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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제6장 경월공주(3)



주유검이 머물게 된 객궁은 남경의 황궁에서도 가장 으리으리한 규모를 자랑하는 전각이었다.

[남경의 황궁은 육조 시대부터 증축을 거듭해왔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저 빈 건물에 지나지 않지. 황궁은 오직 천자만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황궁이란 유일하게 황제에게만 허락된 궁궐이다.

황제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머물러서는 안 된다.

문무를 관장하는 남경부윤은 물론, 문무백관들 역시 불허된다. 영락제가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면서부터 정해진 규율이었는데, 그 규율은 지금까지도 철저히 지켜지고 있었다.

“남경의 황족들이 옥좌에 눈이 돌아갈 만도 하네요. 황제가 되는 순간, 육조 시대부터 내려온 이 황궁의 주인이 될 테니까.”

[만승(萬乘)이란 그런 자리다. 만 대의 수레란 만천하를 상징하는 말이지. 천하라는 수레를 탐내지 않을 자가 세상에 있겠느냐?]

“그래서 절 만월인지 경월인지, 얼굴도 모르는 여자한테 팔아넘기려고 하셨어요?”

[그게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이다.]

주유검은 내실에 홀로 머물고 있었다.

그로 인해 숭정제와 찬찬히 이야기를 나눌 여유도 생겼고, 직접 입술을 움직이며 그와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설마 경월공주의 약혼자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냐? 한낱 미신에 불과하다고 말한 건 너일 텐데? 하여간 너는 종잡을 수 없는 사내로구나. 황제다운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조금만 한 눈을 팔아도 푼수 같은 모습으로 돌아와 버리니.]

“미신 따위는 안 믿는다고 했잖아요. 병사를 빌리자고 여자를 이용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뿐입니다. 영감님 시대에는 정략약혼이 성행하였을지 몰라도, 제가 사는 시대는 다르거든요. 남녀의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하죠.”

[그래서 그 나이가 되도록 여자 하나 없었던 거냐?]

“그 얘길 왜 지금 꺼내요? 그리고 영감님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지금의 네 반응을 보면 예상이 된다. 다람쥐마냥 조급함에 떠는데 그걸 모를 리가 없지.]

숭정제의 발언에 주유검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궁시렁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숭정제의 말들이 모두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17년간 제위에 있던 황제다운 관찰력이라고나 할까. 정확히 맞췄다. 실제로 주유검은 죽기 전까지 애인이라고는 전혀 없었던 남자였다.

[강왕을 외척으로 두면 남경의 군후들 역시 무시하지 못하겠지. 우리로서는 하등 나쁠 것이 없는 상황이다. 오랫동안 반목을 이어온 북경과 남경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지.]

“만약 경월공주가 황후가 되더라도, 영감님은 괜찮으세요?”

원래 숭정제의 황후가 되는 여인은 효절열황후(孝節烈皇后) 주씨였다.

하남성(河南省)의 호족인 주규의 여식으로, 현재 거론되고 있는 대상인 경월공주와는 생판 남이었다. 주유검이 경월공주를 황후로 들이면 숭정제의 부인이 될 여인은 황후가 될 기회를 놓치게 되는 셈이었다.

숭정제가 씁쓸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짐의 황후는 평생을 고달프게 보냈다. 자린고비 같은 지아비를 만나 평생 무명옷이나 입고 다녀야 했지. 옷이 헤지면 기워 입어야 했고, 금은보화는 언감생심이었다.]

효절열황후는 숭정제의 손에 죽었다.

그리고 그의 딸인 장평공주와 소인공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내와 딸들이 반란군의 손에 치욕을 겪을까봐 숭정제가 자신의 손으로 가족들을 베어 죽인 것이었다.

[짐의 황후는 분명 현모양처에 어울리는 여인이었지. 하지만 황후로서는 어울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정이 많고 눈물도 많았으니까. 짐이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났다면 평온한 여생을 보냈을 것이다. 비록 황후가 되지는 못했을지라도……. 짐이 회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기 전에 문득 든 생각이다.]

