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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제5장 병력을 모아야 할 때(2)



군적(軍籍)만 살펴본다면 명나라는 3백만에 이르는 정규군을 보유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조정이 보유한 정규군은 군사훈련조차 받지 못한 오합지졸에 불과했고, 기존의 정예병들은 봉급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는 조정에 실망하여 제후와 호족들의 사병집단이 되면서 깊은 병폐가 발생했다.

“저, 저희를 버리고 가시는 건 아니죠?”

선교사 아담이 주유검에게 다가와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가 곧 남경(南京)으로 향할 것이라는 소문을 들은 것이었다.

여진족의 침공을 피해 주유검이 장강 이남으로 달아나는 것은 아닌지, 무서운 마음이 들어 달려온 것이리라. 요서군에 겨우 천주교회를 차리고 포교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으니, 두려운 마음이 드는 건 당연했다.

“병력을 부르기 위해서다. 그러니 내 바짓가랑이에서 떨어져라.”

“진짜 돌아오시는 거죠?”

“……누가 보면 소박맞은 아낙네인 줄 알겠군. 그 동안 요동마병이 요서군을 지키고 있을 테니 안심해라.”

주유검은 요동마병을 모두 산해관 방어에 투입했다.

자신이 자리를 비웠을 때 여진족이 쳐들어온다면 큰 낭패를 볼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방비가 최대한으로 강화된 상태였으며, 홍이포까지 배치하면서 혹시 모를 위험을 방지했다.

“북방 오랑캐들에게 중원을 잃은 한족들이 매번 강남으로 도망쳐서 왕조를 세웠으니, 만약 불리한 처지에 놓인다면 도망쳐버릴지도 모르지.”

동진(東晉)과 남송(南宋)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오랑캐들에게 중원을 잃고 쫓겨난 한족들은 장강 이남으로 도망쳐서 왕조를 재건했다.

건업(建業), 응천부(應天府) 등으로 불린 강남의 수도들은 모두 천하를 잃고 쫓겨난 한족의 굴욕적인 역사를 통해 생겨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강남에 세운 왕조들 중, 어느 누구도 중원을 수복하지 못했다.

장강 남쪽에 철저히 고립된 채로 방치되었고, 결국 내부에서부터 분열하여 멸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한족국가에게 있어 남쪽으로 도망쳐 왕조를 세운다는 것은 철저히 금기시되는 일이다. 단 한 번도 중원을 회복한 사례가 없으니. 도망치는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해라.”

주유검은 아담을 달래 성당으로 돌려보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을 한 뒤에야 그는 가까스로 발걸음을 돌릴 수 있었다.

축 처진 아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숭정제가 주유검에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원래 색목인들은 죄다 저 꼬락서니냐?]

‘여기에 걸린 게 많으니까요. 많은 걸 부담하고 있으니 그만큼 두려움이 많아질 수밖에 없죠. 꼴사납게 보이긴 해도, 나쁘단 생각은 안 해요.’

[그럴지도 모르지. 저 색목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성당과 신도들일 테니.]

그 동안 요서군에는 수많은 성당들이 세워졌다.

지방을 떠돌며 조정을 피해온 선교사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아담의 보고를 들은 예수회가 본격적으로 지원을 시작했고, 점차 서양선과의 교류도 빈번하게 늘어났다.

“전하, 채비를 모두 갖췄습니다.”

손전정이 다가와 보고했다.

남경으로의 여정은 손전정과 조문조가 보필하기로 했다.

부관 역할을 맡은 홍승주는 요서군의 군사를 지휘하기로 했고, 노상승이 보조를 맡게 되었다.

“산동성(山東省) 동래항(東萊港)에서 배를 타고 남경으로 갈 계획입니다. 갈 길이 멀고 시간이 촉박하니, 서두르셔야 할 겁니다.”

“문제없다. 최대한 신속하게 서두르도록 하지.”

손전정의 말에 주유검은 답을 했다.

그는 또한 황태자 주상락의 친필서한을 챙겨두었다.

남경으로 떠날 채비를 갖추기 전, 주유검은 북경의 자금성에 들러 황태자로부터 남경의 지원 병력을 요청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받아냈다.

