있다. 호탕한 성격의 강왕 주경이 주유검에게 기대를 걸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았다. 적어도 좌참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만천하를 다스리게 될 천자의 장인이라……. 물론 그리만 된다면야 바랄 게 없긴 하다만.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면 알아서 다음 자리를 알아서 내줄 테고. 잘 키운 딸내미를 줬으니 호가호위는 당연하지.’

좌참의의 말에 문득 욕심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그를 부정했다.

“설마 내가 남경 황족들에게 등을 돌리겠는가? 자네가 뭘 들었는지, 그리고 무엇을 예상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모두 헛소문일세!”

물론 좌참의는 그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남경에 무려 8천의 정예부대가 집결했다. 강왕의 조력이 없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일이다. 좌참의는 분명 강왕이 자신을 시험하는 것이라 여겼다.

“어찌 저를 의심하십니까? 같은 고향에서 자라고 같은 스승에게서 학문을 닦지 않았습니까. 저와 제 가문은 전하를 위해 일련탁생의 심정으로 따르겠습니다!”

“그게 아닐세! 그게 아니라고!”

주경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좌참의와 그 뒤를 이어 저택을 방문한 군후들 역시 믿으려 하질 않았다.

줄을 잘 서야 출세하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다.

강왕이 신왕의 편에 섰다는 말에 남경 군후들이 재빠르게 집합한 것은 말한 나위도 없었다. 혹여나 선착순일까 말을 채찍질하며 부리나케 달려온 군후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들 모두가 거대한 착각에 빠져있었다.

직계황족의 부탁으로 병력이 소집된 게 유래가 없는 일이다 보니, 그 여파가 상상을 초월하게 된 것이다.

“주상락 황태자가 직접 친필서한을 보내왔다고 들었습니다. 그 서체를 한 번이라도 볼 수 있다면 가문의 영광으로 삼겠습니다.”

“둘째 공주님과 혼인을 약속하고 살아남은 혼약자는 신왕이 유일하지 않습니까? 이건 하늘이 점지한 운명인 게 분명합니다.”

우연에 우연이 겹치면서 거대한 착각을 만들었다.

황태자가 남경에 친필교서를 보낸 것도 처음이고, 주서연과 혼인을 약속하고도 살아남은 사내도 처음이다. 계속해서 쌓이고 맞물리면서 거대한 톱니바퀴가 되어 흐르기 시작했다.

“아버님, 이번 일로 남경의 황족들과 척을 지게 된 것은 분명합니다.”

“네가 알아서 잘 설명해주면 알아주지 않겠느냐?”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왕과 노왕이 남경을 떠나 봉읍지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이놈의 딸이 가문을 망치려 드는구나!”

만약 일반적인 경우였다면 딸을 멍석말이 시켜서라도 결백을 입증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경은 가족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성격이었다.

오래전에 부인과 사별하고서 어린 자녀들을 키워왔다. 부와 권력의 정점을 찍은 대군후였지만, 죽은 부인을 잊지 못해 재혼은 물론 첩을 들이지도 않았다.

‘신왕에게 마냥 기대를 걸 순 없는 노릇이다. 전쟁에 나가는 젊은 황손에게 가문을 걸라니, 어림도 없는 소리!’

군후들이 신왕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주경은 남경 황족들과의 연줄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자칫 신왕 주유검이 패전할 경우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할 때였다.



* * *



8천에 달하는 숫자만큼 절강보병이 소집령에 응했다.

강왕이 뒷배를 봐주고 있는 주유검에게 합류하고자 제후가 과거 절강보병 소속이었던 사병 병력들을 보내준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개중에는 남경 황족들의 편에 선 경우가 더러 있었다. 물론 그런 경우에는 사병들이 가문과의 고용관계를 끊어버리고 남경군에 합류해 버렸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오랑캐들을 토벌한다.

절강보병의 사명이자, 그들이 남경에 모인 이유였다.

“왜놈이든 여진 놈이든, 모조리 모가지를 비틀어버려야 하오!”

“더러운 오랑캐 따위가 감히 대명의 사직을 노린단 말인가!”

나라의 위기에 절강보병이 소집되었다.

그를 위해서 소속된 가문에서 도망쳤다. 가문에서 하사한 땅과 재산, 심지어 처자식마저 두고 온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경우에는 주유검이 직접 붓을 들어 군후와 호족들에게 친필서한을 보냈다. 나라를 위해 병사를 보내주어 감격하였으니, 몇 배에 달하는 보답으로 갚을 것이라 약속했다.

“전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대명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남경 전역에 흩어졌던 절강보병이 한군데로 집결했다.

도합 8천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병력이 모였다.

갑옷과 병장기로 무장한 그들은 어느 때보다도 사기충천한 모습으로 새로운 주인을 맞이했다.

드디어 천하를 향해 뛰어들 시간이다.

지긋지긋한 귀족 사병에서 벗어나 오랑캐와의 싸움에 나설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잔인하고 사나운 왜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창설된 군단이니만큼, 그 강인함은 크게 남달랐다.

“과연 강왕은 남경의 왕이라 할 법합니다.”

