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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제7장 전쟁의 시대(1)



강왕(江王) 주경은 주유검과는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과연 손을 잡아도 될까.

북경의 직계황족을 대놓고 무시하자니 후환이 두렵고, 그렇다고 손을 잡자니 남경의 군후들이 거센 반대를 할까 무서웠다. 북경과 남경, 어느 편에 서야할지 고심에 젖은 채로 시일만 흘러갔다.

“남경부윤의 권한으로도 병력을 동원할 수 있습니다. 군후들에게 직접 명령을 내릴 수는 없어도, 남경의 정예부대만큼은 제 휘하입니다.”

한편 남경부윤 오찬서는 주유검을 따르겠노라 결심했다.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사나운 왜적들과 싸운 용맹스러움.

그런 주유검의 모습을 보고 감탄한 오찬서는 설령 장인어른인 강왕과 척을 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따를 것이라 다짐했다.

“저희 호족 역시도 동참하겠습니다. 적어도 물자만큼은 댈 수 있습니다.”

“미약하게나마 지원하고 싶습니다.”

남경의 몇 안 되는 군후와 호족들도 협력을 제의해왔다.

그들은 주유검이 장차 북경의 황제가 될 인물이라 생각했다.

이건 기회였다. 가문을 크게 일으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없던 영악한 호족들로서는 병력과 물자의 지원을 바라는 주유검에게 협력하는 길을 택했다.

이에 따라 7천에 달하는 병력이 모였다.

남경부윤이 직접 호족들과의 교섭을 책임졌고, 남경에서 활동하던 상단들도 점차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적지 않은 물자들도 모이기 시작했다.

“뭐에 쓰이기라도 했나? 갑자기 왜 남경부윤이 신왕을 돕는단 말인가.”

남경의 여론이 크게 움직이기 시작한 계기는 남경부윤 오찬서의 지지였다.

남경부윤이 지지를 천명하자 호족과 상인들이 움직였다.

물론 남경부윤이 그동안 신왕과 함께 왜구 토벌에 나서면서 그에게 마음이 움직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강왕이 예상치 못한 것은 빠르게 결집되기 시작한 주유검의 지지 세력이었다.

“아버님, 백성들이 신왕을 지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계산에 능한 호족과 상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였으니, 더욱 빠르게 성장할 겁니다.”

“신왕이 남경에 온 지 이제 겨우 보름이 아니냐. 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게냐.”

주경이 심드렁한 모습을 보이며 턱을 괴었다.

그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금지옥엽으로 키운 여식이 물심양면으로 주유검을 돕고 있음을.

늦깎이 나이에 연심을 느낀 처녀는 무서운 법이다.

주서연은 많은 재화들을 풀어 주유검을 지지하는 여론에 불을 지폈다. 그녀는 황족들에게 받은 패물과 금은보화만이 아니라, 지금껏 자신이 모아온 개인적인 재산들까지도 모두 사용하고 있었다.

“이러다 신왕이 원하는 대로 절강보병을 빌려줘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물론 빌려주는 것까지야 어렵지 않다만, 무사히 이기고 돌아올 거라는 보증을 내 이름으로 써주기가 겁난다.”

어느덧 주경이 절강보병의 투입에 관점을 두었다.

남경의 여론이 심상치가 않다. 그동안 남경을 다스려 온 주경이기에 며칠 사이에 변한 민심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자칫 신왕의 요청을 거절했다는 게 알려지면 곤혹스런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여론 따위야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주경은 남경의 여론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소규모라면 빌려줘도 좋지 않습니까? 지금 신왕에게 모인 병력만 7천이 넘습니다. 소정의 목적은 달성하였으니, 많은 군사는 필요하지 않을 겁니다.”

“굳이 우리 가문이 여론에 반할 필요는 없다는 거구나.”

“그렇습니다. 아버님께서 그러시지 않으셨습니까, 물살은 타고 흐르는 것이지 거꾸로 헤엄치는 게 아니라고.”