그 아픔을 또 다시 겪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숭정제는 과거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백년가약을 맺은 여인을 만나려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주유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객궁에서 나설 차비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어디 갈 셈이더냐?]

“그냥 잠시 마실 좀 다녀오려고요.”



* * *



강왕 주경의 둘째 여식인 경월공주 주서연은 절세미녀로 유명했다.

절강성(浙江省)은 미녀들이 많기로 유명한 지역인데, 강왕의 왕비가 바로 절강성 출신이었다. 중국 최고의 미녀라고 불리는 서시가 바로 절강성 출신이었고, 황실에서도 주로 절강성 출신의 여인들을 궁녀로 간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마, 이게 모두 황족분들께서 보내오신 패물이옵니까? 값진 금은보화에 장신구들까지……. 마치 별천지를 보는 것 같습니다!”

“모두 마마께 어울리는 것들뿐이옵니다!”

노왕과 유왕, 당왕에 이르기까지 많은 황족들이 패물을 보내왔다.

매우 노골적인 뇌물이 아닐 수 없었다. 남경의 대군후인 주씨 가문을 등에 업기 위해서라면 금은보화 따윈 아깝지 않다는 뜻이겠지. 어떻게 해서든 남경의 황제가 되고 싶은 황족들의 처절한 발버둥이었다.

“마음에 드는 걸 하나씩 가져가거라.”

주서연의 윤허가 떨어지자, 궁녀들이 눈에 불을 켜며 가장 예쁜 패물을 찾기 시작했다.

한편, 주서연은 수많은 금은보화를 받았음에도 전혀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깟 금은보화 따위야 다른 귀부인들도 얼마든지 가지고 있다. 경월공주가 원하는 건 어느 여인도 가져 보지 못한 선명한 것이었다.

“마마님, 큰 도련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 하거라.”

방에 있던 궁녀들이 나가기 무섭게 남경도위 주명성이 들어왔다.

주명성은 주서연에게 있어 큰오라비였다. 오라비가 여동생을 만나러 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주서연은 필시 오라비가 무언가 이유가 있어 왔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번 혼담에 대해 말씀하러 오신 것입니까?”

“그래. 이제 그만 답을 내줬으면 한다. 아버님께서도 심려가 많으시다.”

“하긴 우리 가문에는 특히 중요한 일이니까요.”

주서연이 마치 비꼬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남경의 주씨 가문은 명 황실과 인척 관계를 맺으면서 세력을 쌓아왔다. 황녀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거나, 왕작을 가진 황자와 혼인하여 왕비가 되었다. 다시 말해 주씨 가문에 있어 혼인은 권력의 우위를 점하는 수단이자, 더 높은 자리로 오르기 위한 도구였다.

“이제 그만 답을 내리거라. 이미 북경은 수명을 다했다. 장성 밖에서 오랑캐들이 들끓고, 명나라 전역에 반란의 불길이 치솟았다. 무능한 황제와 간신들이 조정에 판을 치고 있으니, 분명 오래가지 못하고 멸망하게 될 게다.”

“그러니 남경에서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것이지요.”

“남경은 육조의 수도였다. 태조 폐하의 왕맥이 여전히 흐르고 있으니, 응당 수도로 삼을 만하다.”

“또다시 한족은 중원을 잃어야 한다는 거군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주서연의 말에 주명성이 고개를 돌렸다.

비록 황실 가문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황실과 인척 관계를 이어왔다. 명나라를 대표하는 군후의 아들로서, 중원을 버려야 한다는 말은 참담할 뿐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중원을 쇠락을 거듭하고 있고, 이를 구제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빠르게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가문이 살아남기 위해선 선조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가장 우세한 권력에 붙어야 했다.

“네 혼사에 우리 가문의 사활이 걸려 있다. 북경의 사직은 머지않아 멸망한다. 남경의 사직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결정 내려야 할 일이다.”

주씨 가문은 복왕 주상순의 아들인 주유숭을 가장 큰 적임자로 보고 있었다.

당왕 주율건과 노왕 주이해, 유왕 주상청도 눈여겨보았지만, 황위 계승의 정통성을 가진 인물은 다름 아닌, 황제의 총애를 받는 주상순의 아들인 주유숭이었다.

