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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제7장 전쟁의 시대(2)



강동 전역으로 소집령을 전달하는 전령들이 보내졌다.

절강보병(浙江步兵)을 모두 소집한다.

북방 토벌에 나설 조정을 위해 북로남왜(北虜南倭)를 전담하던 병력을 모두 집결시킨다는 게 명분이었지만, 결국 강왕 주경이 신왕 주유검과 손을 잡았다고 생각한 군후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번 계기를 통해 북경과 남경 세력이 손을 잡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추측하는 군후도 적지 않았는데, 그들 중에는 북경 조정에 출사하려는 야욕을 가진 자도 더러 있었다.

“소녀가 최선을 다할 것이오니 믿고 맡겨주십시오.”

주서연은 얼굴을 복숭아 색으로 붉히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어디 하나 흠 잡을 곳이 없을 정도로 우아하고 정숙한 몸가짐이었다.

그녀의 미색에는 숭정제조차도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나라를 무너뜨리게 만들 정도의 미색을 가진 그녀였다. 과연 이러한 미녀를 부인으로 삼아도 되는 것인지, 주유검은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왜 저를 도와주는 걸까요? 설마하니 저의 남자다움에 빠진 건 아닐 테고. 전생에서 여자와 인연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가정해서 보면 틀림없이 아닐 겁니다.’

[숭정제 어진(崇禎帝 御眞)을 봐도 알겠지만 짐은 건장한 청년 시절부터 미남으로 유명했다. 절세의 미남으로 유명한 난릉왕(蘭陵王) 정도는 아니더라도 짐 스스로가 미남이라는 것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짐의 용안을 본 후 밤에 잠도 못 자고 상사병에 걸리는 궁녀들도 더러 있을 정도였다.]

‘잠꼬대는 좀 자면서나 하세요. 몽유병 초기증상 오셨어요?’

[뭐라고, 이 녀석이!]

물론 주유검도 숭정제가 미남이었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었다.

아침에 몸단장을 할 때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볼뿐더러, 숭정제의 육체를 빌려 쓴 지도 시간이 제법 되었기에 이 얼굴이 미남이라는 것은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경월공주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분명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주유검은 눈앞의 미녀가 사내의 용모만으로 혼사를 결정할 정도로 단순한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공주에게 억지를 부린 게 아닐까, 우려스런 마음뿐입니다.”

주유검은 애써 태연스런 태도로 답을 했다.

하지만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옆에 있던 숭정제는 볼멘소리를 내놓았다.

[쯧쯧. 미녀를 앞에 두고 벌벌 떠는 모습이나 보이다니. 심장이 아주 박동을 치다 못해 터지기 직전이다, 요 녀석아. 좀 대범하게 굴 수는 없냐? 의젓한 사내답게 굴란 말이다.]

‘아, 진짜. 그럼 어떡합니까? 어머니가 아닌 이성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10년만인데! 게다가 상대는 천하절색의 미녀라고요.’

[……10년 만에 처음이라고? 4백 년 뒤의 시대라고 해서 풍습과 예법에 자유로울 거라 생각했거늘, 더 엄격한 시대가 되어버렸구나. 설마 남녀의 교제 자체를 금지시킬 줄이야.]

숭정제의 오해 가득한 말에 주유검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해버리면 분명 두고두고 놀림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혹여 소녀가 무슨 실수라도 범한 것이옵니까?”

주서연이 조심스런 어투로 물었다.

방금 전까지도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주유검의 모습에서 의아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숭정제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주유검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의 일에 관하여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너무 괘념치 마시옵소서. 분명 잘해내실 것입니다.”

주서연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 간드러지는 눈웃음에 과연 얼마나 많은 사내들이 희생당했을까? 그녀의 용모를 본 것만으로도 상사병에 걸려 쓰러진 사내들이 한 무더기는 된다고 하니, 분명 어마어마한 인원들이 희생당했을 터였다.

“그리고 신왕 전하께서는 소첩의 부군(夫君)이 되실 대장부이십니다. 소녀에게 경어를 쓰지 마옵소서.”

