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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제6장 경월공주(4)



먼저 물음을 던진 건 주서연이었다.

“전하께옵선 남경에 군사를 모으기 위해 오셨다 들었사옵니다. 그를 위한 청혼이신 것인지요?”

“아니라곤 부정하지 않겠소.”

주유검은 솔직하게 답했다.

남경에서 비상한 재녀로 유명한 주서연을 알량한 자신의 머리로 속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주유검은 솔직하게 답했고, 그 대답에 주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군사를 모은 다음에는 여진 정벌에 나설 생각이시군요. 여진족은 무자비하고 사납기로 유명합니다. 몽골과의 싸움과는 격이 다른 위험과 고난에 봉착하실 것인데… 전하께선 두렵지 않으십니까?”

주서연에게 있어 전쟁은 매우 낯선 단어였다.

남경이 왜구의 침범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곤 하지만, 전쟁이라 부를 정도는 아니다. 그러니 당당하게 전쟁에 나가고자 하는 주유검의 모습은 주서연에게 있어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비겁하고 무능한 황족들만 대해오던 주서연에게 있어, 주유검은 매우 특이한 경우였다.

“전쟁은 무장들에게 맡겨도 될 일이 아니옵니까?”

“비단 전쟁만을 위한 건 아니오. 나라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라도, 사직을 다시 재건하기 위해서라도 움직이려는 것이오.”

나라의 멸망을 운운하는 것은 황태자의 아들로서 매우 부적합한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유검은 주서연에게 오로지 사실만을 말했다.

나라에 망조가 들었다는 것은 시골 백성들도 아는 일이다. 중앙 조정은 지방의 통제권을 상실했고, 지방에선 반란군이 득세하여 진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나라가 굳건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한들, 누가 그 말을 믿어줄까.

그걸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황제밖에 없을 것이다.

“전하의 말씀은 알겠사옵니다. 저에 대한 연모의 마음은 전혀 없고, 오로지 나라의 멸망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저를 원한다는 것 아니십니까?”

“그, 그건 아닌데……. 아니, 사실이기도 하고.”

말을 버벅거리는 주유검의 태도에 주서연이 입가를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참으로 순박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과연 몽골의 십만 대군을 쳐부수고 북방을 안정시킨 황손이 맞는 걸까?

남경으로 오기 전에는 야차 같은 왜구들과도 싸웠다고 들었다. 남경에도 소문이 자자한 영웅이지만, 주서연의 눈에는 연하의 남동생처럼 보였다.

“남경의 황족분들께선 소녀에게 값진 패물과 수많은 금은보화를 주셨사옵니다. 하오면 전하께옵선 소녀에게 무엇을 주실 수 있는지요?”

“지금으로선 마땅히 줄 수 있는 게 없소.”

주유검이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곤궁과 피폐함의 극치를 달리는 요서성(遼西省)을 관리하는 게 전부였다. 백성들에게 조세조차 거두지 못하는 마당에 경월공주의 환심을 사기 위해 패물을 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꿈과 야망만 앞서는 가난한 황손.

북경에서 권세를 가진 것도 아니고, 남경에서 부와 권력을 자랑하는 황족들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졌다. 직계 황족의 혈통을 가지고 있되, 장자계승을 최우선적으로 여기는 황실의 관법에 따라 형인 주유교가 이어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저희 주씨 가문은 황실과 혼인을 맺으며 성장한 인척 가문이옵니다. 혼인은 무릇 양측의 이해관계를 통해서 결정됩니다. 그런데 전하께옵선 저희 가문에 당장 주실 수 있는 게 없사옵니다.”

주서연이 현실적인 문제를 들며 혼담에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몰차게 거절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무슨 영문인지, 주유검에게 자신과의 혼담이 성사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정벌에서 이기셔야 합니다. 누르하치를 멸망시키고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시옵소서.”

눈에 띄는 성과만이 세상의 전부다.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불명확한 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세울 수 없는 업적과 성과를 거두어야만 혼담이 성공하게 될 것이다.

“남경부윤 오찬서를 이용하셔야 합니다. 남경을 지배하는 것은 아버님이오나, 군사권은 부윤에게 있습니다. 부윤이 강경한 목소리를 낸다면 군후들도 긴장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주서연이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왜구를 크게 격퇴한 이후부터 주유검의 명성이 남경에서 하늘을 찌르고 있다.

