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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제4장 여진 봉쇄령(4)



전의가 꺾인 병사들에게 찾아오는 것은 끔찍한 유린(蹂躪)일 뿐이었다.

병사들은 목숨이 짓밟히고 명예가 꺾였다.

대장기가 부러지고 예봉이 무너진 명군은 팔기군에게 패전했다. 결사의 각오로 전장에 뛰어든 총병 장승음은 전사했다.

그의 부장들도 모두 전사하였으며, 가까스로 살아서 패주한 장수는 광녕순무 이유한과 요동절도사 신백이 유일했다. 그들이 요동마병들의 잔존병력을 대동하고 퇴각한 덕분에 요동 전선이 완전히 무너지는 최악의 결과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

“커헉!”

“이, 이런 곳에서… 내가… 죽다니……!”

전장에는 까마귀밥이 되기만을 기다리는 병사가 태반이었다.

무거운 말에 몸과 다리가 깔리거나, 무자비한 창격에 몸이 관통당한 병사도 있었다. 무려 수천에 달하는 목숨들이 서서히 싸늘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여진족 병사들은 돌아다니면서 살아남은 병사들을 색출했다.

그들을 모두 포로로 삼기 위해서였다. 후금은 인구부족이 극심한 나라였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인구를 충당해야만 했다.

“아이신에 투항할 자들은 나를 따라와라.”

“자비로우신 대가한께서는 너희들을 받아주실 것이니, 지금부터는 대금의 백성으로 살도록 하라!”

제법 많은 병사들이 여진의 회유정책에 넘어갔다.

그들은 명나라로 돌아가 봤자 다시 전쟁터로 나와야 할지도 모른다. 여진족과 싸워서 과연 이길 수 있을까? 팔기군과의 전면전에서 압도적인 패배를 경험한 병사들은 다시는 전의를 세우지 못할 정도로 철저히 무너졌다.

명나라는 결코 금을 이기지 못한다. 누르하치의 지략과 여진족의 용맹함에 명은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하지만 그중에는,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가문 대대로 대명의 은혜를 입고 살아왔다. 오랑캐들 따위에게 머리를 숙일 것 같으냐!”

“어서 목을 쳐라! 위대하신 선조께서 기다리시니.”

여진족은 투항하는 인원들은 환영하되, 항전의사를 보이는 이들은 용서치 않았다.

투항을 거부한 자들.

그들은 모두 목 없는 시신이 되어 버려졌다. 명예도, 긍지도 찾아볼 수 없는 구덩이에 매장되었다. 그들의 고결한 충성심에 감복한 여진족 병사 하나가 그 위에 술을 뿌려주었을 뿐이었다.

“형님, 어찌 나와 계십니까?”

적군을 생매장시키는 자리에 홍타이지가 나와 있었다.

그를 본 도르곤이 다가와 물음을 던졌다.

“저 병사들을 봐라. 산 채로 묻히는 형벌을 받게 되었음에도 누구 하나 살려달라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변방의 병사들이 참으로 대단하지 않느냐. 저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대명의 국운이 금방 꺼질 정도는 아닌 모양이다.”

요동의 군세 2만 명이 패전했다.

그 반절이 죽거나 사로잡히는 굴욕을 겪었고, 나머지 반절은 패주에 성공했다.

적들의 대처가 빨랐다. 아마도 군사를 지휘하던 장수들이 유능했기 때문이겠지. 목숨을 건 돌격을 명령하면서도 퇴각로를 마련해두었다. 그 덕분에 패전하였음에도 반절이나 되는 병력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지. 과연 명나라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구나. 용맹한 병사와 출중한 장수를 두었으되, 그 우두머리가 비겁하고 무능한 자라면 나라가 망하는 법이다.”

홍타이지가 평가한 만력제는 무능의 상징과도 같았다.

아버지 누르하치가 만력제를 요나라의 천조제와 동일시 여긴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정무도 보지 않고 간신들의 말에만 귀를 기울였으며, 충신들을 내치고 사직을 망쳤다. 그로 인해 천조제는 금나라에 대패하고 천하를 빼앗겼다.

지금의 만력제 역시 5백 년 전의 사람인 천조제와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지나간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라고 하였거늘. 수많은 망군들이 태어나고 나라가 멸망한 역사가 있건만, 지금의 명 황제는 현실을 보려하지 않았다.

“도르곤, 나는 나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호적수를 필요로 하고 있다.”

“형님께서는 문무에 모두 능통하신 명장이시온데, 누가 감히 필적하겠습니까? 명나라의 척계광이 살아 돌아와야 비로소 상대가 될 것입니다.”

