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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제5장 병력을 모아야 할 때(1)



명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을 사르후 결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북경에서 토벌군이 출정하는 것은 4개월 뒤.

황제는 긁어모을 수 있는 병력들을 최대한으로 집결시켰고, 이를 뒷받침할 물자들까지도 징발하기 시작했다.

오랜 기근으로 민생은 초토화된 상황. 거기에 병역과 물자 동원령까지 내려지면서 폭발 직전에까지 내몰렸다. 백성들은 대대로 살아왔던 고향을 버린 채 산으로 도망쳤고, 의기투합한 장정들은 도적떼가 되어 치안을 어지럽혔다.

[민생이 어지러운 건 사실이다. 궁지에 내몰린 백성들은 조정에 반기를 들었지. 대명이 다스리는 13개의 성(省)들 중, 제대로 굴러가는 곳이 단 한 지역도 없을 정도였다.]

명나라가 다스리고 있던 모든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오랫동안 봉급을 받지 못한 지방군, 가난에 지친 백성들. 야심을 품기 시작한 지방군벌들까지.

그들 모두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사실상 황제의 명령이 닿는 지역들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황제는 여진족을 반드시 토벌하겠다며 병사와 물자들을 징발하고 있었다.

“전하께서 보잘 것 없는 소장들의 목숨을 살려주셨습니다.”

“부디 전하의 군문에서 백의종군하고 싶습니다.”

광녕순무 이유한. 요동절도사 신백.

두 장군들은 요동마병과 함께 주유검을 따를 것을 맹세했다.

신왕 주유검은 요동마병을 거두었다. 우수한 기병군단은 여진족과의 전쟁에 반드시 필요했고, 요동에서 몽골, 여진과 싸우며 단련된 정예기병은 훌륭한 전력이었다.

“신왕 전하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대명 만세, 만세, 만만세!”

요동마병이 주유검의 휘하로 들어왔다.

또한 패잔병들이 요동에서 속속 돌아와 주유검에게로 집결했다. 병사들은 분명 조정에서 패전을 두고 죄를 물을 것이라 여겨 도망 다니고 있었는데, 백의종군하여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는 소식에 부리나케 합류한 것이었다.

부상을 입은 병사들도 몸을 추스르고는 다시 군문에 들어왔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여진족을 죽여 전우들의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전하, 조정과 병부는 4개의 군단으로 나뉘어 요동으로 진격할 것이라고 합니다.”

“적어도 군단을 자칭하기 위해서는 4만 이상의 병력이 필요할 텐데.”

홍승주의 말에 주유검이 중얼거렸다.

고작해야 요동마병 5천 기가 그가 가진 병력의 전부였다.

요동에서 뿔뿔이 흩어진 패잔병들이 다시 합류할 것을 기대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봐야 수백 명에 불과할 게 분명했다.

나머지 병력을 보충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요동마병을 뒷받침할 수 있는 막강한 보병부대가 필요했다.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보병이기 때문이었다.

“병부상서의 군단에 합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물론 병부상서와 연관된 소문들이 다소 불온한 것은 사실이나, 조정군을 총괄하는 대도독이지 않습니까.”

“양호는 무조건 패전한다. 그따위 능력을 가진 놈이 여진족의 누르하치를 무슨 수로 이기겠는가.”

“그렇긴 하오나…….”

양호의 무능과 실책은 조정에서도 유명했다.

그로 인해 탄핵까지 당한 인물이 아닌가.

황제의 총애와 재상들의 신임 덕분에 병부를 담당하게 되었다고는 하나, 과거의 실책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명나라 군부 내에서도 양호를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지고 있었다.

“요동마병은 북로남왜(北虜南倭)를 위해 창설된 정예군대가 아닙니까? 그러니 절강보병(浙江步兵)만 합류하면 무적이지 않겠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조문조가 끼어들었다.

“절강보병? 자세히 설명해보라.”

