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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제6장 경월공주(2)



약탈과 살인을 일삼는 왜구(倭寇)는 어느 시대에서건 골칫거리였다.

그들은 해안과 인접한 군현을 습격하여 재산을 약탈했고, 백성들을 납치해 왜국으로 끌고 가 노예로 팔아치웠다. 날이 갈수록 악랄해지고 교묘해지는 수법에, 명나라와 조선 조정은 몇 번이나 소탕작전을 벌였지만 왜구는 이를 비웃듯이 끊이지를 않고 쳐들어왔다.

“쏴라!”

“발포하라!”

주유검의 근위대들은 방아쇠를 당기며 왜구를 소탕했다.

조악한 일본도를 가진 왜구는 손쉬운 표적이었다.

간혹 조총을 가진 왜구도 여럿 있었지만, 신식 화승총에 비하면 사정거리가 열악했다. 곧이어 남경부윤 오찬서가 이끄는 관군들이 도착하며 왜구들을 들이쳤다.

“물러서지 마라! 공격하라!”

“반격해라!”

본격적으로 전투가 발발하였음에도 왜구들은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반적인 도적들이 아니었다.

정규군처럼 모두 갑옷과 병장기들을 갖추고 있었고, 상하의 명령체계 또한 명확했다. 전문적인 군사훈련을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놈들을 모두 소탕하라!”

조문조는 대검을 휘두르며 왜구를 여럿 베어냈다.

왜인들과 싸우던 조문조는 마치 거인처럼 보였다.

7척에 달하는 덩치에다가, 그 상대가 왜소한 체격의 왜인들이다보니 체격에 격차가 심했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 속에서도 그는 크게 활약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음 총.”

주유검은 방아쇠를 당겨 왜구 하나를 쏴 죽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병사에게서 장전된 화승총을 건네받았다.

심지가 타들어가면서 새로운 총탄이 발포되었고, 그 때마다 왜구가 죽어나갔다.

“손전정 장군, 놈들의 해적선을 모조리 불태워라! 모조리 씨를 말려야 한다.”

“알겠사옵니다.”

해적선의 규모로 보건데, 결코 단순한 도적의 무리라고는 볼 수 없었다.

왜나라에서 명나라의 강동(江東)까지는 매우 먼 거리였다.

먼 바다를 가로지르기 위해서는 뛰어난 항해술이 필요했다. 왜구는 바닷길에 매우 능통했고, 명나라와 조선의 해류에 대해서도 밝았다.

‘빌어먹을 왜놈들이 정규군을 도적으로 변장시켰습니다.’

[타국과의 무역이 막힌 탓이다. 부족한 물자만큼 약탈로 보충하려는 수작이구나. 더러운 놈들 같으니라고.]

왜란이 발발한 이후부터 명나라와 조선은 왜국과의 교역을 금지시켰다.

지금은 제한이 다소 풀리긴 했지만 과거처럼 활발하지는 못했다. 조선은 왜국을 원수로 취급하고 있었고, 왜란에서 많은 병사를 잃은 명나라 역시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주장한 왜국을 크게 불신했기 때문에 무역에 여러 제약을 걸었다.

왜구의 중심지는 쓰시마(津岛)와 이키(壹岐) 지역이었다.

이 지역들은 왜나라의 전진기지이기도 했으므로, 왜국 조정이 관여되어 있을 거라고 의심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짓밟아라!”

“도적놈들에게 굴하지 마라!”

기병대들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돌격을 감행했다.

왜병들이 미처 장전하지 못했을 때를 노린 돌격이었다.

작은 칼을 휘두를 뿐인 왜병들로서는 기병대에 대항할 수단이 없었다. 용맹하게 달려든 기병들은 해안에 상륙한 왜구들을 모조리 격멸하면서 사태를 진정시켰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모조리 다 죽여라.”

오찬서가 명령했다.

포로로 잡은 왜구는 살려두지 않았다.

힘을 쓰는 일은 물론 농사에도 적합하지 못했기에, 굳이 아까운 식량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명나라 병사들은 포로로 잡은 왜구를 모두 죽여 물고기 밥으로 만들었다.