일은 어렵지 않았다.

부자로서의 관계는 냉랭하기 그지없었지만, 명나라 황실과 관련된 일이었으므로 황태자가 쉽게 윤허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남경의 제후들이다. 장강을 넘어서는 순간, 황태자의 친필서한은 단순한 휴지조각이 되어버릴 게다. 황손이라는 신분 역시 통하지 않겠지. 명령조차 먹히지 않는 외국(外國)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 정도예요? 분명 명나라의 영토일 텐데 황손이란 혈통이 먹히질 않는다니. 남경은 영락제(永樂帝) 시절까지는 수도였던 걸로 아는데요.’

[남경의 군후(君侯)들은 북경 정권에 반대하는 자들이다. 북경으로 수도를 이전하는 것에 격렬히 반대했었고, 조정의 영향력이 약해질 때마다 조세 내기를 거부했지. 장강 이북을 모두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숭정제는 남경의 군후들을 크게 경계하고 있었다.

반란군에게 명나라가 망할 때까지 조정에 단 한 번도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던 그들이었다. 여진족과의 전쟁에서도 지원하길 거부했고, 북경의 정권이 멸망하려고 하자 스스로를 남명(南明)이라 주장하며 북경과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렸을 정도였다.

가문의 이익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기회주의자들.

그들에게 나라 따윈 아무래도 좋은 문제였다. 자신의 가문이 얼마나 번창하느냐가 관심사의 전부였고, 나라를 향한 애국심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괴물들의 소굴……. 그렇게 생각해도 되겠죠?’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편할 거다. 적어도 실망은 하지 않을 테니.]

스스로 마굴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누구도 반겨줄 사람이 없겠지.

남경의 군후들 중 어느 누구도 황손의 방문을 환영하지 않을 것이며, 도리어 노골적인 괄시를 보낼지도 모른다.

그래도 주유검은 가야만 했다.

여진 정벌을 위해서는 절강보병(浙江步兵)의 참전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전하, 하명만 내려주십시오!”

조문조가 신이 난 듯한 어조로 말했다.

장수들 중에서 자신을 호위장으로 임명해준 것에 대해 크게 감격한 듯했다. 그는 큰 곰처럼 덩치가 있는 무골이었지만 쉽게 감명을 받는 단순한 성격이었다. 호위에 투입된 근위대들 역시 조문조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들뜬 모습을 보였다.

“내 목숨을 그대들에게 맡긴다. 내가 눈 먼 화살에 죽게 된다면 그대들의 탓으로 돌릴 터이니 염두에 두도록 하라.”

주유검의 장난 섞인 말에 장정들은 예를 갖췄다.

여진 정벌을 위한 첫 번째 임무.

장강을 넘어 남경으로 가는 기나긴 여정이었기에 그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장정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주군을 위해 싸울 것이라는 각오를 다졌다.



* * *



남경은 영락제가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는 명나라의 수도였던 곳이었다.

6조의 수도로 번성한 곳이었기 때문에 남경의 백성들은 황제가 있는 북경이 아닌, 오랜 수도인 남경이야말로 천하의 중심이라 생각했다. 번영의 역사만큼은 감히 북경이 견주지 못할 정도로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백성들 사이에는 ‘남경에선 황제의 명령도 통하지 않는다.’란 말이 있었다.

남경이 얼마나 큰 권위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장강 이남은 사실상 명나라 조정에서 벗어난 외부 지역이라 할 수 있었다.

“들으셨소? 신왕이 남경으로 오고 있다고 하오.”

당왕(唐王) 주율건이 말했다.

주율건에게 있어 주유검은 20촌 할아버지뻘이 된다.

말이 좋아 황족이지, 그는 방계 중에서도 먼 방계에 해당되는 처지라 사실상 남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북경의 직계황족이 남경으로 오고 있다.

이 소식으로 남경의 귀족사회는 크게 들썩였다. 북경 황제의 황손이자 황태자의 아들이며, 몽골과의 전쟁에서도 혁혁한 공헌을 했기에 그 명성이 남경에서도 자자했기 때문이었다.