맏아들의 말에 주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그렇기도 하다. 신왕이 정벌에서 병력을 크게 잃고 돌아와도 큰 피해를 보는 건 신왕일 터. 자신이야 남경의 민심을 들먹이며 병력을 빌려줬을 뿐이라고 신왕에게 책임을 둘러대면 그뿐이다.

“절강보병은 군후들의 사병입니다. 군후들의 세력이 약해지면 득을 보는 건 아버님이십니다.”

“내가 피해를 보는 건 없지.”

주경은 이해타산적인 성격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사사로운 일에도 가문의 이익을 중시하며,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 항상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두었다. 치밀하고 이기적인 성격 덕분에 강왕은 남경을 제패하는 대군후가 된 것이다.

“아버님!”

둘째 아들인 주명균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얼마 전에 주유검을 따라 왜구 토벌에 종군하였다가 이제야 돌아온 모양이다.

“그래서 그동안 감시했던 신왕은 어떤 인물이더냐? 기탄없이 말해보거라.”

주경의 말에 주명균이 대답했다.

“몽골의 십만 대군을 쳐부순 무훈이 과연 허언이 아니었습니다. 왜구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었고, 잡힌 백성들을 모두 구출해 냈습니다. 그리고 양식과 재물을 풀어 백성들의 구휼에도 힘쓰는 듯 보였습니다.”

“남의 재물로 생색내기는.”

주명균의 보고에 주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주유검이 백성들에게 내린 양식과 재물은 남경의 곳간에서 푼 것들이며, 그 곳간의 주인은 오찬서였다. 오찬서를 사위로 둔 주경은 그 곳간에 든 재물들이 모두 자신의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신왕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들라고 할까요?”

무관의 물음에 주경이 심드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줄은 아는군. 들라고 하거라.”

주유검이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다시 한 번 절강보병의 참전을 요구하기 위함이었다.

두 번째 부탁이다.

하지만 처음 부탁할 때와는 상황이 달라졌다. 남경의 민심을 등에 업은 주유검의 부탁은 차마 거절하기 어려웠다. 주유검이 적잖은 지지 세력을 가지기 시작한 탓이다.

“그리 간곡히 청하시면 저로서는 망설여집니다.”

주경이 넌지시 의중을 보냈다.

지금까지는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황태자의 교서가 있고 황손이 간곡히 부탁하고 있으니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다. 꾀에 능한 너구리 같은 주경이 슬그머니 주유검의 지지 여론에 발을 올렸다. 가문을 위해 두 다리 걸치는 건 주경의 특기 중 하나였다.

“우선 군후들에게 소집령을 내리겠습니다. 하지만 소집령에 응할지 하지 않을지는 모두 군후의 의중에 달려 있습니다.”

지방 군후들이 자발적으로 사병을 내어줄 가능성은 희박하다.

사병은 곧 군후들의 칼이다. 앞을 헤아리기 어려운 난세가 찾아오면서 군후들은 사병을 늘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 군후들이 애지중지하면서 키운 사병을 내어줄 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건 신왕이 알아서 할 일이지. 나는 소집령을 내린 것만으로도 북경 황실과 황태자, 그리고 신왕에 대한 의리를 지킨 셈이다.’

물론 숭정제는 교활한 너구리의 속셈을 이미 헤아리고 있었다.

절강파병의 투입 문제는 결국 군후들의 의중에 달려 있다. 그렇기에 당착된 문제는 매우 복잡하게 흘러가게 될 것이다.

[이런 놈이 외척으로 성장할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지는군.]

부와 권력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인간.

이런 유형의 인간은 어느 시대건 존재했다. 그 유능함을 자신과 나라를 위해 쓴다면 장거정 같은 인물이 될 것이고, 오로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쓴다면 나라를 망치는 간신이 될 것이다.

양날의 칼이다. 숭정제는 주경을 외척으로 두는 것에 대해 고심에 빠졌다.