[내 말이 그 말이다. 부인이 될 여자에게 존댓말이나 하며 다닐 거냐? 그럴 거면 차라리 부인마마라고 부르지?]

‘아직 혼례가 성사된 것도 아니잖습니까. 왜들 이래?’

주서연의 말에 주유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혼사 여부에 대해 일일이 논하는 것른 아직 시기상조였다.

그녀가 일찍이 말한 것처럼 아직은 가난한 황손에 불과하다. 공훈을 세웠다고 한들, 경월공주와 혼인하기엔 모든 것이 뒤처지는 게 사실이다.

[공주에게 마음이 든 것이냐. 문득 그런 생각도 다 하고.]

‘나도 모릅니다. 일단 말이 그렇다는 거죠. 기대를 걸어주는 여인을 배신할 정도로 저는 독한 녀석이 못 됩니다.’

어떻게 해서든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

주서연에게서 자세한 사정은 들었다. 개선장군으로 금의환향할 경우에는 그녀와 혼인을 하게 되겠지만, 실패하는 순간 그녀는 개망나니로 유명한 황족에게 시집을 가야 한다.

다시 말해 앞으로의 결과에 따라 한 여인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절강보병이 모두 소집되면 곧 북경으로 가시지 않겠사옵니까?”

“모인 거란 보장도 없을 텐데. 군후들이 과연 순순히 사병을 내어놓을지가 걱정되니.”

“원하시는 대로 흘러갈 것이니 심려 마시옵소서.”

마치 주서윤은 앞날을 예측하고 있는 듯이 답했다.

족집게 같은 처자가 아닐 수 없다. 지금껏 모두 그녀의 말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남경 제일의 재녀라고 하더니, 머리가 매우 비상했다. 만약 사내로 태어났다면 천하를 호령하는 참모가 되었으리라.

“부군께서 다음으로 향하실 곳을 소첩이 맞춰보아도 될는지요?”

“그것까지 맞춰?”

이제는 아예 무당집까지 차릴 기세로군.

자신 있어 보이는 주서연의 태도에 혀를 내둘렀다.

“후후, 소첩이 한 번 맞춰보겠사옵니다. 미처 종이를 마련하지 못하였으니, 부군의 손을 잠시 빌리도록 하겠습니다.”

주유검이 답을 하였음에도 주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는 이윽고 주유검의 손바닥 위에 섬섬옥수 같은 손가락으로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혼담을 나눈 사이라고는 하나 이는 매우 대담스런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미녀의 손가락이 슥슥 움직일 때마다 주유검은 온몸에 찌릿하게 전율이 일었다. 덕분에 주유검은 겉으로는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상태가 되어야 했다. 어찌나 심장이 빨리 뛰는지 주서연의 귀에까지 그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어떻사옵니까. 소첩의 예상이 맞았는지요?”

주서연의 말에 주유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예상은 정확했다.

여인답지 않은 냉철한 눈썰미에 주유검은 물론 숭정제도 적지 않게 놀란 반응을 보여야 했다. 휘하 장수들에게조차도 아직 말하지 않았거늘, 그녀는 이미 목적지를 예상하고 있었다.

조선(朝鮮).

주서연이 주유검의 손바닥 위에 적은 두 글자였다.

“혹여 틀리더라도 소녀를 골리진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그 말에 주유검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가 예상한 대로 주유검은 사신의 자격으로 조선에 들를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아주 예상 못할 것은 아니었지만 주서연의 지모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 * *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중압감을 느꼈다.

사르후 결전에 걸린 것은 명나라의 국운만이 아니다.

한 여성의 인생은 물론, 전쟁에 참전할 모든 장정들의 사활이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으로선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걱정 마라. 이미 남경부윤은 네 편이 아니냐. 부윤을 뒷배로 두고 있으니, 남경의 군후들도 감히 어쩌진 못할 게다.]

‘백성들을 부추겨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라……. 뭔가 무서운데요. 남경 백성들을 이용한 듯한 느낌도 들고.’

[무얼. 결과만 좋으면 됐지.]