“그들은 잔인하기로 유명한 왜놈들을 상대로 백전백승을 기록할 정도로 막강한 보병군단입니다. 절강성 출신의 병사들은 날래고 용맹하기로 유명하지요. 항상 왜구들의 습격을 받는 탓에 실력이 능한 정예들이 많습니다.”

조문조의 설명에 주유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절강보병은 조선에서 일어난 왜란에도 참전한 적이 있었다.

조선에 원군으로 투입된 명나라 부대가 크게 승전을 거둔 전투들마다 절강보병들이 활약을 했다. 정유재란 당시에 조선군왕(선조)의 친위대로 활약한 것은 물론,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서도 싸운 바가 있었다.

“절강보병의 전력은 조 장군의 말대로 우수하오나, 전쟁에 참전시키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어째서인가?”

노상승의 말에 주유검이 되물었다.

이에 노상승이 대답했다.

“절강보병은 남경(南京) 휘하의 부대입니다. 남경부윤과 남경의 제후들은 자신의 안위를 챙기기에만 바쁜 소인배들이니, 쉽게 병력을 내어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노상승 자신이 바로 남경 출신이었다.

그렇기에 어느 누구보다도 절강보병과 양주의 사정이 밝았다.

현재 절강보병은 남경 제후들의 휘하 병력으로 전락해 있었다.

본디 조정의 독립부대였지만, 조정의 힘이 약화되면서 제후군으로 편입된 것이었다. 그 탓에 절강보병은 왜란이 끝난 이후 어느 전투에도 동원되지 못한 채 제후들의 호위 노릇이나 하는 사병 집단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조 장군은 어찌 입을 가벼이 놀린단 말이오.”

“미처 거기까지는 헤아리지 못했소.”

노상승의 핀잔에 조문조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절강보병은 요동마병과 함께 북로남왜에 대처하는 대표적인 특수병들이었다.

그래서 말한 것일 뿐, 조문조는 절강보병의 자세한 사정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섣불리 꺼낸 말로 주유검에게 헛된 기대를 품게 하였으니, 이는 곧 주군에 대한 무례에 해당되었다.

“아니다. 절강보병이 그토록 뛰어난 병단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아군에 합류시켜야 한다.”

주유검이 장수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마땅한 방안이 없었다.

남경 제후들은 오래 전부터 조정의 명령을 거부해오고 있는데다가 조세를 바치는 것 역시도 거부해오고 있었다.

이제 와서 조정의 권위를 내세운다고 한들, 저들이 말을 들어먹을 리는 없었다.

현재 명은 변경까지 미치던 조정의 영향력이 사라진 것은 물론, 제후들을 억압할 강제력을 발휘할 수도 없었다. 남경 제후들은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역심을 품고 있기까지 했다.

“남경으로 가야겠다.”

주유검이 장수들에게 말했다.

여진정벌까지 남은 기간은 4개월.

그 동안 어떻게 해서든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군단을 신설해야만 했다.



* * *



병부상서 양호는 탐욕스럽고 무능한 인물이었다.

정유재란의 최고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을 당시, 많은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군으로부터 변변찮은 승리밖에는 거두지를 못했다. 심지어 승리라고 부르는 전투들도 대개 명군의 피해가 더욱 컸기 때문에 승리라고 부르기도 민망스러울 정도였다.

과연 그를 명장의 선상에 놓을 수 있을까.

그를 두고서 조정 내부에서는 갑론을박이 자주 벌어졌다.

“병부상서 양호는 군략에 무지하니, 결코 대도독에 올라서는 안 됩니다.”

“부디 헤아려주시옵소서, 폐하.”

많은 조정 신료들이 만력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양호의 전공들은 대개 부풀려진 것들에 불과했다.

왜란에서 세운 공들은 모두 조선군왕 선조가 명나라 조정에 아부하기 위해 부풀린 승전보들에 지나지 않았고, 양호가 북방 오랑캐들과 싸운 기록들 역시 허구성이 짙은 승전보에 불과했다.