“너는 나를 너무 띄워주는구나.”

동생의 아부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홍타이지는 웃음을 지었다.

무순성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후금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총대장이었던 장승음의 목을 베었으며, 이 전투의 패전으로 명나라는 요동의 걸출한 무장과 군사들을 죄다 잃게 되는 손실을 맛봐야 했다.



1619년 5월.

명나라의 국운이 쇠퇴하는 직접적인 효시가 되는 ‘사르후 결전’까지는 겨우 4개월밖에 남지 않은 시기였다.



* * *



총병 장승음이 대패하고 전사했다.

그 소식이 북경을 크게 휩쓸게 되었다. 사실상 요동은 후금에게 빼앗긴 것이나 다름이 없었고, 무순성 인근에 위치한 심양(沈陽)과 안산(鞍山), 철령(铁岭)은 위험에 처해 있었다. 지금도 계속해서 요동의 도시들이 지원을 요청하는 전령을 보내왔다.

무순성이 점령당했다는 것은 곧, 그다음은 자신들의 차례가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그들은 크게 두려워했다.

“싸움에서 패배하고도 살아 돌아오다니! 총대장이 전사하였거늘, 무슨 염치로 살아 돌아온 것인가!”

병부상서 양호는 크게 대노하여 외쳤다.

그는 살아 돌아온 이유한과 신백을 참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호의 의견에 육부의 재상들도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병부상서는 병부(兵部)의 수장이고, 병권을 책임지는 병부상서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곧 군율과도 같았다.

“하지만 두 장군들은 용감하게도 싸움터를 돌며 궤멸당할 뻔했던 병마들을 끌고 돌아왔습니다. 덕분에 요동마병들이 아직도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니, 그 공을 참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병부시랑 광시정이 말했다.

이는 매우 대담한 발언이었다. 병부의 일원인 광시정이 병부의 수장인 양호의 의견에 반론을 제기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발언에 신하들은 수군거렸고, 의견이 분분하게 갈렸다.

“그 공을 가상히 여겨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백의종군(白衣從軍)을 시키는 건 어떻겠습니까?”

조정회의에 참석한 신왕 주유검이 말했다.

백의종군이라는 말에 양호는 귀가 솔깃해졌다. 왜란 당시에 함께 싸웠던 이순신이라는 장수 역시 백의종군으로 스스로의 결백함을 증명하지 않았던가. 비록 제후국의 장수이기는 하나, 그는 이순신을 매우 존경해왔다.

주유검은 말에 그는 두 장군에게 기회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광시정의 말에도 충분히 일리는 있었다. 전쟁에서 패전한 것은 죽을죄이나, 먼 길을 헤치며 북경까지 온 장군들을 죽이자니 입맛이 썼다.

“좋다. 황손의 의견대로 광녕순무 이유한과 요동절도사 신백에게 백의종군을 명하겠다. 다시 대명을 위해 싸울 기회를 줄 터이니, 그대들은 다시 한 번 칼을 들고 오랑캐와 싸우도록 하라.”

“명을 받들겠나이다!”

황태자 주상락의 명령에 두 장군들은 이마를 찧으며 그의 명을 받들었다.

그들은 수많은 병졸들을 전장에 두고 도망쳐야 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굴욕과 증오를 느꼈다. 여진족과는 결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다 생각했고, 또다시 여진족과 싸우게 된다면 목숨을 던져 싸울 것이라 다짐했다.

“이만 두 장군들은 물러가라.”

황태자는 두 장군들을 조정에서 물렸다.

그 이후, 병부의 주관으로 군사회의가 진행되었다.

“누르하치는 무순성을 점령한 이후, 성채를 모두 파괴하고 백성들을 납치해 본거지로 데려갔습니다.”

“분명 부족한 호구(戶口)를 채우려는 속셈입니다.”

요동에서 온 전령들이 전한 정보들을 토대로 그들은 누르하치의 경로를 예측했다.

전투 이후 누르하치는 얌전히 군사를 회군시켰다.

당장이라도 심양을 공격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그는 무순성을 점령한 것으로 만족한 듯 했다.

무순성의 백성들을 잡았고 전쟁에서 포로들을 많이 얻었으니, 이미 그로서는 충족할 만큼의 인구를 얻은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만족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주유검의 말에 주상락이 되물었다.

“그것만이 아니라니?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이냐?”

“놈들은 결전(決戰)을 원하고 있습니다. 필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서 아군을 맞이하겠다는 생각입니다.”