특히 왜구의 습격을 매번 받아온 도시와 마을에서는 주유검을 영웅으로 치켜세우고 있으며, 남경의 하급 무관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대단했다. 기세등등해진 여론에 더욱 불을 지핀다면 어쩔 수 없이 절강보병을 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릇 만인의 마음은 무쇠도 녹이는 법이옵니다. 군중의 여론이 전하를 지지하는 한, 군후들도 모르쇠로 일관하진 못할 겁니다.”

혼인이 성사되긴 어렵다.

지금의 주유검은 남경 황족들에 비해 모든 것이 부족했다. 설사 당사자들이 간절하게 원한다고 한들, 현실적인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주서연은 혼인이 성사될 수 있도록 혜안을 주었다.

어째서 처음 보는 남자를 위해 움직이려 하는지는 주서연으로서도 알지 못했다. 그저 잠시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마음이 이끌렸다고밖에는 말할 길이 없었다.



* * *



왜구(倭寇)들은 보통의 도적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화승총으로 무장한 병사가 있는가 하면, 조악하게나마 화포를 다룰 줄 아는 병사도 더러 있었다. 견고한 투구와 갑옷에는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저마다 신호를 보내며 명령체계를 갖추었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조문조가 크게 일갈했다.

그는 모래바람을 뚫어내며 적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거대한 무골의 장수가 뛰어들자 왜구들은 경악성을 토해냈고, 조문조가 창을 휘두를 때마다 작은 난쟁이 같은 왜구들은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타아앙!

타다다다다당!!

총탄이 대기를 가르며 쏘아졌다.

왜구의 강한 저항에 계속해서 부상자들이 발생했다. 더 이상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왜구들은 화포까지 동원하여 남경 병사들을 궁지로 내몰았다.

“왜놈들은 창병이 없어 기마에 약하다. 손전정 장군은 기마대를 이끌고 적의 후미를 쳐라.”

“알겠습니다, 전하!”

손전정에게 명령을 내린 주유검은 곧바로 화승총을 들어 달려드는 왜병을 쏴 죽였다.

근위대들 역시 부지런히 장전과 발포를 반복했다.

그로 인해 달려들던 왜병들은 모두 총탄 앞에 발이 묶이게 되었고, 가까스로 접근해온 자들은 옆의 창병들이 나서며 진격을 가로막았다.

“이놈들, 내가 상대해주겠다!”

얼굴에 칼자국이 가득한 남성이 사자후를 터트렸다.

왜구들의 우두머리로 보였다.

그는 놀랍게도 한족의 언어를 사용하는 중원인이었다. 중원에서 태어나 중원에서 자랐음에도, 왜인들과 손을 잡고 중원인들을 납치해 노예로 팔아치우며 이윤을 챙겨온 자였다.

[왜구의 7할은 왜나라로 도망친 중원의 죄인들이다. 동포를 짐승마냥 사냥한 놈들이다. 절대로 봐주지 마라.]

숭정제의 말에 주유검은 화승총을 들었다.

새롭게 장전된 화승총이었다.

심지가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방아쇠를 당겼다.

“크악!”

총탄은 정확히 표적에 적중했다.

하지만 탄환 한 발로는 부족했는지 왜적의 우두머리는 두 발을 멈추지 않았다.

주유검을 병사를 이끄는 대장으로 여기고 그를 죽이고자 단단히 결심한 듯, 커다란 대도를 휘두르며 광기 어린 질주를 해오고 있었다.

“새 총.”

주유검은 병사에게서 화승총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장전된 화승총을 연이어 쏘았다.

이번에는 가슴팍을 노렸다.

하지만 총탄이 얕게 박혔는지 아직까지도 우두머리는 성큼성큼 뛰어오고 있었다. 이를 본 주유검은 당황하기는커녕, 병사에게서 새로운 화승총을 받아들고 차분히 조준을 시작했다.

“그래, 누가 이기나 해보자.”

세 번째 탄환을 쏘아냈다.

이번에는 넓적다리를 향해서였다.

그것이 제대로 먹혀들었는지, 주유검을 향해 질주해 오던 우두머리는 고꾸라지듯 쓰러졌다.

“놈의 수급을 베어서 창대에 꽂아라. 그 출신이 무엇이든, 백성을 수탈하는 왜구 놈들은 그 뿌리를 뽑을 것이다.”

