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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제6장 경월공주(1)



경월공주와 혼약을 나눈 황족들은 예외 없이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다.

연이은 참사에 강왕 주경은 용한 점성가를 찾아가 답을 묻기에 이르렀다.

자태가 곱고 아름다워 화용월태(花容月態)라 불리는 둘째 딸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 스물이 넘도록 혼인을 못한 것이 강왕은 원통했다.

‘공주께서는 황후가 되실 존귀하신 분이십니다. 그 짝이 되실 분은 만승천자뿐이거늘, 감히 승냥이 같은 무리들이 봉황의 짝이 되려 하니 화가 미친 것입니다.’

점성가의 답에 주경은 웃지도, 울지도 못할 상황에 직면했다.

둘째 딸아이는 황후가 될 존귀함을 가지고 있었다.

가문을 크게 빛낼 일이니 기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만승천자가 될 황족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기 때문에 한숨이 나왔다.

“신왕 주유검이라, 분명 황제가 될 그릇이기는 한데…….”

신왕이 남경으로 온다는 소식에 강왕 주경은 침음을 흘렸다.

황제의 손자이자, 황태자의 아들.

이복형 주유교가 있다고는 하나 유약하고 소심한 성격으로 유명해 황태자 주상락의 뒤를 이어 주유검이 황제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사나운 몽골족과의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뒀다.

십만 대군을 격파하고 명나라의 영토를 수호하였으며, 명나라 군부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당장 옥좌에 오르지는 않겠지만, 언젠가는 자금성의 황제가 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버님, 지금의 북경은 말 그대로 지옥입니다. 국론이 분열되고 북로(北虜)가 기승을 부리니, 언제 자금성이 함락될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지옥에 우리 서연이를 시집보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강왕 주경의 아들인 남경도위(南京都尉) 주명성과 남경교위(南京校尉) 주명균이 입을 열어 말했다.

북경으로 여동생을 시집보낼 수는 없었다.

영락제가 수도를 북경으로 이전한 이후부터 북(北)과 남(南)의 지역감정이 시작되었다. 남경에 터전을 둔 군후와 사대부들은 북경을 마치 원수처럼 여겼다.

“홍왕(弘王) 주유숭은 어떻습니까? 복왕(福王) 주상순의 아들이긴 해도, 남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남경인입니다. 복왕이 황제의 모든 총애를 받고 있으니, 황위계승에도 가깝습니다. 장차 남경의 황제로 옹립하기에도 정통성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남경에 다른 황족들도 많은데, 북경 출신의 직계황족을 염두에 둘 이유가 있겠습니까? 우리 가문의 손으로 황제를 옹립시키고 서연이를 황후로 보내면 될 문제입니다. 먼 북경으로 보내다니, 말도 안 됩니다.”

두 아들의 강한 반대에 주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구구절절 옳은 말들이었다.

막내딸을 위험천만한 북경으로 보낸다는 게 가당키나 한 것인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고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딸을 둔 아버지라면 누구나가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신왕은 어디까지 왔다더냐? 혼약의 대상은 아니더라도… 북경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홀대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적어도 지금 같은 시기에 흠집이 잡힐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곡아항(曲阿港)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아랫것들을 보내 감시토록 하였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잘했다.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말거라. 남경에 괜한 분란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소자에게 맡겨주십시오.”

강왕의 가문은 항주(杭州)와 남경(南京)을 모두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

신왕 주유검은 강왕의 영토로 들어온 것과도 같았다.

장강 이남으로 온 이상, 강왕의 눈과 귀를 벗어나기란 불가능했다. 아직 어린 황족에 불과했지만, 그 명성이 천하에 확산되기 시작하였으므로 그를 예의주시하는 눈들이 많았다.



* * *



주유검 일행이 장강 이남에 도착하는 데는 나흘이란 시간이 걸렸다.

가장 빠른 수로를 이용했음에도 오래 걸렸다.

때로는 짓궂은 역풍을 맞기도 하고, 수적 떼를 만나기도 하면서 시간이 지체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떠냐. 제법 구미가 당기는 일이지?]