* * *



신왕 주유검이 온다는 소식에 강왕 주경은 나름대로의 환영식을 마련했다.

적대적인 사이라고는 해도 상대는 직계황족이 아닌가.

황제의 손자를 핍박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괜한 소란을 겪을 수도 있었다. 지긋하게 나이를 먹은 어른으로서 그는 남경의 궁중예법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왜 안 오는 것이냐? 올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거늘. 게다가 우리 남경부윤은 왜 안 오고?”

벌써 남경으로 오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일처리가 꼼꼼하기로 유명한 남경부윤이 늦장을 부릴 리는 없었다. 그 성실함이 마음에 들어 첫째 딸까지 내어주지 않았던가.

“제가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설마 매형에게 무슨 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래, 네가 좀 알아봐라.”

곧이어 아들 주명성이 소식을 가져왔다.

단도현을 대규모의 왜구들이 급습했다.

그래서 남경부윤과 신왕이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왜구를 토벌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의 앞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단도현에서 교전이 발발했다는 소식에 주경은 크게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왜구들이 단도현까지 왔단 말이냐? 어째 요즘 잠잠하다 했거늘……. 또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구나. 그런데 신왕은 왜 나섰다더냐?”

“부윤의 군사마가 말하길, 남경의 백성들도 모두 명나라의 민초들이라면서 신왕이 직접 나섰다고 합니다.”

“젊어서 그런지 혈기가 넘치는군.”

북경의 황족들은 대부분 군략을 모르는 문외한이었다.

물론 이것은 남경의 황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왜구가 군현을 습격하더라도 나서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왜구들이 워낙에 사납고 흉폭한 족속들이어서 명나라 황족이라고 해도 살려주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황족과 사대부들은 결코 나서는 법이 없었다.

“신왕 전하께서 들어오십니다!”

그 때, 남경의 성문이 열렸다.

주유검으로 추측되는 젊은 남성이 병사들을 이끌고서 돌아오고 있었다.

강왕 주경과 남경의 군후들은 성문까지 마중을 나갔다.

북경에서 온 직계황족이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는데, 군후를 비롯한 많은 사대부들은 주유검의 모습을 보고서 크게 경악했다.

“저, 저런…….”

“크흠!”

주유검은 피투성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왜구와의 난전에서 옷차림이라고 멀쩡할 리가 없었다.

어깨에는 상처를 입었는지 붕대를 감고 있었고, 옷소매에는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도 사나운 왜구들과 목숨이 오고가는 사투를 벌였기 때문이었다.

“신왕 주유검이라 합니다.”

“항주를 다스리는 강왕 주경입니다. 이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주유검과 그 휘하 병력은 군후와 사대부들에게 있어 관심의 대상이었다.

2백 명의 병사들은 모두 신식총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왜구와의 싸움에서 얕은 부상만 입었을 뿐, 사상자는 전혀 없었다. 어깨에 멘 심지끈과 허리에 매달린 화약주머니는 그들이 화승총병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단도현(丹徒縣)을 습격한 왜구들을 친히 나서서 토벌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백성들을 대표하여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황족으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윗감으로서는 아직이지만, 주경은 첫 모습에서부터 주유검을 썩 괜찮은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젊은 혈기와 배포가 넘쳐흘렀다.

남경 백성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면 크게 성공한 셈이었다. 군후와 사대부들이 주유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강왕의 아들인 남경도위 주명성입니다.”

“저는 남경교위 주명균이라 합니다.”

강왕의 두 아들 역시도 부친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동생을 주는 건 아직은 더 생각해 볼 일이었다.

하지만 군웅(群雄)으로서 평가를 한다면 뛰어난 인물임이 분명했다. 사내로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선 제 저택으로 모시겠습니다.”

강왕 주경은 주유검을 자신의 저택으로 초청했다.

남경 군후들의 우두머리였으므로, 자신의 저택에 그를 초대하는 것은 당연했다.

주유검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군후와 사대부들도 덩달아 참석하면서 초대 규모는 크게 늘어났다.