물론 숭정제도 마냥 안심한 것만은 아니었다.

천문학적인 재물을 모조리 투자해서 남경 백성들의 여론을 움직인 경월공주의 처세술에 대해선 두렵다는 마음이 들었다.

섬뜩한 독녀와 혼인을 약속한 게 아닐까.

숭정제는 그녀와 혼담을 나누었던 여섯 명의 혼약자가 모두 사망한 것에서도 결코 우연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전하, 혼사를 감축드립니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서라도 코가 비뚤어지게 술을 마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손전정과 조문조가 다가와 주유검에게 예를 취했다.

남경의 공주와 으슥한 밤에 담화를 나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곧바로 혼약으로 이어질 줄이야. 그동안 주유검을 보필했던 두 무장은 감격했다는 모습을 보였다. 하긴 마냥 어리게만 생각한 황손이 남경에서 배필을 찾았다는데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남경에 모인 병사들의 상태는 어떤가? 혹여 그들 사이에 불만이 나오진 않았는가.”

주유검의 물음에 조문조가 답했다.

“체격이 훤칠한 장정들로만 모았습니다. 상인들도 많은 물자들을 충당해주고 있으니 앞으로 걱정은 없을 듯합니다. 남경에서 명성이 자자한 전하를 따르게 되어 모두 감격하는 눈치였습니다.”

상인들은 이윤과 재산의 축적만을 위해 일한다.

그 말인즉슨 주유검에게서 일확천금의 기회를 보았다는 뜻이다. 언젠가 이 황손이 황제가 될 것이라고, 전쟁에서 능히 이겨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경월공주에 대한 소문이 알려졌다고?”

전쟁에서 이긴다면 황손이 공주와 혼인할 것이요, 전쟁에서 진다면 남경의 망나니로 유명한 주유숭이 공주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약속을 나눈 당사자들만이 알고 있어야 할 정보가 지금 남경 전역에 퍼진 상태였다. 분명 그 소문을 퍼뜨린 배후에는 경월공주가 있을 거라 확신했다.

[반드시 이겨야 할 사명감이 생기지 않았느냐. 병사들도 재밌어하는 눈치니 나쁠 것 없는 일이다.]

‘아니, 한 여성의 인생을 책임지게 된 제 생각 좀 하시죠.’

[그러니 더욱 좋은 일이지. 네가 진심을 다해 전쟁에 전념할 테니. 한 처자의 인생이 걸린 중대사다. 더욱 더 분발하려구나.]

‘하여간 못돼먹으셨다니까.’

숭정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전정이 입을 열며 말했다.

“하지만 덕분에 많은 호족과 상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공주와의 혼약이 걸렸으니 분명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거라 확신하는 눈치였습니다.”

남경 사람치고 경월공주를 모르는 자가 없었다.

공주와 연결된 연담은 남경 사람들에겐 최고의 관심거리였고, 어찌나 빨리 소문이 퍼졌는지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속담을 입증시킬 정도였다.

유명세는 곧 인기가 되어 돌아왔다.

경국지색의 미녀를 어느 누가 모른단 말인가. 지금에 와선 남경의 모든 백성들이 두 남녀의 혼약이 무사히 성사되길 기대하고 있었다. 주유숭에 대한 악평이 자자했기 때문에 모든 백성들이 두 손 모아 전쟁에서 이기길 기도했다.

“골치가 아프군. 군사를 모으기 위한 일이라곤 해도,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소문이 퍼진 덕분에 저희는 물론 병사들까지도 모두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소장들이 반드시 전쟁에서 이겨 보이겠습니다.”

손전정과 조문조가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이 어깨에 주군의 혼사가 걸려있다. 주유검을 따르게 된 남경군도 마찬가지였는지 이 일에 대해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대들에게 매번 목숨을 맡겨왔네. 그런데 이번에는 혼사까지도 걸어야 할 상황에 놓였군. 승패의 여부에 따라 결론이 나지 않겠는가?”

“맡겨만 주십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주유검의 말에 두 장군들이 예를 취하며 굳게 맹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