숭정제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주유검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혼령이었기에 그의 손가락은 육체를 통과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손가락에 담긴 익살스런 마음이 전해졌다. 숭정제의 잇따른 물음에 주유검은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강왕 주경이라면……. 명 황실과 관계된 인물입니까?’

[그는 주씨(周氏)다. 왕작에 봉해진 몸이니 인척관계에 해당될지는 몰라도……, 대명률(大明律)에 걸릴 정돈 아니다.]

대명률은 동성혼, 근친혼에 대해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서양의 왕실이 권력독점과 부의 세습을 위해 근친혼을 반복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보면 매우 특이한 경우였다.

‘그렇다곤 해도 병사를 빌리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여자를 부인으로 맞이하기는 싫습니다.’

[듣자하니 강왕의 여식인 경월공주의 미색이 가히 경국지색(傾國之色), 폐월수화(閉月羞花)라고 한다지? 분명 이것은 하늘이 준 기회란 말이다. 남경을 대표하는 군후의 사위가 된다면 휘하 군후들이 절강보병의 지휘권을 넘겨줄 테니.]

‘진짜 끈질기시네. 계속 영감님이라고 불렀다고, 진짜 영감님 같은 고집이라도 생기신 겁니까?’

[설마 경월공주와 연관된 혼약자들이 모두 죽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냐?]

정곡이 찔렸는지 주유검의 어깨가 떨렸다.

무려 여섯이다.

여섯 명에 달하는 혼약자들이 모두 초야를 맞이하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했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사실상 저주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참사였다.

그럼에도 경월공주와 혼인을 하고픈 황족들이 줄을 섰다고 했다. 남경 제일의 군후가 가진 권력, 그리고 그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욕망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설마 제가 겁이야 먹었겠습니까. 저는 4백 년 뒤의 시대에서 온 사람이라고요. 시시껄렁한 미신 따위는 안줏거리도 못 됩니다.’

주유검은 되도록 허세를 부리기로 했다.

얼굴도 모르는 공주와 연관된 저주가 무서워서 발을 뺐다는 게 알려지면 그만한 창피도 없었다.

“환영인파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무례한 놈들 같으니라고!”

조문조가 곡아항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곳에는 거친 강바람과 떠들썩한 상인들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북경에서 온 황족을 철저히 무시하기로 남경의 군후들이 입을 모았는지, 주유검이 곡아항에 도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 하나 환영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분명 우리를 감시하는 시선들이 있을 것이다.”

손전정의 명령에 2백 명에 달하는 병사들은 고개를 끄떡였다.

모든 병사들이 신식총기를 가지고 있었다.

장전을 모두 끝낸 상태에서 심지에 불만 붙이면 즉시 발포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춘 정예들이었다.

“혹시 북경에서 오신 신왕 전하이십니까?”

기품이 넘치는 의복을 갖춘 남성이 많은 인원들을 대동하고서 모습을 드러냈다.

곡아현을 가득 메우던 인파들은 좌우로 갈라졌다.

남경에서 제법 높은 신분이었는지 상인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예를 취했다.

“남경부윤(南京府尹) 오찬서입니다. 미처 준비가 미숙했던 점을 용서해주십시오.”

오찬서는 사죄를 청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를 따라온 남경의 백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미처 곡아현에 마중을 나오지 않은 불경에 대한 죗값을 청했다. 이에 주유검은 손을 흔들며 대수롭지 않다는 모습을 보였다.

“괘념치 않네. 남경까지 가는 길을 몰라 곤욕스러웠는데, 오히려 남경부윤이 와주어 걱정거리를 덜었군.”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남경인들은 북경 조정을 불신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이어진 지역감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만력제의 실정으로 명나라 전역에 도적떼들이 들끓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남경인이 북경을 미워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오찬서는 달랐다.

남경의 모든 관청들을 총괄하는 부윤이었지만, 북경 황실을 향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애써 백관들을 소집하여 주유검을 마중 나오게 된 것이었다.

“우선 어디로 안내해드리면 되겠습니까?”

“강왕을 만나고 싶다.”

“예, 알겠습니다.”

오찬서는 우선 역참에서 말을 구하기로 했다.