“그 소식으로 벌써부터 남경이 들썩이고 있지 않습니까? 하여간 소문도 참 빠르군요. 아직 신왕이 남직예(南直隶)에 도착하지도 않았거늘, 벌써부터 소문이 퍼졌으니까요.”

주율건의 말에 노왕(魯王) 주이해가 답했다.

남경에서 주씨 황족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민족의 침입과 만력제의 실정으로 많은 황족들이 남경으로 이주했기 때문이었다.

남경의 황족들은 조정이 망해가길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북경 조정이 망하면 자신들이 그 뒤를 이어받기 위해서였다. 진나라와 송나라가 그리하였듯, 중원의 정권이 몰락하면 장강 이남에 새로운 정권이 세워졌기 때문이었다.

“신왕이 이 남경에 오는 이유를 뭐라고 보시오? 설마 강왕(江王)의 소식을 들은 것은 아닐 테고.”

“설마 그러겠습니까. 신왕도 여진 정벌에 참전한다고 들었으니, 필시 남경에서 병사를 빌리기 위해 오는 것이겠지요.”

주이해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주율건은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기가 매우 절묘했다.

지금 남경에서는 강왕 주경의 여식인 경월공주(傾月公主)의 혼담이 진행되고 있었다. 항주(杭州)를 봉읍으로 두고 있으며, 남경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대군후의 여식이었기 때문에 남경이 크게 들썩이고 있었다.

“반드시 내가 공주의 사위가 되어야 하오.”

“당연히 그리하셔야죠. 강왕의 지원을 받는다면 어느 황족보다도 권좌에 가까워지실 겁니다.”

주율건과 주이해는 정자에서 암약을 나누었다.

당왕은 남경의 황제가 되길 원하고 있었고, 노왕은 그를 옥좌에 올리는 대가로 재상 자리를 약속받았다.

강왕 주경의 사위가 되면 남경을 손에 넣는 것도 꿈만은 아니었다.

주경의 두 아들이 남경도위 주명성과 남경교위 주명균이었고, 사위가 남경부윤(南京府尹)이었으므로 사실상 강왕 주경이 남경의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온데 그 소문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경월공주의 약혼자들에 대한 이야기 말이오? 설마 그런 미신을 내가 믿을 리가 있겠소.”

주이해의 우려에 주율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물론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의젓한 대장부 같은 모습은 보였지만, 경월공주와 연관된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적지는 않았다.

‘경월공주와 혼례를 약속한 약혼자들이 모두 초야를 넘기지 못하고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강왕 주경의 차녀인 경월공주의 나이는 올해로 스물이 넘어서고 있었다.

스무 살이 넘은 처녀가 아직도 혼례를 올리지 못했다.

열네 살만 넘어도 혼례가 치러지는 지금의 풍습으로 볼 때, 경월공주의 비혼(非婚)은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타고난 박색(薄色)이거나, 몸이 불구가 아닌 이상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도 모두 여섯이라 하지 않습니까? 여섯이 넘는 황족들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주이해의 말에 주율건으로서도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작스레 토혈을 하고 죽거나, 부하에게 배신당해 죽임을 당하거나.

경월공주와의 혼례를 앞두고 있었던 약혼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어느 누구도 예외는 없었다.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경월공주와 혼담이 약속되면 얼마 가지 못하고 모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하, 하지만 경월공주와 혼인만 하면 권좌가 바로 눈앞이오. 북경은 얼마 가지 못하고 멸망할 것이니, 그 때는 이 남경 군후들의 지지를 받아 제위에 오를 수 있을 것이오.”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구태여 불안감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으니.”

“송구합니다. 제가 말실수를 한 듯합니다.”

“나를 위한 충성심에서 한 말이니 괘념치는 않소.”

경월공주의 배필이 되고자 하는 황족들은 차고 넘쳤다.

당왕 주율건만이 아니었다. 남경에서 야심을 가진 황족이라면 누구나가 그녀의 배필이 되기를 원했다.

빛나는 옥좌와 아리따운 공주가 손아귀에 들어온다.

남경 왕조의 황제가 되고 싶은 황족들은 야심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