그런 인물이니 여진정벌의 대도독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명나라에는 아직도 내로라하는 명장들이 많은데, 굳이 무능의 대명사인 양호를 대도독으로 삼은 이유를 조정 신료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병부상서는 왜란에서 큰 공을 세운 장수이지 않느냐! 오랑캐 정벌에는 양호만한 인물도 없거늘, 어찌 반대하는 것인가?”

만력제는 양호를 크게 총애하고 있었다.

왜란에 종군하여 명나라의 이름을 드높여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증거로 조선은 명나라를 재조지은의 국가라 부르고 있었고, 변란을 일으켰던 왜나라 역시도 명나라를 크게 경계하고 있었다.

변방을 크게 위무하고 진정시켰으니, 그 공이 실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만력제는 바로 이러한 점을 거론하면서 양호를 크게 치켜세웠다. 조선 조정이 명나라 군대를 칭송한 승전보들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부상서는 조선의 장수 이순신의 전과를 가로챈 인물입니다. 해전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는 보고들은 모두 이순신이란 장수의 전과입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는 거요? 그럼 조선 조정에서는 자기네 장수들의 명성을 깎으면서까지 병부상서를 치켜세워줬다는 말이 아닌가.”

신하들의 집단 상소에도 불구하고, 만력제는 이를 듣지 않았다.

요즘 들어 그는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꿈속의 오랑캐 여인에게 습격을 당한 이후부터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차마 견딜 수가 없었다. 이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은 오직 여진족의 누르하치를 죽여 그 목을 취하는 것뿐이리라.

“양호는 당대의 명장인데 어찌 폄하를 하는 건지……. 소자는 그걸 모르겠습니다.”

“네 말이 옳다! 저 멍청한 대신들이 조금이라도 너의 총명함을 따라갔으면 좋겠구나.”

복왕 주상순의 말에 만력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총애하는 아들이 편을 들어주자 그는 마음이 든든해졌다.

주상순은 병부상서 양호와 오랜 지우였기 때문에 그의 편을 들어준 것에 불과했지만, 만력제는 역시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면서 주상순을 크게 칭찬했다.

‘이 아이가 황태자가 되었어야 했거늘.’

만력제는 아직까지도 후계구도에 대해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셋째 아들을 황태자의 자리에 앉히고 싶었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대신들이 장자계승을 이유로 꼴도 보기 싫은 첫째 아들을 황태자에 앉혀버렸으니, 당연히 만력제로서는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소문 들으셨습니까? 신왕(信王)이 이번 원정에 참전한다고 합니다.”

“신왕? 그게 누구냐?”

주상순의 말에 만력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첫째 아들을 워낙 싫어하다보니, 신왕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형님의 아들이지 않습니까. 아바마마께는 손자가 되고요.”

“그놈에게 아들이 또 있었더냐? 방구석에서 목수질이나 하는 멍청한 놈 말고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거늘.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느냐? 보아하니 젊은 혈기에 이끌려 무턱대고 전장에 참전하려고 하는 것 같다만.”

“몽골족과의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태원 전투와 거용관 전투에 대해서는 들어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주상순의 말에 만력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었다.

워낙 정사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주의 깊게 듣지는 않았지만, 몽골족의 십만 대군이 아무 것도 못한 채 거용관에서 후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 아들이 자칫 공이라도 세우면 주상락, 그 놈의 콧대가 높아질 텐데.”

“황족이 공을 세우면 황실에 좋은 일이지 않겠습니까? 젊은 황손의 출진이니 원하는 것이 있다면 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주상순은 빠르게 주유검을 변호했다.

그는 자칫 신왕을 대신하여 자신을 전장에 내보낼까 두려웠다.

그렇잖아도 조정에서 출전을 권유하는 제의가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래서 주상순은 자신에게 들어온 권유를 신왕 주유검에게 돌리는 한편, 안전한 북경에서 사태를 관망하려는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