주유검에게는 직계황족의 품격에 걸맞은 가마를 준비하겠다고 일렀다.

하지만 주유검은 편리성을 들면서 역참의 말로 대신하겠다고 답했다. 겉치레를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팔다리가 멀쩡한데 가마까지 탈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온데 신왕 전하께서는 남경에 무슨 연유로 오신 것입니까? 조정으로부터는 이렇다 할 분부를 받지 못했습니다.”

“절강보병을 전쟁에 참전시키기 위함이네.”

“절강보병… 을 말씀이십니까?”

주유검의 말에 오찬서는 난색을 표했다.

절강보병은 남경 최강의 보병부대였다.

그들은 남경인에게 있어 최대의 골칫거리인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존재했다. 하지만 왜구와의 싸움에서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고 왜란에서도 많은 무명을 쌓았기에, 남경의 군후들은 절강보병을 모두 사병으로 들여 버렸다.

군후들은 저마다 무역상단을 두고 있었다.

그 상단을 왜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절강보병을 수족으로 부렸다. 조정군 소속이었던 절강보병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지금은 군후들의 휘하 사병에 지나지 않았다.

“어렵습니다. 군후들이 내어줄 리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내어달라 하면 내어줄 것이지, 무슨 말이 그리 많소? 황태자께서도 명하신 바이거늘, 감히 황실의 명령을 거스르려는 거요?”

오찬서의 난색에 조문조가 강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제아무리 남경이 옛 수도였다고 한들, 명나라의 영토에 불과했다.

명나라 영토에 사는 백성들은 예외 없이 황실의 명령을 받들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남경의 병사를 빌리기 위해 황태자가 직접 서한을 작성했고, 황손까지 남경에 친히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도 코빼기조차 비추지 않는 남경 군후들의 태도에 그는 불만을 쏟아냈다. 당장에 불충죄로 다스려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잠깐 진정하시오, 조 장군.”

“남경 군후들이 황실과 조정을 능멸한 지가 오래인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소?”

손전정의 만류에도 조문조는 완강한 모습을 보였다.

생각 같아서는 무례한 군후들을 요절내고 싶었다.

북방 오랑캐들의 발호로 나라가 위태롭거늘, 군후라는 것들이 이해타산적인 모습이나 보일 뿐이니 어찌 분노하지 않겠는가? 군후들은 오랑캐만도 못한 소인배에 불과했다.

“부윤, 급보입니다!”

전령의 깃발을 매단 병사가 황급히 오찬서에게 달려왔다.

전령은 헐떡이며 잠시 숨을 고르고는, 주유검이 있는 자리에서 시급한 파발을 전달했다.

“단도현(丹徒縣) 경구(京口)에 왜구들이 몰려왔습니다. 현재 부락을 습격하여 백성들을 유린하고 있습니다. 그 숫자가 제법 많습니다.”

“왜구들이 왔단 말이냐? 요즘 잠잠하더니, 결국 본색을 드러냈구나.”

오찬서는 말머리를 돌렸다.

주유검을 남경으로 안내하는 역할은 부관에게 맡기고, 자신은 가까운 관아를 돌며 군사들을 소집할 생각이었다.

대규모의 왜구가 쳐들어온 것이라면 매우 심각한 사안이었다.

사분오열하여 전란에 휩싸였던 왜나라가 하나로 통일된 이후로는 잠잠해졌다 했더니, 결국 탐욕을 참지 못하고 습격을 가해온 것이었다.

“휘하의 병사들이 모두 총포술에 능하다. 신식총기로 무장하였으니 분명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주유검 역시 말머리를 돌렸다.

“위험합니다. 고정하시옵소서.”

왜구는 사납고 잔인한 족속들이었다.

그 흉악함만큼은 몽골족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래서 오찬서는 강한 우려를 표했지만, 주유검은 뜻을 굽히려 들지 않았다.

“남경의 백성들도 모두 명나라의 민초들인데, 황손인 내가 나서지 않는다면 뭐가 되겠는가? 두 장군들은 병사들을 지휘하라.”

오랑캐와의 싸움은 익숙했다.

몽골족에서 왜구로 그 표적만 바뀌었을 뿐, 해야 될 일은 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