남경부윤 오찬서가 검을 뽑으며 병사들과 함께 돌격을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기병대를 이끌던 손전정이 왜구들의 본진을 강타하면서 결정타를 먹였다.

뒤에서 포격을 하던 왜구들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주유검은 그 동안 남경 해안에서 약탈을 하던 무리들을 소탕한 것은 물론, 해적선에 감금되어 있던 백성들을 구출하면서 상당한 성과를 낼 수 있었다.

“대승입니다, 전하. 전하께서 조력해주지 않으셨다면 큰일을 겪을 뻔했습니다.”

오찬서가 감읍하여 주유검에게 감사의 예를 올렸다.

왜구가 다루는 조총보다 사정거리가 긴 신식총기는 매우 훌륭했다.

전술적으로 왜구보다 앞설 뿐만 아니라, 적이 자랑하는 총격전에서도 한 수 앞서 공격을 퍼부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놈들의 해적선을 모조리 부숴서 그 잔해가 왜나라까지 떠내려가게 합시다.”

“예, 알겠습니다.”

주유검의 명령을 오찬서는 기꺼이 받들었다.

주유검은 대규모 침공을 감행한 왜구들을 연이어 격퇴해냈다.

왜구들의 수급을 모조리 베어 조정에 알린 것은 물론, 왜구로 인해 큰 피해를 보았을 남경의 군현들을 차례대로 돌며 백성들을 위무했다.

[남경의 민심을 사로잡아 네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어제 공주가 말한 것처럼 남경의 군후들이 너에게 군사를 빌려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 또한 하나의 방법이다. 민심이 크게 돌아선다면 군후들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겠지. 이미 남경에서는 너를 따르는 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으로선 공주가 이야기한 방법만이 유일한 대책이니.’

[경월공주는 과연 뛰어난 재녀다. 민심을 이용하여 군대를 손아귀에 너으려 할 줄이야.]

남경의 군대를 손에 넣어야 한다.

왜구와의 싸움은 그 준비에 불과했다. 가장 큰 적은 왜구가 아닌 만주의 여진족들이다. 왜구는 그저 약탈과 살인에서 끝날 뿐이지만, 여진족은 한족을 상대로 천하를 훔치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놈들이 도망친다! 쫓아라!”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선 안 된다!”

남경 인근에서 벌어진 왜구들을 모두 격퇴했다.

남경부윤 오찬서와 함께 왜구를 물리친 주유검의 명성이 남경을 가득 메우게 되었다.

“신왕 전하와 함께 싸운 것이 믿어지질 않습니다!”

“대단한 무훈을 세우셨습니다.”

남경에 소속된 장수부터 하급무관에 이르기까지.

무장들 모두가 주유검에게 깊은 감명을 느꼈다.

지금껏 보아온 황족들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부와 권력만을 이용해 오만한 모습을 보일 뿐이던 소인배들이었지만, 주유검은 장정들과 함께 싸우며 왜구들로부터 백성들을 지켜냈다.

“남경부윤, 구출해낸 백성들은 어떻던가? 아이를 가진 산모가 위태로워 보였네만.”

“전하께서 염려해주신 덕분에 지금은 안정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건강하게 아이를 낳으면 좋겠군.”

주유검은 오찬서의 마음을 얻기 위해 따로 연기를 하는 일은 없었다.

지금까지 해온 것의 연장선이었을 뿐이다.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왜구를 증오하여 그들을 물리쳤고, 그들에게 붙잡혀 있던 백성들을 구출해냈다.

힘을 가진 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황손으로서 자각심을 가진 건 아니었지만, 힘없는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 전투에도 전하의 군문에서 종군하고 싶습니다!”

“소장도 전하의 용전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직접 전장에 나아가 싸우는 황족은 무장들에게 파격적으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이토록 백성들을 위해 싸운 황족이 있었던가.

혹시나 강왕의 눈에 들려고 일부러 꾸미는 게 아닐까 많은 군인들이 의심을 품었지만, 거친 전장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는 주유검의 모습에 의심이 말끔하게 씻겨나갔다.

“남경은 강한 곳이군. 악랄한 왜구들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많은 백성들이 터전에서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예. 이 남경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소관의 사명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유검의 말에 오찬서가 가슴을 두드리며 답했다.

오찬서는 남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토박이다. 조상들이 대를 거쳐 살아온 고향을 지키고 싶다는 그 마음만큼은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