* * *



“병사를 빌리고 싶습니다.”

주유검이 꺼낸 제안은 매우 간단했다.

여진을 정벌할 것이니, 군단에 합류시킬 절강보병을 빌려 달라는 것.

비록 주유검이 요동마병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강왕 주경은 다소 놀랍다는 모습을 보였지만, 주유검의 제안에 만족스런 대답을 주지는 않았다.

“어렵습니다. 절강보병은 오래 전부터 남경을 지켜온 수호병들입니다. 그런 수호병들을 내어드리면 사나운 왜구들이 본격적으로 남경을 노릴 것입니다.”

물론 주경의 말은 다소 변명에 가까웠다.

절강보병을 차출한다고 해서 남경이 위태로워질 리는 없었다.

수많은 군대들이 남경을 사수하고 있었고, 주변 군후들의 사병집단들을 모두 합류시킨다면 북경에 주둔한 군단보다도 많은 대군이 모이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북경 조정을 위해 군사를 보낼 이유도, 그럴 의리도 없었다.

주경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주유검에게 군사를 빌려주길 꺼려했다.

“신왕 전하, 절강보병이 과거에는 조정의 군사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군후들의 사병조직입니다. 봉읍을 지키는 사병을 내어달란 명령은 곧 군후의 봉읍에 대한 내정간섭에 속합니다.”

남경도위 주명성이 말했다.

제아무리 황제라 해도, 반역에 연루된 것이 아닌 한은 군후의 영토에 간섭할 수는 없었다. 그게 바로 봉건제(封建制)를 이어온 왕조들의 오랜 불문율이었다. 군후가 봉읍을 받으면 그 지역의 지배권까지도 소유하고 있는 셈이 되기 때문이었다.

군후의 지배권은 섣불리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북경의 황족이 제멋대로 나선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남경의 군후들과 척을 지게 될 것이다.

“그럼 결국 이 황명은 휴지조각인 셈이로군요.”

주유검이 황태자의 친필서한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에 주경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차마 입에 담을 수는 없었지만, 그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멀리 떨어진 북경의 명령 따위는 남경에서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왕 전하께서 왜구를 격퇴하여 남경 백성들을 구원해주셨으니, 제가 힘을 발휘하여 군사를 마련해보기는 하겠습니다.”

적어도 마음의 빚은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주경은 1천의 절강보병 정도는 마련해볼 수 있다며 운을 뗐다. 물론 은퇴한 노병들을 여럿 섞을 것이니 군대의 질에 대해서는 믿을 수가 없겠지만 말이다.

이것은 또한 북경의 부름에 응하였다는 생색을 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북경의 명령을 완전히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건 조금 과격한 행동인 듯싶었다.

“전하, 듣고 계십니까?”

주경이 의문 섞인 물음을 던졌다.

조금 전부터 주유검이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듣고 있습니다. 골머리를 앓는 결정을 내릴 때면 항상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버릇이 있어서요. 혹여 무례하게 보였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아직도 홍안(紅顔)의 청춘이시니, 섣불리 답하기가 어려울 거라는 건 충분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뒤로도 주유검은 혼잣말을 이어나갔다.

다들 의아하게 여길 법도 했지만 주유검은 아직 열여덟의 청년이었다.

주경은 필시 이 젊은 황족이 크게 긴장하여 혼잣말을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주유검은 세력의 영수(領袖)를 앞에 두고서 교섭을 펼치고 있었다.

아직 젊은 청년이 얼마나 많은 부담감을 떠안고 있겠는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저는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다른 황족 분들께서도 저를 만나기를 청하고 있기 때문에…….”

주경은 아들 주명성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택을 방문하는 남경 황족들의 발길이 끊이지를 않고 있었다.

모두 권세를 얻으려는 승냥이들이었는데, 특히 둘째 딸인 경월공주와 혼담을 나누고 싶어 발걸음을 한 구혼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주경은 주유검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남경의 군사들을 얻고자 주유검이 혹시나 여식과의 혼담을 제의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잠시 했었지만, 그에 관해 주유검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