누르하치는 매우 영리한 인물이었다.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었음에도, 그다음 전투에 대한 경계와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번 패전으로 명나라는 국격에 큰 상처를 입었다. 한낱 오랑캐라고 여겼던 여진족에게 대패한 것으로도 모자라 총병과 장수들까지 죄다 잃었으니, 두고두고 회자될 치욕이었다.

명나라는 반드시 군사를 일으킨다. 누르하치는 명나라가 어떻게 나올지까지도 모두 헤아리고 있었다.

“당연히 군사를 일으켜야지! 여진 놈들은 짐의 천하를 빼앗으려 드는 것들이다. 그런 역적무리들은 하루라도 빨리 토벌해버리고 싶구나.”

황태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한 만력제였다.

하지만 어디서 패전 소식을 들었는지, 직접 모습을 드러내며 분개를 터트렸다.

대명의 군대가 요동에서 대패했다. 그 점이 자존심을 크게 긁은 것일까. 백만 대군을 일으켜서 놈들을 죄다 쓸어버리겠다며 분노를 토해내기 바빴다.

‘백만은 개뿔. 십만도 겨우겨우 충당할까 말깐데.’

주유검은 황제의 의견을 매우 비관적으로 생각했다.

몇 해 전부터 흉년이 이어지고 있었다. 전 국토가 기근을 겪고 있었으며, 농사를 지어야 할 백성들은 전국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백만 대군을 일으킨다면, 분명 이 나라는 민란으로 인해 멸망하게 될 것이다.

‘영감님, 영감님 할애비가 노망이 났는데요.’

[노망이라니! 원래부터 저런 분이셨거늘.]

황제는 현실감각이 결여되어 있었다. 현실의 문제점이라고는 전혀 모른 채, 그저 자존심 내세우기만을 좋아할 뿐이었다.

누르하치의 예상은 적중했다. 만력제는 크게 분노하며 토벌령을 내렸다.

“명하신대로 따르겠사옵니다. 병부의 수장인 이 양호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누르하치의 목을 베어오겠습니다.”

병부상서 양호가 황제의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그의 말에 만력제는 양호에게 여진 토벌의 전권을 위임하기에 이르렀다.

외정과 군사는 모두 병부의 권한이다. 더욱이 양호는 명나라 조정이 신임하고 있는 명장이었으므로 만력제가 기대를 거는 것은 당연했다.

‘분명 양호라고 하면… 막대한 피해를 입고도 울산성조차 함락시키지 못한 패장일 텐데요. 이순신의 전공까지 가로채서 보고하질 않나, 비리란 비리는 죄다 저지르고 다녔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조선에서 벌어진 왜란을 말하는 것이냐? 양호는 명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비리사건에 연루되어 탄핵을 당해 좌천까지 되었었지. 훗날에 모든 죄목들이 밝혀지면서 짐이 참형을 명령하였다.]

‘하고 싶은 말이 많긴 한데… 결국 그런 비리장수를 총대장으로 내세워서 출진시킨다는 거죠?’

비리와 부패에 대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자타공인의 명장 양호.

그가 십만 대군을 이끌고 출전하여 여진과 싸우게 되니, 그 전투가 바로 사르후 결전(薩爾滸 決戰)이다. 이름 그대로 천하를 건 전면전이라 할 수 있는 결전에서 명나라는 대패를 하게 된다. 믿고 보내놨더니 장정들을 죄다 잃고 총대장인 양호만 겨우 도망쳐왔다.

그 이후 명나라는 요동과 만주의 영향권을 모두 상실하게 되었다.

후금은 힘을 얻어 몽골과 북방 민족들을 모조리 통일하기에 이르는데,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대가한이 된 홍타이지는 대청(大淸)을 건국하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했다.

[우선 네가 해야 할 일은 군사를 모으는 것이다.]

숭정제가 말했다.

자신의 조부가 꽥꽥거리며 여진족 토벌을 외치고 있는 와중에도 그는 주유검에게 의견을 내놓았다.

‘군사요? 많잖아요. 실없는 영감님 같으니라고. 태원 전투에서도 군사를 이끌었고, 거용관에서도 군사를 이끌었잖아요.’

[멍청한 녀석, 그건 너의 직속 병력이 아니지 않느냐. 오로지 네 명령만을 받드는 너만의 군대가 없단 말이다.]

요서에 주둔한 병력이 겨우 4백 명 남짓. 또한 곁을 지키는 장수들도 턱없이 부족했다.

사르후 결전에 참전하기 위해서는 병력을 확보해야 했다. 비리와 부패의 대명사인 양호의 명령을 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독립적인 속성의 군단이 절실하게 필요했다.