“주유숭은 여색을 밝히고 사치와 향락에만 매진하는 인물이 아닙니까?”

주서연이 난색을 표했다.

명분과 정통성에 있어선 주유숭이 단연 앞선다고는 하나, 그는 조부와 부친을 쏙 빼닮은 필부였다. 얼마나 못났으면 무능한 망군으로 유명한 유선에 비견될 정도였다.

그런 인물을 어찌 황제로 옹립할 수 있단 말인가. 오래가지 않아 남경의 사직이 무너질 게 빤하다.

“너에겐 미안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히려 가문이 위세를 더욱 떨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겠느냐. 놈을 무능한 허수아비로 만들면 우리 가문이 남경의 정권을 장악하게 될 테니.”

“황제가 무능할수록 외척이 성장하는 법이니까요.”

“너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밖에 없는 이 못난 오라비를 용서하거라.”

“용서라뇨. 대군후의 가문에 태어난 여식으로서 지금껏 호의호식을 해왔습니다. 응당 제가 해야 될 역할인 것을요.”

남녀라 서로 연모하여 혼인을 하는 것은 일반 백성들에게나 해당되는 경우다.

주서연은 철이 들었을 때부터 오늘 같은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지아비의 성격이 어찌 되었든, 용모가 어찌 되었든 간에 가문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희생해야 할 일이다.

“잠시 자리에서 일어서도 되겠습니까? 잠시 머리를 진정시키고 싶습니다.”

“그러거라. 갑작스레 결론을 내기엔 어려울 것이니. 나도 이제 그만 슬슬 일어나마.”



오라비 주명성과 헤어진 후, 주서연은 시녀들을 대동한 채로 궁을 나섰다.

내일 아침이 오기 전까지는 결론을 내야 한다.

새벽의 쌀쌀한 공기를 맡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냉철한 성격으로 유명한 그녀지만, 개망나니 같은 인간에게 시집을 가야 한다는 것은 매우 잔인한 경우였다.

그녀는 운치가 좋은 정자로 향했다.

복잡한 마음이 들 때마다 항상 향하는 장소였다. 아름답게 꾸며진 연못이 내려다보이는 정자로 향한 그녀지만, 이미 정자에는 선객이 머무르고 있었다.

“신왕 전하시군요.”

선객의 얼굴을 알아본 주서연이 예를 취하며 인사했다.

그에 주유검 역시 예를 공손하게 취하였다.

“달이 아름다운 밤입니다, 공주.”

“예, 그러네요.”

서로가 만난 게 과연 우연일까?

아니, 이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 주유검은 주서연이 자주 들르는 장소를 파악해 두었고, 혼약을 앞두고 있는 그녀라면 복잡한 마음이 들어 분명 이 정자에 올 것이라 예상했다.

“하옵시면 전하께서 소녀를 만나기 위해 애써 행차하신 연유를 물어도 되겠사옵니까?”

“역시 들켰소?”

“비록 여인의 몸이나 눈썰미가 빠르다고 자부하옵니다.”

“감히 공주의 처소를 들를 수가 없다 보니 여기서 주구장창 기다리고 있었소. 하마터면 이대로 밤을 지새울 뻔했다오.”주서연이 눈웃음을 지었다.

황족들 중에서 이토록 유쾌한 사람은 처음이다. 주유검은 애써 여유를 부리는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 뺨이 붉어진 것이 주서연의 눈에는 보였다.

“공주께 청혼하고자 하오.”

직접적인 제안이다.

지금껏 많은 황족들에게 혼담을 받은 주서연이지만, 이토록 대범하고 노골적으로 청혼을 해온 경우는 없었다.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남녀가 밀회를 가진다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곤 하지만, 구설수에 오르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 대범하게 청혼을 해올 줄은 몰랐다.

“우선 전하께옵선 여인에 대해 모르시는 분이라는 건 알겠사옵니다.”

“크흠.”

주서연의 짓궂은 말에 주유검이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주서연이 빙긋 웃음을 지으며 잠시 그를 골려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