8천에 이르는 보병군단을 보며 손전정이 말했다.

어느 누가 있어 이 정도의 병력을 모을 수 있었겠는가?

절강보병은 귀족가의 사병으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사실상 명맥이 끊어졌었다. 해체된 지 이미 오랜 세월이 흘렀거늘, 제후들의 집결로 절강보병이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으하하! 기골이 장대한 놈들뿐이군. 여진 놈들, 꼼짝도 못하겠어!”

조문조도 절강보병이 썩 마음에 든 듯했다.

남경의 호족과 상인들이 모은 병력이 7천. 그리고 절강보병이 8천이다.

그들을 모두 합치면 1만 5천에 이르는 대병력이 된다. 전쟁의 주도권을 좌지우지할 병력으로는 부족함이 없었다.

이들을 뒷받침하기 위한 물자도 걱정할 게 없다.

신왕의 명성을 들은 상단들이 스스로 호국충신을 자청하면서 물자들을 바친 덕분이었다.

‘때가 도래했다. 이들이 모두 나의 병력이며, 나의 사활을 책임질 용사들이다.’

드디어 이날이 왔다.

전장의 핵심인 기병과 보병들을 모두 손에 넣었다.

명나라 최강의 기마군단이라고 불리는 요동마병.

그리고 왜적들을 상대로 단 한 번의 패주도 없었던 절강보병까지.

이 모두를 손에 넣었으니 여진족이 두려워할 최강의 전력을 갖춘 셈이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마침내 주유검은 두 날개를 손에 넣었다.

[저들 모두가 너를 따르는 병력이다. 무려 1만 5천에 달하는 대군단이라……. 요동마병과 절강보병은 여진의 팔기군을 능가하는 명나라의 유일한 전력이다.]

주유검은 숭정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육안으로만 봐도 절강보병의 강인함을 알 수 있었다.

오랫동안 귀족가의 사병으로 활동하였음에도 그 움직임에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저들과 전장을 함께한다면 어느 무엇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저들이라면 함께 대업을 이루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드디어 여진을 상대할 수 있는 명나라의 전력들이 모두 모였다.

“그대들도 모두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요동을 침략한 여진을 토벌하러 간다.”

주유검이 제일선에 서며 말했다.

절강보병의 부장들은 묵묵히 귀를 열고 들었다.

“대명은 오랑캐를 몰아내고 탄생한 한족들의 나라다! 비록 오랑캐들에게 침공은 당했을지언정, 황제가 오랑캐들의 손아귀에 사로잡히는 굴욕을 겪었을지언정! 우리는 언제나 다시 일어서서 싸우고 또 싸워왔다!”

이들은 오랑캐들에게 지배당한 굴욕을 잘 알고 있었다.

오랫동안 지켜 내려온 가문이 수모를 겪고, 아내와 딸아이를 빼앗겼으며, 심지어 선조들이 묻힌 선산마저도 저들에게 빼앗겨야 했다.

울분과 분노.

그리고 가슴 깊이 맺힌 증오.

몽골족에게 자그마치 수백 년 동안을 지배당해온 굴욕의 역사는 한족들에게서 숨은 증오심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대들에게 약속한다! 나 주유검은 10년 안에 누르하치의 목을 손에 넣을 것이며, 오랑캐들에게 빼앗겼던 선조들의 고토를 모두 탈환할 것이다! 그러니 그대들은 선조의 천하와 강산을 지키기 위해 오랑캐 토벌에 사활을 걸어주길 바란다!”

주유검이 모든 감정들을 쥐어짜내 장정들에게 토로하며 말했다.

절강보병으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자신들을 버렸던 조정임에도 불구하고, 절강보병 소속의 병사들은 소집령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달려와 주었다. 나라를 위한 충성으로 무장된 병사들은 그 누구보다도 빛나 보였다.

‘나라가 나를 버릴지라도, 나는 나라를 버리지 않겠다.’

‘선조들의 산천을 어찌 오랑캐들에게 빼앗기는 것을 두고 보겠는가!’

절강보병들의 곧은 의기가 느껴졌다.

지금껏 주유검은 지금까지 ‘생존’을 위해서만 싸워왔다.

미래에서 온 자신과 명나라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해왔었다. 생존을 위해 명나라의 멸망을 막아내려 했을 뿐, 진심으로 명나라를 구해내 보이겠다는 의기가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모인 절강보병들을 보며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 저들 앞에서 감히 사사로운 안위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충신보국의 병사들에게 부끄러움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들은 반드시 이긴다!”

주유검이 검을 뽑아들며 소리쳤다.

“대명 만세!”

“대명 만세!!”“신왕 전하 천천세!”

병사들은 압도적인 기세로 함성을 내질렀다.

산천초목이 두려움을 느끼도록. 이 함성을 들은 오랑캐들이 절로 도망칠 정도로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드디어 오랑캐들과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음에 기뻐했다.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며 주유검에게 충의를 표현한 병사도 있었다.

[기다려라, 누르하치. 이제 네놈을 잡으러 가마.]

숭정제가 살의를 담은 눈으로 북쪽을 노려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