‘지금은 넙죽 받아들여야죠. 언젠가 이 굴욕을 갚아줄 때가 올 겁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주유검의 말에 숭정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주경이 주유검과 손을 잡았다.

사실과는 매우 다른 소식이 남경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대체 이건 또 무슨 봉변이냐. 내가 왜 그 젊은 황손과 손을 잡아?”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하는 소문에 당사지인 주경이 비명을 토해냈다.

뒤숭숭한 마음이 들더니 결국 안 좋은 일이 찾아왔다. 혼담을 제의한 황족들을 모두 물리치고 북경의 황손과 손을 잡았단 소식이 남경 전역에 퍼져나갔다.

“그래, 네가 한 짓이라고?”

주경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든 건 신왕이 아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금지옥엽처럼 키운 딸이 지금껏 신왕을 뒤에서 돕고 있었던 것이다. 머지않아 알게 될 사실이었지만, 오히려 주서연이 먼저 찾아와 이실직고했다.

“네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느냐.”

주명성이 노한 표정으로 여동생을 힐난했다.

남경 황족들로부터 등을 돌리는 순간, 가문에 받게 될 타격이 상당하다. 그들을 모두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신왕을 도운 주서연의 행동은 미쳤다고 밖에는 볼 수 없었다.

“네가 신왕과 야밤에 만남을 가졌다는 것은 들었다. 설마 그 황손에게 마음을 두기라도 한 거냐? 직계황족이라는 혈통뿐, 그 무엇도 가지지 못한 황손일 뿐이다.”

“제가 설마 치기어린 마음으로 신왕을 도왔겠습니까.”

주서연의 답변에 주명성이 입을 다물었다.

어디 한 번 변명이나 해보라는 뜻이다. 그에 주서연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저희 가문은 북경도, 그리고 남경도 버려선 안 됩니다. 반쪽짜리 황제를 꿈꾸는 황족들은 물론, 사직을 다시 세우려는 신왕에게도 승산을 걸어보잔 뜻입니다.”

“승산?”

“신왕이 조정군을 이끌고 누르하치의 여진을 몰아낼 경우를 생각해보세요. 황제의 골칫거리였던 여진족을 토벌하는 순간, 신왕은 황제의 총애를 받는 전쟁영웅이 됩니다. 황위계승의 구도가 완전히 뒤바뀌게 될 겁니다.”

주서연의 말에 주명성은 물론 주경과 주명균 역시도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주 적지만 가능성이 있다.

황제는 여진 정벌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십만 대군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 물자까지 총동원하면서 대대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신왕은 황태자의 다섯 번째 아들이 아니냐. 장남인 주유교가 다음을 이을 텐데.”

“방에 박혀서 목수질이나 하는 황손을 누가 지지해주긴 할까요? 지금까지 명 황실이 장자계승을 주장한 이유는 복왕이 아닌 황태자를 다음 황위에 등극시키기 위해서였어요.”

명나라 조정세력은 둘로 나뉘어 있다.

황제와 육조 재상들. 여진 정벌에서 큰 승전보를 거둔다면 황제와 육조 재상들 모두로부터 인정을 받게 될 것이고, 황위계승에 한 발 앞설 수 있게 된다.

더욱이 황태자 주상락은 선천적으로 병약한 몸이다.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으니 주유검이 옥좌에 등극하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네 말은 모두 신왕이 전쟁에서 이길 경우에 해당되는 이야기나 아니냐. 신왕이 몽골과의 전쟁에서 큰 공훈을 쌓은 건 사실이나, 정벌에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확실치 않은 가능성이란 말이다. 게다가 군후들이 사병을 얌전히 보내줄 거란 사실도 정해지지 않았다.”

“신왕이 실패한다면 두 말 없이 아버님과 오라버님들께서 시키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대체 신왕의 어느 점이 마음에 들었단 말이냐.”

어째서 이렇게까지 신왕에게 집착하는 거지?

주명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등장으로 인해 고요하게 흐를 뿐이던 남경의 시간이 급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